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Chapter 11 - Chapter 20

146 Chapters

11화. 낯선 지방 도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은 지독하도록 시커멓고 차가웠다. 도망치듯 짐을 싼 아버지를 따라 밤차에 몸을 실었을 때, 연수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덜컹거리는 구형 고속버스의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는 멀어지는 서울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불빛들 중 어딘가에는 제게 재킷을 벗어주던 소년, 서준이 살고 있을 터였다. 번호가 결번이라는 기계음만을 남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나의 오빠. 연수는 창창한 고속도로의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버스가 밤새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몇 시간이나 떨어진, 이름도 낯선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였다. ​새벽녘의 도시는 무채색의 안개에 갇혀 있었다. 서울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빌딩도, 번쩍이는 샹들리에도 없었다. 회색빛의 낮은 상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거리는 유난히 한산하고 쓸쓸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허파 깊숙이 밀려들 때마다 연수는 낯선 타향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비릿한 흙먼지와 오래된 콘크리트가 자아내는, 지독하게 가난하고 무거운 냄새였다. ​이삿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몇 개의 플라스틱 상자와 이불 보따리가 트럭에서 내려졌다. ​그날 연수는 무릎이 살짝 늘어난 회색 트레이닝바지에,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샀던 두꺼운 오리털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한때는 유행하는 브랜드라며 기분 좋게 입었던 옷이었지만, 이제는 겉면에 거뭇한 때가 묻고 깃이 죽어 처량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질질 끌리는 운동화 사이로 들어오는 시린 새벽바람이 그녀의 발목을 사정없이 때렸다. ​“연수야…… 힘들지? 미안하다, 엄마 아빠가 못나서 이런 데까지 오게 해서…….” ​어머니가 연수의 손을 잡으며 말끝을 흐렸다. 한때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고운 수입 실크 스카프를 두르던 어머니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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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집

​부동산 중개인의 뒤를 따라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올라간 끝에 마주한 그들의 ‘새집’은,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무덤 같았다. ​오래된 붉은 벽돌 주택의 반지하. 계단을 따라 대여섯 칸을 내려가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철제 현관문은 녹이 슬어 열릴 때마다 기괴한 쇳소리를 내질렀고, 문이 열리자마자 밀려오는 공기에 연수는 자기도 모르게 쿨럭이며 코를 막았다. ​지독하게 눅눅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였다. ​바닥에는 누런 장판이 깔려 있었는데, 구석진 곳마다 습기를 머금어 거뭇거뭇하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벽지는 원래 흰색이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바래 있었고, 손을 대면 축축한 물기가 배어 나올 것만 같았다. 창문은 성인 남자의 무릎 높이만 한 크기로 벽면에 간신히 붙어 있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낡은 신발과 먼지 낀 시멘트 바닥이 전부였다. 햇빛이 들어올 리 만무한 공간이었다. ​한때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평창동의 이층집에 살던 연수였다. 방마다 은은한 아로마 향이 감돌고, 고급 대리석 바닥에는 발걸음 소리조차 부드럽게 흡수되던 그 공간과 이 반지하는 우주의 양끝만큼이나 멀었다. ​연수는 입고 있던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보일러를 틀지 않은 방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더 냉랭했다. 짐을 풀기 위해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는데, 장판의 냉기가 옷을 뚫고 뼈마디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하는구나.’ ​가슴이 꽉 막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연수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이내 가만히 닫았다. 타일 사이마다 찌든 때가 가득했고, 녹물이 떨어지는 세면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이런 곳에서 씻고,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한다는 현실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연수는 눈을 크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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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엄마의 눈물

