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61 - Chapter 70

111 Chapters

60화.

서린은 자연스럽게 테이블 끝자리에 앉았다.시선을 낮추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 그 동작 하나까지 몸에 밴 습관이었다.강민재는 소파 상석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한 모금 머금은 뒤,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차 향이 좋군요.”“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신경을 좀 썼습니다.”수혁이 무난하게 맞받았다.짧은 예열이 끝나자, 강민재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공식 후원사가 되셨으니, 앞으로 재단과의 협력이 더 긴밀해질 겁니다. 특히 자금 운용 부분에서 말이죠.”그의 시선이 수혁에게 정확히 꽂혔다.“지난번 같은 불미스러운 사고는… 없어야겠죠.”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보이스피싱이라니. 하하.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던데요.”농담처럼 포장된 경고였다.다시는 내 돈줄을 건드리지 말라는.수혁은 미동도 없이 받아냈다.“그러게 말입니다. 금융 사기가 워낙 기승이라서요. 저희도 내부 통제를 대폭 강화했습니다.”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공 과장이 그쪽 전문가라 든든합니다.”수혁의 손짓에 따라, 강민재의 시선이 서린에게 옮겨왔다.“아.”강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이분이 그 유능하시다는 공 과장님이시군요.”그 순간, 서린의 숨이 멎었다.강민재가 가까웠다. 너무 가까웠다.그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익숙한 향이었다.지워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며들었다.서린이 엄지 손가락으로 손목을 문질렀다.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그때였다.찻잔을 들고 있던 강민재의 손이 멈칫했다.그의 시선이, 서린의 손으로 떨어졌다.가느다란 손목.도드라진 뼈.그리고 그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엄지손가락.그 습관.예전에... 어디서—‘설마….’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서린을 다시 살폈다.전혀 다른 이목구비. 차가운 인상.기억 속의 지안과는 분명 달랐다.지안은 훨씬 더 부드럽고, 잘 웃는 여자였다.하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만큼은 이상하리만큼 닮아 있었다.상대를 살피면서도 먼저 감정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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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오전 8시. 한도오토링크 대회의실.오늘 이 자리에서, 회사의 체급이 갈린다.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제안서와 데이터 분석 자료가 각 잡혀 놓여 있었다.서린은 마지막으로 빔프로젝터 연결 상태를 확인하고, 정민우 변호사는 계약서 조항을 꼼꼼히 검토하고 있었다.“유통그룹 쪽, 깐깐하기로 소문났어요. 특히 물류 담당 박 상무, 숫자 하나 틀리면 그 자리에서 서류 집어 던지는 사람이에요.”민우가 넥타이를 고쳐 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데이터는 완벽합니다.”서린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밤새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준비한 자료였다. 틈은 없었다.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고 유통그룹 실무진들이 들어왔다.그들의 표정은 딱딱했다.‘회장님 딸이 꽂아준 낙하산 업체’라는, 은근한 무시가 깔려 있었다.“반갑습니다. 한도오토링크 차수혁입니다.”수혁이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박 상무는 대충 손끝만 잡고 자리에 앉았다.“시간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가시죠. 5천 대, 소화 가능합니까? 한도오토링크 규모로는 벅찰 텐데.”“단순 매입이 아닙니다. 저희는 ‘순환 시스템’을 제안합니다.”수혁의 신호에 서린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스크린에 복잡하지만 명쾌한 도표가 떴다.“기존에는 차량을 일괄 매각하고 끝났지만, 저희는 매입 후 정비, 재판매, 그리고 신차 리스 연계까지 원스톱으로 관리... 유통그룹 입장에서는 차량 처분 수익뿐만 아니라... ”서린의 설명은 막힘이 없었다.박 상무의 눈빛이 달라졌다.그는 꼬투리를 잡기 위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리스크 헷지(Hedge)는? 재고가 쌓이면 그 비용은 누가 감당합니까?”“저희가 감당합니다. 계약서 12조 3항, 재고 부담 전액 한도오토링크 귀속 조항을 넣었습니다.”민우가 계약서를 들이밀며 거들었다. 법리적으로도 완벽했다.박 상무는 서린과 수혁을 번갈아 보았다.낙하산인 줄 알았더니, 준비된 칼잡이들이었다.그는 계약서를 내려놓고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차량 회전율, 예상 수익률, 재고 관리 계획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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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박동하는 외워. 우리 단지에 있는 3천 대 차량 데이터, 전부 머릿속에 있어. 지난주에 내가 직접 확인했다.”