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하나고 계약서는 없네요.”“그래서 이제 당신 대답만 남았어.”나는 객실 한가운데 놓인 침대를 한 번, 이록을 한 번 봤다.1708호에서는 문을 잠그는 것만으로도 과거를 다시 밟는 기분이었는데,이 방은 아무 기억도 없어서 오히려 더 난감했다.핑계로 삼을 사건도, 확인할 카메라도, 누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역할도 없었다.“방 바꿀까요?”내가 물었지만 이록은 프런트로 전화하지 않았다.“바꾸고 싶으면 바꾸자. 같은 침대 써도 되고,내가 소파에서 자도 돼. 중간에 마음 바뀌면 그때 다시 말하면 되고.”“그렇게 하나씩 다 물어봐야 해요?”“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은데.”“왜요?”“우린 예전에 너무 많이 안 물어봤으니까.”그 말에 농담이 멈췄다.결혼해 살던 때에도 우리는 서로의 몸보다 먼저 상대의 의도를 읽었다.손을 잡으면 기자가 있는지 봤고, 가까이 서면 누가 지켜보는지 계산했다.침실 문이 닫혀도 완전히 사적인 공간이 된 적은 드물었다.애정과 연기, 감시와 정보전이 한데 섞여 있어 무엇이 진짜였는지 뒤늦게 구분해야 했다.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늘 계약서가 있었다. 써놓은 문서가 없어도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완벽한 부부처럼 보일 것, 상대의 약점을 먼저 읽을 것, 필요하면 서로를 미끼로 쓸 것. 어기면 상처를 입고도 그게 계획의 일부였다고 넘겼다.나는 침대 위에 놓인 장식 쿠션을 치우며 말했다.“오늘은 어기면 벌금 같은 것도 없네요.”“대신 싫으면 바로 끝.”“그게 더 어렵다는 거 알아요?”“알아. 그래서 묻는 거야.”“지금은 아무도 안 보는데 이상하네요.”“나도.”“당신도요?”“응. 당신이 나한테 뭘 시킬지 기다리는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나는 웃지 못했다.“나는 당신이 먼저 결정할까 봐 기다리고 있고요.”이록이 침대 끝에 앉았다.“그럼 오늘은 둘 다 기다리지 말자.”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내가 먼저 가까이 가도 되는 거리를 남겨뒀다. 억지로 편안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걸
Last Updated : 2026-08-1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