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배신당한 내가 재벌의 아내가 되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55 Chapters

11화: "나를 위해 살겠어" 마음의 다짐

지독한 향수병의 늪에서 혜진을 끌어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에서 울린 짧은 알림음 하나였다. 텅 빈 방 안에 울려 퍼진 '띠링' 하는 작은 소리는 빗소리보다도 선명하게 혜진의 귀를 파고들었다. 무심코 휴대전화를 집어 든 그녀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손을 멈췄다. 한국에 있는 몇 안 되는 지인이 보낸 메시지였다. '혜진아… 혹시 아직 못 봤으면 마음 단단히 먹고 봐.' 짧은 문장과 함께 하나의 SNS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혜진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했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스스로 그 흉터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혜진은 결국 떨리는 손끝으로 링크를 눌렀다. 화면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그대로 멈춰 버렸다. 대한민국 최고의 특급 호텔. 수천 송이의 꽃으로 장식된 웨딩홀. 고급 샹들리에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 강태성이었다. 그의 곁에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 김세은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새 반지가 반짝였고, 하객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축복을 보내고 있었다. 사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샴페인을 터뜨리는 장면.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장면. 기업인들과 유명 인사들이 줄지어 축하 인사를 건네는 모습. '세기의 커플.' '진정한 사랑의 결실.' '두 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사진 아래를 가득 메운 축하 댓글들은 혜진의 심장을 칼끝처럼 난도질했다. 잠시 동안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눈물도. 마치 심장이 완전히 얼어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나는...' '나는 여기서 생수 한 병 값도 아끼려고 계산기를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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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한 나

향수병을 완전히 떨쳐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혜진은 이제 더 이상 과거를 그리워하며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자신이 되찾아야 할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잃어버린 **'윤혜진'**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결심만으로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는 일은 언제나 잔인했다. 다음 날 아침. 민지를 학교에 보낸 혜진은 욕실로 들어갔다. 좁은 욕실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선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를 키우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로. 언제나 거울은 얼굴만 대충 확인한 채 지나쳐 버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혜진은 도망치지 않았다.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무런 변명도 없이 현실을 마주했다. 거울 속에 서 있는 여자는 너무도 낯설었다. 결혼 전, 그녀는 대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캠퍼스 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고, 축제 때마다 모델 제안을 받을 만큼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가졌었다. 길을 걸으면 남학생들이 한 번쯤은 돌아봤고, 미스 캠퍼스 선발대회에서는 단연 1위를 차지했다. 뽀얀 피부와 긴 생머리. 늘씬한 몸매와 자신감 넘치는 미소. 친구들은 늘 말했다. "혜진아, 넌 연예인 해도 되겠다." 하지만 거울 속 여자에게서는 그 시절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은 뒤 한 번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몸. 군살이 붙어 둔해진 허리와 팔. 탄력을 잃은 복부.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으로 생기를 잃은 피부. 눈가에는 어느새 기미와 잔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달라진 것은 눈빛이었다. 언제나 반짝이던 눈은 사라지고, 지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체념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혜진은 천천히 자신의 팔을 만져 보았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낯선 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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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과거의 나와 이별하는 법

사람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없다. 하지만 달라지기로 결심한 사람은, 하루아침에라도 과거와 결별할 수는 있었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다음 날. 혜진은 가장 먼저 여행용 캐리어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베이지색 정장이었다. 강태성이 대기업 대표들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참석하라며 사 주었던 옷이었다. 당시 그는 웃으며 말했다. "대표 사모님은 대표 사모님답게 보여야 하잖아." 하지만 그 옷을 입고 있었던 날들, 혜진은 단 한 번도 자신답게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아내였고, 회사의 얼굴이었으며, 누군가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한 장식품이었다. 정장을 조용히 접던 혜진은 피식 웃었다. "이젠 필요 없어." 그 옷은 그대로 수거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은 헐렁한 티셔츠들이었다. 아이를 낳은 뒤 불어난 몸을 가리기 위해 습관처럼 입었던 옷. 살이 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예쁜 옷을 사는 대신 더 큰 사이즈의 티셔츠를 샀다. 몸을 숨기고, 자신감을 숨기고, 결국 자신이라는 사람까지 숨겨 버렸던 시간이었다. 임신 때 입던 바지. 몇 년째 입고 있던 낡은 운동복. 색이 바랜 잠옷. 하나하나 손에 잡힐 때마다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혜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봉투 안으로 던졌다. 툭. 툭. 천이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마치 지난 10년을 정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봉투가 가득 차자 그녀는 그것을 들고 콘도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수거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안에는 단순히 낡은 옷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착한 아내. 희생만 하던 엄마. 자신보다 남편을 먼저 생각했던 여자. 늘 뒤로 물러서던 윤혜진. 그 모든 시간이 함께 담겨 있었다. 혜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봉투를 수거함 안으로 던졌다. 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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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필리핀에서의 진짜 첫걸음

