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완벽한 쇼윈도 부부의 은밀한 이중생활 : Chapter 151 - Chapter 160

217 Chapters

제152화. 호텔방의 불륜 흔적

“여기서 데이트하자고요? 내가 당신을 무너뜨리려고 빌린 방에서?”1708호 앞에서 나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다. 몇 년 전의 내가 문예라를 이 방으로 들여보냈고, 이록이 뒤따라 들어오는 시각까지 계산했다. 침대 옆 조명, 커튼이 반쯤 열린 창문, 복도에서 방 안이 보이는 각도. 실제 불륜은 없었지만, 불륜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가 고른 방이었다.“싫으면 내려가자.”이록이 카드키를 내밀었다.“예약 취소하고 다른 데 가면 돼.”“이 방을 고른 이유부터 말해요.”“들어가겠다고 결정하면 안에서 말할게.”“또 당신 혼자 판 짜고 나보고 선택하라는 거예요?”“아니. 그래서 문밖에 있잖아.”그는 카드키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여기부터 당신이 정해.”내가 돌아서도 따라오지 않을 사람처럼 이록은 한 발 물러섰다. 그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예전에는 둘 다 상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데 익숙했다. 나는 덫을 놓았고, 그는 덫인 줄 알면서 밟았다. 이제는 문 하나 여는 데도 선택을 돌려받아야 했다.나는 결국 카드키를 찍었다.문이 열렸다.객실은 리모델링돼 있었다. 벽지는 바뀌었고 침대 위치도 조금 옮겨졌다. 그런데 창문은 그대로였다. 복도에서 문이 열렸을 때 안쪽이 보이는 각도도 달라지지 않았다.머릿속에서 예전 장면이 순식간에 완성됐다.예라는 창가 쪽에 앉혔다.카메라는 저쪽 장식장 근처.이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측면 얼굴이 먼저 잡혔다.촬영자는 두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침대 모서리를 프레임 안에 넣었다.나는 생각하기도 전에 방 안을 걸으며 위치를 짚고 있었다.“카메라는 여기였어요.”이록이 뒤따라오지 않았다.“두 번째는 저쪽. 내가 원한 건 당신 얼굴이랑 예라가 한 화면 안에 들어오는 것뿐이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나는 그제야 멈췄다.데이트하러 온 방에서 또 증거를 재구성하고 있었다.“미안.”“그 말 하려고 여기 데려온 건 아니죠?”“아니.”이록이 창가 의자에 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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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키스보다 어려운 사과

“키스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전에, 당신한테 사과할 게 있어요.”잠가 둔 객실 문을 등지고 내가 말했다.이록은 조금 전보다 가까이 서 있었지만 더 다가오지 않았다.그가 묻지 않았는데도 나는 알고 있었다.여기서 내가 한 걸음 물러나면 그는 그대로 멈출 것이고,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다음이 시작될 것이다.그게 예전과 달랐다.나는 침대가 아니라 창가 테이블로 갔다.“문예라를 이 방에 들여보낸 건 나였어요.”“알아.”“끝까지 들어요.”이록이 의자를 빼 내 앞에 앉았다.“예라를 당신한테 보냈고,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고 했어요.카메라에 찍힐 것도 알았고, 기사가 나면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도 예상했어요.그런데 그걸 전부 계획 비용처럼 계산했어요.”말로 꺼내니 훨씬 선명했다.그때의 나는 이록이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상처받아도 괜찮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당신이 나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어요.”“그랬지.”“그런데도 밀어붙였어요. 복수하려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나는 그를 바라봤다.“미안해요. 당신이 견딜 수 있는지 묻지도 않고, 견뎌야 할 사람으로 정해버렸어요.”이록은 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고마웠다.“나도 사과할 게 있어.”“뭔데요?”“당신 계획을 알아챘을 때 바로 말하지 않은 것.”나는 눈을 들었다.“알면서도 더 들어갔어. 당신이 어디까지 갈지 보려고 했고,내가 판 안에 있으면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그건 어제 들었어요.”“어제는 이유를 말했고, 지금은 잘못을 말하는 거야.”그가 이어 말했다.“나는 위험을 혼자 감당하면 당신을 보호하는 거라고 생각했어.내가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버티면 된다고. 그래서 당신한테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당신은 늘 그랬죠.”“알아.”“나한테 말하면 내가 위험해질까 봐. 내가 무너질까 봐. 내가 반대할까 봐.”“그래.”“결국 이유는 하나네요.”“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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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부부싸움이 기사화됐다