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경험? 짬밥? 그게 차 팔아주나? 나는 데이터만 믿어. 차를 가장 잘 알고, 가장 많이 뛰어다닌 놈한테 기회를 주는 게 내 방식이야.”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불만 있으면 나가.”김 팀장은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의 반론은 없었다.“박동하 대리, 앞으로 나와.”구석에 앉아 있던 동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났다.“잘해 봐. 네가 못 하면, 너를 추천한 내 안목이 쓰레기가 되는 거야. 알겠나?”“네! 목숨 걸고 하겠습니다!”동하의 씩씩한 대답이 회의실을 울렸다.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되었다.썩은 물은 빠지고, 새로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그 날 오후부터 대표실 옆 소회의실에서 서린은 박동하를 앉혀놓고 집중 과외를 시작했다.“단순히 차만 잘 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흐름을 봐야 합니다.”서린은 모니터에 띄워진 엑셀 데이터를 가리켰다.“매입 단가, 수리비 지출, 그리고 재판매 마진율. 이 세 가지 숫자가 맞아떨어져야 회사가 돈을 법니다. 지금까지는 이 틈새로 돈이 샜어요. 동하 씨는 그걸 막아야 합니다.”동하는 눈을 반짝이며 서린의 설명을 받아 적었다.처음에는 버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모르는 게 있으면 열 번이고 다시 물었고, 서린이 던져주는 자료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열심이네.’서린은 그런 동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과거의 자신도 그랬다.강민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의 선거 캠프에서 밤을 새우며 자료를 정리하고 공약을 다듬었다.그 순수한 열정이, 누군가에게는 이용하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과장님, 여기 이 부분은… 이렇게 해석하면 되는 겁니까?”“맞아요. 정확해요.”동하는 서린의 칭찬에 아이처럼 기뻐했다.서린은 마음속으로 응원했다.동하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지만, 좋은 선배로 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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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창밖으로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새벽의 푸스름한 빛이 블라인드 틈새를 넘어와 집무실 바닥을 비췄다.수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아직 몽롱한 정신 속에서, 손끝에 닿아 있는 부드러운 온기가 먼저 느껴졌다.수혁은 고개를 돌려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그리고, 순간 숨을 멈췄다.서린이었다.그녀는 소파 아래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소파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웅크려 잠들어 있었다.자신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느슨하게 쥐고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수혁은 어젯밤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자신에게 담요를 덮어주던 손길.돌아서려던 그녀를 무의식중에 붙잡으며 ‘가지 마’라고 중얼거렸던 자신의 목소리.‘바보같이.’수혁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그 말 한마디에 진짜로 밤새 이러고 있었던 건가.’불편한 자세로 색색거리며 잠든 서린의 얼굴을 보며, 그는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는 서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목을 놓아주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수혁은 바닥에 잠든 그녀를 가뿐히 안아 올렸다.“으음…….”서린이 작게 뒤척이며 그의 가슴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수혁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녀를 자신이 누워있던 소파 위에 눕혔다.담요를 덮어주자, 그제야 편안한 듯 작게 숨을 내쉬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수혁은 서린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주었다.“조금 더 자.”조용한 속삭임이 새벽 공기 속에 흩어졌다.수혁은 시계를 확인했다.곧 날이 밝고 출근 시간이 다가올 터였다.이대로 자신이 옆에 있다가 서린이 눈을 뜨면, 분명 그녀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민망해하며 딱딱한 ‘공 과장’의 가면을 쓸 것이 뻔했다.‘그렇게 둘 순 없지.’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서린은 따스한 온기에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어?”눈을 뜬 서린은 자신이 바닥이 아닌 소파 위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어깨에서 담요가 스르르 흘러내렸다.수혁 특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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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수혁은 미간을 좁히며,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 손을 떼어냈다.