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71 - Chapter 80

111 Chapters

70화.

그 옆으로 박동하, 김다은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자, 다들 고생 많았다.”수혁이 소맥 잔을 들고 일어났다.“이번 프로젝트,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다.그래서 오늘, 특별한 발표를 하나 하겠다.”식당 안이 조용해졌다.“이번 런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공서린 과장.”그의 시선이 서린에게 머물렀다.“오늘부로 부장으로 승진 발령한다.”“와아—!”박수가 터져 나왔다.입사 한 달 만의 부장 승진.파격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그리고.”수혁의 시선이 박동하에게로 옮겨갔다.“현장에서 실무를 완벽하게 장악한 박동하 대리. 과장으로 승진한다.”동하는 굳은 채로 박수 소리를 듣고 있었다.“불만 있는 사람 있나?”수혁이 좌중을 훑었다.영업 2팀 김태호 팀장의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없으면 마셔. 오늘은 법카다.”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수혁은 서린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낮게 물었다.“어때. 마음에 드나?”“과분합니다. 감사합니다.”“네 능력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하지. 앞으로도 잘 부탁해, 공 부장.”‘부장’이라는 호칭에 힘이 실렸다.그 승진은,누군가에는 파격이었고,누군가에게는 명백한 선언이었다.서린은 감사와 뿌듯함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걸 보려고 내가 하루를 다 썼나.그 생각은,서린이 웃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래.부장 자리든, 그보다 더한 자리든—전혀 아깝지 않았다.2차는 없었다.내일 출근을 위해 일찍 정리했다.“조심히 들어가세요.”“내일 봐요.”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서린도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수혁은 계산을 하느라 카운터에 서 있었다.“부장님.”가게 밖으로 나온 서린을 누군가 불렀다.박동하였다.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동하 씨. 아니, 이제 박 과장님이죠? 축하해요.”“감사합니다. 다 부장님 덕분이에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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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아침의 한도오토링크는 어수선했지만, 활기가 차 있었다.사무실 곳곳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와 박스를 여는 소리가 이어졌다.“부장님 자리, 여기 맞죠?”“아니야, 창 쪽으로 조금 더.”서린은 새로 배정받은 부서장 사무실 앞에서 박동하와 함께 짐을 옮기고 있었다.갑작스러운 발령이라 아직 명패가 없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와…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동하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멋지세요, 부장님. 명패만 있으면 완벽한데요.”“그런 게 뭐 중요해요.”서린이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오늘 아침에 닦달 좀 했어요.”김다은이 끼어들었다.“퇴근하면서 직접 찾아서, 내일 출근할 때 가져올 거예요.”“빠르기도 하네.”서린이 웃었다.“우리 박 과장님 것도 챙긴 거죠?”“그럼요.”김다은이 어깨를 으쓱했다.“제가 누군데요.”하하하.짧은 웃음이 오갔다.“부장님,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동하가 진지하게 말했다.“이 모든 게 부장님 덕분입니다.”“아니에요.”서린은 고개를 저었다.“동하 씨가 잘해서 그런 거죠. 누구보다 열심히 했잖아요.”그때 김다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부장님, 과장님. 오늘 저녁 어때요?”“승진턱은 필수잖아요. 제가 예약할게요.”“그럼 오늘은 칼퇴입니다.”동하가 손뼉을 쳤다.“제가 쏘겠습니다.”사무실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모두 바빴지만 표정은 가벼웠고, 그 중심에는 서린과 동하가 있었다.지나가던 직원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축하를 건넸다.“축하드립니다, 부장님.”“박 과장님도요.”서린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고, 동하는 쑥스러운 듯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두 사람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에는 시기보다 기대가 더 짙게 어려 있었다.새로운 부장과 새로운 과장.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두 사람이 만들어 갈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그 시각,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자연스럽게 타는 사람이 있었다.한도오토링크의 1층은 딜러와 고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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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결재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척하더니.”“밖에서는 꼬리 치고 다닌 모양이지?”말이 끝나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서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결재판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회사에서는 일로 평가받습니다.”낮고 또렷한 목소리였다.“밖에서 제가 누구를 만나든, 그게 승진 사유가 되는 회사라면, 애초에 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뭐라고?”유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서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불편하시면, 저보다 회사 시스템이 문제겠죠.”“회사 시스템?”유나가 코웃음을 쳤다.“야, 너.”“주제 파악 좀 해. 대표님이 오냐오냐해주니까 뭐라도 된 줄 알아?”서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꼬리친게 아니면, 남들은 몇 년은 굴러야 겨우 과장을 다는데 넌 이 회사 온 지 얼마나 됐어?”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서린의 얼굴 가까이, 숨이 느껴질 만큼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그날 호텔에서 젊은 놈이랑은 잘 놀았어?”그리고 고개를 돌려 수혁을 보며, 한숨처럼 덧붙였다.“오빠, 정신 차려.”“얘는 젊은 놈이랑 호텔에서 노는 애야.”