“기사부터 막아요.”“아니, 유출자를 먼저 찾고 아이부터 옮겨.”우리의 첫 진짜 부부싸움은 생중계됐다.1708호에서 내려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호텔 로비 한쪽에서 예라와 통화하던 나는 해야 사진이 퍼지고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휴대전화로 유출 게시물을 찾았다.해야가 웃고 있었다.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작은 인형을 쥔 사진이었다.얼굴이 정면으로 나와 있었다.“삭제 요청부터 넣어야 해요. 원본 퍼지기 전에 플랫폼마다...”이록이 내 휴대전화를 보며 끊었다.“해야 먼저 옮겨.”“지금 사진이 퍼지고 있잖아요.”“주소까지 확인되면 삭제보다 이동이 먼저야.”“확인도 안 됐는데 아이부터 옮기면 오히려 동선이 생겨요.”“확인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거야?”“그게 아니라 순서를...”“사율아, 지금 순서 따질 때 아니야.”그 말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그 순서를 내가 몇 년 동안 따져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이번엔 증거가 아니라 해야야.”“나도 알아요!”목소리가 높아진 순간 로비 바깥에서 카메라 셔터가 연달아 터졌다.판결 이후 우리를 따라붙은 기자들이었다.나는 바로 말을 멈췄지만 늦었다.이록은 내 앞을 가리지 않았다. 기자들을 향해 몸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내게 짧게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어가.”그 한마디까지 촬영됐다.30분 뒤 기사가 떴다.[재결합 하루 만에 파경? 권이록·온사율 호텔 로비서 격한 언쟁]기사 제목 아래에는 내가 이록을 바라보며 소리치는 사진과,이록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장면이 붙었다.해야 사진 유출보다 부부싸움이 먼저 기사화됐다.“미쳤네.”내가 화면을 끄자 예라가 영상통화 너머에서 말했다.“해야는 안전해요.”“지금 어디예요?”“그건 두 분한테 동시에 문자로 보냈어요. 한 사람한테만 말하면 또 서로 통제하려 들 것 같아서.”“예라 씨.”“맞잖아요.”예라는 물러서지 않았다.“사모님은 사진부터 지우겠다고 하고, 대표님은 아이부터 옮기겠다고 하고.둘 다 해야 때문이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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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이혼한 부부의 신혼여행

우리는 이혼한 상태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출발 3시간 전에 상간녀의 휴대폰을 압수했다.정확히 말하면 압수는 아니었다.예라가 제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가져가세요. 비밀번호도 알려드릴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세요.”“예라 씨를 범인으로 정한 거 아니에요.”“제 키가 쓰였다면서요.”“키가 사용됐다는 것과 예라 씨가 사용했다는 건 달라요.”“그럼 더 빨리 확인해요. 내가 해야 사진 팔아먹었다는 의심 달고 집에 돌아가기 싫으니까.”예라는 화가 나 있었다. 나나 이록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라희가 별도 장비로 휴대전화 접근 기록을 확인하는 동안 우리는 예라가 최근 열어본 링크부터 대조했다.돌잔치 답례품.한복 견적.소규모 장소 대관.그중 하나가 문제였다.“이 업체 링크, 어디서 받았어요?”“검색하다가 광고로 떴어요. 견적 확인하려면 사진을 올리라고 해서 가족사진 중 얼굴 덜 나온 걸 하나 골랐고요.”라희가 바로 끼어들었다.“원본 키 전체가 빠져나간 건 아니에요.”“그럼?”“미리보기용 복호화 토큰만 외부에서 사용됐어요. 사진 전체 보관함을 연 게 아니라,예라 씨 휴대전화에서 미리보기 화면을 불러낼 때 생긴 권한을 가져간 쪽에 가까워요.”예라가 나를 봤다.“제가 일부러 넘긴 가능성은요?”“현재 기록만 보면 낮아졌어요. 하지만 링크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는 더 확인해야 해요.”나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신 확인 과정을 그대로 보여줬다.예라도 결백하다는 말을 강요하지 않았다.그게 우리가 예전과 달라진 방식이었다.믿는다고 증거를 버리지 않고, 확인한다고 사람부터 범인으로 만들지도 않았다.조금 뒤 라희가 돌잔치 관련 검색과 광고 노출 시점을 겹쳐 보여줬다.아무 링크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해야의 첫돌 준비를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접근이 들어왔다.우연한 유출보다 우리 생활을 노리고 던진 미끼에 가까웠다.나는 곧바로 여행 예약을 취소하려 했다.“안 가요.”이록이 나를 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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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침대 하나, 계약서 없음

