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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민윤서는 온몸이 차갑게 굳었다.다시 한번 민윤아와의 차이가 뼈저리게 실감 났기 때문이다.신태현은 민윤서가 건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민윤아의 전화는 조금이라도 늦게 받을까 봐 걱정되는 사람처럼 서둘러 받았다.통화가 연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민윤아가 몇 마디 하자 곧바로 신태현이 입금을 했다는 알림이 떴다.신태현은 무려 1억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보냈다.“1억이면 돼?”민윤아가 대답했다.“응, 1억이면 될 것 같아. 고마워, 태현 오빠.”그들의 대화를 들은 민윤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과 우스움을 느꼈다.민윤서는 수도 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신태현은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반대로 민윤아는 그저 도와달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신태현은 즉시 1억을 입금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그것이 바로 민윤서와 민윤아가 신태현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차이였고,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민윤서는 오래전부터 그 점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주민석은 민윤서를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민윤아를 바라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돈은 갚을게.”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오빠, 왜 그런 말을 해. 외할머니는 내 외할머니기도 해. 그러니까 당연한 도와야지.”주한범과 이선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병원비가 납부되자 의사는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가 최선을 다해 응급처치를 진행했다.모두 복도에서 결과를 기다렸다.주한범과 이선희는 의자에 앉아 피곤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몇 살은 더 늙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주민석은 그들의 곁을 지키며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응급실 문을 바라보았다.민윤서는 홀로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온몸이 서늘했고 마음속 절망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민윤서는 외할머니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복도 끝에서 묵직한 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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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민윤서는 신태현이 한 말을 들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시선을 내리자 긴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눈동자 속 모든 감정을 감추었다. 민윤서는 솔직히 황당하기만 했다.‘왜 자기한테 얘기 안 했냐고?’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왜 본인에게 얘기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다니.‘참나, 연기도 적당히 해야지.’신태현은 민윤아가 걱정되어서, 민윤아가 돌아가서 쉴 수 있도록 하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와 민윤서의 곁에 있는 것이었다.‘정말 최선을 다해 연기하네. 아주 대단해.’신태현은 아내를 매우 사랑하고 책임감이 강한 남편, 세심하고 배려심 깊은 사위를 연기했다.그러나 신태현이 그동안 그들 몰래 해온 짓들은 이미 민윤서의 가슴에 수도 없이 칼을 꽂았다.민윤서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시선을 옮겨 응급실 조명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신태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려고 했다.대답하는 것도, 다투는 것도, 신태현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리는 것도 이제는 귀찮았다.주한범과 이선희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민석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민윤서의 결혼 생활에 굳이 간섭하지는 않았다.상황을 보아하니 민윤서는 이미 마음이 완전히 떠난 듯했다.신태현은 민윤서가 자신을 무시했음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힘들지 않아? 좀 쉬어. 여기는 내가 있잖아.”민윤서는 그 말이 귀에 몹시 거슬렸고 또 역겨웠다.신태현은 민윤아의 버팀목이자 외교부 부국장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의지하는 대단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그러나 신태현은 민윤서의 남편도, 민윤서의 버팀목도, 민윤서의 가족도 되지 못했다.신태현이 병원에 온 건 외할머니를 위해서도, 민윤서를 위해서도 아니다. 신태현은 자신이 사랑하는 민윤아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신태현의 관심과 걱정은 신태현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베푸는 행위이자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그리고 그것은 신씨 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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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주한범과 이선희는 서둘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들의 말투에서 감격스러움과 공손함이 느껴졌다.그들은 평범한 집안의 사람이었기에 신태현처럼 막강한 권력을 쥔 사람 앞에서는 감사의 말조차 조심스럽게 꺼낼 수밖에 없었다.신태현이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그 말이 민윤서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숨은 뜻이 담겨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신태현이 이곳에 계속 남아 있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의 전제는 민윤서가 신태현의 아내라는 것이었다.만약 민윤서가 끝까지 이혼을 고집한다면 지금의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그것이야말로 신태현의 진짜 목적이었다.몸이 좋지 않았던 민윤서는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신태현은 고개를 돌려 민윤서를 힐끗 바라보더니 주한범과 이선희를 향해 말했다.“윤서 안색이 안 좋은데 제가 데리고 가서 쉬게 하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진 비서에게 얘기하세요.”주민석은 민윤서를 바라봤다.