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Chapter 41 - Chapter 50

146 Chapters

41화. 박 차장의 질투

오전 9시, 태성 그룹 9층 기획팀 사무실은 타자기 소리와 긴장감이 섞인 공기로 가득했다. 연수가 단정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슬랙스를 차려입고 자리로 들어섰을 때, 사무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일렁였다.“어머, 저기 좀 봐. 오늘도 대표님 눈에 들려고 저렇게 꾸미고 온 거 아냐?”탕비실 근처에서 들려오는 날 선 속삭임은 꽤 노골적이었다. 기획팀의 2인자인 박 차장이 찻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연수를 향해 쏘아붙인 말이었다. 박 차장은 입사 때부터 연수의 맑고 투명한 외모와, 사내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업무를 습득하는 그녀의 능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다. 특히 최근 대표 강태성의 지시로 진행된 보안 강화와 환경 개선이 사실상 연수를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박 차장의 질투는 증오로 변질되었다.“신입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요직을 꿰차? 몸이라도 잘 굴리면 승진이 빨라지나 보지?”박 차장의 말에 주변 여직원 몇몇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몸으로 승진한다’는 저급한 소문이 사무실 곳곳에 독처럼 퍼져 나갔다. 하지만 연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제 자리로 걸어갔다. 차가운 얼음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모니터 속 론칭 프로젝트의 마케팅 전략 수립에 집중했다. 그녀에게 그 소문은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지나가는 먼지에 불과했다.연수가 묵묵히 제 일을 하자, 오히려 박 차장의 질투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연수를 진심으로 아끼는 선배들도 있었다. 팀의 맏언니 격인 최 과장이 연수의 책상 위에 몰래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올려두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연수야, 저런 말들 신경 쓰지 마.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그건 여기 있는 사람 다 알아. 멍청한 것들은 질투할 대상이 필요해서 그래.”최 과장의 다독임에 연수는 비로소 맑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사무실 내의 수많은 남직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연수의 업무 능력을 동경하며 그녀의 곁을 맴도는 남자 사원들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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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아이디어를 도둑맞다

회의실의 공기는 박 차장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벼려졌다. 박 차장이 발표한 기획안은 연수가 밤을 새워 만든 ‘하이브리드 이벤트’의 핵심 골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교묘하게 고객 타겟층을 수정하고 이벤트 명칭을 바꾸어 놓은 상태였다. 원본의 영혼은 연수의 것이었으나, 겉모습은 박 차장의 입맛대로 뒤틀려 있었다.연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논리의 흐름, 타겟 고객의 행동 분석 방식, 그리고 그가 제시한 마케팅 문구까지. 그것은 분명 자신의 흔적이었다.그때, 연수의 곁을 묵묵히 지키던 최 과장이 의아하다는 듯 손을 들었다.“박 차장님, 이 기획안의 핵심 로직이 지난주 연수 씨가 공유 드라이브에 올려둔 초안과 상당히 흡사해 보이는데요. 혹시 연수 씨의 아이디어를 참고하신 건가요?”회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든 시선이 박 차장과 연수를 향해 쏟아졌다. 박 차장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뻔뻔할 정도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최 과장님, 기획팀은 팀 전체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 아닙니까? 연수 씨의 초안이 좋았기에 그걸 바탕으로 팀의 이익을 위해 더 발전시킨 겁니다. 개인이 쥐고 있는 아이디어보다 조직의 성과가 우선인데, 제가 공유 드라이브의 자료를 활용한 게 문제가 됩니까?”박 차장의 말은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궤변이었다. 그는 연수가 기획팀의 일원이라는 점을 악용해, 그녀의 노력을 자신의 공료로 둔갑시켰다. 박 차장의 눈빛은 비열하게 빛나며 연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감히 신입이 내 앞길을 막아?’라는 무언의 협박이 섞인 시선이었다. 연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억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여기서 반박하는 순간 ‘팀워크를 해치는 이기적인 신입’으로 낙인찍힐 것임을 직감했다.같은 시각, 해외 출장 중인 태성은 전용기 안에서 비즈니스 론칭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체구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그의 표정은 출장지의 날씨만큼이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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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옥상에서 울고 있는 연수를 만나다

