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Chapter 21 - Chapter 30

146 Chapters

21화. 대표실에서 발견한 이름

태성 기획의 첫 출근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신입 사원 OJT와 산더미 같은 기획서 양식 교육 속에서도 연수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긴 생머리에 짙은 네이비색 정장 재킷, 그리고 앞코를 깨끗하게 닦아낸 구두까지. 비록 명품은 아니었지만 연수의 맑고 청초한 분위기는 그 투박한 정장마저 고급스럽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하연수 씨, 죄송한데 이것 좀 최고경영자(CEO) 집무실로 전달해 줄래요? 다른 직원이 자리를 비워서.” 사수의 다급한 요청에 연수는 서류 봉투를 소중히 받아 들고 28층 대표실로 향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상승할 때마다 연수의 심장도 조금씩 가파르게 뛰었다. 오늘 아침, 로비에서 마주쳤던 그 압도적인 남자. 얼음 가시를 두른 듯 차갑고 냉정하던 강태성 CEO의 잔상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대표실은…… 다른 세계 같네.’ 28층에 내리자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고요한 복도가 펼쳐졌다. 바닥에 깔린 짙은 회색의 고급 카펫은 구두 소리마저 부드럽게 흡수했고, 은은하게 풍기는 세련된 우디 향이 공간의 무게감을 더했다. 연수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거대한 통유리와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된 대표실의 묵직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들려온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연수는 문을 열고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대표실 안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한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빌딩 숲 위로 겨울의 차가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그 중심에, 남주인공 강태성이 서 있었다. 태성은 185센티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신장에, 짙은 챠콜색의 쓰리피스 수트를 완벽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와 단단한 몸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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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하연수, 살아 있었구나

“하연수 씨.” 조용히 가라앉은 대표실의 공기를 깨고 태성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 케이스의 각인, ‘강서준’이라는 석 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연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독하게 그리워했던 이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왜 이 오만한 대표의 방에 놓여 있는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연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애써 차분함을 가장했다. 짙은 네이비색 재킷의 옷깃을 다잡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서류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동양적인 선이 고운 눈매를 아래로 내리깐 채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 더 투명해 보이는 피부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생머리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실루엣을 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성의 가슴 안쪽이 사정없이 아려왔다. 태성은 천천히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체구와 챠콜색 쓰리피스 수트의 단단한 실루엣이 연수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비추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차갑고도 깊었다. 하지만 그 차가운 외피 속에서, 태성의 심장은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었다. ‘하연수. 정말 너구나. 살아 있었어…….’ 10년 전, 하씨 가문의 파산 소식을 듣고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온 가족이 야반도주하듯 사라진 뒤였다. 집안의 강요로 영국 유학길에 오르면서도, CEO 자리에 앉아 상류층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지금까지도 태성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작은 꼬맹이 하나뿐이었다. 부모가 들이미는 정략결혼 상대들에게 까칠하고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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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15년 동안 잊지 못한 아이

대표실을 빠져나온 연수의 발걸음은 28층의 고급 카펫 위를 위태롭게 부딪쳤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 로비로 내려오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강서준’이라는 석 자로 가득 차 있었다. ​‘설마…… 대표님이 서준 오빠와 형제나 친척인 걸까? 아니면, 그냥 동명이인일 뿐인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수는 짙은 네이비색 재킷의 소매 끝을 세게 쥐었다.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가난의 구덩이 속에서 구르면서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던 첫사랑이었다. 번호가 바뀌고 유학을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심장이 갈가리 찢겼던 열일곱의 겨울 이후, 연수의 시간은 절반쯤 멈춰 있었다. 오만하고 차가워 보였던 강태성 CEO의 등 뒤로, 자꾸만 제게 큰 재킷을 덮어주던 열일곱 소년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는 것은 제 지독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연수는 스스로의 뺨을 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차려, 하연수. 넌 여기 일하러 온 거야. 그런 동화 같은 기적은 없어.” ​연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탕비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화장기 없는 투명한 얼굴에 생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야무진 눈빛의 스물일곱 하연수가 있었다. 그녀는 제 낡은 구두 끝을 내려다보며 사적인 감정을 완벽히 차단하려 애썼다. ​하지만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의 공기는 연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연수가 나간 문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태성은 천천히 거대한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185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구가 유리창에 선명하게 비쳤다. 칼같이 재단된 챠콜색 쓰리피스 수트의 옷깃을 거친 손길로 풀어헤치며, 태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평소의 냉정함 대신, 15년이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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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자기소개서의 한 문장

