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배신당한 내가 재벌의 아내가 되었다: Chapter 21 - Chapter 30

55 Chapters

21화: 나를 돌보다

운동을 마친 뒤의 샤워는 언제나 작은 정화 의식과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미지근한 물줄기가 쏟아지자, 새벽부터 몸 안에 쌓였던 피로가 천천히 씻겨 내려갔다. 혜진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물소리만 들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던 시간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도록 버텼던 순간도 물줄기 아래에서는 잠시 멀어졌다. 욕실 거울에 뿌옇게 맺힌 김 사이로 자신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거울을 보는 일이 두려웠다. 거울 속 여자가 너무 초라해서가 아니었다. 그 얼굴 안에 자신이 버텨 온 십 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념과 피로. 눌러 삼킨 분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 혜진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어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닦아 낸 혜진은 실크 로브를 걸친 뒤 침실로 나왔다. 침대 위에는 스킨과 에센스, 크림, 라벤더 오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한때 혜진의 아침은 늘 전쟁과 같았다. 민지의 등원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이의 머리를 빗기고, 준비물을 확인하고, 아침을 먹이는 사이 주방에서는 강태성의 해장국이 끓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는 찬물을 몇 번 끼얹는 것이 전부였다. 거울 앞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삼 분. 화장품 뚜껑을 열었다가도 거실에서 남편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대로 내려놓고 달려갔다. 그 시절에는 자신을 위해 십 분을 사용하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좋은 화장품을 사면 괜한 돈을 썼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혼자 카페에 앉아 있는 여자들을 볼 때면 부러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자책이 밀려왔다.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 좋은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자신이 버틸 수 있었다. 혜진은 손바닥에 에센스를 덜어 양 볼을 천천히 감쌌다. 차갑고 촉촉한 감촉이 피부에 스며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Read more

22화: 자신의 계절을 맞이한 여자

혜진은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꺼내 몸에 걸쳤다. 부드러운 옷감이 허리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새벽마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균형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한 것은 가느다란 허리도, 또렷해진 쇄골도 아니었다.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숨기려 하지 않는 태도였다. 혜진은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보았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 아래로 긴 목선이 드러났고, 한쪽 어깨 위로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았다. 화려한 장신구는 하지 않았다. 작은 귀걸이와 얇은 팔찌만으로도 충분했다. 거울 속에는 분명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낯섦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잊고 지냈던 진짜 자신을 다시 만난 것 같았다. 대학교 시절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윤혜진.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 자신만의 꿈과 자신감을 품고 있던 여자.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상처를 견디고도 다시 일어선 지금의 자신. 과거의 아름다움이 순수한 빛이었다면, 지금의 아름다움에는 삶을 버텨 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있었다. 혜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 자신이 아름다워 보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에이든이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의 차갑고 단정한 눈빛이 잠시라도 흔들리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혜진은 그런 자신이 낯설어 살짝 미소 지었다. 누군가에게 설레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직은 두려웠다. 하지만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에이든이 그녀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결국 혜진 자신이었다. 다만 에이든은 그녀가 스스로를 의심할 때마다 조용히 빛을 비춰 주었다. 그가 건넨 믿음은 씨앗이 아니라 햇빛에 가까웠다. 씨앗은 애초부터 혜진의 안에 있었다. 오랫동안 깊은 땅속에 묻혀 있었을 뿐이었다. 똑, 똑. 절제된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혜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Read more

23화: 당신의 보석

루프탑 레스토랑은 마닐라의 야경을 한눈에 품고 있었다. 도시를 수놓은 수많은 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고, 잔잔한 음악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에이든은 난간 가까이에 서 있었다. 턱시도 스타일의 블랙 수트를 입은 그는 와인잔을 손에 든 채 조용히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처럼 감정을 읽기 어려운 차분함이 서려 있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내 직원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윤혜진이었다. 그 순간, 늘 흔들림 없던 그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 말을 잊은 사람처럼 시선이 잠시 멈췄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 단정하게 드러난 목선. 우아하게 떨어지는 블랙 드레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드레스가 아니었다. 당당하게 걸어오는 혜진의 눈빛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움츠러든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불안하게 손끝을 만지작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오는 한 사람의 당당한 여성이었다. 에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혜진가 그의 앞에 멈추자 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미소를 지었다. "...제가 당신을 보석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혜진도 작게 웃었다. "기억하고 있어요." 에이든은 그녀를 바라본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는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 빛을 믿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보니 제 예상보다 훨씬 아름답게 피어났군요." 혜진의 심장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말은 단순히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그녀가 흘린 눈물과 땀,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을 알아봐 주는 말이었다. 혜진은 작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에이든 씨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네요." "사실을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Read more

24화: 평범함 이웃인줄 알았던 그가?

