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버림받은 여자’라는 낙인과 주변인들의 지독한 관심이 혜진을 괴롭혔다. 친정 부모님마저도 “네가 얼마나 남편을 들볶았으면 남자가 밖으로 도냐”며 오히려 혜진을 탓했다. 전남편 태성은 이혼 서류에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김세은과 화려한 재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SNS에는 두 사람이 고급 리조트에서 찍은 행복한 사진들이 넘쳐났다.더 이상 이곳에 숨 쉴 공간은 없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던 혜진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딸 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밝던 아이가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있었다.‘여기 있으면 나도, 민지도 피말라 죽을 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혜진은 손에 쥔 마지막 돈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연히 인터넷 유학 커뮤니티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물가가 저렴하고, 영어 교육이 가능하며, 한국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 필리핀이었다. 혜진은 망설임 없이 마닐라행 편도 항공권 두 장을 예매했다.떠나기 전날 밤, 혜진은 거울 앞에 섰다. 스트레스로 거칠어진 피부, 눈가에 가득한 기미, 그리고 눈물로 부어오른 눈. 10년 동안 남을 위해서만 살다가 정작 자신은 잃어버린 한 여자가 서 있었다.“강태성, 김세은. 당신들이 날 버린 걸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혜진은 거울을 보며 독하게 중얼거렸다.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독한 생존 본능으로 바뀌었다.다음 날 아침, 혜진은 캐리어 두 개에 민지와 자신의 최소한의 짐만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서울의 빌딩 숲을 바라보며 혜진은 마음속으로 완전히 과거의 자신을 지워버렸다.비행기가 이륙하고 몇 시간 뒤, 마닐라 공항의 게이트가 열렸다. 훅 끼쳐오는 후텁지근한 열기와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낯선 언어들. 여덟 살 민지는 무서운 듯 혜진의 손을 꼭 쥐었다.“엄마, 여기 이제 우리 집이야?”혜진은 민지를 품에 꼭 안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응, 민지야. 여기서 엄마랑
최신 업데이트 : 2026-06-30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