“여긴 회사야.”“알아, 누가 뭐래? 밥 먹으러 가자.”“내가 시간 될 때 연락하지. 오늘은 안되겠어.”더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수혁은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오빠―!”최유나가 뒤를 쫓았지만,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온 유나를 뒤로한 채, 짧게 말을 남겼다.“다음에 보자.”차 문이 닫히고, 그대로 출발했다.백미러 속 유나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수혁이 향한 곳은 민우의 오피스텔이었다.비번을 누르고 들어가자 주방에서 라면을 끓이던 민우가 돌아봤다.“어 왔어?”“라면이야?”“오늘은 이게 땡기네.”두 사람은 말없이 식탁에 마주 앉아 라면을 먹었다.식사가 끝나자 민우가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받아라. 네 피땀이다.”[한도전자 주식 매입 현황 보고서]수혁의 시선이 봉투 위에 잠시 머물렀다.“목표치 5%, 거의 다 채웠다. 우호 지분까지 합치면 이사 선임권은 흔들 수 있어. 5년 걸렸네.”민우가 혀를 찼다.보고서에는 지난 5년간 사들인 주식의 수량과 매입 시점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차윤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의를 나눴고,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물량을 늘렸다.한도오토링크의 사정이 어려운 달에도 매입을 멈춘 적은 없었다.당장 회사의 숨통을 틔울 자금까지 한도전자 주식으로 바꿔 넣은 날도 있었다.직원들 급여를 맞추기 위해 새벽까지 대출처를 찾아다니면서도, 이미 사들인 주식만큼은 단 한 주도 팔지 않았다.수혁에게 그것은 투자가 아니었다.언젠가 반드시 돌아가기 위해 쌓아 올린 계단이었다.한도전자. 아버지 차순기 회장이 일군, 한도그룹의 심장이었다.아버지가 죽고, 삼촌 차윤호가 그룹을 장악했을 때— 수혁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남은 건 빌라 한 채뿐.그는 유산을 정리해 전부 주식으로 바꿔 넣었다.“고생했다.”“고생은 네가 했지. 밥은 굶어도 주식은 사는 놈이잖아.”민우가 웃으며 덧붙였다.“근데 타이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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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토요일 아침, 서린은 옷장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회사에 갈 때처럼 무채색 정장을 고를까 하다가,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손끝이 연한 화사한 파스텔톤 원피스에 멈췄다.허리를 조이지 않는 부드러운 선, 소매 끝에 작은 주름이 잡힌 디자인이었다.거울 속의 자신을 한 번 보고,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도심 외곽, 오래된 주택가 골목 끝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 교회.그 옆에 부설 아동복지시설 ‘하품’이 있었다.부모가 있지만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머무는 곳.어릴 적 부모님 손을 잡고 다니던 교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다.귀국 후 서린은 주말이면 달에 두 번은 꼭 이곳을 찾곤 했다.서린은 아이들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안고 현관으로 들어섰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소음이 반겼다.아이들 웃음소리, 장난감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 그리고 주방에서 들려오는 설거지 소리.“서린 씨!”가장 먼저 알아본 건 시설을 맡고 있는 김 권사였다.서린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아이들이 하나둘 몰려왔다.“서린 이모다!”“이모, 오늘도 책 읽어줘요?”서린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그때 주방 쪽 문이 열리며 한 아이가 나왔다.서린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이모—”“소영아.”고3이 된 소영은 예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고, 웃음에는 어른의 그림자가 섞여 있었다.서린은 아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소영과 나란히 앉았다.“요즘 어때?”“그냥요. 공부는 하는데… 가끔은 끝이 정해진 시험 같아요.”서린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곧 졸업.퇴소.갈 곳은 없지만, 나가야 하는 나이.“무서워?”소영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퇴소하면 당장 아르바이트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대학은 가고 싶은데, 등록금이 제일 걱정이에요.""장학금도 알아보고 있어?""네.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시는데... 그래도 결국엔 내가 결정해야 하는 거잖아요.”서린은 말없이 소영을 바라보았다.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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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예상치 못한 얼굴에 표정이 환해졌다.“주말인데 웬일이세요?”“근처에 왔다가요. 김 대리님 혼자 있을 것 같아서 점심이나 같이 먹으려고요.”서린이 도시락 봉투를 들어 보였다.“진짜 다행이에요. 