​집안 정리가 대충 끝난 그날 밤, 얇은 이불 한 채를 깔고 세 식구가 나란히 누웠다. 한 사람이 뒤척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방안을 채웠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벽을 돌아눕고 이내 지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지만, 연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연수의 옆에 누운 어머니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처절한 흐느낌이었다. 한때 우아함의 대명사였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해 보였던 나의 엄마가 암흑 같은 반지하 바닥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연수는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바라본 어머니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낮 동안 사채업자들의 눈을 피하고, 낯선 이웃들의 수군거림을 견뎌내느라 단단히 조여놓았던 감정의 끈이 밤이 되자 결국 끊어져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엄마…….” 연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르며 어머니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는 연수의 온기가 닿자 참았던 울음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연수야, 엄마가…… 엄마가 너무 미안해. 우리 이쁜 딸, 좋은 옷도 못 입혀주고 이런 더러운 구덩이에 처박히게 해서 엄마 가슴이 찢어져…… 날이 밝는 게 무서워. 사람들이 다 우리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어머니의 눈물이 연수의 얇은 티셔츠 깃을 적셨다. 그 눈물은 너무 뜨거워서 연수의 살을 데이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고운 손은 이미 이삿짐을 나르고 청소를 하느라 군데군데 긁히고 거칠어져 있었다. 상류층 사모님들과 웃으며 마작을 하고 차를 마시던 그 손이, 이제는 백 원 한 장에 벌벌 떨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연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렸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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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내가 가족을 지킬게

​날이 밝자마자 연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며칠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하지만 눈빛만큼은 독하게 살아있는 소녀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투박한 검은 고무줄로 단단하게 묶어 올렸다. 거추장스러운 아름다움 따위는 지금의 자신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연수는 집을 나섰다. 물정이 어두운 부모님을 대신해 당장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버지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고, 평생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내가 움직여야 해. 내가 우리 가족을 지킬 거야.’ ​그날 연수는 물 빠진 청자켓에 낡은 백팩을 메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옷 중 가장 활동하기 편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누비며 구인 전단지가 붙은 곳이라면 어디든 문을 두드렸다. 편의점, 식당, 전단지 돌리기까지. 나이가 어려 정식 채용이 어렵다는 말에는 무릎을 꿇을 기세로 매달렸다. ​“저 진짜 성실해요. 힘도 세고,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제발 한 번만 써주세요.” ​야무지고 부러질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눈빛으로 애원하는 연수를 보며, 결국 동네의 작은 고깃집 사장이 혀를 내두르며 불판 닦는 일을 맡겼다. ​방과 후와 주말, 연수의 일과는 고된 노동으로 채워졌다. 시커먼 기름때와 숯가루가 묻은 불판을 철수세미로 박박 닦아낼 때마다 손가락 끝이 갈라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고기 탄내와 비린내가 옷과 머리카락에 깊숙이 배어들었지만 연수는 개의치 않았다. 주말 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 사장이 쥐여준 몇 장의 만 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었을 때, 연수는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보일러 등유를 채우고, 엄마의 마른 기침 약을 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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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공부만이 살길이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나날이었다. 새벽에는 동틀 녘 배달되는 신문을 돌렸고,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으며, 저녁에는 고깃집과 편의점 알바를 전전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었지만, 연수는 결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이끌어줄 부모의 인맥도 모두 사라진 이 지옥 같은 밑바닥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통제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시험지의 점수’뿐이었다. ​공부만이 이 지독한 곰팡이 냄새나는 반지하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연수의 방에는 책상이 없었다. 좁은 방안에 밥상을 펴고, 밤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책을 펼쳤다. 잠을 쫓기 위해 얼음물을 마시고, 허벅지를 볼펜으로 찔러가며 영어 단어를 외웠다. 졸음이 밀려올 때면 차가운 반지하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입는 옷은 늘 똑같았다. 학교에서 나누어준 낡은 교복 실린더 셔츠에 보풀이 잔뜩 인 조끼. 친구들이 최신 유행하는 화장품이나 연예인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릴 때, 연수는 귀를 닫고 오직 수학 정석 책의 여백에 문제 풀이를 써 내려갔다. 그녀의 교과서는 수백 번도 더 넘겨보아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중요 표시를 한 형광펜 줄로 빼곡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해.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곳까지.’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습기를 맡으며 연수는 이를 악물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고통이 잊혀졌다. 활자들은 그녀에게 지독한 가난을 잊게 해주는 마취제인 동시에, 미래를 향해 쏠 수 있는 유일한 화살이었다. ​가끔 너무 지치고 서러울 때면, 서준이 주머니에 넣어주던 반짝이던 초콜릿 포장지를 떠올렸다. 이제 그 달콤함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가 했던 말은 여전히 심장을 뛰게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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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전교 1등이라는 갑옷