다음 날 아침. 혜진은 민지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콘도 로비로 내려왔다. 평소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혹시 에이든을 마주치면 어젯밤 리셉션에 대해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혜진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로비 한가운데에는 에이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던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짙은 네이비 스트라이프 수트를 완벽하게 갖춰 입은 그는 수행원들에게 짧고 명확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필리핀 정계 인사들과 경찰 고위 관계자들이 차례로 인사를 건넸고, 경호원들은 로비 전체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에이든을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과 긴장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혜진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이 사람이….' '정말 이런 세계의 사람이었구나.' 어젯밤 와인을 따라 주며 조용히 웃던 남자. 민지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들어 주던 남자. 그 다정한 모습과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냉정한 지도자의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리가 생긴 것만 같았다.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준비하고 있는 작은 사업. 강태성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다짐. 그 모든 것이 그의 거대한 세계 앞에서는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에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서 있는 혜진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혜진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른 출입구로 향했다. 에이든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그날 이후. 혜진은 의도적으로 에이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침 운동 시간도 조금 앞당겼고, 커피를 마시던 루프탑에도 올라가지 않았다. 에이든이 보낸 메시지에는 필요한 말만 짧게 답했다. "오늘도 무리하지 마십시오." "네." "사업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Read more

25화: 내 눈을 피해 도망가지 말아요.

주차장의 희미한 노란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멀리서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자동차 엔진이 식어 가는 미세한 소음만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카트 손잡이를 꼭 움켜쥐고 있던 혜진은 에이든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단단했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도망치는 그녀를 힘으로 끌어당기려는 손길이라기보다, 아무 설명도 없이 또다시 멀어지려는 혜진을 이번만큼은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절박함에 가까웠다. 에이든은 곧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깨달은 듯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손을 놓지는 않았다. 혜진이 원한다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만 가볍게 손목을 감싼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돼서 두려운 겁니까?” 혜진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이든은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면…….” 잠시 말을 멈춘 그의 목소리가 전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또다시 믿었다가 배신당할까 봐 겁이 나는 겁니까?” 정확히 마음 한가운데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에이든의 정체를 알게 된 뒤부터 그녀가 애써 외면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두려움. 열등감. 그의 호의가 언젠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잃게 될까 봐 미리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 혜진은 고개를 숙였다. “저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전에는 누군가가 다정하게 대해 주면 그게 사랑인 줄 알았어요.” 에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촉하지도, 대신 답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결국 모든 게 거짓말이었어요. 선물도, 약속도, 사랑한다는 말도요.” 혜진의 손끝이 떨렸다. “그래서 당신도 언젠가는 마음이 바뀔까 봐 무서웠어요. 지금은 제가 안쓰럽고 새로워 보여서 가까이하는 것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흥미를 잃고 돌아서면…….” 마지막 말은 끝내 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Read more

26화: 파도 끝에 머문 진심

다음 날 아침. 에이든은 혜진과 민지를 데리고 마닐라 근교의 작은 프라이빗 해변 리조트로 향했다. 며칠 동안 긴장 속에서 지낸 민지를 위한 외출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혜진은 알고 있었다. 이 여행이 자신에게도 숨을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한 것임을. “민지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차 안에서 에이든이 태연하게 말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요?” 혜진이 웃음을 참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는 앞을 바라본 채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어제 인형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초코한테 한 말도 들었어요?” “우연히.” 민지는 금세 신이 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혜진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에이든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민지를 핑계 삼아 혜진에게 필요한 시간을 건네곤 했다. 리조트에 도착하자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시야 가득 펼쳐졌다. 햇빛을 머금은 파도가 잘게 부서졌고, 새하얀 모래 위로 야자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민지는 현지 직원과 함께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민지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경호 인력을 배치했지만, 눈에 띄지 않도록 모두 물렸다. 그 배려 덕분에 해변에는 세 사람만 남은 것처럼 고요했다. 혜진은 넉넉한 화이트 리넨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셔츠 자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에이든도 평소의 완벽한 수트 대신 가벼운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썼다. 정장과 경호원에 둘러싸여 있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를 평범한 휴양객으로 착각할 만큼 편안한 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민지가 노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끝에 잔잔한 파도가 닿았다가 물러갔다. 혜진은 맨발 아래로 부드럽게 무너지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Read more

27화. 남자의 분노, 그리고 위로

혜진의 이야기가 끝나자 해변에는 한동안 파도 소리만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에이든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을빛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두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날 만큼 힘이 들어갔다. 평소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억누르기 힘든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강태성."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목소리에는 서늘한 냉기가 배어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까지 짓밟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다는 겁니까." 에이든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끝내 버릴 수 있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다시 혜진에게 닿는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던 눈빛이 서서히 풀어졌다. 혜진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작게 떨리는 어깨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울어왔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에이든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굽혀 혜진과 같은 눈높이에 앉았다. "윤혜진 씨." 혜진이 눈물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이든은 손등으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당신의 십 년은 결코 가짜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 "가짜였던 것은 그 사람들의 사랑이었고, 거짓이었고, 탐욕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흘린 시간과 진심은 모두 진짜였습니다." 혜진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에이든은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거짓 때문에 당신 자신까지 부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혜진을 바라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복수는 제가 대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직접 되찾아야 합니다."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길이 너무 힘들어 넘어질 것 같으면..." 그는 자신의 가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Read more

