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월로부터 시작된 우리: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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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선전포고 또한 퍼포먼스 (3)

음료 한 번 휙 젓다 예상치 못한 재원의 발언에 제가 헛소리를 들었나 싶은 예린.물론 재원은 다른 의미로서 저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도 타격이란 전혀 없었다.오히려 이전보다 홀가분한 쪽에 가까웠지.“아,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도 않았고 또 말할 이유도 없지만 너한테는 말해주고 싶었어. 왠지 너라면 소문이란 걸 들었거나 너 혼자서 눈치 채고도 남았을 거 같아서. 아니야?”“참나... 왜 하필 나한테 말하고 싶었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네. 근데 이제 와서 나도 변명이라는 건 하기가 싫다는 거야. 들리는 소문도 소문이지만 나도 뭘 보기는 봤거든. 그러게 누가 열 시 넘는 야심한 시각에 손잡고 동네 산책을 하고 있으래. 집에나 들어가지.”테이블 아래로는 예린과 손깍지를 맞잡고 테이블 위로는 잘도 무덤덤한 재이 재원 팍.오늘따라 타고난 날티를 전혀 감추지 않더니 웃는 낯으로 또 한 번의 대답을 이어간다.“다행이다. 역시 너한테 말하기를 잘한 거 같아. 열 시 넘는 야심한 시각이라는 거 보니까 학원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봤나보지?”“어. 딱 봐도 공개 연애는 아닌 거 같아서 지금까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어. 근데 뭐? 나한테만큼은 드러내야겠다고? 도대체 왜?”“그러게. 나 역시 의문이기는 해.”수록 곡을 제외하고 선 공개곡과 타이틀곡 위주로 부르면 충분히 큰 재미 볼 게 확실했다.근데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 덕분에 코인 노래방 데이트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딱 봐도 데이트 하러 가는 애 뒤따라와서 붙잡은 꼴 아닌가. 난 네가 말한 타이밍이라는 게 공감이 안 되거든. 내일 학교에서 볼 일이 하루나 더 남았는데 왜 굳이 지금? 안 그래?”“하... 그러게. 또 내 입장만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박재원 네 말은 이번에도 내 탓이다?”“아니. 내가 뭐라고 네 탓을 해. 그냥 좀 유치하게 굴었어. 아무래도 같은 반 반장이랑 남자친구 입장은 전혀 다를 게 확실하잖아.”이도준 때문에 코인 노래방은 문턱도 못 밟게 됐다는 말은 농담으로도 못 건넬 분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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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조리개는 함구하지 않지 (1)

손들어 인사하기도 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이는 건 뭔가 또 준비했다는 의미.그렇게 달리 요구하지 않아도 갖가지 포즈를 취한 후에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선글라스까지 착 하고 꺼내 써야 한단다.그래야 제 앞으로 다가오는 순서라니까.“우와~ 새로 산 머리띠에. 새로 산 신발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공항 패션? 우리 율혜 체리 공주님인 거 여기저기 소문나겠는데?”“쉿! 체리 공주님의 공항 일정은 함구한다. 무조건 숨겨야해. 그것이 곧 함구의 정의니까.”본격 등교도 전부터 이런 재미를 볼 줄이야.분명 어디서 주워들었을 게 분명한, 율혜 사전에는 어려운 축에 속한다는 함구라는 단어는 휘안에게 또 다른 생각을 가져다줬다.내일 모레면 율혜의 출국일인지라 좀처럼 뒤숭숭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는데.이렇게 또 제 앞에서만 여럿 재롱 펼쳐주는 율혜라면 속도 없이 헤퍼지기 바쁘다니까.“응. 함구하라면 함구할게. 그나저나 우리 율혜. 이렇게 선글라스 끼고 등교할 생각이야?”휘안은 한껏 멋을 부린 율혜를 껴안고는 선글라스 테 너머 반짝이는 두 눈을 응시했다.