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81 - Chapter 90

111 Chapters

80화.

서린은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휴우— 힘들다. 요즘 애들 체력 장난 아니네.”그의 셔츠 등판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숨은 거칠었다.서린이 미리 준비해둔 물티슈와 생수를 건넸다.“고생하셨습니다. 옷은 세탁비 청구하세요.”“됐어. 오랜만에 몸 쓰니까 개운하네.”수혁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김 목사가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수혁과 서린은 정중히 사양했다.“저녁은 제가 살게요.”차에 오르자 서린이 말했다.수혁은 땀을 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메뉴는?”“초밥 어떠세요? 회사 근처에 조용하고 잘하는 곳 압니다.”“콜-.”두 사람이 초밥집으로 가서 룸으로 안내를 받아 마주 보고 앉았다.“아까 보니까 농구 실력이 예사롭지 않으시던데요.”서린이 따뜻한 사케를 수혁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수혁이 잔을 받으며 피식 웃었다.“왕년에 좀 했지. 근데 고등학생 놈 하나가 자꾸 팔꿈치를 쓰잖아. 내가 봐주려다가 승부욕 발동해서 제대로 밟아줬지.”“애들을 상대로 진심이시더라고요.”“승부의 세계에 애 어른이 어디 있어.”수혁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서린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대화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업무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하품 아이들 이야기, 수혁의 학창 시절 이야기,그리고 맛있는 초밥 이야기뿐이었다.서린은 처음 알았다.차수혁이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잘 웃는다는 걸.평소 회사에서는 필요한 말만 짧게 하는 사람이었다.회의실에서는 빈틈을 찾기 어려웠고, 누구도 쉽게 농담을 걸지 못했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학창 시절 농구 시합에서 연장전 끝에 역전승을 했던 이야기며, 친구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가 치킨을 먹으러 갔다가 선생님에게 붙잡혔던 이야기까지.별것 아닌 추억을 이야기하면서도 수혁은 여러 번 웃었고, 서린도 그 웃음에 따라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웃었다.수혁은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서린은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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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 앉았고, 주변에는 빠르게 오가는 차량들의 소음이 깔렸다.가자고 해서 나섰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서린의 눈에 길 건너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대표님 잠시만요.”수혁은 횡단보도를 건너 편의점 불빛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서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가벼운 발걸음, 살짝 흩날리는 머리카락.‘내가 아는 공 부장이 맞나.’회사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수혁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피식 웃었다.오늘의 그녀는 평소의 공 부장의 얼굴과는 많이 달랐다.수혁은 그 사실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그녀의 낯선 조각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모아가는 과정이 꽤나 달콤했다.잠시 후,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리고 서린이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그녀의 두 손에는 작고 노란 병 두 개가 들려 있었다.“자요.”서린이 숨을 살짝 몰아쉬며 병 하나를 수혁에게 불쑥 내밀었다.“비타 500?”“네. 이거 드시고 피로 좀 푸시라고요.”서린이 멋쩍게 웃으며 병뚜껑을 돌려 땄다.치익,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수혁은 제 손에 쥐여진 작고 유리병을 내려다 보았다.이게 뭐라고.“잘 마실게. 덕분에 체력 충전 제대로 하겠네.”와인도 아니고 보양식도 아닌데 벌써 피로가 씻겨 나간 듯 했다.수혁은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고 단숨에 음료를 비웠다.빈 병을 쥔 수혁의 얼굴에, 오늘 중 가장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서린은 그 미소를 마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올랐다.밤의 도심을 달리는 차 안, 라디오도 켜지 않은 조용한 공간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오히려 두 사람 사이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졌다.다음날 아침, 햇살이 블라인드 틈새로 길게 늘어졌다.서린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하지만 몸이 움직이는 속도는, 어제와 조금 달랐다.‘좋아 보여서요.’어제 무심코 내뱉었던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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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수혁은 그런 반응마저 즐겁다는 얼굴로,굳이 필요 없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지고, 또 하나 더 보태며서린을 그 자리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그 평화로운 공기는,대표실 문을 두드리는 또 다른 노크 소리로 깨졌다.똑똑.“누구야?”수혁의 목소리에는,막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빼앗긴 듯한 아쉬움과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들어오라는 말 대신, 굳이 누구냐고 되묻는 어조였다.“한 실장입니다, 대표님.”“하— 이거야 원.”짧은 숨을 내쉰 수혁이 말했다.“들어와.”“대표님.”수혁과 서린이 마주 앉아 있던 테이블 옆으로 한 실장이 들어왔다.평소보다 굳은 표정이었다.그는 말없이 태블릿을 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방금 뜬 기사들입니다.”화면에는 포털 메인 화면이 떠 있었다.— [단독] 최유나, ‘약혼자 회사 계약에 조언했다’ 발언 논란— “가족 될 사람이잖아요” 예능 발언 후폭풍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화면을 훑었다.“이게 무슨…….”한 실장이 화면을 넘기자, 짧은 영상 클립이 재생되었다.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스타일 체인지〉의 한 장면이었다.패널로 출연한 최유나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꼰 채,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아유, 그럼요. 저도 사업하는 집안 딸이라 그런 거 딱 보이거든요.]