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Chapter 51 - Chapter 60

146 Chapters

51화. 대표님의 파트너

대표실의 적막은 깊었다. 진혁과의 술자리 이후, 태성의 가슴 속에 똬리를 튼 불안감은 맹독처럼 퍼져 나갔다. 연수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강태성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았다. '더 이상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태성은 결심했다. 연수가 그저 '회사원 하연수'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자신이 보호해주던 그 눈부신 아이로서의 자존감을 되찾게 하겠다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연수를 자신의 세상, 가장 높은 곳으로 다시 끌어올리겠다고 다짐했다. 그 첫걸음은 상류층의 사교계, CEO들의 연례 자선 파티였다. 그날 저녁, 태성은 본가를 찾았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응접실,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부모님은 이미 차가운 정색을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성아, 언제까지 일에만 파묻혀 살 거니? 네 나이가 서른다섯이다. 이제 슬슬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 김 미진 여사의 우아한 목소리에 날 선 압박이 섞여 있었다. 아버지 강 창수 화장은 신문을 접으며 묵직하게 거들었다. “진경이만큼 네 옆을 든든히 지켜온 애가 어디 있니? 회사 일도 네 손발처럼 척척 맞추고, 우리 집안 사정도 훤히 꿰뚫고 있는데. 양가 어른들끼리도 말이 오가고 있으니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태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진경. 10년 넘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을 지키며 태성을 도와 태성 시획을 함께 키워 온 그녀, 부모님은 진경의 마음을 알고 있고, 그것을 이용해 태성을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결혼은 사업이 아니니 더 이상 강요하지 마십시오.” 태성의 말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의 분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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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가면 뒤의 두려움, 그리고 화려한 초대

CEO 연례 자선 파티를 앞둔 며칠 동안, 태성 그룹의 기획팀은 그야말로 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연수는 프랑스 본사와의 마지막 화상 회의를 마친 직후였다. 본사의 디렉터들은 연수의 기획안에 찬사를 보내며, 이번 파티를 기점으로 럭셔리 라인의 글로벌 론칭을 공식화하겠다고 통보해왔다. “하연수 사원, 이번 파티는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프랑스 본사 팀은 물론, 아시아 시장의 판도를 바꿀 주요 고객들과 기업 대표들이 모두 참석합니다. 대표님께서는 하 사원이 그 중심에서 직접 프로젝트의 비전을 발표하길 원하십니다.” 연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프랑스 본사 사람들을 대면하고, 자신의 기획을 직접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획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설렘과 흥분이 연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릴적 상류층 모임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나 묘한 두려움도 있었다. 연수는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막판 세부 기획안을 다듬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 파티에는 연수뿐만 아니라 박 차장도 동행하게 되었다. 팀의 관리자로서 참석해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박 차장의 눈빛은 기획안을 손에 쥔 연수를 향해 끈적하고 날카로운 질투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수씨, 최종 발표 자료 내가 한번 점검하지. 신입이 멋모르고 큰 무대 섰다가 망신당하면 우리 팀 전체가 욕먹는 거니까.” 박 차장은 연수의 책상 위로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의 비열한 말투에 주변 동료들은 숨을 죽였다. ‘저걸 또 가로채려는 건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사무실을 감돌았다. 그때, 연수의 옆자리를 지키던 최 과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박 차장의 손을 멈춰 세웠다. “박 차장님, 이번 발표는 대표님께서 직접 연수씨를 지목해서 지시하신 건입니다. 자료 점검은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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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화련한 변신