주말 하루 못 봐도 정말 큰일이다 싶은데 당분간은 가늠도 못할 큰 고비겠지 싶어서.근데 또 막상 저희 사이에 틈이랄 게 없이 가까이도 붙은 이 상황 속에서는 보드라운 살결에 아기 분유 같은 살내음이 느껴지는 게 다른 의미로서 저를 더 돌게 만든다.“당연하지. 오늘은 방학식이잖아. 따라서 학생회는 활동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도 혹시나 싶으면 이렇게 빼면 그만이라는 거야.”“헤헤. 되게 재빠른데? 그럼 이렇게 율혜가 선글라스 갖고 온 건 이따 카메라 앞에서도 선글라스 끼고 각 좀 잡아보는 뜻인가?”“그럴 리가. 이 선글라스는 오직 휘안이만을 위한 퍼포먼스 소품이었어. 이목구비가 다 안 보이는 증명사진은 증명사진이 될 수 없어. 카메라 앞에서는 살짝만 웃고 앞을 보는 거야. 그것이 곧 전 세계 증명사진 룰이라니까.”혹시라도 휘안이 제 선글라스 퍼포먼스에 깊은 감명을 받아 다른 꾀를 떠올린 건 아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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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조리개는 함구하지 않지 (2)

“자, 가방 앞주머니는 율혜가 열었고 여기에 선글라스 넣는 건 휘안이가 했다? 한국어로 조리개도 안다는 율혜인데 이 정도 도움은 줘야지. 우리 율혜 벌점 받을 일 하나도 없게.”“고마워, 휘안아. 오늘도 우리 휘안이는 최고~ 이렇게 최고로 멋진 남자친구면서 최고로 기특한 아기 토끼니까. 바쁜 아침에 새로운 한국어를 알려주다니. 덕분에 리짱은 또 하나 배웠는걸. 휘안이에게 좋은 보상을 줄게!”그래, 오늘은 방학식이라 너 나 할 거 없이 평소보다 더 들뜰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는 거지 그거 말고는 별반 크게 다를 건 없다.오늘도 제가 최고라는 우리 율혜.평소와 같이 주변에 위협이 되는 요소는 없나 싹 둘러보고는 제 뺨에 말캉한 체리 맛 젤리로서 쪽 소리도 내준지 않던가.그러니 다른 부가설명은 필요가 없다는 거다.***아, 오늘로 말하자면 교내 모든 구성원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그날.어쩜 다들 평소와는 딴 판인 발걸음들인지.덕분에 교실이 비워지기까지는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고 율혜는 제 뜻대로 방학식이 끝난 이후에도 원하는 모든 공간에서 수많은 찰나를 담아낼 수 있었다는 거다.사진 스튜디오에서는 유미 씨가 일등이지만 유미 씨가 없는 교실에서는 리짱이 일등인 법.그러니 제 필름 카메라를 들고 쉬는 시간 틈틈이도 몇 명의 피사체를 담아내기도 했고.아, 물론 저 역시 피사체가 되기는 했다.제가 피사체가 될 계획이란 전혀 없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휘안과 예린의 주도 하에 저 역시 피사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니까.“아, 나 어떡해~ 율혜 어머님 처음 만나 뵙는 자리라 진짜 잘 보이고 싶었는데. 이렇게 뻗친 머리도 보정 가능할까? 율혜 어머님이 내 머리 보시고는 증명사진 찍을 준비 안 됐다고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이 머리 답이 없잖아.”“에이, 지금 예린이 머리 정도라면 충분히 해결 가능해. 그리고 예린이가 여기서 더 뻗친 머리라 해도 유미 씨는 예린이를 환영할 거야. 아무튼 예린이는 선글라스를 끼고 증명사진 찍을 생각은 아니라는 거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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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조리개는 함구하지 않지 (3)

“글쎄? 복잡함의 정도는 생각해본 적 없어서.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율혜 너랑 재원이, 아니 재이 사이에 존재하는 친구가 내 아기 효자인 것도 밝혀진 마당에 뭐가 또 어렵겠어. 어쨌든 차휘안보다는 내가 먼저 아기 효자의 존재를 알았다는 거잖아. 난 그거면 돼.”“정말이지 딱 한 사람에게만 승부욕이 강한 예린이. 리짱의 정체가 휘안이에게 먼저 알려진 사실에 계속해서 분해하고 있어. 근데 말이야. 리짱에게 또 다른 비밀이 있다고 하면 어때?”대다수의 친구들에게 고백한 사실은 제가 해외 거주 이력이 있어 영어가 능숙하다는 점.