민윤서는 고개를 들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민윤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민석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질문과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것이 민윤서 본인이 원하는 일인지, 정말 신태현을 따라서 떠날 것인지 묻는 우려 섞인 시선이었다.평소였다면 민윤서는 틀림없이 신태현의 손을 뿌리치고 사람들 앞에서 오랫동안 삼켜 왔던 그 한마디를 내뱉어 겉으로 화목한 척하는 연기를 기어코 끝장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외할머니가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긴 지금 이 시점에 이곳에서 큰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고, 이미 크게 놀란 부모님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무엇보다 외할머니가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소식이 자신이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게 싫었다.“아빠, 엄마, 오빠. 저 나중에 다시 와서 외할머니를 보살펴드릴게요.”주한범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윤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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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잘 챙기도록 해.”신태현은 덤덤히 말했다.“앞으로 남한테 부탁할 필요는 없어.”민윤서는 고개를 들어 신태현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아래 신태현의 옆모습은 평소보다 더 차갑고 서늘해 보였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민윤서는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민윤서에게 그것은 신태현이 대충 던져 준 물건일 뿐이었다.어쩌면 누군가 거절한 보석일 수도 있었고, 별 가치가 없는 액세서리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은혜를 베풀 듯 민윤서에게 건넸다. 마치 그렇게 하면 자신의 냉담함과 빚진 것을 모두 덮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민윤서는 상자를 받아 들고 몸을 돌려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 문을 닫는 순간, 그 상자를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그것을 쳐다보는 것조차 역겨웠다....민윤서는 별장으로 돌아간 뒤 깊은 잠을 잤다.다음 날,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할 때쯤 민윤서는 눈을 떴다.민윤서가 깨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민석에게 전화를 걸어 외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주민석이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잘 회복하고 계신대. 아직 의식을 찾지는 못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민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 오빠. 아침 해뒀으니까 이따가 가져갈게.”전화를 끊은 후 민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넓은 주방에는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지만 누군가 사용한 적이 있는 듯한 흔적은 거의 없었다.민윤서는 간단히 죽을 끓이고 반찬 두 가지를 만들어 보온 용기에 담은 뒤 병원으로 향했다.VIP 병실에서 외할머니는 병상에 조용히 누워 있었고 안색이 한결 좋아진 듯 보였다.부모님은 눈이 충혈되어 빨개진 채 외할머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민윤서는 보온 용기를 내려놓고 외할머니의 따뜻한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응급 처치를 할 때처럼 차갑지는 않았다.“걱정하지 마.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이틀 정도면 깨어나실 거래.”이선희는 민윤서의 손을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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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다들 모였죠? 안녕하세요, 저는 민윤아라고 해요. 오늘부터 청림바이오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민윤아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제가 디저트를 좀 챙겨왔는데 다들 사양하지 마시고 편히 드시면 돼요.”동료들은 연신 감사 인사를 했고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민윤아는 사람들을 지나 곧장 민윤서의 앞으로 걸어갔다.민윤아는 예쁜 마카롱 하나를 집어 민윤서에게 건네며 가볍게 말했다.“윤서야, 너도 먹어 봐. 이건 태현 씨가 나를 위해 특별히 골라준 거야. 엄청 맛있대. 그래서 사람들이랑 같이 나누고 싶어서 일부러 챙겨왔어.”신태현이 특별히 골라준 것이라니.신태현다웠다. 신태현은 차분하고 성숙한 사람이었고, 민윤아는 이제 막 입사했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호감을 사야 했다.비록 신태현은 직접 이곳에 오지는 않았지만 민윤아의 미래를 위해 길을 잘 닦아주었다.그리고 민윤아는 민윤서의 신경을 긁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민윤서는 민윤아를 바라보며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 화난 기색은 전혀 없고 눈빛이 한없이 평온했다.“그래?”민윤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오직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잘됐네. 우리 남편이 사 온 디저트 잘 먹도록 해.”우리 남편이라는 짧은 말이 민윤아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민윤서와 신태현의 사이가 아무리 안 좋아도 이혼하지 않는다면 민윤아는 떳떳하지 못한 내연녀일 뿐이다.그 순간 민윤아는 미소가 굳으며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해 귀엽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언니가 입사했으니 동생인 내가 좀 더 챙겨야 했는데.”민윤서는 눈을 접어 웃었다.“우리 남편이 나 대신 디저트를 사줬다니 우리 부부가 언니를 같이 챙긴 셈이네. 우리 남편도 참 배려심이 싶다니까. 덕분에 골치 아픈 일이 줄었어.”“…”민윤아는 말문이 막혔다.이혼을 앞두고 있으면서 민윤서는 참으로 뻔뻔했다. 신태현은 민윤아의 미래를 생각해 디저트를 준비했는데 민윤서는 마치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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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민윤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언니가 내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언니 편의를 봐줘야 해?”민윤서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방법이었다.