파티 당일 오후, 황준서 비서의 안내를 받아 연수가 도착한 곳은 강남에서도 가장 프라이빗하게 운영되는 최고급 드레스 숍 ‘르네 드 블랑’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끝없이 펼쳐진 수입 드레스들의 향연은 연수로 하여금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연수 씨, 오늘 모든 준비는 태성 대표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준서의 차분한 안내에 따라 연수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맡겼다. 숍의 수석 스타일리스트들이 연수를 둘러싸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피부 본연의 투명함을 살리는 메이크업은 은은한 진주 빛 광채를 머금었고,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우아하게 틀어 올려져 그녀의 가녀린 목선과 매혹적인 쇄골 라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가 입혀졌다. 태성이 직접 골랐다는 딥 네이비 실크 드레스였다. 쇄골을 따라 흐르는 섬세한 레이스 장식과 허리 라인을 타고 바닥까지 유려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은, 연수를 마치 깊은 밤하늘에서 막 내려온 여신처럼 보이게 했다. 귀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드롭 이어링이, 손목에는 태성의 세심한 배려가 담긴 심플하고도 고급스러운 팔찌가 채워졌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연수는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아버지의 파산 이후, 그녀에게 ‘자신을 돌보는 일’은 사치이자 잊어야 할 과거였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여유는커녕, 거울을 볼 여유조차 없었던 지난날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여인이 서 있었다. “……정말 제가 맞나요?” 연수가 나직하게 읊조리자, 스타일리스트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정말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아마 오늘 파티장에서 누구든 연수 씨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할 거예요.” 그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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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화려한 무대, 쏟아지는 시선

자선 파티장의 거대한 아치형 문이 열리자, 쏟아지는 조명과 함께 샴페인 향이 섞인 사교계의 공기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연수는 태성의 팔에 끼워진 손에 힘을 주었다. 턱시도를 입은 태성의 당당한 어깨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경외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태성은 망설임 없이 파티장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 그리고 프랑스 본사에서 오신 파트너분들께 제 파트너이자 이번 글로벌 럭셔리 라인의 총괄 기획자인 하연수 사원을 소개합니다.” 태성의 낮은 목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수백 개의 시선이 연수에게 집중되었다. 15년 전, 몰락하던 날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연수는 등 뒤에 느껴지는 태성의 온기에 기대어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녀가 나타나자 파티장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가 이내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화려한 네이비 드레스와 우아한 자태, 그리고 무엇보다 강태성 대표의 파트너라는 사실은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진경은 샴페인 잔을 쥔 손에 하얗게 힘을 주었다. 겉으로는 태성 곁의 비즈니스 파트너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연수를 향해 날카로운 증오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감히 저 계집이, 내 자리를?’ 프랑스 본사 디렉터들에게 다가간 연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넸고, 이어진 주요 투자자들과의 대화에서는 세련된 영어와 논리적인 한국어를 오가며 프로젝트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은 놀라움에서 감탄으로 바뀌었다. 그때, 군중 사이를 헤치고 진혁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거 놀랍군. 태성이 뒤에 숨어있는 줄 알았더니, 오늘 밤 이 파티의 주인공은 단연 하연수 씨였어.” 진혁은 감탄이 섞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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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다시 들어선 상류층 세계

이민우의 노골적인 시선이 연수의 가슴팍과 드레스 자락을 느슨하게 훑고 지나갔다. 상류층 사교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답게, 그의 목소리에는 거만함과 여유가 가득 배어 있었다. 그는 태성이 잠시 프랑스 본사 임원과 대화를 나누느라 한 걸음 떨어진 틈을 타, 마치 먹잇감을 가로채려는 맹수처럼 연수의 앞을 막아섰다. “연수씨, 태성 형이랑 무슨 사이야?. 나랑 저쪽 조용한 테이블에서 샴페인이나 한잔하면서 진짜 미래를 얘기해 보는 건 어때?” 그의 손이 연수의 가녀린 손목을 향해 뻗어왔다. 노골적인 대시와 함께 풍기는 오만한 향수 냄새에 연수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15년 전, 집안이 몰락했을 때 자신을 비웃던 이들의 잔인한 얼굴이 이민우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연수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던 작은 아이가 아니었다. 세상에 내던져진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 남기 위해 그녀는 단단해져 있었다. 그녀의 미모를 보고 달려드는 늑대들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하는지 그녀는 오랜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척추를 곧게 세우고, 민성의 손길이 닿기 직전, 우아하면서도 차갑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민우 씨, 유감스럽게도 저는 오늘 태성 그룹 대표님의 공식 파트너이자, 글로벌 프로젝트의 발표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적인 유흥을 즐기며 샴페인을 마실 만큼 제 시간이 한가하지 않군요. 죄송하지만 초대에는 응할 수가 없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하고 잔인한 거절이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상류층 자제들의 시선이 민우에게 쏠렸다. 단 한 번도 여자에게 거절당해 본 적 없는 이민우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수치심과 당혹감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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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드러난 과거