그리고 앞으로도 긴 인연을 이어나갈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는 저는 일본 소재의 국제 학교를 오래도록 다녀왔다는 사실 또한 밝혔다.물론 비밀이라는 건 단속이 어렵다는 점에서 제가 점찍은 이들 말고도 저와 애매한 관계에 놓인 몇 명에게도 흘러들어갔다는 상황이지만.“또 다른 비밀이라... 난 그저 차휘안보다는 빨리 알고 싶다는 건데. 율혜야. 혹시 말이야. 차휘안한테 말하기 전이면 나부터 말해줄래? 이번에는 나부터 먼저 아는 것도 괜찮잖아!”“어…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휘안이한테 먼저 말한 거 같아. 그렇다면 예린이한테는 아예 말하지 않는 쪽이 정답이라는 걸까? 예린이가 듣기 싫다고 하면 리짱 혼자서 잘 간직해볼게.”“아, 이게 말이지. 또 아 다르고 어 달라서 말이야. 잠깐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이왕이면 차휘안보다 먼저 알고 싶은 거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좀 나중이라도 좋다는 거야. 율혜 네가 나한테 말할 준비가 그때 말해줘. 율혜한테 막 재촉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사람의 머릿속에 과도한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셔터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따라서 저는 예린이 재이의 신상정보를 다 받아들이고 여유가 생길 때를 노렸다는 거지.한국 여권이 있는 한국인도 맞지만 일본에 가면 일본인이 되는 이중 국적의 소유자인 점.휘안이 그렇게 좋아하던 체리가 저였다는 점.일본에서는 오랜 아역배우 생활을 해왔고 한국에서는 일반인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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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최고로 귀엽고 당돌한 편 (1)

증명사진 작업을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예쁘게 꾸며보는 시간.과연 사진 스튜디오 딸답게 필름을 현상하고 건조시키고 디지털 스캔까지 하는데 삼십 분 안쪽으로 모든 과정을 끝낸 율혜였다.그러니 지금 이 시간부터는 걸스 토크의 일환으로 다이어리 꾸미기 대신 사진 테두리 꾸미기를 할 거다 이 말씀이었지.“근데 예린아. 어제 도준이랑 어정쩡하게 헤어졌다는데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불과 몇 시간 만에 도준이를 보게 된 상황이었잖아.”“음... 어제 재이의 폭탄 발언 때문에 오늘 이도준 보기가 민망하기는 했지. 그래도 다행인 게 앞으로 한동안 마주칠 일은 없잖아. 솔직히 이도준 걔도 다행이다 싶었을걸. 오늘 오전에만 철판 깔고 서로 잊고 살면 그만이니까.”“그렇구나. 도준이가 예린이랑 재이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했을 때 휘안이도 도준이랑 같이 있었다고 했어. 그런데도 비밀로 했던 거야.”“그러게. 차휘안 걔도 어떻게 보면 이도준 못지않게 입이 무거웠네. 율혜 너한테 물어볼 수 있었던 걸 꾹 참고 안 물어봤다는 거잖아.”도준이 제 행동의 무례함을 깨닫고 하루라도 더 빨리 고해성사할 목적 하나로 예린의 뒤를 밟아 재이 앞에서도 제 존재를 드러냈다고?솔직히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리짱이 마현고로 전학을 와 큐피드 활동을 벌이기 한참 전부터 도준 역시 재이처럼 예린을 좋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하지만 도준이 예린을 상대하던 여러 장면을 떠올려보면 고개부터 내젓게 된다는 거지.오히려 제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도준과 더 가까운 여자 친구란 소연이었으니 말이다.“응. 휘안이는 절대로 가벼운 남자가 아니야. 아무래도 예린이랑 재이 일인데 리짱한테 돌려 묻는 건 유치하다는 판단이었을 테니까. 근데 말이야. 난 이 사진 여백에 오늘 날짜도 적고 누가 찍어줬는지까지 적어났다? 한 번 봐볼래? 예린이가 보기에 틀린 게 있다면 꼭 알려줘.”“그래. 내가 또 꼼꼼한 걸로는 일등이지. 뭐 틀린 거 있으면 위에 마킹 테이프로 덧붙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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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최고로 귀엽고 당돌한 편 (2)