사무실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비릿했다. 박 차장이 가로챈 기획안은 팀장에게 승인을 받았고, 사무실 내의 동료들은 마치 연수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그녀를 투명하게 취급했다. 억울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연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보다 더 밝게 미소 지으며 업무에 매진했다. 흰 블라우스 깃을 단정하게 매만지고,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녀는 오직 모니터 화면 속 데이터에만 몰두했다.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녀의 내면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해 질 녘, 노을이 서울의 빌딩 숲을 피빛으로 물들이던 시간. 연수는 아무도 없는 회사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의 어깨가 맥없이 처졌다.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몰아치는 찬 바람에 뺨이 시려왔지만, 연수는 벤치 옆 난간에 기대어 서서 붉게 물든 하늘을 멍하니 응시했다.“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참아왔던 눈물이 툭, 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낡은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찌른 채, 그녀는 억지로 삼켰던 울음을 터뜨렸다. 박 차장의 뻔뻔한 얼굴, 침묵하던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스스로 견뎌내야 하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가슴을 저몄다.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가렸다.그때였다. 옥상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발소리는 조용했지만, 연수는 본능적으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 챠콜색 쓰리피스 수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태성의 실루엣이 들어왔다.강태성. 한 때 그녀의 모든 세상이었던 서준 오빠, 그러나 지금은 태성 기획의 대표이자 우리나라 최고 기업중 하나인 태성 그룹의 장남… 그녀의 자리에서는 감히 올려다 보기 어려운 가장 차가운 CEO.태성은 옥상 정원의 은은한 조명 아래 서 있었다. 큰 키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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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합니다

옥상 정원에서의 그 짧고도 강렬했던 조우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9층 기획팀 사무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박 차장에게 아이디어를 약탈당하고 선배들의 침묵 속에 고립되었던 신입 사원. 하지만 연수는 단 한 자락의 처량함도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그날 연수는 빳빳하게 각이 잡힌 네이비색 테일러드 재킷에 깃이 높은 화이트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단하게 묶어 올린 그녀의 얼굴은 파리했지만, 투명한 눈동자만큼은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빛났다.“하연수 씨, 이번에 프랑스 본사에서 급하게 내려온 ‘글로벌 럭셔리 라인 컨셉 보완 건’이 있어. 다들 기존 프로젝트로 손이 모자라는데, 연수씨가 새 기획안을 한번 맡아볼래?”장 차장이 눈치를 보며 던진 서류 봉투는 사실상 독이 든 성배였다. 본사의 까다로운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독박을 쓰기 십상인 버려진 과제. 하지만 연수는 주저 없이 그 서류를 받아들었다.“네, 제가 하겠습니다. 기한 내에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박 차장의 비열한 미소와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등 뒤를 찔렀지만, 연수는 수첩을 펼쳐 들고 데이터 분석에 착수했다. 옥상에서 자신을 ‘꼬맹이’라 부르며 독기를 불어넣었던 강태성 대표의 서늘한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억울함에 눈물 흘리기보다, 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기획서로 짓밟아주겠다는 야무진 책임감이 그녀의 가녀린 척추를 빳빳하게 세웠다.한편,칼같이 재단된 쓰리피스 수트를 입은 태성은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정적을 깨고 태성의 오랜 수하이자 비밀 비서인 황준서가 다가왔다. 준서는 태성의 지시에 따라 연수의 모든 행동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대표님, 하 사원이 박 차장의 견제를 뚫고 프랑스 본사의 신규 럭셔리 라인 기획안을 단독으로 맡았습니다. 밤샘 작업을 시작할 기세입니다.”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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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왜 나에게만 차가운 걸까

