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완벽한 쇼윈도 부부의 은밀한 이중생활 : Chapter 141 - Chapter 150

217 Chapters

제142화. 변호사 없는 변호사

남의 무죄를 만들던 남자는 자기 변호인 앞에서 한 문장도 변명하지 못했다.“서도겸 씨, 다시 묻겠습니다. 최근 법원 원본 교체에 관여했습니까?”“아닙니다.”“그런데 왜 과거 결재 얘기만 합니까?”독립 변호인은 도겸이 작성한 진술서를 책상 위로 밀어 돌려보냈다. 첫 장 절반이 태강 외부 법무팀 시절의 형식 결재에 대한 인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작 이번 혐의를 부인하는 문장은 마지막 두 줄뿐이었다.“확인하지 않고 서명했습니다. 그 일로 피해가 이어졌다면 제 책임입니다.”“그 책임은 별도로 조사받으면 됩니다. 지금 묻는 건 당신이 최근 증거를 조작했느냐는 겁니다. 죄책감을 사실처럼 진술하면 수사기관은 둘을 분리해 주지 않습니다.”도겸은 펜을 잡았지만 쓰지 못했다. 하겸의 기록을 놓쳤다는 후회가 그에게는 형량보다 오래된 감옥이었다.나는 접견실 유리 너머로 진술서를 보다가 인터폰을 들었다.“도겸 씨, 하지 않은 일까지 떠안는다고 하겸에게 사과가 되는 건 아니에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당신이 책임져야 할 만큼만 책임져요. 나머지는 진실을 훔친 사람 몫으로 남겨 두고.”도겸은 진술서 마지막 장을 찢었다. 그리고 새 종이에 두 문장을 따로 적었다. 과거 형식 결재의 과실을 인정한다. 최근 법원 원본 교체와 인계표 작성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그제야 변호인이 조사를 재개했다.나는 도겸의 개인 금고 접근 경로를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 금고 열쇠는 도겸이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의 종이 묶음이 반드시 금고에 직접 넣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무실 이전 당시 봉인된 보관물은 직원이 목록만 확인한 뒤 금고 안으로 옮겼고, 외부인이 맡긴 법률 자료도 밀봉 상태라면 별도 개봉 없이 보관됐다.보관 기록에서 한 줄이 걸렸다.[한미라 제출 자료. 별도 봉투 1개. 서도겸 지정 보관.]날짜는 한미라가 자백 장부를 넘긴 날보다 4일 전이었다. 나는 그날의 방문 기록을 찾아냈다. 한미라는 도겸을 만나지 못했고, 1층 안내 데스크에 봉투를 맡겼다. 수령자는 도겸이 아니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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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한미라의 마지막 증언

“내가 바꿨다.”한미라는 며느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죄의 마지막 줄을 쓰기 위해 법정에 섰다.도겸의 석방 검토는 즉시 중단됐고, 한미라의 자수서는 긴급 증인신문 자료로 넘어갔다. 나는 방청석이 아니라 증인석 정면에 앉았다. 그녀가 나를 위해 거짓말한다면 내가 먼저 끊어야 했다.“법원 원본 교체를 누구에게 지시했습니까?”“당시 기록관리 직원 박종수에게.”검사가 확인표를 펼쳤다.“박종수는 그날 연차였습니다. 법원 출입 기록도 없습니다.”한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전달 시각은요?”“오후 6시쯤.”“문제의 인계서는 17시 21분에 봉인됐습니다. 증인이 말한 시각에는 이미 보관실로 이동한 뒤였습니다.”첫 질문부터 두 군데가 어긋났다. 자백은 정확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죄를 대신 쓸 때 외운 문장이 무너지는 방식이었다.나는 신문 허가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도겸 씨를 빼내려고 온 겁니까?”한미라가 나를 봤다.“내가 한 일을 말하러 왔다.”“방금 말한 직원은 현장에 없었고 시각도 틀렸어요. 모르는 일을 안다고 말하는 게 어머님 방식의 책임입니까?”“온사율.”“나를 위한 거짓말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감금하는 데 동의했고, 내 진단서를 이용했으며, 하겸의 기록을 외면했다는 사실도 함께 남을 테니까.”한미라의 손이 자수서 위에서 멈췄다. 그러나 울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그래. 그래서 전부 말하려는 거다.”“그럼 바꿔 말하지 말고 정확히 말하세요. 무엇을 바꿨습니까?”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자수서를 뒤집었다.“동의서가 아니다.”법정 안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권태겸 쪽에서 끼워 넣은 가짜 사망 기록 1장을 빼냈다. 온하겸이 이미 사망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문서였어. 그걸 없애면 나머지 기록이 살아날 줄 알았다.”“진짜 동의서는요?”“못 막았다.”“누가 바꿨습니까?”“그건 모른다.”한미라는 처음으로 모른다는 말을 했다. 자백의 범위가 줄어들자 오히려 진술은 선명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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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살리다