화면 속 최유나는 자랑하듯 손을 휘저었다.[최근에도 그이 회사에 큰 물류 계약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딱 보니까 조건이 너무 별로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자기야, 이 조건은 너무 손해 아니야? 다시 생각해 봐.’그랬더니 진짜로 계약 안 하고 엎었잖아요. 역시 내조가 중요하다니까요?]자막에는#내조의_여왕 #재벌가_며느리_클라스같은 문구들이 화려하게 깔려 있었다.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수혁이 화면을 꺼버렸다.탁—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태블릿을 엎어버렸다.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미쳤군.”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사무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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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이상하지 않아?”민우가 태블릿 화면을 두드리며 말했다.한 실장이 탕비실로 나간 직후였다.대표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최유나 씨 말이야. 방송에서 ‘물류 계약’을 언급했어. 그건 실무진에서 반려된 건이라 외부엔 알려지지도 않았는데.”서린이 조용히 덧붙였다.“저희가 반려 결정을 내린 그날 저녁에, 최유나 씨가 SNS에 ‘내조하느라 힘들다’는 게시물을 올렸더군요.”“…….”수혁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소파에 깊게 등을 묻었다.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잡히지 않았다.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수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액정에 뜬 이름은 [최유나].수혁의 눈썹이 꿈틀했다.그는 민우와 서린에게 ‘조용히’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스피커폰이었다.“어.”수혁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다.그는 최유나의 첫마디를 기다렸다.평소의 그녀라면, 실검 1위를 찍은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하며 “봤어? 내가 오빠 회사 홍보 제대로 해줬지?”라고 떠들썩하게 굴 타이밍이었다.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오빠……. 기사 봤어?잔뜩 위축된, 눈치를 보는 목소리였다.— 그거 방송 편집이 악마의 편집이야. ……나 진짜 억울해.수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래? 악마의 편집이라...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수혁이 짐짓 부드럽게 되물었다.—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 성격 아니까 그렇지.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수혁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오해는 무슨. 나중에 다시 통화해.”풀이 잔뜩 죽은채로 다음에 오빠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하는 최유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이상했다.유나는 언제나 당당했다.자기가 무슨 말을 했든, 그게 어떤 파장을 만들든, 늘 “그래서”라는 얼굴을 하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마치 수혁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어디까지 움직일지를 이미 알고 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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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참고 있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배신감보다 더 깊은 피로감이 가슴을 눌렀다.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은,항상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비서실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민우와 서린은, 대표실 문이 열리며 한 실장이 급히 나오는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갔다.한 실장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고, 걸음은 어딘가 서둘러 보였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묘한 공기가 비서실 복도에 내려앉았다.두 사람은 말없이 눈을 맞췄다.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표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대표실 문이 다시 열리며 수혁이 모습을 드러냈다.막 문 앞에 다다른 두 사람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수혁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오래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던 시절에는 곁에 남은 사람이 민우 하나뿐이었다.누군가는 등을 돌렸고, 누군가는 침묵했다.믿었던 사람일수록 먼저 멀어졌다.그런데 지금은—눈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이 사람들이라면.’수혁의 시선이 민우에게서 서린으로 옮겨갔다.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어떤 결정을 내리든 믿고 따르겠다는 듯잔잔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표정을 보는 순간,가슴을 조이던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후우—수혁은 깊게 숨을 한 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아까 말한 대로, 법무 쪽은 네가 맡아.”민우를 향해 말했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수혁은 다시 서린을 보았다.“공 부장은 나랑 어디 좀 가지.”“어디로요?”“유통물류 본사, 전화로 왔다 갔다 할 일이 아니야. 직접 가서 단판을 지어야지.”서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수혁과 서린은 나란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잠시 후, 두 사람은 같은 차에 올라 유통물류 본사를 향해 출발했다.차가 도로 위로 올라서자, 서린은 곧바로 실무팀에 전화를 걸어서 미팅을 잡았다.“좋아. 어떻게 나오나 보자고.”차는 신호를 받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유통물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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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짜악—!”날카로운 파열음이 거실의 높은 천장을 때리고 흩어졌다.