​지방의 낯선 고등학교로 전학 온 지 첫 학기. 중간고사 성적표가 게시판에 붙던 날, 전교생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 1등 하연수 ] ​서울에서 온 가난하고 말수 적은 전학생, 늘 똑같은 낡은 체육복 바지를 교복 치마 밑에 받쳐 입고 다니던 흙수저 소녀가 학교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점수로 전교 1등을 차지한 것이다. ​그날 연수는 단정하게 다려진 교복을 입고, 여전히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성적표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경악과 시기 질투 섞인 수군거림이 피부로 느껴졌다. “대박, 쟤가 1등이야? 맨날 알바 하느라 수업 시간에 졸던 것 같더니만.” “독하다, 독해. 서울에서 망해서 내려왔다더니 눈에 독기 서린 것 좀 봐.” ​하지만 연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완벽한 갑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돈이 없다고 무시하던 눈빛들, 낡은 가방을 보며 비웃던 아이들의 입을 입을 단번에 다물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그것이 바로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이었다. 가난은 그녀의 자존심을 갉아먹었지만, 완벽한 성적은 그녀에게 그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아우라를 선물했다. ​연수는 그날 이후 학교에서 ‘얼음 마녀’라고 불렸다.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고, 오직 앞만 보며 달렸다. 야무진 성격과 강한 책임감은 학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났고, 선생님들조차 하연수의 이름 앞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방과 후, 다시 고깃집 불판 앞으로 돌아와 앞치마를 매면서도 연수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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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명문대 합격

‘전교 1등’이라는 무겁고도 단단한 갑옷을 입고 버텨낸 3년의 세월은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12월의 어느 오후, 반지하 방의 낡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연수의 투명하리만치 맑고 깨끗한 피부를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그날 연수는 늘 입던 물 빠진 청자켓 대신, 이제는 소매 끝단이 닳아 실밥이 터진 회색 울 코트를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머니가 동네 구제 시장을 몇 바퀴나 돌며 겨우 구해다 준, 연수의 몇 안 되는 외출복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여전히 거추장스럽다는 듯 검은 집게핀으로 대충 찔러 올려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수험번호를 입력하는 연수의 손가락 끝바디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새벽 편의점의 물건을 정리하느라, 고깃집의 시커먼 불판을 철수세미로 박박 닦아내느라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이고 거칠어진 손이었다. 가난이라는 지독한 족쇄 속에서, 오직 이 손가락 끝으로 펜을 쥐고 피눈물을 삼키며 써 내려간 3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옆에 선 어머니는 차마 화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거칠어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재 대신 거실 한구석에서 담배만 만지작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마우스의 왼쪽 버튼을 딸깍, 누르는 소리가 좁은 지하방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화면이 잠시 로딩되는 찰나의 순간, 연수는 숨을 멈췄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유난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평생을 썩어갈 것인가, 아니면 마침내 날개를 펴고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것인가가 이 클릭 한 번에 정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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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새벽 편의점의 불빛