나를 빈 그릇이라 부른 여자가, 내 몸에서 무엇을 훔쳤는지 증명하는 법을 가르쳐줬다.한미라의 기억만으로 원본을 정할 수는 없었다. 유란과 나는 봉인된 문서 3종을 감정대 위에 올렸다. 법원 보관용이라는 표시도, 태강 병원 직인도 믿지 않았다. 먼저 모서리 천공 위치를 재고, 용지 섬유의 배열과 형광 반응을 비교한 뒤 작성 시각과 인계 기록을 겹쳤다.왼쪽 위에 구멍 2개가 난 문서는 병원 보관용이었다. 오른쪽 아래에 바늘 자국이 남은 것은 법무팀 회람용이었다. 마지막 문서에는 한미라가 말한 반달 모양 눌림이 있었다. 아래 모서리에서 정확히 7밀리미터 떨어진 자리였다.“이게 진짜라는 뜻은 아니에요.”유란이 감정표에 선을 그었다.“법원 제출용 서식과 일치한다는 뜻까지만 말할 수 있어요. 종이도 같은 시기에 생산됐지만, 내용이 그때 작성됐는지는 잉크와 출력 이력을 더 봐야 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라의 증언은 문을 찾았을 뿐이었다. 열쇠는 보관 경로와 물리적 흔적이어야 했다.출력 장비 기록은 7년 전 태강재단병원 문서실을 가리켰고, 법원 인계대장에는 같은 봉인번호가 남아 있었다. 감정인은 봉인 접착면이 처음 붙은 뒤 다시 열리지 않았다는 의견을 냈다.그제야 문서의 본문을 확인했다.내 이름 아래 동의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대신 ‘의사 확인 불가 시 대리 승인’ 칸에 지문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 옆에는 백문우의 결재 코드가 있었다. 코드 사용 시각은 내가 수면 유도제를 투여받은 뒤 23분이 지난 때였다.유란은 당시 투약기록과 간호일지를 나란히 놓았다. 의식 확인란은 공란이었고, 보호자 연락란에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가 거부할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었다. 거부할 사람 자체를 서류에서 지운 뒤 시술이 승인된 것이었다.이록은 내 옆에서 기록을 읽고도 대신 질문하지 않았다. 책상 아래에서 그의 손등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가 멈췄다. 잡을지 말지는 내 몫으로 남겨 둔 거리였다. 나는 먼저 손을 포갠 뒤 검사를 바라봤다.“환자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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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백문우의 환자 목록

선재는 해외에 있었고, 그의 지문은 서울 문서에 남아 있었다.출입국 기록은 위조되지 않았다. 권선재는 내 대리 승인서가 출력되기 전에 출국했고, 승인 시각에는 해외에 있었다. 출입국 기록의 발급 경로와 원본 대조 결과도 일치했다.“그러니 피고인은 승인할 수 없었습니다.”선재 측 변호인이 단정하자 나는 감정서의 지문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지문은 작성된 문장 위가 아니라 빈 승인란의 아래쪽에 찍혀 있었다.“문서가 완성된 뒤 남긴 지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내 질문에 감정인이 답했다.“현재 감정만으로는 선후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빈 서식에 먼저 지문이 찍힌 뒤 내용이 출력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선재의 알리바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방식이 바뀌었다. 직접 서명하지 않고 미리 찍어 둔 승인서, 혹은 본인 대신 움직이는 인증 수단이 있었다면 해외에서도 지시는 작동할 수 있었다.그때 백문우가 형량 협상을 조건으로 환자 목록을 제출했다. 이름과 시술명만 적힌 명단이 아니었다. 날짜별 승인 코드, 실제 시술자, 기록 수정자, 결재 기기가 서로 다른 칸에 나뉘어 있었다.내 이름이 적힌 줄에는 승인 코드 ‘KSJ-02’, 실제 시술자 백문우, 기록 수정자 외부 계정, 결재 방식 원격 토큰이라고 적혀 있었다.“KSJ가 권선재라는 뜻입니까?”검사의 질문에 백문우가 대답했다.“병원에서는 그렇게 불렀습니다.”“당신들끼리 부른 약어만으로 사람을 특정할 수는 없어요.”내가 끼어들자 백문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럼 누가 그 코드를 썼겠습니까?”“그걸 증명하라고 당신을 부른 겁니다. 추측을 대신 말하라고 부른 게 아니라.”도겸은 방청석 뒤편에 앉아 있었다. 사건 대리에서는 빠졌지만, 과거 결재 경로를 설명할 증인 자격으로 출석했다. 그는 KSJ라는 세 글자 옆에 표시만 남겼다. 이름이 닮았다는 이유로 범인을 완성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검찰은 결재 기기의 등록 기록을 요구했지만 병원 서버에는 토큰 번호 일부만 남아 있었다. 그 번호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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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권선재의 무죄 카드

