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Chapter 31 - Chapter 40

146 Chapters

31화. 대표의 흔들린 눈빛

진혁의 외제차가 거친 배기음을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9층 복도를 감싼 무겁고 서늘한 정적은 쉽게 깨어지지 않았다.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늘어진 태성의 그림자가 연수의 발끝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연수는 짙은 갈색 니트 자락을 쥔 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금 전 진혁의 능청스러운 접근보다, 제 앞을 거대하게 가로막아 선 강태성 CEO의 숨 막히는 아우라가 그녀를 더 위태롭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화장기 없는 하얗고 투명한 얼굴에 붉은 곤혹스러움이 옅게 번졌고, 단정하게 묶은 생머리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목덜미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연수 사원.” 태성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간신히 억눌린 짐승의 호흡 같은 거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칼같이 재단된 네이비색 쓰리피스 수트 너머로 태성의 단단한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피지컬로 연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늘 얼음 가시를 두른 듯 냉정하던 평소와 달리 걷잡을 수 없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태성의 머릿속은 방금 전 진혁이 연수의 어깨를 감싸려던 그 짧은 찰나의 잔상으로 피칠갑이 된 듯했다. 최진혁. 자신과 대등한 상류층 가문의 후계자이자, 어릴 적 화려한 파티장에서 연수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탐내던 녀석이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내려왔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태성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15년 동안 오직 하연수라는 하나의 세계만을 가슴에 품고 버텨온 그였다. 다른 여자들이 배경을 보고 들이밀 때도 까칠하고 차갑게 벽을 치며 오직 그녀만을 위한 완벽한 성벽을 쌓아 올렸는데, 감히 제 구역에 들어온 다른 수컷이 그녀를 흔들려 했다는 사실이 그의 독점욕과 소유욕을 미치도록 자극했다. 하지만 그보다 태성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Read more

32화. 태성과 진혁

청담동의 한적한 골목 깊숙이 자리한 프라이빗 바(Bar) ‘아틀리에’. 상류층의 극소수 명사들만 드나드는 이곳은 묵직한 마호가니 목재와 짙은 가죽 향, 그리고 나직하게 흐르는 재즈 선율이 공간의 밀도를 더하고 있었다.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대리석 바(Bar) 테이블 위로 흐르는 위스키 잔을 잔잔하게 비추었다. 그곳에 대한민국 상류층의 정점에 선 두 남자, 태성과 진혁이 마주 앉아 있었다. 태성은 칼같이 재단된 네이비색 쓰리피스 수트의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두고, 흰 드레스 셔츠의 소매를 가볍게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큰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사방을 지누르는 가운데,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수려한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반면 맞은편의 진혁은 명품 하우스의 베이지색 수트 단추를 풀어헤친 채, 위스키 잔을 가볍게 흔들며 특유의 바람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딸깍-. 진혁이 얼음 잔을 내려놓으며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솔직히 말해봐, 강태성. 너 낮에 9층 복도에서 눈빛 장난 아니더라? 무슨 집어삼킬 기세던데.” 태성은 대답 대신 위스키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조각 같은 턱선이 묵직하게 움직였다. 진혁은 그런 태성의 서늘한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슬며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연수…… 진짜 몰라보게 예뻐졌더라. 어릴 때 상류층 파티장에서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 입고 돌아다닐 때도 인형 같다고 생각했는데, 가문 망하고 사라져서 내심 아쉬웠거든. 근데 그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도 피부가 어찌나 투명하고 하얗던지, 숨이 턱 막히더라고.” 진혁의 노골적인 호기심이 담긴 어조가 태성의 신경을 거칠게 긁어내렸다. 셔츠 너머로 태성의 단단한 등 근육과 넓은 어깨가 분노로 잘게 들썩였다. 15년 동안 오직 하연수라는 단 하나의 세계만을 심장에 문신처럼 새기고 살아온 그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Read more