“침대는 하나고 계약서는 없네요.”“그래서 이제 당신 대답만 남았어.”나는 객실 한가운데 놓인 침대를 한 번, 이록을 한 번 봤다.1708호에서는 문을 잠그는 것만으로도 과거를 다시 밟는 기분이었는데,이 방은 아무 기억도 없어서 오히려 더 난감했다.핑계로 삼을 사건도, 확인할 카메라도, 누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역할도 없었다.“방 바꿀까요?”내가 물었지만 이록은 프런트로 전화하지 않았다.“바꾸고 싶으면 바꾸자. 같은 침대 써도 되고,내가 소파에서 자도 돼. 중간에 마음 바뀌면 그때 다시 말하면 되고.”“그렇게 하나씩 다 물어봐야 해요?”“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은데.”“왜요?”“우린 예전에 너무 많이 안 물어봤으니까.”그 말에 농담이 멈췄다.결혼해 살던 때에도 우리는 서로의 몸보다 먼저 상대의 의도를 읽었다.손을 잡으면 기자가 있는지 봤고, 가까이 서면 누가 지켜보는지 계산했다.침실 문이 닫혀도 완전히 사적인 공간이 된 적은 드물었다.애정과 연기, 감시와 정보전이 한데 섞여 있어 무엇이 진짜였는지 뒤늦게 구분해야 했다.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늘 계약서가 있었다. 써놓은 문서가 없어도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완벽한 부부처럼 보일 것, 상대의 약점을 먼저 읽을 것, 필요하면 서로를 미끼로 쓸 것. 어기면 상처를 입고도 그게 계획의 일부였다고 넘겼다.나는 침대 위에 놓인 장식 쿠션을 치우며 말했다.“오늘은 어기면 벌금 같은 것도 없네요.”“대신 싫으면 바로 끝.”“그게 더 어렵다는 거 알아요?”“알아. 그래서 묻는 거야.”“지금은 아무도 안 보는데 이상하네요.”“나도.”“당신도요?”“응. 당신이 나한테 뭘 시킬지 기다리는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나는 웃지 못했다.“나는 당신이 먼저 결정할까 봐 기다리고 있고요.”이록이 침대 끝에 앉았다.“그럼 오늘은 둘 다 기다리지 말자.”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까이 가도 되는 거리를 남겨뒀다. 억지로 편안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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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사랑한다는 말의 유효기간