사람은 두 달 만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 달이라는 시간은, 다시 살아갈 용기를 되찾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혜진에게 지난 두 달은 단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다. 새벽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민지를 학교에 보내면 곧장 콘도 피트니스센터로 향했다. 처음에는 러닝머신 위에서 10분도 버티지 못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혜진은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오늘 포기하면 내일도 포기하게 돼." "딱 하루만 더." 그 하루가 쌓여 일주일이 되었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었으며, 어느새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은 결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철저한 식단 관리. 하루도 빠지지 않은 운동. 규칙적인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노력. 그 모든 것이 조금씩 그녀를 바꾸기 시작했다. 체중은 8킬로그램이 줄었다. 하지만 숫자보다 더 크게 달라진 것은 거울 속 모습이었다. 둥글었던 턱선은 또렷해졌고, 군살에 가려져 있던 허리선이 다시 살아났다. 굽어 있던 어깨는 자연스럽게 펴졌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생겼다. 스트레스에 푸석했던 피부는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 덕분에 생기를 되찾았다. 강렬한 필리핀의 햇살 아래에서 피부는 은은한 구릿빛으로 물들었고, 그녀만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눈빛이었다. 늘 불안과 체념으로 흔들리던 눈동자 대신, 자신을 믿기 시작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혜진은 어느새 길을 걸을 때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지나칠 때도 일부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시 윤혜진이 되어 가고 있었다. ---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민지의 국제학교 학부모 상담과 함께 장기 체류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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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마닐라의 스콜은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거세게 쏟아졌다. 비자 인터뷰와 국제학교 상담을 무사히 마친 혜진은 민지의 손을 꼭 잡은 채 BGC의 화려한 쇼핑몰을 빠져나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햇살이 비추던 거리는 순식간에 회색 장막으로 뒤덮여 버렸다. 굵은 빗방울이 거리를 삼켜 버리자 사람들은 저마다 처마 밑과 건물 안으로 몸을 피했다. "엄마!" 민지가 놀라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혜진은 급히 아이를 안아 들고 눈앞에 보이는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늘 처음 입은 화이트 리넨 원피스는 어느새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얇은 천은 물기를 머금으며 몸을 무겁게 감쌌고, 차가운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등을 따라 흘러내렸다. 혜진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구글 지도를 켜려 했지만 화면은 습기 때문인지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검은 화면만 깜빡일 뿐이었다. "설마..."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민지가 젖은 샌들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우리 집 가는 길 아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혜진의 머릿속도 새하얘졌다. BGC는 안전하고 깨끗한 신도시라고 들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한 블록만 잘못 들어가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혜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고층 빌딩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낡은 철제 지붕들이 빗물을 두드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들은 빗속에서 더욱 음침하게 보였다.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가 물웅덩이를 튀기며 지나갔고, 몇몇 현지인들이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이쪽을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거리.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느껴 보는 두려움.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민지를 등 뒤로 감쌌다. '정신 차려.' '한국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버텨 놓고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입술을 깨문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발밑에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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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위험한 순간, 손을 내민 의문의 남자

혜진과 에이든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거친 웃음이었다. 비를 피해 처마 밑에 모여 있던 남자 서넛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 냄새가 섞인 숨결과 함께 그들은 자연스럽게 혜진과 민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혜진은 본능적으로 민지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남자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훑고 있었다. 빗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하얀 원피스. 손에 들린 명품 가방. 그리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양인 여자. 그들에게는 너무 쉬운 표적으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엄마..." 민지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혜진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느 방향이 큰길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먹통이었고, 거센 빗줄기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마담." 서툰 영어였다. "길 잃었어요?" 그는 히죽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우리가 도와줄까?"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에는 호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혜진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짧게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그의 손이 천천히 혜진의 어깨를 향해 뻗어 왔다. 순간 혜진은 민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민지만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또각. 또각. 빗소리 사이를 가르며 묵직한 구두 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규칙적이고 흔들림 없는 발걸음. 이상하게도 그 소리 하나만으로 골목의 공기가 달라졌다. 남자의 손끝이 혜진의 어깨에 닿기 직전.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당장 그 더러운 손 치워." 한국어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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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차갑고 매혹적인 눈빛