​연수가 대표실을 나간 뒤에도 서늘한 잔향처럼 감돌던 우디 향 사이로, 방 안에는 오직 서류가 사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만이 둔탁하게 울렸다. ​태성은 널찍한 최고급 매호가니 책상 앞에 깊숙이 묻어 앉아 있었다. 칼같이 재단된 챠콜색 쓰리피스 수트의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쳐둔 터라, 얇은 흰색 드레스 셔츠 너머로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하고 넓은 어깨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사방을 짓누르는 가운데, 그의 긴 손가락이 멈춘 곳은 이번 하반기 공채 신입 사원들의 인사기록 카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에 놓인 한 장의 서류. ​[ 하연수 (27세) ] ​정갈하게 묶은 머리에 맑고 투명한 피부, 동양적인 선이 고운 눈매가 돋보이는 증명사진이 태성의 시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최고 명문대 경영학과 수석 졸업이라는 화려한 타이틀 아래로 빽빽하게 적힌 이력들은 눈물겨울 만큼 치열했다. 편의점, 고깃집, 과외, 문서 타이핑…… 흔한 대외활동이나 어학연수 도장 하나 없이 오직 생활전선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흔적들이 이력서 한 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태성은 가슴 한구석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십여 년 전,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천사처럼 웃던 그 귀한 아이가 이 거친 세상에서 홀로 버텨냈을 무게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였다. ​천천히 장을 넘기던 태성의 손길이 서류의 마지막 장, 자기소개서의 가장 하단 문항에서 뚝 멈춰 섰다. ​[……제 인생의 가장 추웠던 겨울, 제게 가장 큰 온기를 나누어주었던 한 사람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공간과 기획을 하라’던 그 오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태성 기획에서 그 약속의 건물을 올리고 싶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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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아는 척하지 않겠습니다

노을빛이 붉은 핏빛처럼 사그라지고, 서울의 빌딩 숲 위로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태성 기획의 탕비실 안은 오직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정수기 소리만이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연수는 찬바람이 들어오는 창틀에 기대어 선 채, 식어가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았다. 단정하게 묶어 올렸던 긴 생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려 맑고 투명한 뺨을 스쳤다. 네이비색 정장 재킷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음에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시린 한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대표실 책상 위에 있던 그 이름, 강서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정답은 하나로 수렴했다. 태성 그룹의 젊은 CEO 강태성. 그가 바로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찾아 헤매던 유일한 구원자이자, 열일곱의 겨울날 재킷을 벗어주었던 그 오빠라는 사실을. 그러나 연수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15년 만에 마주한 그는 더 이상 가을 정원 벤치에 앉아 무심하게 초콜릿을 쥐여주던 다정한 소년이 아니었다. 185센티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체구에, 범접할 수 없는 차가운 아우라를 풍기며 상류층의 정점에 선 오만한 군주. 그것이 현재 강태성의 모습이었다. ‘오빠는…… 변했어. 아니, 그게 당연한 걸지도 몰라.’ 연수는 낡은 구두 끝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반지하 곰팡이 냄새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남은 흙수저 신입 사원이었고,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랑감이자 거대 기업의 CEO였다. 그 메워질 수 없는 아홉 살의 나이 차이와 신분의 간극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연수의 심장을 찔렀다. 만약 지금 자신이 “오빠, 저 기억해요?” 하고 구차하게 아는 척을 한다면, 그 오만한 남자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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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대표의 비밀 지시