프랑스 본사의 럭셔리 라인 컨셉 보완 기획안은 연수의 삶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회의실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참고 자료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도면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야근. 연수는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 사원, 이 부분은 데이터 오류가 좀 있는 것 같은데?” 기획팀 팀장이 지나가며 던진 한마디에 연수는 즉시 고개를 숙이고 수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몸에 딱 맞는 그레이 컬러의 블레이저를 단정하게 걸치고, 긴 머리를 낮게 묶은 채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야근의 피로로 창백했지만, 그 정갈한 모습은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도 고고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 탕비실 쪽에서 들려오는 여직원들의 웃음소리가 연수의 귀를 찔렀다. “오늘 대표님이 사내 식당 메뉴가 부실하다고 직접 셰프를 바꾸셨대. 진짜 다정하시지 않아?” “맞아, 지난번에 우리 부서 마감 때도 몰래 익명으로 야식 보내주신 거 다들 알지? 차가운 척하시지만, 우리 대표님만큼 섬세한 분도 없어.” 여직원들은 하나같이 핑크빛 볼을 하며 태성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회사의 복지가 좋은 이유, 어려운 처지의 직원을 남몰래 돕는다는 소문, 심지어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고개만 까닥여도 그 카리스마에 심장이 떨린다는 고백까지. 회사에서 강태성은 차가운 냉혈한이 아니라, 모두가 동경하고 비밀스럽게 짝사랑하는 ‘완벽한 왕자님’이었다. 연수는 묵묵히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시려왔다. 태성은 다른 직원들에게는 그렇게 다정하고 사려 깊은 배려를 베푸는데, 왜 자신에게만은 그토록 서늘하고 냉정한 걸까. ‘내가 뭐를 그렇게 잘못했을까. 아니면, 내가 싫은 걸까.’ 연수는 회의실 벽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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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퇴근 후의 기다림

시계 바늘이 밤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텅 빈 9층 기획팀 사무실은 한낮의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적에 잠겨 있었다. 연수는 며칠째 이어지는 야근으로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모니터를 껐다. 짙은 남색 셔츠 블라우스의 단추가 하나쯤 풀려 있을지도 모를 만큼 그녀는 지쳐 있었다. 창밖의 서울 야경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사무실 안은 차가운 냉기만이 감돌았다. 연수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차장의 방해와 선배들의 침묵 속에서도 기어이 본사의 요구치를 맞춘 완벽한 기획안을 메일함에 전송한 직후였다.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기로 한 이후, 그녀의 일상은 오직 성취와 증명뿐이었다. 하지만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연수는 태성을 생각했다. ‘서준 오빠는 퇴근 했을까!.’ 태성이 회사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연수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직원들에게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복지를 살피는 그가 자신에게만 유독 얼음처럼 차가운 이유. 어쩌면 그는 자신을 정말로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수는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대신, 1층 로비 밖 정원을 가로질러 걷기로 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머리칼을 스치자 조금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원 한가운데, 짙은 어둠 속에 세워진 블랙 세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기대어 선 남자. 완벽한 핏의 블랙 수트를 입은 태성이었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묵묵히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성은 가로등 불빛 아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연수는 멈칫했다. 발걸음을 돌려야 할지, 아니면 지나쳐 가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태성의 시선이 정확히 연수에게 꽂혔다. “……늦었군.” 태성의 낮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 연수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대표님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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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꺼지지 않는 대표실의 불빛

시계 바늘이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획팀 사무실의 마지막 불을 끄고 나온 연수는 묵직한 서류 가방을 고쳐 맸다. 이번 글로벌 럭셔리 라인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강행군에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태성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퇴근길, 연수는 본능적으로 28층을 향했다. ‘서준 오빠는 아직 퇴근 안 했을까?’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연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핏기 없는 얼굴. 하지만 태성을 향한 알 수 없는 이끌림은 그녀를 28층 복도로 이끌었다. 복도 끝, 대표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날카로운 빛줄기가 보였다. 조심스레 다가간 연수는 문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 사이로, 태성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피로감과 동시에, 회사를 지탱하는 CEO로서의 차가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때, 비서 황준서가 차를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이제 좀 쉬시죠. 연수씨도 방금 퇴근했습니다. 대표님께서 물밑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연수씨가 이번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태성은 펜을 멈추고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도와주다니. 그저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야. 15년 전, 그 꼬맹이가 내 눈앞에서 울며 떠났을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그 무력감이 아직도 이 가슴에 박혀 있거든.” 연수는 문밖에서 숨을 멈췄다. 꼬맹이? 무력감? 태성이 말하는 과거의 조각들이 연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나저나 대표님, 연수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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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하연수라는 이름