아무렴 프로가 괜히 프로였을까.물론 일부 제한적인 상황은 존재했지만 프로의 필드를 떠나도 과거의 영광은 여전했다.“어… 하지만 말이야. 유미 씨가 찍어주는 사진이 아니었다면 잘 못 찍었을 거야. 난 이제 뭐랄까.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불편하게 됐거든. 그래서 활동 중단 후에 한국으로 왔다는 거고.”“아, 그건 또 몰랐네... 내가 섣불렀다.”“음... 그래도 영원한 은퇴는 아닐 거야. 지금 당장 연예계 활동이 그리운 건 아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예린이가 나한테 자주 하는 말 있잖아. 그래서 그 말들이 고마웠어. 내 미래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거든.”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한다.사람은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사람은 한 가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그 언젠가 제가 농담 삼아 일렀던 어록들이 율혜에게는 제 현실로서 와 닿는 중이었다니.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는 말.딱 그 말이 예린의 현재 심경이었다.“뭐야...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해야 하는 입장이지. 율혜 네가 어떤 생각으로 한국으로 건너왔는지도 모르고 괜한 어록들을 나열했어. 하여튼 난 이 입이 문제라니까, 이 입이. 어디 쥐구멍 없니? 있으면 나부터 좀 들어가게.”“치잇~ 예린이가 미안해해야 할 게 뭐가 있어. 아무튼 조금 어려웠던 시절은 지나갔고 지금은 꽤나 행복한 시절이라는 거야. 작년에는 한국 여고생들의 최신 유행을 배울 수 있었고. 올해에는 마현고에 전학와서 예린이처럼 좋은 친구도 만났으니까. 좋은 추억들을 쌓은 거지.”“리츠에... 도대체 나란 존재를 왜 이렇게 감동시켜. 하여튼 외국물 먹었다는 애들은 플러팅 기술이 남달라. 왜 이렇게들 내 마음을 옥죄게 하는지 원. 이래서 내 소나무 취향은 사시사철 푸를 수밖에 없다는 거잖아. 평범한 사람들 같은 건 눈에도 안 들어올 테니까.”“이런, 누가 봐도 감동을 받은 게 확실해 보이는 예린이. 아무튼 리짱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다음과 같아. 시작은 큐피드 활동이라는 불순한 의도가 섞였지만 지금은 별다른 의도 없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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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최고로 귀엽고 당돌한 편 (3)

아무렴 본부가 곧 율혜라니 율혜가 말한 본부의 의견은 율혜의 의견과도 같은 법.장난으로라도 저는 하루아침에 어른 토끼가 됐다는 둥 아기 토끼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반하는 의지를 내비쳤다가는 큰일이 날 테지.근데 그걸 잘 안다 해도 한 번 더 장난을 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랄까.꼭 이렇게 한 소리 들을 걸 알고도 말이다.“그래~ 그럼 본부 질문은 여기까지. 율혜가 곤란해할만한 상황은 안 만드는 게 좋다니까.”“맞아. 오늘의 당근 토끼들은 테마파크의 놀이기구를 타러 온 거야. 물론 본부도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지. 따라서 본부가 곤란해할만한 상황은 무조건 뿌부! 이것도 기억해야 해.”제가 만든 아기 토끼 세계관을 의심했다고 잔머리를 삐죽 하고 세우는데 그 모습이 또 적당히 귀엽지 못해 저를 안달 나게 만든다.그러니 오늘도 망설여야 하나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란 게 아까워서는 생각도 전에 눈앞의 율혜를 꼭 하고 안아주게 되는 손길이지.“그러게. 도대체 그 누가 우리 착한 율혜를 곤란하게 만들려 했담. 아주 낱낱이 살펴보고 따져야겠어. 못된 애면 제대로 혼내주게.”“뭐야... 그렇다면 휘안이한테 제대로 혼나야 될 애는 휘안이거든. 못된 애도 아니면서 못된 애로 보이고 싶어 하는 장난꾸러기. 휘안이를 낱낱이 살펴보고 막 따져볼 수도 없잖아.”둥글둥글한 성격 반영하듯 잘도 정돈된 손톱.