자선 파티의 화려한 조명 뒤편, 긴 여운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연수의 프레젠테이션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기술적 오류라는 위기를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기회로 바꾼 그녀의 모습은 업계 관계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파티 직후, 태성에게는 또 다른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성의 본가로부터 급한 호출이 떨어진 것이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응접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태성의 부모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파티, 진경이가 아니라 신입 사원을 데리고 갔다면서?”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불만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태성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그 안에는 연수의 신상 명세서가 들어 있었다. “조사를 해보니, 그 아이가 예전 파산한 태산물산 하 회장의 딸이더구나!. 연수라는 그 아이, 화려한 사교계를 다시 기웃거리는 이유가 뭐겠니? 뻔하지 않겠느냐.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수작이겠지. 그 아이가 불쌍하면 물질적으로 그냥 도와 줘라. 하회장과의 인연도 있고하니, 그러나 그 아이와 사적으로 만날 생각은 마라.” 강회장은 아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태성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부모님이 연수의 과거를 파헤쳤다는 사실에 태성은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버지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연수는 제 도움이 아니라 능력으로 어제 그 자리에 참석 한 겁니다.” 태성의 어조는 단호 했다. “태성아,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진경이만큼 네 옆을 든든하게 지켜줄 사람은 없다. 그 아이는 우리 가문의 격에 맞지 않아. 아니, 애초에 그 집안은 끝난 집안이다. 너무 깊게 엮이지 마라.” 어머니 김여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부모님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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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사라진 기회, 그리고 드리워진 검은 손길

프랑스 본사와의 글로벌 럭셔리 라인 프로젝트를 기적처럼 성공시킨 하연수는 이제 태성 기획 내에서 독보적인 기획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 위기에 대처하는 냉철한 판단력은 더 이상 ‘대표의 낙하산’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찾아온 새로운 기회. 연수는 한 달간 밤을 지새우며 이번 태성 기획의 사활이 걸린 ‘스마트 시티 문화 프로젝트’ 기획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고요한 사무실의 불을 가장 먼저 켠 것은 연수였다. 창밖으로 겨울 안개가 서울의 빌딩 숲을 희미하게 감싸고 있었지만, 연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이번 프로젝트마저 성공한다면 그녀는 정식 PM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해내야 해.” 검은색 슬랙스와 아이보리 블라우스, 그 위에 걸친 베이지색 재킷은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녀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료들을 마지막으로 검토했다. 시장조사 자료, 예산안, 계약 검토서, 그리고 새벽 세 시까지 수정한 기획안까지.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느긋한 목소리. “하연수 씨, 오늘도 일찍 나왔네.” 기획 1팀의 박 차장이었다. 그는 어느새 연수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네, 차장님. 오늘 최종 결재가 있는 날이라 조금 서둘렀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어. 대표님 결재 전에 내가 한번 검토해 줄 테니까 이리 줘봐.” 연수는 망설임 없이 서류철을 두 손으로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 차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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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회의가 내일로 연기되었다는 대표이사 강태성의 짧은 선언은, 얼어붙은 호수 위로 찬바람이 들이닥친 듯 사무실 전체를 정적으로 몰아넣었다. 직원들은 썰물처럼 회의실을 빠져나갔지만, 뒤이어 쏟아지는 수군거림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연수의 귓가를 찔렀다. “서류가 쓰레기통에서 나왔다며? 핵심 데이터만 쏙 빠져 있었다며?” “신입이라 그런가, 관리가 너무 허술한 거 아냐?” 연수는 쏟아지는 시선들을 등 뒤로 받으며 꼿꼿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보리 블라우스 위에 걸친 베이지색 재킷은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그 속의 마음은 이미 수천 번도 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변명하지 않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패자의 방식임을, 열두 살 어린 시절 채권자들이 집을 휩쓸고 지나가던 그날 밤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수는 차가운 손끝으로 구겨진 종이 모서리를 정성껏 펴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을 다시금 다림질하듯, 그녀는 남아 있는 자료들을 차분하게 순서대로 맞춰 넣었다. 그 처연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은 주변의 비아냥조차 뚫지 못하는 단단한 결계를 치고 있었다. 같은 시각, 28층 대표실. 창밖으로는 서울의 겨울 하늘이 잿빛으로 짓눌려 있었다. 태성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서 김도윤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확인했습니다.” “말해보세요.” “회의실 복도 CCTV 일부가 오늘 아침 20분 동안 강제로 정지되어 있었습니다.” 태성의 눈빛이 순식간에 맹수의 그것으로 변했다. “우연이라 생각하나?” 그의 낮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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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박 차장의 덫