동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다들 방금 민윤아에게서 받은 것이 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다들 민윤서와 꽤 오랫동안 일했기에 민윤서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다.민윤아는 민윤서가 자신의 체면을 전혀 생각해 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미안. 내가 너를 난처하게 했네. 나는 우리가 사이가 좋아서 네가 양보해 줄 줄 알았어. 그런데...”민윤아는 시선을 살짝 내려뜨리면서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서승재는 민윤아를 보며 말했다.“옆에도 똑같이 편리한 사무실이 있어요.”서승재는 민윤아가 동의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어 다른 가능성을 차단했다.“윤아 씨를 위해서 정리까지 마친 상태니까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민윤아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불쾌했다.민윤아는 사무실로 향했고 서승재는 민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떤 일을 시킬까?”“그냥 서류 정리를 시키면 될 것 같은데요.”민윤서는 덤덤히 말했다.“이 프로젝트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서류 정리는 다 언니한테 맡기죠.”서승재는 웃었다.“그러면 네가 어떤 일을 시킬지 정하도록 해.”그들이 민윤아에게 핵심적인 업무를 맡길 리가 없었다.민윤아의 야심을 똑똑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민윤서는 서류를 잔뜩 안은 채로 민윤아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민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언제 나한테 연구실을 보여줄 거야?”“연구실?”민윤서는 민윤아를 바라봤다.“이제 사무실도 생겼잖아. 언니가 해야 할 일은 서류를 정리하는 거야.”민윤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 말은 민윤아에게 그 어떤 영광도 안겨주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민윤서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언니는 지금 임신 중이잖아. 동생인 내가 언니를 열심히 챙겨야지. 실험실 일은 너무 힘들어서 버틸 수 없을 거야.”그 말에 민윤아는 말문이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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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회사 건물 아래 가로수 그늘에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 차체에는 화려한 엠블럼 하나 없었지만 번호판만큼은 경포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아보는, 신씨 가문 사람들만 사용하는 전용 번호판이었다.그것은 바로 신태현의 차였다.지금의 신태현은 높은 자리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특별하고도 민감한 신분이 되어 공공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걸 늘 꺼렸다.그래서 데리러 올 때조차 운전석에 조용히 앉아 창문을 꼭 닫은 채 기다릴 뿐, 차에서 내리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적당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여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 빌미를 주지 않았다.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결혼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일부러 결혼 사실을 비밀로 한 것도 아닌데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민윤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시선을 돌렸다. 신태현이 자신을 데리러 왔을 리는 없었다.다음 순간, 민윤서는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일부러 불룩한 배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 민윤아가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신난 얼굴로 빠르게 차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민윤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차에 탔다.심지어 차에 타기 전 일부러 민윤서가 있는 통유리창 쪽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민윤아의 눈동자에서는 과시욕과 의기양양함이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듯했고 얼굴에 걸린 미소는 눈에 거슬릴 만큼 행복해 보였다.민윤서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마치 그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주차장이 있는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민윤서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고 오직 평온만이 남아 있었다.애초에 민윤서는 대신 결혼한 것이고 3년 동안 결혼 생활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삶을 살았다. 신태현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아끼는지 민윤서는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다만 민윤아가 번번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 도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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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민윤서는 차갑고도 직설적인 어조로 말했다. 신태현의 체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민윤서가 말했다.“그렇게 걱정되면서 왜 굳이 내가 담당한 프로젝트 팀에 집어넣은 거야? 왜 굳이 나한테 보내놓고 나한테 언니를 괴롭혔냐고 묻는 건데? 태현 씨,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언니를 나한테 보낸 이유는 언니가 힘든 경험도 해보길 바라서잖아. 설마 몰랐다고 할 건 아니지?”민윤서는 신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직장에서의 룰도 잘 알고 있었다.신태현이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신태현은 민윤서의 업무 배치에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민윤아를 편들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크다고 해도 그것은 명백한 월권이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신태현의 명성과 권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해만 끼치게 된다.신태현은 말없이 민윤서를 바라보기만 했다.그 침묵에는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담겨 있었다.민윤서는 신태현과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로 들어가 씻고 쉬었다.