어디 어렸을 적부터 악기 하나는 꾸준히 배웠으리라 추정되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넓은 손바닥뿐이면 아쉬울까 굴곡진 선명한 핏줄 또한 옵션 장착이었다는 남자다운 손등.그래서 그냥 장난꾸러기도 아닌 특이한 장난꾸러기여도 용서가 된다는 쪽으로 휘안의 가슴팍에 콩주먹 하나 가볍게 발사한 율혜였다.물론 휘안은 다 안다는 듯 또 웃어 보였지만.“헤헤. 율혜가 보기에 휘안이는 안 못 됐어? 하긴. 못된 장난꾸러기면 율혜 옆에 못 있지.”“……!”“지금도 봐. 우리 율혜가 모르는 행인이랑 엄한 곳 맞닿아서 불쾌해할 일 따위는 하나도 안 만들잖아. 이게 다 율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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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문득 네가 떠오르는 날 (1)

할머니 표 수제 푸딩을 찾아 먼 길 떠나서는 사진 공모전 출품도 제때 잘 마쳤다는 율혜.글쎄, 푸딩은 하루에 한 개씩만 까먹고 있다 하던데 과연 달다구리에 환장하는 우리 율혜가 매일같이 그 정량을 지키고 있을지는 모르겠다.아무튼 요즘 제 일상을 나열해보자면 율혜의 부재를 깨닫게 되는 연속뿐이라 해야 하나.많이도 허전할 걸 알았지만 이런 사소한 순간에서조차 허전할 수 있구나 싶어서.정답이었다면 큰 동그라미를.오답이었다면 작은 동그라미 끝에 별표를.동글동글한 모양을 좋아하는 율혜답게 본 시험이 아닌 문제집 채점에 있어서는 일직선 같은 딱딱한 빗금 모양은 용납하지 않았다.물론 그런 채점 방식을 처음 본 이들에게는 전교 일등이냐는 오해를 살 수 있지만 그거야 뭐 언제든 극복 가능한 해프닝이라니까.“도준아... 시간이 너무 안 가. 앞으로 방학 특강 일주일 더 듣고 싱가포르에도 다녀와야 율혜가 돌아올 때라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여름 방학이 이렇게 늘어질 일이야, 응?”“뭘 어떻게 생각해. 싱가포르 여행에 누님도 합류하시고 여행이 끝난 뒤에는 가족 다 같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정이라며. 부디 누님을 생각해서라도 영어 단어 좀 외워라. 누님은 원어민 급인데 넌 그냥 흥선 대원군이잖아.”“아니... 그렇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일정인걸.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아기 토끼의 생존권을 보장해주지도 않고. 서러워 죽겠네. 율혜가 있으면 바로 같이 투쟁 들어가는 건데.”“응,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죠? 아무튼 너도 생각이란 게 있어서 힘들 거 알고도 방학 특강 신청한 거잖아. 학원 비는 땅 파서 안 나온다.”내년에는 고3 수험생이 될 입장이니 고2 여름 방학부터 제 자신을 한도 끝도 없이 몰아붙이는 경험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법.따라서 휘안 스스로 자처한 건 맞았다.근데 지금은 뭐랄까.반복되는 일상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거지.휘안은 주어진 상황에 몰두하고 뭐든 하나는 제 것으로 터득하는 재주를 지녔지만 그것도 저를 봐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더 잘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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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문득 네가 떠오르는 날 (2)

누가 보면 가족 외식이 있는 날에는 친구들과는 만나지 않겠다고 대대적인 선언이라도 한 줄.하지만 상대방도 만만치는 않았다.휘안의 헛소리에도 식사에 탄력을 붙이기로 한 도준은 흰 쌀밥 위에 고기 두 점을 얹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니까.“휘안아. 내가 뭐 가족 외식이 있는 날에는 널 만나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라도 했니? 그런 거 아니야. 단지 내일은 성소연이랑 한 약속이 먼저여서 너랑 못 만난다고 한 거니까.”“그래? 근데 학원 하나 알아보는데 뭐 하러 둘이나 같이 가? 소연이만 등록하는 거잖아.”“걔 입장에서는 입시 상담 개념으로 방문하는 거잖아. 그니까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 그거지. 