그 순간, 서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처음부터 참으려 했다.자신을 향한 비아냥쯤은 얼마든지 흘려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제 동생과의 시간을 그런 식으로 더럽히는 말까지 참아줄 생각은 없었다.한 박자 늦게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말씀 가려서 하시죠.”서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했다.“제가 누구와 있든, 그건 제 사생활입니다.”서린은 유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최유나 씨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뭐?”“사생화-알?”유나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웃기고 있네. 뻔하지, 뭐. 몸으로 때우는 거 아니야?”그때, 책상 위에서 펜 하나가 튀어 올랐다.저게 진짜로 미쳤나.수혁이 벌떡 일어섰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서린이 입을 열었다.“최유나 씨.”서린은 최유나를 향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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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아침부터 한도오토링크 1층 로비는 분주했다.2층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간단한 출입 확인 데스크가 설치되었고, 정문 옆에는 새 안내 배너가 세워져 있었다.[외부인 출입 안내]출입증 소지자 및 사전 약속된 방문객만 출입 가능합니다.직원 몇 명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뭐야, 갑자기?”“어제 일 때문인가 봐.”“이제 여기도 전자카드 찍어야 들어오겠네.”딜러와 고객이 자유롭게 오가던 1층과 달리,관리 부서와 본사 인력이 있는 2층 이상부터는 명확히 선을 긋겠다는 조치였다.수혁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로비 전체를 한 번 훑어본 뒤, 한 실장을 향해 짧게 말했다.“1층은 기존대로 둡니다.”“2층부터는 무조건 출입 확인.”한 실장이 곧바로 수첩에 메모했다.“약속 없는 외부인은 대표실로 바로 올라오는 일 없게 하고.”“특히 개인 방문은 전부 제 허락 받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수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바쁜 하루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되자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랐다.***오늘 승진턱을 내기로 한 날이었다.회사 근처, 퇴근 시간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는 생맥주집.테이블 위에는 금세 노릇하게 튀겨진 치킨과 김이 오른 생맥주 잔들이 놓였다.“짠! 승진 축하드립니다!”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 바삭한 치킨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와, 진짜 꿈만 같아요. 제가 과장이라니.”동하는 맥주 거품을 입가에 묻힌 채 헤벌쭉 웃었다.“다 부장님 덕분입니다.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말만 하지 말고 보여줘요. 내일부터 더 빡세게 굴릴 거예요.”서린의 말에 동하가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넵! 충성!”김 대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아, 진짜. 오바 좀 하지 마요. 동하 씨, 처음엔 진짜 어리버리했는데.”“에이, 그땐 눈에 비눗물 들어가서 그런 거지.”동하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아, 맞다. 저 어제 아버지한테 전화드렸거든요.”동하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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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전화를 받고 돌아오던 서린은 문밖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동하를 바라보는 김 대리의 눈빛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짝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깊고 따뜻한 시선이었다.‘아… 그랬구나.’서린은 그제야 깨달았다.김 대리가 말했던 ‘신경 쓰이는 사람’이 바로 박동하라는 것을.두 사람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김 대리가 고개를 돌리자 서린과 눈이 마주쳤다.김 대리가 어서오라고 손짓을 했다.서린이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미안해요. 통화가 길어져서.”다시 이어진 술자리에는 소소한 웃음이 함께 하고 있었다.“동하 씨, 오늘 술 많이 마셨죠? 대리 불러야겠네.”“네. 제가 부르겠습니다.”“아니에요. 제가 부를게요. 그리고… 김 대리님 집 방향 같던데, 데려다주세요.”서린의 말에 동하와 김 대리가 서로를 바라봤다.“어… 그래도 되나요?”“그럼요. 부장님 명령입니다.”서린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에이스 김 대리님, 안전하게 모셔다드리세요.”“넵! 부장님 말씀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 해도 하겠습니다!”동하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대리운전을 불렀다.잠시 후, 대리기사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부장님, 조심히 가세요!”“내일 뵈요!”차창 밖으로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을 보며, 서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차의 미등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홀로 남은 서린은 옷깃을 여몄다.‘누군가를 배웅하는 게, 얼마 만이지.’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무거워졌다.대리 운전을 불러서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오피스텔 입구, 가로등 불빛이 원뿔 모양으로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입구로 향하던 서린의 발걸음이 멈춰섰다.항상 이 곳으로 오면 어둠과 정적만이 있던 공간에 누군가가 있었다.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가로등 아래 길게 드리운 그림자와 익숙한 어깨선.그 모습을 알아보는 순간, 서린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그는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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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하루가 시작되고 얼마 후,서린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강민재 의원]서린은 화면을 한 번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네, 의원님.”