기획팀 사무실의 공기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져 있었다. 프랑스 본사에서 긴급하게 날아온 ‘글로벌 럭셔리 라인 컨셉 보완’ 과제는 단순한 업무를 넘어, 9층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시험대였다. 박 차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며칠 밤을 새우며 매달렸지만, 본사에서 요구하는 ‘유럽 상류층의 미묘한 감성’을 건드리지 못해 번번이 퇴짜를 맞던 참이었다. 연수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다, 어제저녁 대표실 문밖에서 들었던 태성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너를 혹독하게 대하는 이유는, 너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연수 또한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법으로 보답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했다. 사실 연수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조각난 과거가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프랑스 파리의 살롱과 그곳의 파티, 우아한 귀족들의 담소와 그들이 공유하던 은밀한 취향들. 비록 지금은 반지하 방에 살고 있지만, 그때 보고 듣고 체득했던 ‘상류층의 언어’가 연수의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었다. 연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기획안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히 화려한 문장을 나열하는 대신, 그 시절 상류층이 나누던 우아한 예법과 본질적인 ‘절제미’를 기획안에 녹여냈다. 럭셔리의 정점은 드러냄이 아니라 감춤에 있다는 것을 연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기획안이 본사로 전송되었다. 몇 시간 뒤, 본사 인터내셔널 디렉터로부터 긴급 화상 회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 제안서, 누가 작성했습니까? 럭셔리의 본질을 꿰뚫는 이 미묘한 서사라니…… 마치 파리의 고전적인 살롱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군요.” 회의실 안은 정적으로 얼어붙었다. 박 차장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고, 연수를 투명 인간 취급하던 동료들은 당혹스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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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회사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본사의 극찬을 받은 그날 이후, 기획팀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연수는 더 이상 구석진 자리에서 눈치를 보는 신입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니터 앞에는 프랑스 본사에서 보낸 실시간 업무 메일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고, 매일 아침 열리는 글로벌 온라인 미팅에서 연수는 프로젝트의 중심축이 되어 논의를 주도했다. 프랑스 본사의 럭셔리 라인 컨셉 보완 건은 단순히 기획안을 제출하는 단계를 넘어, 전 세계 시장의 소비자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재해석하는 거대한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연수는 며칠 밤을 새우며 파리 본사의 마케팅 디렉터들과 화상 회의를 진행했다. “하연수 사원, 이 부분의 로컬 감각은 정말 놀랍군요. 서울의 트렌드와 유럽의 클래식함이 이토록 완벽하게 조화될 줄은 몰랐습니다.” 디렉터의 칭찬에도 연수는 겸손하게 웃으며 다시 데이터 시트를 확인했다. 그녀의 꼼꼼함과 세련된 감각은 팀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 차장은 더 이상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태성은 연수의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본사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난 출장 기간 동안 구축했던 현지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태성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프랑스 내 상류층 소비 패턴에 관한 최신 보고서를 비공식 경로로 입수했고, 이를 연수가 소화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게 했다. 본사 디렉터들이 연수의 기획에 유독 유연하게 반응했던 것도, 사실 태성이 현지 거물들과의 비즈니스 식사 자리에서 은근슬쩍 ‘한국 지사의 유능한 기획자’를 언급하며 신뢰도를 높여놓은 덕분이었다. “대표님, 프랑스 현지 시장 현황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연수씨가 준비하는 라인과 정확히 일치하는 타겟 분석 자료입니다.” 황준서의 보고에 태성은 서류를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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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소유욕

도심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바(Bar)의 구석, 차가운 위스키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강태성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얼음이 녹아가는 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체구, 완벽하게 정돈된 수트 차림은 그가 어디에 있든 그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술잔이 아닌,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불빛을 향해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진혁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태성을 관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지만, 진혁은 항상 태성의 평정심을 흔들어놓는 유일한 존재였다. “요즘 너, 회사 경영보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거 아니야?” 진혁이 톡 쏘는 말투로 물었다. 태성은 대꾸 없이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진혁은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하연수 씨 말이야. 이번 프랑스 프로젝트 건으로 꽤 유명해졌더군. 본사에서도 난리라며? 그 작던 꼬맹이가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서는…ㅎㅎ 똑똑하고, 당차고, 무엇보다…… 묘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어.” 태성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여전히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보호 본능’이라는 단어가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 그 친구에게 관심 없지?” 진혁이 은근히 태성을 떠보며 툭 던진 한마디였다. “관심 없다면, 내가 연수랑 만나봐도 될까? 그녀처럼 매력적인 여자 찾기 힘들거든. 내가 들이대면 연수 씨도 나쁘지 않게 생각할 것 같은데.” 순간, 바 안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태성이 쥐고 있던 유리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아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찰나의 순간, 맹수를 연상케 하는 날카롭고 강렬한 소유욕이 스쳤다. 하지만 태성은 곧바로 시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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