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간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얼얼한 통증보다, 눈앞에 있는 아버지의 싸늘한 눈빛이 더 아팠다.“아빠……?”유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내가 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왜 때려?”“짜악—!”대답 대신 다시 한번 손바닥이 날아들었다.이번에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유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아빠아아!”그제야 터져 나온 울음 섞인 비명.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기겁하며 달려와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여보! 당신 미쳤어요? 애 얼굴을- 내일 방송도 있는 애를!”“비켜!”최 회장은 아내를 거칠게 밀쳐냈다.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유나를 내려다보았다.“네가 뭘 잘못했는지 정말 몰라?”그의 손끝이 유나를 향해 꽂혔다.“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내가 그 결혼 성사시키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최 회장의 얼굴이 분노로 발갛게 달아올랐다.“한도오토링크는 단순한 회사가 아니었어. 물류 독점권에 경영 참여까지, 우리 그룹을 한 단계 더 키울 기회였다고!”최 회장은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유나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그런데 네가 그 입방정 하나로 전부 날려 버렸어!”“그깟…… 그깟 회사 때문에…….”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유나가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눈물이 번져 마스카라가 검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보다 회사가 중요해? 딸이 파혼 당하게 생겼는데, 창피하지도 않아?”“파혼?”최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그게 대수야? 네가 멍청하게 굴어서 우리 그룹 주가가 오늘 하루 만에 얼마나 빠졌는지 알아? 네 몸값보다 비싼 돈이 허공으로 날아갔어!”그는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당분간 쥐 죽은 듯이 있어. 방송? 나가기만 해봐!”쾅-서재 문이 거칠게 닫혔다.거실에는 흐느끼는 유나와, 그런 딸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의 탄식만이 남았다.“이것아... 내가 뭐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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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그때,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버터에 구운 새우와 바게트였다.버터 향이 먼저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노릇하게 구워진 새우 위로 녹아내린 버터가 바게트 가장자리까지 번져 있었다.“먹어. 빈속에 술 마시면 내일 힘들다.”서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포크를 들었다.한 입 베어 문 순간,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퍼졌다.“……맛있네요.”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다.수혁은 그제야 잔을 내려놓고 서린을 바라봤다.그녀는 천천히 씹으며, 요리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얼굴.‘잘 먹네.’괜히 더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수혁은 말없이 새우 하나를 집어 들었다.툭, 하고 껍질을 벗겨 접시 한쪽에 내려놓고, 바게트 위에 올려 서린 쪽으로 밀어주었다.“이건 껍질 벗겨 먹는 게 편해.”서린은 잠깐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긴장이 풀린 사람 특유의, 조금 느슨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다시 포크를 들었다.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한 속도로 먹었다.수혁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서린을 보았다.예전 같았으면 민우와 술을 한잔 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이 자리가 훨씬 더 좋았다.서린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걸 보니 수혁의 마음도 조금씩 풀어졌다.“배가 고팠나봐.”하는 말도 편했다.서린은 잠시 씹던 것을 삼키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위스키가 내려가자,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오늘 일이 좀 많았잖아요.”“그래서 내가 밥 사주잖아. 많이 먹어.”후후-“네.”서린은 다시 포크를 들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음식이 잘 들어갔다.대표실에서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도 어느새 힘이 빠져 있었다.맞은편에서 아무 말 없이 잔을 만지작거리는 수혁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그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괜히 민망해져 다시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바 안에는 잔 부딪히는 소리도, 큰 웃음도 없었다.재즈 선율이 낮게 흐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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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한 달에 한 번 있는 호텔 조찬 회동, 수혁은 식은 수프처럼 냉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차윤호가 테이블 위에 두툼한 파일 하나를 던지듯 올려놓았다.“봐라.”수혁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파일을 열었다.첫 장부터 화려한 스펙과 단아한 얼굴의 여성 사진들이 줄지어 나타났다.재계 서열 20위권 내의 영애들, 혹은 법조계 거물의 딸들의 학력, 집안, 재산, 외모, 해외경력까지 빼곡하게 정리된 문서였다.이른바 ‘결혼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들이었다.“최유나 건은 네가 알아서 정리했다니 넘어가마. 하지만 빈자리는 빨리 채워야지.”차윤호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룹 내에서 입지가 불안한 건 사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처가 덕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번 달 내로 결정해.”수혁은 파일 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사진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지만, 수혁의 눈에는 그저 ‘거래 품목’으로 보일 뿐이었다.주변에는 한도그룹의 임원진들이 배석해 있었다.