야근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태성 기획의 9층 기획팀 사무실. 신입 사원들의 자리만 스탠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연수는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진 타사 광고 분석 데이터들을 붉어진 눈으로 훑어 내렸다. 단정하게 반 묶음 했던 긴 생머리는 어느새 풀려 허리께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려 있었다. 짙은 네이비색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채,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흰 블라우스 차림의 연수는 펜을 쥔 손가락 끝바디에 힘을 주었다. 화장기 없는 파리한 안색 속에서도, 동양적인 선이 고운 까만 눈동자만큼은 맑고 야무지게 빛나고 있었다. ‘동정표나 과거의 기억 따위로 살아남고 싶진 않아. 내 실력으로 이 자리를 증명하겠어.’ 그녀는 다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바로 그때, 기획팀의 몇몇 남자 직원들이 커피 캔을 들고 연수의 책상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연수 씨, 아직 안 퇴근했어요?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모르는 거 있으면 이 선배한테 편하게 물어봐요.” “맞아, 하연수 씨는 안 꾸며도 피부가 투명해서 그런가, 사무실 분위기가 싹 사네. 주말에 시간 되면 내가 업무 팁 좀 줄 겸 맛있는 거 살게요.” 은근한 사심이 담긴 시선과 말투가 연수의 뺨을 스쳤다. 아무리 제 아름다움을 꾸밀 줄 모른다 한들, 15년 동안 거친 생활전선에서 다져진 눈치가 있었다. 연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낡은 구두를 신은 발끝을 웅크렸다. 딱 잘라 거절하기엔 첫날부터 팀의 분위기를 흐릴까 걱정됐고, 받아주기엔 불쾌감이 밀려왔다. 야무진 그녀의 성격이 대답을 고르던 찰나였다.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 고요함이 지배하는 방 안에서 태성은 챠콜색 수트 재킷을 걸친 채, 기획팀 사무실의 실시간 CCTV 화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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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신입 사원 하연수

대표의 비밀스러운 지시가 아래로 내려간 다음 날 아침, 태성 기획의 9층 기획팀 사무실은 이른 시간부터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세련된 유리 파티션 사이로 복사기의 거친 작동음과 전화벨 소리가 섞여 드는 가운데, 연수는 제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날 연수는 단정한 흰색 셔츠 위에 단추가 깔끔하게 달린 검은색 니트 베스트를 겹쳐 입고 있었다. 대학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갈 때 입던 손때 묻은 옷이었지만,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덕에 외려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생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내린 모습은, 맑고 투명한 피부와 어우러져 동양적인 아우라를 풍겼다. 스스로 꾸밀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연수였으나, 그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삭막한 사무실에서 단연 돋보였다. “하연수 씨, 아침 안 먹었으면 이 샌드위치 좀 먹어봐요. 출근길에 연수 씨 생각나서 좀 샀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제에 이어 다른 파트의 대리 한 명이 슬그머니 연수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포장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주변 남자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연수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쉬었지만, 겉으로는 한 치의 흐름 없이 야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15년 동안 거친 생활전선에서 구르며, 제 예쁜 외모만을 보고 가볍게 접근해 오던 수많은 남자를 거절해 본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선을 긋는 법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머, 대리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연수는 샌드위치를 공손히 받아 들고는, 이내 목소리를 높여 주변 직원들을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마침 오늘 아침 일찍 나오느라 동기들이 다 배고파했는데, 다 같이 나눠 먹으면 정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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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는 사람

새벽 5시 30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태성 기획의 사옥은 아직 밤의 잔상이 채 가시지 않은 짙은 푸른빛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심의 소음마저 잠든 시각, 거대한 얼음 성처럼 솟아오른 빌딩의 회전문이 스르륵 돌아가며 정적을 깨뜨렸다. 회전문 너머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신입 사원 하연수였다. 그날 연수는 옅은 베이지색 가디건에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명품은 아니지만 깔끔한 그녀의 성격처럼 깨끗하게 손질된 옅은 베이지색 가디건은, 투명하리만치 맑고 깨끗한 그녀의 피부와 어우러져 오히려 수수하고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는 새벽바람에 흩날려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손에는 여전히 앞코가 살짝 닳은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만큼은 전교 1등이라는 갑옷을 입었을 때처럼 단단하고 야무졌다. ‘신입 사원으로서 TF 팀에 들어 온 연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연수는 서류 가방을 꼭 쥐며 가만히 다짐했다. 어제 팀장에게 전달받은 ‘글로벌 브랜드 신규 론칭 TF 프로젝트’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밤새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자료를 조사하다가, 차라리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놓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9층 기획팀 사무실에 불이 켜지자,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연수의 파리한 얼굴을 비추었다. 아직 온기가 돌지 않아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연수는 개의치 않았다. 가방에서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분석한 타사 데이터를 꺼내 책상 가득 펼쳐놓았다. 펜을 쥔 거칠어진 손가락 끝바디에 힘을 주며, 연수는 오직 일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새벽 편의점의 불빛 아래서 버텨왔던 그녀의 끈기와 야성이 화려한 사무실 책상 위에서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같은 시각, 사옥 지하 주차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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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완벽한 메모 습관