사무실의 조명이 하나둘 꺼지고, 정적만이 흐르는 야심한 밤. 28층 대표실, 유일하게 켜진 모니터 앞에는 강태성이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회사 내의 은밀한 악의를 도려내고 있었다. 짙은 네이비 컬러의 셔츠는 단추가 두 개쯤 풀려 있었고, 평소의 빈틈없던 완벽한 수트 차림 대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의 그것과도 같았다. 화면 속, 연수의 자리를 은밀히 오가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박 차장의 비열한 손놀림이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태성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에게 하연수는 단순한 사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지켜야 할 성역이었고, 그 성역을 감히 짓밟으려 든 자에게는 자비란 없었다. 태성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내는 소리조차 무겁고 낮았다. 그는 재킷을 걸치고 복도로 나섰다. 그의 발소리는 낮고 묵직하게 울리며, 박 차장의 등 뒤를 습격하는 그림자처럼 다가갔다. 회사 로비로 향하는 통로, 퇴근을 준비하던 박 차장이 서류를 챙겨 가방을 메려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박 차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박 차장.” 그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서늘해서, 박 차장은 자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흠칫 몸을 떨며 멈춰 선 박 차장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살기마저 느껴지는 강태성이 서 있었다. 박 차장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 이진경이라는 믿음직한 뒷배가 있었지만, 눈앞의 강태성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박 차장은 그저 사지에 몰린 쥐에 불과했다. 태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박 차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압박감은 공기를 질식시킬 듯했다. 태성은 손을 뻗어 박 차장의 넥타이를 매만져 주는 척했다. 그러나 그것은 친절한 행위가 아니었다. 넥타이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마치 뱀이 먹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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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모든 책임은 신입의 몫이었다

강태성의 서늘한 경고가 박 차장의 목줄을 죄어 왔지만, 박 차장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는 이진경 부사장이라는 더 거대한 공포를 마주하고 있었다. 태성이 쏜 화살이 자신의 턱밑까지 날아왔음을 느낀 박 차장은,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더 비열한 카드를 꺼내 들기로 했다. 그것은 연수를 ‘제물’로 삼아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기획 1팀 사무실은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연수는 전날 밤새워 복구한 기획안을 품에 안고 출근했다. 그녀의 눈가엔 옅은 피로가 서려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강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제보다 훨씬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팀원들은 연수가 지나갈 때마다 눈길을 피하거나,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어제 일 들었어? 박 차장님이 대표님께 크게 깨졌다던데.” “그러게. 왜 굳이 그 서류를 가지고 문제를 만들어서 팀 전체를 망신시키냐고.” “그러니까 말이야. 신입이 자기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해서….” 박 차장은 팀원들의 수군거림을 등에 업고, 마치 승리자라도 된 양 여유롭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연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 “다들 집중하세요. 이번 ‘스마트 시티 문화 프로젝트’ 결재 건으로 인해 우리 팀 전체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표님께서 어제 직접 행차하신 것, 다들 보셨죠?” 박 차장의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연수에게 꽂혔다. 박 차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연수를 지목했다. “이번 일의 발단은 명백합니다. 하연수 사원이 결재 서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명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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