오늘따라 사람이 더 없는 것 같아서요.”두 사람은 탕비실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김 대리는 평소처럼 명랑한 척했지만, 젓가락질이 자꾸 멈췄다.반찬을 뒤적이다 말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김 대리님.”“네?”“무슨 고민 있죠.”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김 대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과장님… 저 사실 입양아예요.”서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 대리는 그 침묵에 용기를 얻은 듯 말을 이었다.“지금 부모님은 정말 잘해주세요. 부족함 없이 키워주셨고요. 그래서 더… 늘 조심스러워요. 괜히 제 존재가 짐이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김 대리는 손을 맞잡았다.“아버지가 공직에 계시거든요. 며칠 전에…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그래서요?”“며칠 생각해 보겠다고는 했는데요.”김 대리는 고개를 숙였다.“선을 보라는 게 싫은 건 아닌데, 그게 은혜를 갚는 일 같아서요.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고.”잠시 말을 멈췄다.“근데….”잠시 망설이던 김 대리는 손끝으로 제 가슴께를 가만히 눌렀다.“저... 여기에 한 사람이 있어요...”그 말을 꺼내고도 김 대리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마음속에만 숨겨 두었던 감정이 진짜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가슴께를 짚은 손끝이 작게 떨렸다.서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선을 긋고 동료로만 대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되더라고요.”김 대리는 씁쓸하게 웃었다.“제가 학창시절에 사고를 엄청 치고 다녔거든요. 이제는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며 은혜를 갚고 싶긴 한데요. 그런데... 마음이 쉽게 정리가 안돼서, 내키지 않아요. 저 참 못됐죠.”말끝이 흐려지며, 고개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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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지금,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강민재의 정중한 제안에 서린은 걸음을 멈췄다.그러나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잠깐이면 됩니다. 하품 아이들 문제입니다.”그 말에도 서린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무슨 용건인지 들어보고 거절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 말에 서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결국 그녀는 강민재를 향해 돌아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들어보나 마나 저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 같네요. 저는 그저 후원자일 뿐입니다. 운영이나 정책에 관여할 위치가 아닙니다.”더 이상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빨리 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서린은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그 순간, 등 뒤에서 다시 강민재의 목소리가 날아왔다.“곧 퇴소하는 아이들 문제입니다. 관심 없으십니까?”서린의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멈췄다.퇴소.시설 아이들에게 ‘퇴소’는 가장 두려운 단어였다.퇴소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졸업이 아니었다.보호가 끝났다는 통보였다.만 열여덟이 되는 순간, 보호는 끝나고 세상으로 내던져진다.준비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이.서린의 머릿속에 하품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얼굴이 스쳤다.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눈빛들.― 끝이 정해진 시험 같아요.―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거요.조금 전 소영이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스쳤다.서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잠깐이면 됩니다.”강민재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서린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회사 안쪽을 가리켰다.“멀리 가진 못합니다. 회사 로비면 되겠죠?”한도오토링크 로비 구석, 자판기 앞.화려한 호텔 커피숍도, 격식 있는 회의실도 아닌 곳.종이컵 커피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이제 말씀하세요.”서린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했다.“하품에는 언제부터 다니셨습니까?”“그건 왜 물으시죠?”“오해하지 마세요. 미리 알았더라면 동행을 요청했을 거라는 뜻입니다.”서린의 시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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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일과 감정.그 사이에서, 또 하나의 균열이 생겼다.... 