— 공 부장님. 하품 건으로 실무진 회의를 오늘 안에 진행하고 싶습니다.— 가능하신 시간대가 언제일까요?“오늘 중이면… 오후가 괜찮습니다.”— 그럼 두 시쯤 의원실로 오시죠. 실무자들 불러두겠습니다.“알겠습니다.”통화는 짧게 끝났다.서린은 잠시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비서실의 한 실장에게 짧게 묵례를 하고 대표실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똑, 똑.“들어와.”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혁은 서류를 보고 있었다.서린을 보자 고개를 들었다.“노크 하지 말라니까, 융통성 없기는. 그래, 무슨 일이지?”“오늘 반차를 쓰려고 합니다.”수혁의 펜 끝이 멈췄다.“반차?”그는 서린을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이유는?”“개인적인 일정입니다.”수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서린을 바라봤다.서린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강... 민재 의원을 만나기로 했습니다.”“용건은?”“한도오토링크와는 연관이 없는, 말씀드린 대로 개인적인 용무 때문입니다.”수혁이 팔짱을 꼈다.“그러니까.”수혁은 서린의 눈을 곧게 보며 말을 이었다.“사석에서 만나는 걸 제일 꺼려하는 사람이,개인적으로 만나겠다고 반차까지 낸다는데.”그가 팔짱을 풀고 톡.톡 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안 궁금하면, 이상한 거 아니야?”서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제가 후원하는 하품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희망재단측에서 미자립 청년들을 위한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면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거기라면 우리가 공식후원사로 있는 곳인데, 어떻게 개인 용무인거지?”“재단의 일일 뿐이니까요, 회사와는 별도로 진행되는 사업입니다.”수혁은 서린을 가만히 보았다.‘그렇게 피하던 사람을 만나야할 정도로 그 하품이란 곳이 중요하다는 건데...’수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강민재.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불편해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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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강민재는 여유 있는 태도로 회의를 주도했다.“이번 ‘자립 준비 청년 지원 사업’은 단기 후원이 아니라, 최소 2년 단위의 정착 프로그램입니다.주거 지원, 멘토링, 취업 연계까지 포함된 구조죠.”실무진이 슬라이드를 넘겼다.“하품의 고3, 졸업 예정자들 중 일부를 파일럿 대상으로 선정하려 합니다.공 부장님께서는 현장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서린은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의는 생각보다 매끄럽게 흘러갔다.한 시간 남짓 이어진 회의가 마무리될 즈음,강민재가 자료를 덮으며 말했다.“오늘은 이 정도로 정리하죠.”실무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회의실 문이 닫히고, 공간에는 서린과 강민재만 남았다.서린은 결재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저는 이만—”“공 부장님.”강민재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서린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강민재는 서린의 얼굴이 아닌, 그녀가 결재판을 쥐고 있는 손끝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마치 기억 속 무언가를 더듬듯, 시선은 한참 동안 손끝에 머물렀다.그의 눈길이 서린의 하얀 손등을 타고 올라와, 천천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혹시... 우리 전에 뵌 적 없습니까?”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했다.“회의 내내 묘하게... 익숙해서 말입니다.”“익숙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서린은 복부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눌렀다.떨림은 숨겼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두 사람이 마주선 공간의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문은 닫혀 있었고, 실무진이 남기고 간 의자 자국만이 방금 전까지 이곳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강민재는 말없이 서린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아니,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요,공 부장님을 보면 자꾸 그 사람이 떠올라서 말입니다.”“…….”“말투.”“분위기.”“그리고 회의를 이끄는 방식까지.”그는 천천히 한 걸음 다가왔다.“머리로 정리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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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위험했어.’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 역겨운 숨소리에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이, 문득 5년 전과 겹쳐 보였다.늦은 밤, 형광등 몇 개만 켜진 작은 회의실.“이 문장은 너무 차갑지 않아요?”“그럼 이렇게 바꿔볼까요. 아이들이 ‘버려졌다’고 느끼지 않게.”서류 위에 고개를 맞대고 문장을 고치던 밤.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지안 씨는 이상해요.”“뭐가요?”“정치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 같아서.”그 말에 웃었던 자신.그때는, 그게 진심이라고 믿었다.손끝이 떨렸다.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하…….”서린은 마른세수를 하며 기억을 밀어냈다.순수했던 열정조차 그에게는 이용할 만한 도구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징— 징—.조수석에 던져둔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서린의 손끝이 잠깐 멈췄다.— 서린아.익숙한 목소리였다.— 이번 주말에 얼굴 볼 수 있을까? 엄마가 시간을 좀 낼 수 있을 것 같은데.평소 같았으면 반가웠을 목소리였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문득, 5년 전의 지안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서린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넌 아직 지안이야. 