“나는 온하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살리지 않았을 뿐이지.”권선재는 그 말을 무죄 주장처럼 내놓았다.피고인신문을 앞둔 사전 절차에서 그는 하겸의 사고 현장을 지나간 사실부터 인정했다. 차량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 부인할 수 없는 부분만 먼저 잘라낸 것이다.“충돌 사고에 관여하지 않았고, 사고를 지시한 사실도 없습니다. 현장에 오래 머물 이유도 없었습니다.”“하겸 씨가 사고를 당한 건 알고 있었습니까?”“차가 멈춰 있는 건 봤습니다.”“사람이 다친 것도요?”선재는 잠시 답을 고른 뒤 말했다.“확인하지 않았습니다.”죽이지 않았다는 말과 살릴 기회를 외면했다는 말 사이에, 그는 스스로 선을 그었다.백문우의 환자 목록에 남은 ‘관찰 종료’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했다.“외주 감시팀 계약 코드입니다. 온하겸을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감시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계약을 끝낸 겁니다.”“왜 하필 사고 당일이었죠?”“그건 외주팀에 물어야죠.”“승인 코드는 당신 겁니다.”“코드를 관리했다고 모든 실행을 제가 했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끝까지 같은 방식이었다. 기록은 인정하되 의미를 잘랐다. 현장에 있었지만 사고와는 무관하고, 하겸을 감시했지만 죽음과는 무관하며, ‘관찰 종료’가 입력됐지만 그 뜻까지 자신이 정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나는 선재의 얼굴이 아니라 시간표를 꺼냈다.“그럼 의미 말고 시간만 보죠.”사고 현장을 통과한 선재 차량 기록, 현장 주변에 머문 구간, 휴대전화 통화 내역,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의 기록을 한 장에 겹쳤다.하겸이 죽은 밤의 10분이었다.“당신은 하겸 씨보다 먼저 현장에 있었어요.”법정 뒤편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이록이었다.그 역시 오늘 처음 직접 듣는 사실이었다. 하겸에게 가장 먼저 닿았어야 했던 사람이 자신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온 남자가, 정작 그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사람이 선재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들었다.선재는 오히려 담담했다.“먼저 도착했다고 제가 죽인 게 됩니까?”“아니요.”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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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하겸의 10분

하겸이 죽은 밤을, 우리는 1분씩 다시 살았다.법정 화면에 첫 시각이 떴다.21시 58분.하겸의 휴대폰에 마지막 메모가 저장된 시각이었다.검찰은 그 뒤 10분을 한 화면에 겹쳤다. 도로 CCTV, 차량 이동 기록,휴대전화 통화 내역, 구급대 신고 기록.사람들의 기억은 서로 달랐지만 기계에 남은 시각은 움직이지 않았다.21시 59분.권선재의 차량이 사고 구간에 진입했다.선재는 전날까지도 하겸이 이미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차량 내부 음성이 재생되자 그 말이 깨졌다.동승자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아직 움직인다.”법정 안이 조용해졌다.나는 선재를 바라봤다.“죽은 줄 알았다고 했죠.”선재는 답하지 않았다.“그런데 당신 차 안에 있던 사람은 하겸이 움직이는 걸 봤어요.”“제가 직접 확인한 말은 아닙니다.”“그래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사고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끝까지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만 말했다.충돌하지 않았다.죽이라고 지시하지 않았다.손대지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22시 01분.선재의 차량은 현장에 그대로 있었다.구조 신고는 없었다.22시 02분.차량이 움직였다.그리고 잠시 뒤 권태겸 비서실로 14초짜리 전화가 걸렸다.전화를 받은 사람은 한미라였다.한미라는 증인석에서 그 통화를 인정했다.“선재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무슨 보고였습니까?”“사고가 났다는 말과 사람이 있다는 말.”“온하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까?”“통화 중에 알았습니다.”나는 그 다음 시각을 보았다.22시 03분.신고 기록 없음.22시 04분.신고 기록 없음.22시 05분.아직도 없었다.“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한미라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때 다른 피해자를 옮기고 있었다.”법정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봤다.태강의 관리망에서 빠져나와야 했던 또 다른 피해자.그 사람을 먼저 이동시키느라 한미라는 선재의 전화를 받은 뒤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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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화. 살리지 않은 죄