​명문대 수석 합격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은 가슴에 훈장처럼 남았지만, 가혹한 현실의 무게는 단 1그램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입학금과 등록금은 수석 장학금으로 해결했다 하더라도, 서울에서의 생활비와 부모님의 생계비는 고스란히 연수의 몫이었다. 스물일곱이 된 지금까지도 연수의 청춘은 늘 푸르스름한 새벽녘, 편의점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딸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편의점 문이 열릴 때마다 찬 바람이 연수의 발목을 사정없이 때렸다. 연수는 편의점의 상징과도 같은 초록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조끼 안에는 목 부분이 살짝 늘어난 검은색 니트티를 받쳐 입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커다란 집게핀으로 질질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해 둔 상태였다. 화장기 없는 투명한 피부는 새벽 근무의 피로로 조금 파리해 보였지만, 동양적인 선이 고운 눈매와 콧날은 여전히 청초하게 빛나고 있었다. ​“폐기 등록하고, 매대 채워야겠네.” ​연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운터 밑에서 바코드 리더기를 꺼냈다. 새벽 3시 30분. 이 시간의 편의점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섬 같았다. 매대 위를 가득 채운 인스턴트 도시락과 삼각김밥, 붉고 노란 음료수 캔들이 쇼케이스의 차가운 조명을 받아 인공적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거리는 짙은 어둠과 매서운 겨울 안개에 가라앉아 있었다. ​삼각김밥의 바코드를 하나씩 찍어 내릴 때마다 삑, 삑 하는 마찰음이 고요한 사방을 울렸다. 연수는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 스티커를 붙인 샌드위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십여 년 전, 서준이 제 손에 쥐여주던 반짝이는 초콜릿들이 떠올랐다. ​‘그 초콜릿들은 참 달콤하고 따뜻했는데.’ ​지금 제 손에 들린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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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밤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겨울, 현실은 또 한 번 연수의 발목을 사정없이 꺾어버렸다. 아버지가 일하던 공사 현장에서 가벼운 추락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당장 수술비와 입원비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연수의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하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독 길고 험난했다. ​그날 연수는 검은색 패딩 점퍼에 무릎이 살짝 나온 청바지, 그리고 낡은 백팩을 메고 있었다. 서울의 밤거리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캐롤과 반짝이는 일루미네이션으로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지만, 연수가 걸어가는 변방의 골목길은 가로등 불빛마저 흐릿해 어두컴컴했다. 계단을 따라 반지하 방으로 내려가는 순간, 코를 찌르는 특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오늘따라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방 안에는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어머니가 침대 맡에 쪼그려 앉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연수야…… 아빠 병원비는 어쩌니. 엄마가 가사도우미라도 일주일에 몇 번 더 나가야 할 텐데, 몸이 뜻대로 안 움직여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이 연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한때 백화점 최고급 라인의 옷만 입던 어머니의 어깨는 몰라보게 작아져 있었고, 목소리는 물기 젖은 낙엽처럼 바스락거렸다. ​연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어머니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눈물이 가슴 끝까지 차 올랐지만, 연수는 기어이 눈통자를 부릅뜨며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이 집안은 영원히 암흑 속으로 침몰할 것이 뻔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나 이번에 태성 기획 최종 면접 보잖아. 서류랑 2차 면접까지 전부 1등으로 통과했어. 조금만 참으면 돼. 나 절대로 안 무너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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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태성 기획 최종 합격

​​운명의 날이 밝았다. ​태성 기획의 웅장한 사옥 26층 대회의실. 연수는 면접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했던 짙은 네이비색 정장 재킷에 주름 하나 없는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면접관들 앞에 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반 묶음으로 단정하게 정리해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냈고, 얇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의 파리한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까다로운 면접관들의 질문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하연수 지원자는 스펙은 완벽한데, 공백기마다 아르바이트 경험만 가득하군요. 우리 회사의 거친 업무 강도를 버틸 수 있겠습니까?” ​질문 속에 담긴 은근한 무시와 탐색을 눈치챈 연수는 오히려 싱긋,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 ​“그 공백기야말로 제가 태성 기획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는 자산입니다. 새벽 편의점에서, 거친 식당 바닥에서 저는 세상의 가장 날것의 트렌드를 배웠고, 그 어떤 압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책임감을 길렀습니다. 최고의 기획은 온실 속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온다고 확신합니다.” ​거침없고 야무진 답변에 면접관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완벽한 실력과 당당한 아우라. 배경이라는 빽 대신 오직 능력이라는 무기 하나로 면접장을 압도한 연수는 인사를 건네고 당당하게 회의실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사흘 뒤, 마침내 기다리던 문자가 핸드폰 화면을 울렸다. ​[태성 기획] 하연수 님, 당사의 신입사원 공채에 최종 합격하셨음을 축하드립니다. ​“합격…… 했다.” ​반지하 방 모니터 앞에서 문자를 확인한 순간, 연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연수를 껴안았고, 병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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