에이든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자 혜진은 잠시 망설였다. 낯선 남자의 차. 그것도 필리핀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차를 타는 것이 맞는 걸까. 평소 같았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골목에서 느꼈던 공포는 아직도 온몸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민지가 겁먹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혜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에이든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문이 닫히자 바깥세상의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차 안은 믿기 어려울 만큼 조용했다. 은은한 가죽 향과 나무 향이 섞인 고급스러운 실내는 조금 전까지 비를 맞으며 헤매던 골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민지는 긴장이 풀렸는지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혜진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혜진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앞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든은 말이 없었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가볍게 잡은 채 빗길만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퍼가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일 때마다 창밖의 빗줄기가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이어졌다.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콧날.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 목선을 따라 떨어지는 깔끔한 턱선.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은 그의 눈동자. 차창 밖의 도시 불빛이 스칠 때마다 깊고 짙은 검은빛이 잠시 드러났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이었다. 쉽게 속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 수많은 비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을 안심시키는 묵직한 힘이 있었다. 혜진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마닐라의 뒷골목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다니는 사람.' '현지인들이 한마디에 물러설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런데 왜... 나 같은 사람에게 계속 손을 내미는 거지?' 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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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자꾸만 마주치는 우연,그리고 딸아이를 웃게 만드는 그

그날 이후로도 이상한 우연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민지의 국제학교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교육청 근처를 찾았던 날이었다. 복잡한 민원 창구 앞에서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던 혜진은 문득 낯익은 분위기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그들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와 짧게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보였다. 에이든이었다. 그는 혜진을 본 듯했지만 특별한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눈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며칠 후에는 한인 마트였다. 장바구니에 채소와 닭가슴살을 담고 계산대로 향하던 혜진은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돌아보니 에이든이 직원과 한국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를 발견했지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채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보니파시오 거리를 걷다가 신호등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이번에도 짧은 인사. 짧은 시선. 그것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한 번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혜진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괜히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보니파시오는 생각보다 좁은 동네였다. 같은 생활권에서 지내다 보면 몇 번쯤 마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 두 달 동안 운동이 생활이 된 어느 토요일 오전. 혜진은 콘도 피트니스센터에서 한 시간 가까이 러닝머신을 뛰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운동은 더 이상 괴로운 숙제가 아니었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마음도 함께 가벼워졌다. 검은 레깅스와 화이트 바람막이를 입은 그녀는 운동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BGC의 한 노천 브런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민지는 학교가 쉬는 날이라 엄마 옆에서 작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엄마." "오늘 팬케이크 먹어도 돼?" 혜진은 웃으며 메뉴판을 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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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낯선 온기, 심장을 두드리는 파도

그날 밤. 혜진은 침대 속으로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한참 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어컨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일정한 소리를 내며 흘러나왔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은 쉽게 식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빗속에서 길을 잃었던 순간. 부랑자들에게 둘러싸여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골목. 그리고 빗줄기를 가르며 들려오던 낮고 차가운 목소리. "당장 그 더러운 손 치워." 그 한마디는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혜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 에이든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골목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차가운 눈빛.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히터 온도를 높여 주던 배려. 민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던 모습. "안녕, 꼬마 아가씨." 아이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웃던 그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브런치 카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던 한마디.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고 하던데." 혜진은 이불 끝을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 거야." 차갑고 냉정한 남자인지. 아니면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가 그의 진짜 모습인지.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그는 자신에게만 계속 손을 내미는 걸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강태성에게로 이어졌다. 강태성은 언제나 계산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사랑도. 결혼도. 배려도.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에게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용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대상이었다. 혜진 역시 그 계산이 끝나는 순간 너무나 쉽게 버려졌다. "유통기한이 지난 여자." 그 한마디는 아직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그날 이후 혜진는 누군가의 친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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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땀방울로 써 내려가는 복수와 도약

에이든이 들려준 말은 며칠이 지나도록 혜진의 마음속에서 잔잔한 울림을 남기고 있었다. "보석은 진흙 속에 떨어져 있어도 보석입니다." 그 한마디는 지난 십 년 동안 강태성이 혜진에게 새겨 놓았던 수많은 상처를 단숨에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변화는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가치를 과거의 상처로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며칠 사이 혜진의 일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아침이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민지를 학교에 데려다준 뒤에는 곧바로 콘도의 작은 서재로 향했다. 한국에서 십 년 동안 가정을 꾸리며 몸으로 익힌 생활 감각. 필리핀에서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한 현지 소비시장. 온라인으로 수집한 뷰티 트렌드와 유통 구조. 혜진은 그 모든 정보를 하나씩 연결하며 자신만의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하지만 한 줄씩 문장을 써 내려갈수록 머릿속에 흐릿하던 미래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녀의 서재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환해졌다. 콘도의 대부분 창문에 불이 꺼진 뒤에도 혜진의 방만은 늦은 새벽까지 작은 등대처럼 빛났다. 커피는 식어 갔고, 노트북 화면에는 수십 개의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키보드를 두드리던 어느 밤이었다. 똑똑.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대신 문 앞 작은 테이블 위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코나 커피 한 잔과 신선하게 손질된 망고, 파파야, 용과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컵 아래에는 짧은 메모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좋은 생각도 건강한 몸에서 나옵니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의 글씨인지 혜진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참 이상한 사람이네." 한 번도 자신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았다. 직접 찾아와 수고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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