33화. 기억 속 오빠와 다른 사람

지하철 막차의 서늘한 한기를 뚫고 돌아온 반지하 방. 연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차가운 침대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단정하게 묶었던 생머리를 풀어내리자, 허리께로 쏟아지는 긴 머리카락이 파리하게 질린 뺨을 감싸 안았다. 방 안에는 여전히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가구의 서글픈 체취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수는 낡은 가죽 수첩을 가슴에 꼭 안은 채, 낮에 복도에서 마주쳤던 강태성 CEO의 서늘한 실루엣을 떠올렸다. ‘오빠는…… 너무 변했어.’ 연수의 기억 속 ‘강서준’은 늘 가을 정원 벤치에 앉아 제게 따뜻한 초콜릿을 쥐여주던 다정한 소년이었다. 추운 겨울 안개 속에서도 제 어깨에 큼직한 재킷을 덮어주며 항상 부드럽게 웃어주던, 인생의 가장 암흑 같았던 시절의 유일한 구원자. 하지만 지금 신입 사원과 회사 대표로 마주한 그는 얼음 가시를 두른 듯 오만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군주였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피지컬에 챠콜색 쓰리피스 수트를 완벽하게 차려입고, “업무 중에 사적인 친목 도모는 금지다”라며 차갑게 질책하던 남자. 더욱 연수의 심장을 잔인하게 찔러온 것은,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이미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인사기록 카드를 보고, 제 자기소개서의 ‘약속’이라는 단어를 읽었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타인으로 선을 그었다. 15년 동안 그 오랜 약속을 심장에 칼처럼 품고 버텨온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그렇게 모른 척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는 걸까. ‘내가…… 이렇게 망해버려서, 구차하게 매달릴까 봐 겁이 났던 걸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독한 서운함과 배신감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쳐 올라왔다. 하지만 이내 연수는 낡은 구두 끝을 내려다보며 제 처지를 자각했다. 상류층 최고의 신랑감이 되기 위해 정교하게 길러진 남자와, 하루아침에 흙수저가 되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Read more

34화. 꽉 쥔 주먹

글로벌 브랜드 신규 론칭 TF 프로젝트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자, 9층 기획팀 사무실은 매일이 총성 없는 전쟁터 같았다. 사방에 어지럽게 널린 시안 보드와 끊임없이 쏟아지는 인쇄물 냄새 속에서 연수는 밤샘 작업으로 조금 파리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 연수는 단정한 차콜색 슬랙스에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목폴라 니트를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투명한 피부는 피로로 약간 까칠해졌으나, 선배들의 지시 하나 놓치지 않으려 빼곡하게 채워 내려간 가죽 수첩을 쥔 손끝에는 여전히 매서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하연수 씨, 이번에 제출한 타사 포지셔닝 분석 자료 아주 훌륭했어. 신입이 행정적인 실수 하나 없이 이렇게 날카롭게 핵심을 짚어내다니, 정말 대단해.” 프로젝트의 총괄 실무를 맡은 장 차장이 연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흡족하게 웃었다. 편의점 새벽 알바와 과외로 다져진 연수의 야무진 일 처리에 경험 많은 상사들과 동료들은 연수를 진심으로 아끼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어지는 법이었다. “능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수단이 좋은 건지 모르겠네.” 기획팀의 한 시니어 과장이 들으라는 듯 서류를 탕 내리치며 비아냥거렸다. 옆에 있던 민지와 몇몇 여직원들도 질투 어린 시선으로 연수를 흘겨보며 수군거렸다. “맞아, 입사하자마자 대형 TF 팀에 들어간 것도 이상하잖아. 아무리 명문대 수석 졸업이라지만 빽이라도 있는 거 아냐? 게다가 안 꾸민 척하면서 여우처럼 남자 상사들 눈길 사로잡는 재주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들의 노골적인 시기와 가시 돋친 말투가 연수의 심장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가난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온 연수에게 이러한 오해는 지독한 통증이었지만,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Read more

35화. 그녀를 지켜보는 남자

최진혁이 남겨두고 간 최고급 수제 초콜릿 상자는 기획팀 사무실의 서늘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기괴할 정도로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변 여직원들의 날카로운 수군거림과 시니어 과장의 싸늘한 시선이 연수의 살결을 도려낼 듯이 밀려왔지만, 연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아래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붉고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단단히 묶은 연수는 화장기 없는 파리한 얼굴을 하고서도, 눈동자만큼은 전교 1등의 독기를 품었던 그 시절처럼 투명하게 빛냈다. 연수는 초콜릿 상자를 손 끝으로 밀어두고, 다시 가죽 수첩을 펼쳐 들었다. ‘흔들리지 마, 하연수. 저들이 원하는 건 내가 감정에 휘말려 무너지는 거야.’ 연수는 밀려오는 서글픔을 집어삼키며 오직 모니터 화면 속 기획서 자막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선배들이 던져준 거친 데이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붉어진 눈으로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장의 빽이나 상류층 도련님의 가벼운 호기심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님을, 오직 제 완벽한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야무진 책임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지탱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의 커다란 통유리창 앞. 태성은 챠콜색 수트 재킷의 단추를 풀어헤친 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피지컬이 거대한 유리창에 쓸쓸한 실루엣으로 비쳐 들었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9층 사무실에서 주먹을 꽉 쥐고 버텨내던 연수의 모습이 낙인처럼 그의 심장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들끓는 소유욕과 독점욕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하찮은 직원들의 주둥이를 전부 닥치게 만들고, 진혁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한 채, 제 거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Read more