“사랑한다는 말은 싫어요. 끝난 뒤에도 한때 진짜였다고 우길 수 있으니까.”이록의 질문에 나는 빵을 내려놓았다. 반지는 오늘도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손을 잡는 것도, 같은 침대에서 아침을 맞는 것도 내가 지금 선택한 일이니까.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오래된 서류처럼 경계부터 생겼다.“왜 그렇게까지 싫어해?”“사랑했다는 말은 너무 편리하잖아요.”그가 기다렸다.“우리 집에서는 사랑하면 참아야 했어요. 가족이니까 이해해야 하고, 부모니까 희생해야 하고, 부부니까 남들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됐어요. 태강에서도 똑같았어요. 아들을 위해서, 집안을 위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사람을 묶을 때마다 사랑이라는 말을 붙였어요.”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그러고 관계가 끝나면 또 말해요. 그래도 그때는 진심이었다고. 그 말이면 상처 준 사람도 자기 기억 속에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잖아요.”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오래 증거처럼 다뤘다. 누가 언제 말했고, 그 다음에 무엇을 했는지 따졌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거짓이라고 판정했고, 행동이 맞아도 언젠가 뒤집힐 수 있으니 보류했다. 그 방식은 재판에서는 유용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최악이었다.이록과 처음 결혼했을 때도 그랬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잡고 웃으면 부부였고, 문이 닫히면 서로가 무엇을 숨기는지부터 살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면 배신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 붙이지 않은 관계는 끝나도 덜 아플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실제로는 반대였다. 이름을 피한다고 상처가 줄어든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운지도 말하지 못한 채 상대의 행동만 분석하게 됐다.이록은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로 반박하지 않았다.“그럼 영원하다는 말 안 할게.”“그것도 쉽게 포기하네요.”“당신한테 영원을 약속해서 안심시키는 것보다 오늘을 책임지는 게 낫잖아.”“오늘만 사랑하겠다는 뜻이에요?”“아니. 오늘 사랑한다고 선택하고, 내일도 같은 선택을 할 건지 다시 확인하겠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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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질투를 처음 배운 아내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었네요.”“상간녀를 직접 고른 사람이 그 호칭에 질투해?”이록이 그렇게 받아치는 바람에 나는 부정할 타이밍을 놓쳤다.바닷가 산책로에서 만난 여자는 여전히 이록의 팔을 잡고 있었다. 스스럼없는 손길보다 더 거슬린 건 이록이 그 여자를 바로 알아봤다는 사실이었다.“진짜 결혼하는 거 맞지? 기사 보고도 못 믿었어.”“손부터 놔.”“왜? 예전에는 업어 달라고 해도 업어줬잖아.”나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한 번 분해했다. 예전. 업어줬다. 오빠. 결혼 소식을 따로 알릴 정도의 관계.이록이 내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사율아, 지금 머릿속으로 신원조회 하지 마.”“안 했어요.”“방금 저 사람 신발까지 봤어.”여자가 그제야 나를 보고 손을 뗐다.“제가 실수했네요. 온사율 씨 맞죠?”“네.”“저는 강세진이에요. 태강 장학생이었고, 이 오빠가 재단 밖으로 빼준 마지막 기수예요.”연인이 아니었다.태강이 장학금을 빌미로 진로와 취업을 묶으려 했을 때, 이록이 외부 장학재단으로 옮겨 준 후배였다. 세진은 지금 이 근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재혼 기사를 보고 연락할까 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었다.설명을 들으면 끝나야 했다.그런데 이상하게 끝나지 않았다.“그래서 오빠예요?”내 질문에 이록이 웃었다.“아직 거기야?”세진도 웃었다.“저만 그렇게 불렀어요.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화냈거든요.”“왜요?”“태강 사람처럼 들린다고.”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세진이 이록을 얼마나 오래 알았는지, 둘이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 묻고 싶었다.결국 입에서 나온 건 더 점잖지 못했다.“예전에도 자주 보셨어요?”이록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건 대화야, 심문이야?”“질문인데요.”“그럼 질문답게 하나씩 해.”세진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 오빠, 저한테 관심 없었어요. 정확히는 다른 사람한테 너무 관심이 많았어요.”나는 이번에는 바로 그녀를 봤다.“누구요?”“사율 씨요.”이록의 표정이 처음으로 곤란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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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권이록이 사라진 세 시간

“당신, 하겸 장례식에 왔었어요?”이록은 세 시간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사진을 내민 순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장례식장 건물 밖, 검은 정장을 입고 혼자 서 있는 남자. 날짜도 장소도 틀릴 수 없었다.하겸을 보내던 날이었다.“왜 말 안 했어요?”이록은 사진을 한 번 보고 나를 봤다.“지금 바로는 대답 못 하겠어.”그 말이 더 화가 났다.“또요?”“숨기겠다는 게 아니라 정리해서 말하고 싶어.”“몇 년이나 숨긴 일을 이제 정리해야 해요?”나는 그가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기다리기 싫었다.“3시간만 줘.”“왜 하필 3시간인데요?”“그날 내가 장례식장에 있었던 시간도 3시간이었으니까.”그 말을 남기고 이록은 숙소를 나갔다.예전 같았으면 아무 말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왔다.[방파제 쪽에 있을게. 3시간 뒤 돌아갈게. 전화는 받을게.]나는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다.우리 둘이 정했던 규칙이 있었으니까. 말할 시간을 요구하면 기다리되, 사라지지는 않을 것. 상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도망치지 않을 것.그래도 화는 났다.하겸 장례식 날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정신없는 사람이었다. 조문객이 누구였는지도 다 기억하지 못했다. 영정사진 속 하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하루를 버티기도 어려웠다.그런데 그곳에 이록이 있었다.내가 몰랐던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3시간 뒤 문이 열렸다.이록은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도 늦게도 들어오지 않았다.“말해요.”그는 맞은편에 앉았다.“하겸 사고 뒤에 장례식장 갔어.”이미 아는 사실인데 그의 입으로 들으니 사진보다 더 잔인했다.“왜 안 들어왔어요?”“못 들어갔어.”“왜요?”“내가 권태겸 아들이었으니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하겸이 죽은 사고에도 태강 이름이 얽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때는 어디까지인지 몰랐지만 적어도 내가 당신 앞에서 조문객인 척 서 있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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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다시 받은 프러포즈