여기서 거절하거나 불쾌한 티를 내는 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었다.“……검토해 보겠습니다.”수혁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파일을 덮었다.차윤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검토는 무슨.”호텔 로비 밖, 흡연 구역.민우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피식 웃었다.수혁은 손에 든 파일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그 영감탱이 속이 뻔하잖아. 너 결혼시켜서 족쇄 채우려는 거지. 처가 핑계 대면서 너를 더 쥐고 흔들기 편하게.”“알아.”“알면, 차라리 진짜 해버리는 건 어때?”민우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돌렸다.민우는 진지했다.“농담 아니야. 네가 진짜로 원하는 상대를 골라서, 네 입지를 다지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위태롭게 있을 거야? 든든한 방패 하나 세운다 생각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해 봐.”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전략적 결혼.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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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행사가 끝나고 리셉션이 이어졌다.강민재가 수혁 쪽으로 다가와서 인사를 하면서도 서린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공 부장님.”강민재는 자연스럽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오늘 스타일이 참 좋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색이 잘 어울리셨던 것 같은데.”서린은 피하지 않고 잔을 받아 들었다.“저는 의원님이 무슨 색을 좋아하셨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요.”차갑게 받아친 말이었지만, 강민재는 개의치 않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보란 듯이,나 당신에게 관심있어요.온 몸으로 표현하고, 얼굴 표정으로 알아달라 말하고 있었다.‘거슬려, 아주 그냥.’수혁은 옆에 있는 서린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가자.”“네? 아직 행사가—”“속이 안 좋아, 더 있으면 체 할 것 같아.”그는 강민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서린을 이끌고 행사장을 빠져나왔다.강민재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샴페인을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혁은 내내 말이 없었다.운전대를 쥔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수석에 앉은 서린은 몇 번이나 말을 꺼낼까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많이 불편하십니까? 약이라도—”“됐어.”툭 던지듯 돌아온 대답.“그 자식은 왜 자꾸 말을 걸어? 할 말 있으면 공문으로 보내지.”“그냥 인사치레였습니다.”웃기고 있네.네가 그놈 눈깔을 못봐서 그래.“인사치레치고는 너무 가까이 붙던데. 샴페인은 왜 받아 줘? 그냥 무시하지.”풉-서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아뇨. 그냥…….”서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대표님이 그러시니까... 제가 좀 든든해서요.”“크흠— 흠.”수혁은 헛기침을 하며 룸미러를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붉어진 귀끝까지는 숨기지 못했다.수혁은 회사 앞에서 차를 세우며 말했다.“들어가. 난 어디 들를 데가 있어. 늦을 거야.”“네, 대표님. 조심히 다녀오세요.”서린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내렸다.수혁은 서린의 뒷모습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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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알아들었으면 꺼져.”더 이상 거슬리게 하지 말고.“내 여자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라고.”그래. 진즉에 이랬어야 했는데.서린의 어깨를 감싸 쥔 수혁의 눈빛은 사나웠다.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그런 수혁의 옆모습을 보는 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민재의 얼굴을 살폈다.‘남자친구’라는 말에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하다는 듯,감정을 지운 건조한 눈빛으로.표정 하나 변함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서린의 시선에, 강민재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진짜……?’강민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정말로 저 놈이 당신 남자친구인 거야? 아니지?’믿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수혁의 단호한 표정도,그 말을 듣고도 부정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서린의 태도도,이것이 꾸며낸 연극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럴 리가 없어.’강민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이렇게 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도 얼마나 오랜만인데.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렇게 끝내야 한다고?“가자.”수혁이 서린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돌렸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탁—수혁이 강민재를 스쳐 지나가며 일부러 어깨를 쳤다.“가라고. 빨리.”낮게 으르렁거리는 경고였다.강민재는 비틀거리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차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패배감과 질투, 그리고 알 수 없는 소유욕이 뒤섞인 눈빛만이 어둠 속에 남겨졌다.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수혁은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했다.핸들을 쥔 손등에는 아직도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서린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세며, 방금 벌어진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남자친구.’그 단어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수혁이 강민재를 떼어놓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안다.아주 적절하고, 효과적인 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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