​28화: 당신의 인생 곁에

브랜드 론칭 행사가 끝난 것은 자정을 훌쩍 넘긴 뒤였다. 마지막 손님이 떠나고 행사장의 음악마저 잦아들자, 긴장으로 팽팽했던 혜진의 어깨가 비로소 조금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투자자들과 악수를 나누는 동안에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텅 비어 가는 행사장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벅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말 해냈다. 누군가의 아내나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의 대표로 세상 앞에 섰다. 혜진은 무대 아래에 홀로 서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에이든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혜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수트를 입은 에이든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온종일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했을 텐데도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혜진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조금요.” 혜진은 작게 웃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가 이런 자리에 서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에이든은 무대 위에 남아 있는 조명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상상했습니다.” “언제부터요?” “당신이 처음 사업 기획서를 보여 줬던 날부터.” 그 말에 혜진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두 달 전, BGC의 라운지 바 안쪽 프라이빗 룸. 그녀는 긴장한 채 태블릿을 꺼내 필리핀 상류층 여성을 대상으로 한 K-뷰티 프리미엄 안티에이징 케어 사업을 설명했었다. 고온다습한 기후에 맞춘 피부 관리 프로그램. 한국식 맞춤 상담과 체계적인 사후 관리. 고객마다 피부 상태와 생활 습관을 분석해 제공하는 개인별 솔루션. 밤을 새우며 완성한 기획서였지만, 발표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강태성의 사업을 뒤에서 돕던 경험이 정말 자신의 능력이 맞는지, 그저 남편의 이름에 기대어 얻은 허상은 아니었는지 두려웠다. 그러나 그날 에이든은 기획서를 대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Read more

29화: 마닐라의 밤 그리고 입맞춤

혜진은 숨을 멈췄다.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그의 시선과 손길, 자신을 기다려 준 모든 순간 속에서 이미 느끼고 있었던 마음이었다. 그런데도 직접 고백을 듣는 순간, 심장은 처음 사랑을 알게 된 사람처럼 속절없이 흔들렸다. 에이든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내민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를 기다렸다. “제 곁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당신의 새로운 인생은 이미 시작됐으니까요.” 혜진의 눈에 맺힌 눈물이 밤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만 그 인생의 일부를 저와 함께 나눠 주셨으면 합니다.” 혜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군가의 인생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고백. 자신의 삶을 버리고 따라오라고 하지 않는 사랑. 에이든은 혜진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옆의 한 자리를 조심스럽게 청하고 있었다. 혜진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에이든의 손가락이 따뜻하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 “저도 무서워요.” 혜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을 믿고 좋아하게 된 만큼, 다시 잃게 될까 봐 두려워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혜진은 눈물을 머금은 채 미소 지었다. “이제는 무섭다고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에이든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 혜진은 그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당신과 함께 걸어 보고 싶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에이든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듯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혜진 씨.” 처음으로 성을 떼고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짧은 호칭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키스해도 됩니까?” 혜진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혜진이 물러서지 않는지 확인하듯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Read more

30화: 사업의 성공과 에이든의 조용한 지원

에이든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도 혜진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바빠졌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는 설렘에 머물러 있기에는,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브랜드가 너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론칭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혜진의 사업은 기획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었다. BGC 중심가에 위치한 최고급 복합 빌딩의 매장 계약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한국의 유명 화장품 제조사와 추진하던 독점 원료 공급 협상도 예상보다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필리핀 현지 법인 설립과 제품 등록, 수입 허가를 비롯한 까다로운 행정 절차 역시 막힘없이 진행됐다. 혜진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과 공사 현장, 관공서와 거래처를 오갔다. 직원 채용 면접을 직접 진행했고, 인테리어 도면을 검토했으며, 한국 본사와 온라인 회의를 이어 갔다. 결정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힘들다는 생각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대표 윤혜진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수록 마음 한편에는 작은 의문이 쌓여 갔다. 혜진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외국인이었다. 현지 인맥도, 오랫동안 쌓아 온 신용도 없었다. 그런데도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한 BGC 핵심 상권에 매장 부지를 확보했고, 평소라면 수개월이 걸린다는 행정 절차도 유난히 빠르게 처리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기획서는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시장 조사도 철저했고, 브랜드 전략과 수익 구조도 허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일이 이토록 한 번에 풀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혜진은 계약서가 놓인 책상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모든 길이 먼저 열릴 수 있을까?’ 처음에는 행사가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기회가 따라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Read more
PREV
12345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