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 새벽,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민윤서는 출근 준비를 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공들여 화장을 한 민윤서는 눈빛이 차갑기만 했다.그리고 집을 나서자마자 눈에 익은 검은색 마이바흐가 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신태현은 어두운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차 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평소에 업무가 없을 때면 신태현은 자주 그 차를 탔다.민윤서가 나오자 신태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차에 타.”황당한 상황이었다.민윤서는 흠칫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신태현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곧장 차 문을 열며 덤덤히 말했다.“윤아 데리러 갈 거야. 가서 윤아한테 사과해.”민윤서는 곧바로 깨달았다. 어젯밤의 침묵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이 아니라 민윤서가 민윤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게 만들기로 마음을 굳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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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민윤서는 차를 타고 청림바이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민윤서는 한시라도 빨리 연구실에 도착해 일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잠깐이라도 기분 나쁜 일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민윤서는 서류봉투를 들고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손끝이 막 버튼에 닿으려던 순간, 갑자기 훤칠한 체격의 남자가 기둥 뒤에서 걸어 나와 민윤서의 앞을 가로막았다.그 남자는 바로 민유찬이었다.민윤서는 고개를 들어 민유찬을 바라보았고 민유찬의 싸늘한 눈빛을 본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왜 길을 막아? 비켜.”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말이 지금 민윤서의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그게 무슨 태도야?”민유찬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분위기마저 섬뜩해졌다.“내 여동생을 괴롭혔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려고?”그 말을 듣자 민윤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민윤서는 알고 있었다. 민유찬이 민윤아의 친오빠이며 민윤아와 피를 나눈 남매이기 때문에 당연히 민윤아의 편에 설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민윤아가 민씨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민유찬이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근 20년을 함께 지내면서 민유찬은 민윤서를 자신의 친여동생처럼 아껴주고 챙겨주었으며 맛있는 것이 있으면 늘 민윤서를 위해 남겨주고 다른 사람이 괴롭히면 가장 먼저 앞에 나서서 민윤서를 챙겨주었다. 그 다정한 애정은 민씨 가문에서 민윤서에게 가장 따뜻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었다.민윤서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시선을 들어 민유찬을 바라보았다.“나는 오빠 여동생이 아니야?”민윤아가 돌아왔으니 민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자라 온 자신은 더 이상 민유찬의 여동생일 자격이 없단 말인가?민유찬은 그 말을 듣더니 눈빛이 더욱 싸늘해지며 이를 악물고서 말을 내뱉었다.“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어? 예전에 네가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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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민윤서는 흠칫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유찬을 바라봤다.민윤서는 민윤아가 민씨 가문으로 돌아와 온갖 거짓말로 자신을 모함하여 자신과 민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정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나 민유찬이 이렇게 악독한 말을 내뱉어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민유찬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처음부터 윤아의 것을 빼앗아 간 건 너였어. 그럼에도 우리는 너를 나무라지 않았어.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우리한테 날을 세우는 거야?”민윤서는 가슴속에서 울분이 치밀어올랐다.민윤아는 좋은 것은 전부 누리고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민윤서에게 왜 민윤아를 괴롭히냐고 따졌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민윤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그래. 오빠 말이 다 맞아. 차라리 신고하지 그래? 사소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언제든 준비가 돼 있으니 마음대로 해.”말을 마친 뒤 민윤서는 그대로 떠났다.그들과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그때 갑자기 민유찬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민윤서! 할머니가 준 주식 뱉어내. 너는 할머니 친손녀가 아니잖아. 그건 윤아 거야.”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주식은 민유찬과 민윤서 두 사람이 반반씩 나눠 가졌다.그때는 민윤아가 민씨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이었다.민윤서는 눈을 살짝 감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만약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할머니도 그들처럼 자신과 민윤아를 차별했을까?민윤서는 고개를 돌려 민유찬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건 할머니가 나 민윤서한테 준 거야. 그게 왜 민윤아 거야? 민윤아가 민윤서야?”민유찬은 눈빛이 어두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민윤서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날 민윤아는 휴가를 내 하루 종일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민윤서가 퇴근할 때쯤에 신태현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데리러 갈게.”전화 너머에서 신태현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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