아무래도 걘 대학 입시 쪽으로 문외한이니까.”중학교 때는 인터넷 강의라도 결제해서 꾸준히 듣는 거 같더니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사교육이라는 게 일절 없었던 소연.제 말로는 딱히 사교육을 찾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말하는데 누가 그걸 믿겠냐고.적어도 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소연에게 있어 제 부친은 이 세상 가장 믿음직한 어른임과 동시에 가장 어려운 어른.어렸을 적부터 배우의 꿈을 수없이 설명해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인정을 못 받았으니 이 이상 더 말해봤자 갈등만 될 거라 판단했겠지.근데 그런 소연이 연기 학원을 알아본다?좋든 싫든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였다.“그래? 도준이 덕분에 좋은 소식을 듣게 되네. 안 그래도 소연이 근황이 궁금했거든. 요즘 연락 빈도가 확 줄어들어서 말이야.”“음... 잘 지내는 거 같아요. 솔직히 저도 매일 보는 입장은 아니라 확신은 어렵지만.”“하긴. 학기 중이면 몰라도 지금은 방학 중이니까. 너희도 너희 나름대로 바쁘겠지만 소연이도 소연이 나름대로 스케줄이 있겠지? 근데 또 소안이 한국 들어오는 거 생각하면 다음 달부터는 시간 빼기 어려울 거 같은데.”민주와 도준의 대화에 고개를 끄덕이는 휘안.그러다 한 템포 쉬고는 한 마디 더해보였다.“엄마. 평일 낮이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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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문득 네가 떠오르는 날 (3)

“네. 근데 처음에만 설렜지 나중에는 이게 뭐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작은 회사라는 걸 모르고 간 건 아니었지만 사무실 입구에서부터 망한 냄새가 풍겨오는 게… 전부 최악이었어요. 그래서 또 이렇다 할 결과도 못 만들어냈고요.”“음~ 그래도 뭐라도 하나 도전해봤다는 거네. 작은 회사였어도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연기를 보여줬다는 거니까. 이모 눈에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한데? 역시 추진력이 참 남달라.”살아 계셨다면 제 모친에게 듣고 싶었던 말.소연은 서서히 눈시울이 붉어져만 갔다.“근데 아빠만 몰라요... 학기 중에는 학교 집만 오가는 거 같더니 왜 이번 방학에서야 연기 학원을 등록 하냐고 한 소리 하셨거든요.”“에이, 어느 부모가 제 아이 동선을 하나도 모를까. 소연이 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게 좀 확고했어야지. 다만 예체능 쪽은 변수가 많아서 걱정부터 앞섰을 거야. 어쨌든 소연이 네가 원하는 대로 연기 학원 끊어주셨다며?”“네...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민주는 소연과 두 눈을 꼭 마주하고 짧은 사이에 새빨개진 눈가 주위를 살살 어루만졌다.말이 톡 쏘아서 그렇지 여린 아이였으니까.“근데 또 하나 더 최악인 건… 지율혜예요.”“율혜? 이모가 듣기로 율혜는 반에서 휘안이 제외하면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 몇 없다던데? 그래서 도준이랑도 서먹한 쪽에 가깝다 하고.”“맞아요. 딱 이모가 말씀하신대로에요. 저는 이도준보다도 더 지율혜랑 서먹한 쪽이니까요. 솔직히 휘안이만 아니면 엮일 이유도 없고요.”애초에 이 집에서 박혀있는 돌의 위치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제 존재를 수시로 드러내서는 특별한 존재라는 게 되고 싶었다.첫째 딸인 소안과는 이름이 비슷하기도 하고 죽은 친구의 유일한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막내아들인 휘안과는 나이도 같고 그를 잘 챙겨준다는 오랜 소꿉친구라는 이유 둘로.하지만 이 집에 새롭게 굴러 들어온 돌은 억지로 끼워 맞춘 제 위치를 빼앗아 가버렸고 그렇게 저는 설 곳이라는 걸 잃어버린 거다.“아니, 첫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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