라고.“엄마… 이번 주말엔 좀 바빠요.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잘 먹고 잘 있는 거지?“네. 그럼요.”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너… 무슨 일 있구나.엄마, 그 사람을 만났어.지안을 잊지 않았더라.나는 서린인데, 나한테서 지안이 보인대....무서웠어, 엄마.“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한가 봐요.”— 운전 중이야?“응.”— 갓길에 차 세워두고 조금 쉬었다 가.“응… 그럴게요, 엄마.”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봤다.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회사 건물이 바로 앞에 보였지만, 그녀는 곧장 들어가지 않았다.비상깜박이 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핸들에 이마를 기대고 엎드렸다.대표님…기다리실 텐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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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서린의 물음에도 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버튼만 눌렀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수혁은 조수석 문을 열어 서린을 태웠다.곧이어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내비 찍어.”“네?”“하품. 거기 가자.”서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갑자기 거기는 왜—”“재단이랑 엮인 곳이잖아.”수혁이 핸들을 꽉 쥐며 말했다.“그럼 나도 알아야지.”“......”“후원하기로 했어. 한도오토링크 이름으로.”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오늘 가서 정리할 거야. 안내해.”서린은 한참을 그를 보다가, 천천히 내비게이션에 손을 뻗었다.“……알겠습니다.”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조수석에 앉아 내비를 찍고, 차가 움직이는 동안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차 안의 공기는 고요했지만, 아까와는 다른 가벼운 침묵이었다.서린은 조수석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도착하면 원장님께 인사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설을 둘러보시게 될 텐데…….”“그보다. 강민재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우리 공 부장이 어떻게 받아쳤는지. 그 이야기 해 봐”수혁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하지만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답을 듣고 싶었다.서린을 기다렸던 두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아직도 생생했다.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건 강민재였다.무슨 이야기가 오갔길래 회사 앞에서 한참이나 차에서 내리지 못했던 걸까.서린이 고개를 돌렸다.앞만 보던 수혁이, 문득 그녀를 보았다.시선이 마주쳤다.“크흠― 아직 사업 초반이라 큰 가닥만 잡았습니다. 재단 측에서는 주거 지원금 위주로 제안했고, 저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서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돈은 쓰면 사라지니까요. 아이들이 자립하려면 지속 가능한 기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원하는 아이들과 취업을 희망하는 아이들을 나누고, 각각에 맞는 컨설팅을 도입하려고 합니다.”이에 수혁이 예리하게 지적했다.“컨설팅받아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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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차는 어느새 서울 외곽의 한적한 동네로 접어들고 있었다.‘하품’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낡았지만, 잘 정돈된 마당과 따뜻한 조명이 포근하게 어우러져 있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현관문이 열리고, 인자한 인상의 중년 남성과 앞치마를 두른 여성이 급하게 마중을 나왔다.하품의 원장인 정 목사와 살림을 도맡는 김 권사였다.“아이고, 서린씨 어서 와요!”“안녕하셨어요?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서린이 고개를 숙이자, 정 목사가 손사래를 쳤다.“죄송하긴요. 언제든 오면 반갑지. 그런데 이분은…….”정 목사의 시선이 서린 뒤에 선 수혁에게 머물렀다.훤칠한 키에 딱 봐도 고급스러운 슈트 차림.이 소박한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표정만은 부드러웠다.“소개할게요. 제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님이세요. 차수혁 대표님입니다.”“반갑습니다. 차수혁입니다.”수혁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세상에, 대표님이 직접…….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공 부장이 여기서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요. 회사 차원에서 후원을 좀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숟가락만 얹는 셈이죠.”수혁이 서린을 슬쩍 보며 농담을 건네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렸다.“어머나, 세상에. 말씀도 참 예쁘게 하시네.”김 권사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우리 서린씨가 회사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는지 알겠네요. 이렇게 든든한 분이 대표님이시라니. 두 분 서 있는 것만 봐도 그림이네, 그림이야.”흐뭇하게 바라보는 두 어른의 시선에 서린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수혁은 싫지 않은지 짐짓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간단한 다과와 함께 후원 이야기가 오갔다.수혁은 약속대로 시원시원했다.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즉각적인 자금 지원과, 한도오토링크와의 인턴십 연계까지.정 목사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들 방 난방도 오래전부터 바꾸고 싶었는데…. 이제야 숨통이 트이겠네요."김 권사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겨울만 되면 아이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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