36화. 야근하는 그녀

밤 10시가 넘어선 시각, 태성 기획의 9층 기획팀 사무실은 낮의 소란스러움이 무색할 정도로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하고 텅 빈 공간, 오직 한 자리에만 스탠드 불빛이 외롭게 밤을 밝히고 있었다. 연수는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진 수백 장의 데이터 시트를 틔운 채 눈을 깜빡였다. 낮에 최진혁이 남기고 간 화려한 초콜릿 상자와 사교계 도련님의 노골적인 접근은 사무실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었지만, 연수는 도리어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동기들에게 초콜릿을 전부 나누어주었다. 사심 없는 척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넘기려 애쓴 덕에 표면적인 소음은 가라앉았지만, 뒤틀린 질투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연수를 시기하던 상사는 퇴근 직전, 도저히 신입 혼자서는 제시간에 끝낼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추가 시장 분석 피드백을 연수의 책상 위에 툭 던지고 가버렸다. 명백한 보복성 야근 지시였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연수는 단정하게 묶었던 긴 생머리를 풀어내렸다. 허리께로 쏟아지는 까만 머리카락이 파리하게 질린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흰 블라우스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채, 연수는 다시 가죽 수첩을 펼쳐 들었다. 선배들의 지시 하나, 까다로운 상사의 억지스러운 요구까지 붉은 펜으로 꼼꼼히 체크해 내려가는 그녀의 손끝에는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오직 실력으로 이 자리를 증명하겠다는 야무진 책임감이 피로를 이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온기가 도지 않는 넓은 사무실에서 홀로 밤을 새우는 일은 생각보다 더 시리고 외로웠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아려왔다.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의 불도 꺼질 줄 몰랐다. 태성은 챠콜색 수트 재킷을 벗어둔 채, 흰 드레스 셔츠 차림으로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태성의 큰 키는 어두운 방 안에서 거대한 실루엣을 그렸다. 화면 속에는 9층 텅 빈 사무실에서 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Read more

37화. 보고서를 다시 읽는 밤

달콤하고도 따뜻했던 기억 속 야식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자정의 시각. 연수의 손가락은 마우스를 쥔 채 멈춰 있었다. 9층 기획팀 사무실의 넓은 창밖으로는 가차 없이 몰아치는 서울의 겨울 칼바람이 빌딩 유리를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텅 빈 사무실의 유일한 빛인 스탠드 불빛 아래, 연수의 하얗고 투명한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머물러 있었다. 15년 전 테라스의 온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보온 도시락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애틋하게 일렁였다. ‘오빠는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어. 가장 차가운 모습으로, 가장 따뜻하게.’ 대표실 책상의 만년필 각인과 오늘 밤 도착한 마법 같은 야식. 이 모든 조각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태성 CEO, 그 오만한 남자가 바로 제 기억 속 서준 오빠라는 것을. 연수는 허리까지 흘러내린 긴 생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면 가득 띄워진 시장 분석 보고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질투에 눈이 먼 상사가 던져주고 간 악의적인 업무였지만, 이제 연수에게 이것은 단순한 야근이 아니었다. 자신을 숨긴 채 뒤에서 묵묵히 발판을 깔아주는 남주에 대한 대답이자,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무기였다. 연수는 가죽 수첩을 펼쳐 선배들의 지시 사항과 상사의 까다로운 피드백을 빨간 펜으로 다시 정밀하게 도식화했다. 한 글자, 한 수치도 흐트러짐 없이 채워 나가는 그녀의 거칠어진 손끝에 독기와 야무진 책임감이 서렸다.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에게 안기는 대신, 가장 완벽한 보고서로 그의 성벽 꼭대기에 당당히 걸어 올라가겠다는 열망이 어두운 밤을 하얗게 불태우고 있었다.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의 공기는 칠흑 같은 어둠과 대조적으로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태성은 칼같이 재단된 네이비색 수트 재킷을 의자에 걸쳐둔 채, 흰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Read more