오전 8시 30분이 넘어서자, 고요하던 9층 기획팀 사무실은 출근하는 직원들의 소란스러운 발걸음과 웅성거림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연수는 이미 세 시간 전부터 자리를 지키며 분석 자료를 정리해 둔 터라, 그녀의 책상 위에는 깔끔하게 분류된 서류철과 빼곡하게 적힌 포스트잇이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날 연수는 흰색 면 블라우스 위에 짙은 갈색의 브이넥 니트를 겹쳐 입고 있었다. 대학 시절 과외비를 아껴 샀던 낡은 옷이었지만, 빳빳하게 깃을 세운 블라우스와 단정하게 묶어 내린 긴 생머리 덕에 오히려 지적이고 야무진 느낌을 자아냈다. “어머, 하연수 씨는 벌써 출근했네? 아주 의욕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동기 여직원인 민지가 커피잔을 들고 다가와 뾰족한 목소리로 툭 던졌다. 그녀의 시선은 연수의 책상 한구석에 놓인 대형 TF 프로젝트 서류철에 꽂혀 있었다. 입사 첫 주 만에 신입 사원 중 유일하게 핵심 파트에 투입된 연수를 향한, 감추지 못한 질투어린 시선이었다. “아직 업무가 서툴러서 미리 나와 정리하고 있었어요.” 연수는 상대의 날 선 태도에도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민지는 들으라는 듯 탕비실 쪽을 향해 다른 여직원들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이번 프로젝트 총괄이 강태성 CEO님이시잖아. 진짜 대박이지 않니? 어제 로비에서 실물 처음 봤는데, 키가 185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여서 모델인 줄 알았어. 그 완벽한 수트 핏에 차가운 눈빛까지…… 상류층에서 왜 그렇게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난리인지 알겠더라.” “말도 마. 여자들 소개받아도 거들떠도 안 보신다잖아. 업무 능력도 최고고, 진짜 얼음 궁전의 왕자님 같아. 그런 분의 눈에 드는 여자는 도대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걸까?”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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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복도에서 마주친 남자

기획팀의 긴급 회의가 끝난 후, 연수는 가죽 수첩을 품에 꼭 안은 채 복도로 나왔다. 선배들의 지시 사항을 빈틈없이 채워 넣은 수첩의 무게만큼이나 어깨가 무거웠다. 그날 연수는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 위에 짙은 갈색 니트를 받쳐 입고, 생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소박한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복도의 화려한 대리석 조명을 받아 청초하게 빛났고,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마다 야무진 독기가 서려 있었다. 동양적인 선이 고운 까만 눈동자는 오직 다음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설마, 그 때 그 꼬맹이?” 그때, 9층 임원 접견실 방향에서 걸어오던 한 남자가 연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연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명품 하우스의 트렌디한 베이지색 수트를 가볍게 걸친 남자. 바람기 어린 부드러운 미소와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그는, 태성의 오랜 친구이자 상류층 사교계의 핵심 인물인 최진혁이었다. 진혁의 집안 또한 태성의 가문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거대 기업의 후계자였으며, 어릴 적 상류층의 화려한 파티에서 태성, 그리고 연수와 함께 어울렸던 기억을 공유한 이였다. 진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수를 뜯어보았다. 비록 십여 년 전의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 대신 낡은 니트를 입고 있었지만, 숨이 멎을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고유의 실루엣은 변함이 없었다. 집안이 망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파티장의 작은 공주가, 왜 이 곳에서 신입 사원 사원증을 메고 서 있는지 의아함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와, 대박. 진짜 그 꼬맹이 맞네? 너 살아 있었구나?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다들 죽었나 했잖아.” 진혁이 반가움과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섞인 말투로 연수의 가녀린 어깨에 손을 올리려 다가섰다. 연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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