“이번 계약서에는 조항이 하나뿐이야. 당신이 싫으면, 언제든 안 해도 된다는 것.”이록은 무릎을 꿇은 채 빈 종이를 내밀었다.나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그게 무슨 계약이에요?”“그래서 비어 있어.”“청혼하면서 계약서부터 들이미는 남자도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반지 내밀면 당신이 시세부터 검색할 것 같아서.”평소라면 웃었을 말인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몇 년 전 우리는 진짜 계약으로 결혼했다. 부부가 되는 이유부터 남들 앞에서 해야 할 행동, 서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정해 놓고 그 안에서 남편과 아내를 연기했다.이번에는 종이가 새하얬다.서명란도 없었다.“일어나요.”“대답 듣고.”“그러니까 일어나라고요.”내가 팔을 잡아당기자 이록이 마지못해 일어났다.“청혼을 용서받는 장면처럼 만들지 마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당신이 하겸 장례식에 왔던 걸 이제 말했으니까, 내가 울었으니까, 그래서 분위기 타서 다시 결혼하는 것처럼 만들지 말라고요.”“그럴 생각 없어.”“우리가 권태겸 이겼으니까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신을 용서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에요.”나는 그제야 빈 종이를 받아 들었다.“결혼은 상도 아니고 판결문도 아니니까.”“알아.”“정말 알아요?”이록은 테이블에 펜 하나를 올려놓았다.“혼인신고 날짜, 결혼식 할지 말지, 어디서 살지. 내가 먼저 정해 둔 거 없어.”“해야 문제는요?”“그건 우리 결혼이랑 별개로 정해야지.”“예라 씨하고 합의할 것도 많아요.”“그것도 별개.”“법적으로 다시 부부가 된다고 해야 가족관계까지 자동으로 정리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안 해.”이록이 잘라 말했다.“당신이 나랑 다시 결혼하는 것과 해야를 어떻게 지킬지는 같은 문제가 아니야. 내가 당신 남편이 된다고 예라 자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그 대답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과거의 태강은 관계를 소유권처럼 다뤘다. 아내가 되면 따라야 했고, 아버지가 되면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가족이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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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첫돌 초대장에 엄마가 둘

“엄마를 둘 적으면 아이가 혼란스럽대요. 어른들이 읽기 불편한 걸 왜 아이 탓으로 돌리죠?”돌잔치 업체 담당자가 보내온 수정 의견을 읽고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초대장 시안의 부모 칸에는 세 이름이 있었다.온사율. 권이록. 문예라.업체 쪽에서 문제 삼은 건 이름의 수가 아니었다.엄마가 둘이라는 사실이었다.“보통 부모님 성함은 두 분만 넣습니다. 온사율 님과 권이록 님을 기재하고 문예라 님은 이모나 특별 보호자로 따로 표기하는 방법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예라가 먼저 말했다.“그렇게 해요.”나는 예라를 봤다.“뭘요?”“제 이름 빼요. 솔직히 초대장 받는 사람들이 설명까지 들을 것도 아니잖아요.”“그래서 없는 사람이 되겠다고요?”“없는 사람 말고, 안 적힌 사람.”“그게 시작이에요.”예라의 표정이 굳었다.“뭐가요?”“해야한테 불편한 진실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지우는 거요.”나는 초대장을 가운데 놓았다.“오늘은 초대장이니까 예라 씨 이름을 빼고, 다음에는 가족사진에서 빼고, 학교 서류 쓸 때는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또 빼고. 그러다 나중에 해야가 물으면 뭐라고 해요? 어른들이 설명하기 귀찮아서 엄마 한 사람을 숨겼다고?”“그럼 사모님은 해야가 평생 ‘엄마가 둘인 아이’라는 기사 따라다녀도 괜찮아요?”“안 괜찮아요.”나는 바로 답했다.“그래서 이름을 지우자는 것도 싫어요.”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듣고 있던 이록이 초대장을 가져갔다.“부모 칸 자체를 없애.”담당자가 당황했다.“그러면 가족 표기가—”“왜 꼭 부모라는 칸 안에 사람을 두 명만 넣어야 하지?”이록은 시안 위 문구를 하나 지웠다.아빠.엄마.엄마.그리고 그 아래 새 문장을 적었다.해야를 지키는 사람들.예라가 종이를 내려다봤다.“그럼 제가 법적으로 부모라는 뜻처럼 보이지 않을까요?”“그래서 공개용하고 가족용을 나누면 돼.”이록이 나를 봤다.결정하라는 뜻이었다.나는 초대장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공개용에는 보호자 이름을 전부 빼요.”“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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