거절해야 하는데.다음 날 아침.서린은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진하게 갈린 원두 향이 천천히 집 안에 퍼졌다.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맞는 아침이었다.머그잔을 들고 테이블에 앉으려는 순간,그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공도윤]서린은 화면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어, 도윤아.”— 누나! 오늘 뭐 해? 바빠?“아니, 별일 없어. 왜?”— 엄마가 누나 맛있는 거 사주라고 엄카 주셨어. 비싼 거 먹자. 내가 갈게.동생의 경쾌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서린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그래. 압구정에 파스타 잘하는 집 있어. 거기서 보자.”압구정의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도윤은 메뉴판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와, 가격 봐라. 엄마 카드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겠네.”“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누나가 사줄 수도 있어.”“에이, 오늘은 내가 쏘는 거야. 누나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해.”도윤은 스테이크와 파스타, 샐러드까지 푸짐하게 주문했다.식사가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뭐야? 취업 준비는 잘 돼가?”“음… 사실 당분간은 백수로 지낼까 생각 중이야.”“백수?”“응. 아버지가… 그런 자리에 계시는데, 내가 어디 취직하면 바로 말 나올 거 아니야. 남들 시선도 부담스럽고… 2년 정도는 그냥 공부 더 하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려고.”도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아버지의 위치는 가족들에게 훈장이 아니라 멍에였다.평범한 삶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서린은 동생의 손을 잡아주었다.“그래. 급할 거 없어. 네가 하고 싶은 거 천천히 찾아봐. 누나가 응원할게.”“고마워, 누나.”도윤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근데 누나. 나… 묻고 싶은 게 있어.”“뭔데?”“그 사고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서린의 손이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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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오빠, 왜 안 와?”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후, 두 사람이 일어섰다.남자가 자연스럽게 서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무언가를 말하자, 서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둘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눈에 거슬렸다.... 기분이 나빴다.“비켜.”“뭐?”“기분 잡쳤으니까.”수혁은 유나를 뿌리치듯 떼어내고 자리에 돌아와 박 이사에게 급히 인사를 건넸다.더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명치 끝이 막힌 듯 답답했다.그대로 레스토랑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주차장 한편에서는 서린과 도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조심히 가. 엄마 기다리셔.”“응. 누나도.”도윤이 웃으며 말했다.그때였다.“오빠!”익숙한 목소리에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주차된 차들 사이로 차수혁이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고, 그 뒤를 최유나가 다급히 따라 걷고 있었다.대표님과… 최유나 씨?서린의 시선이 잠시 그 장면에 머물렀다.수혁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유나는 그의 팔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고 있었다.“누나, 아는 사람이야?”“어… 아는 사람이긴 한데.”한 번 더 그들을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렸다.“너랑은 상관없어. 얼른 가. 엄마 기다리셔.”도윤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짧게 포옹했다.서린이 도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다음에 또 봐.”“응.”도윤이 떠나고, 서린은 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그 순간, 빠른 발소리가 뒤에서 다가왔다.서린이 다시 뒤를 돌아봤다.주차된 차들 사이를 가로질러 수혁이 걸어오고 있었다.서린 앞까지 다가오던 걸음이,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우뚝 멈췄다.“공 과장, 잠시 시간 낼 수 있겠나?”수혁이 물었다.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서린은 차 문을 잡은 채 짧게 대꾸했다.“대표님. 오늘은 휴일입니다.”“알아. 하지만….”“업무 지시가 아니라면, 제가 시간을 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수혁은 입을 다물었다.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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