38화. 누군가 그녀를 노리고 있다

새벽의 푸른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 기획팀 사무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고 축축했다. 밤샘 야근으로 붉어진 눈을 비비며 연수가 탕비실로 향했을 때, 그녀의 등 뒤로 가해지는 끈적하고 집요한 시선이 있었다. 기획팀 3년 차 대리, 김태수. 그는 연수가 이 회사에 첫 발을 내딛던 면세점 최종 면접 날부터 오직 하연수라는 존재 하나만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수많은 지원자들 사이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단단히 묶고,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투명한 눈동자를 빛내던 연수의 모습은 태수의 뒤틀린 소유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가난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고고한 척 척추를 똑바로 세운 그 자존심을 제 손으로 짓밟고, 결국엔 제 밑에서 울부짖게 만들고 싶다는 가학적인 충동. 그것이 태수가 지난 몇 달간 숨겨온 본음이었다. 태수는 책상 파티션 너머로 연수가 자리에 앉아 수첩을 펼치는 모습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연수가 마우스를 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피곤할 때면 입술을 살짝 깨무는 버릇, 심지어 그녀가 내쉬는 가녀린 숨소리의 리듬까지. 그의 온 신경은 오직 연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머릿속에 지독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최근 최진혁이 남기고 간 화려한 초콜릿 상자나, 정체모를 이가 보낸 호텔 야식을 보며 연수의 뺨이 붉어질 때마다 태수의 가슴속에서는 시커먼 질투와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연수, 넌 결국 내 동류야. 상류층 도련님들의 가벼운 노리개로 전락하기 전에, 내가 널 가져야겠어.’ 태수는 연수의 책상 위, 그녀가 밤새 수정해 놓은 TF 팀 기획서 출력본을 흘낏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저 야무진 책임감으로 가득 찬 보고서를 망가뜨렸을 때, 연수가 지을 절망적인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짜릿해졌다.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연수의 서랍 깊숙이 보관된 외장 하드와 서류들의 위치를 눈으로 꼼꼼히 박아두었다. 음침한 사냥꾼의 눈빛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Read more

39화. 그림자 없는 울타리

김태수 대리의 노골적인 접근과 비열한 속내는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었다. 기획팀 사무실 안에서 태수는 업무 지시를 핑계로 연수의 개인 공간을 끊임없이 침범했다. “연수 씨,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아. 저런 상류층 도련님들이 던지는 동정심에 기대를 걸지 마.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려야 마음이 편한 법이야.” 태수의 끈적한 시선이 연수의 가녀린 어깨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연수는 주먹을 꽉 쥐고 독기를 품었다. 그녀는 특유의 야무진 처세로 공적인 선을 그었지만, 회사를 나서는 퇴근길마다 등 뒤에 달라붙는 그 음흉한 존재감은 연수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연수는 굴하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무너지는 순간, 그 오만한 상사와 질투 어린 동료들이 원하는 먹잇감이 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 태성은 대형 모니터 화면 너머로 태수가 연수의 책상 근처를 맴도는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9층으로 내려가 그 더러운 쥐새끼를 짓밟아버리고 싶었지만, 태성은 연수가 제 힘으로 세상의 편견을 부수고 당당히 자립하기를 바랐기에 이성을 붙잡았다. “한 실장.” 태성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깼다. “기획팀 김태수 대리. 내일부터 본사에서 제외하고 가장 외진 지방 지점으로 발령 내. 다신 내 눈앞에, 그리고 연수 눈앞에 얼씬도 못 하게 해. 그자가 맡았던 모든 업무 권한은 즉시 박탈해.” 태성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연수가 퇴근하는 골목길을 띄운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밤마다 어둡고 칙칙한 골목을 걸어 지하방으로 들어가는 연수의 모습은 태성의 심장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고통이었다. “연수 퇴근길, 내가 직접 간다. 아무도 모르게.” 밤늦게 퇴근한 연수가 낡은 가방을 멘 채 골목길에 들어섰다. 가로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Read more

40화. 지독한 짝사랑의 교차로

기획팀 사무실 내의 불온한 기운은 김태수 대리의 좌천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팀원들의 미묘한 거리감과 질투, 그리고 연수를 향한 알 수 없는 경외감이었다. 신입 사원이 감히 회사 내의 불순한 인사를 정리할 만큼 대표의 눈에 띄었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연수는 달라진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모니터 속 글로벌 론칭 프로젝트의 성과 지표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퇴근길, 대낮처럼 밝아진 골목길과 든든하게 바뀐 보안 도어록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심장 한구석에서는 묘한 박동이 일었다. ‘도대체 누가…… 왜 나를 이렇게까지 지켜주는 걸까.’ 연수는 서늘하도록 투명한 눈동자로 어두운 골목 끝을 응시했다.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질 때마다, 문득 15년 전 파티장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던 강서준 오빠의 실루엣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강태성 대표는 그런 사사로운 정에 매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그의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할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시각, 28층 대표실의 문이 경쾌하게 열렸다. 태성 그룹의 계열사 부사장인 이진경이 우아한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태성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온 그녀였다. 완벽한 집안 배경과 지적인 매력을 갖춘 진경은, 태성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다정한 친구이자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다. “태성아, 이번 글로벌 프로젝트 기획안 다 읽어봤어. 정말 훌륭하더라. 특히 그 신입 사원, 하연수 씨 기획력이 눈에 띄던데?” 진경은 태성이 연수를 향해 쏟는 시선이 어떤 온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태성의 눈동자가 오직 한 사람을 향해 굶주려 있음을 보아온 진경이었다. 그녀는 태성의 사랑을 가질 수 없다면, 적어도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Read more
PREV
123456
...
1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