“죽인 사람만 죄인이 아닙니다. 살릴 수 있는 시간을 가격으로 계산한 사람도 여기 있습니다.”나는 마지막 변론에서 권태겸을 보며 말했다.재판부 앞에는 세 사람의 책임이 따로 놓였다.선재는 사고 현장에서 하겸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떠났다.한미라는 선재에게 보고받은 뒤 다른 피해자를 먼저 옮기겠다고 판단해 신고를 미뤘다.그리고 권태겸은 현장에 없었다.그래서 그의 변호인은 그 사실을 가장 강한 방패로 내밀었다.“피고인 권태겸이 사고를 지시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습니다. 현장에도 없었으며 구조를 방해했다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검찰도 모든 책임을 하나로 묶지 않았다.직접 한 행동과 지시, 기록 은폐, 구조가 늦어진 과정은 각각 분리해 판단해야 했다.나는 그 방식이 맞다고 생각했다.누군가를 가장 큰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머지 사람의 선택까지 지워 버리면 태강이 해 온 기록 조작과 다르지 않았다.한미라는 최종 진술에서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최나경을 옮기고 있었습니다.”“그 일을 했다면 하겸 씨 신고를 미룬 것이 정당했다고 생각합니까?”“아니요.”한미라가 바로 답했다.“한 사람을 살리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늦어도 된다고 내가 판단했습니다.”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태강은 사람을 계속 그렇게 골랐습니다. 살릴 사람, 버릴 사람, 기록할 사람, 지울 사람. 나는 그 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 똑같이 골랐습니다.”선행 하나로 죄 하나를 지우지 않았다.그게 내가 한미라에게 원했던 마지막 진술이었다.선재는 달랐다.“저는 아버지의 지시 체계 안에서 움직였습니다.”마지막까지 권태겸을 향해 책임을 밀었다.“외주 감시는 제가 만든 구조가 아니고, 사고를 내라는 지시도 받은 적 없습니다.”나는 그 말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지시가 없었으니 책임도 없다는 겁니까?”선재가 나를 봤다.“저는 직접 해치지 않았습니다.”“알아요. 그래서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나는 법정 화면에 하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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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화. 태강의 마지막 판결

판결문 첫 줄에 온하겸의 이름이 있었다.나는 그 한 줄을 보는 데 판결 전체를 읽는 것보다 오래 걸렸다. 피고인석에는 권태겸, 권선재, 백문우, 한미라가 각각 다른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늘까지 우리는 그들을 한 덩어리로 부르기 쉬웠다. 태강. 하지만 재판부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권태겸이 만든 지시 구조, 선재가 행사한 승인과 현장 이탈, 백문우가 실행한 의료·기록 조작, 한미라가 알고도 막지 않았거나 직접 선택한 행위가 하나씩 분리됐다. 같은 사건에 연결돼 있어도 누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까지 증명됐는지 따로 적혔다.하겸 사고 부분에서는 더 냉정했다. 선재가 현장에 먼저 도착했고 구조 요청 없이 떠난 사실, 한미라가 보고 전화를 받은 뒤 신고를 미룬 사실은 기록됐다. 그러나 그 10분이 하겸의 사망 결과를 확정적으로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의료 감정의 한계도 그대로 판결문에 남았다.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예전의 나라면 화가 났을 것이다. 더 세게 써 달라고, 그들이 빼앗은 가능성까지 전부 죄의 이름으로 묶어 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보다 큰 복수는 결국 또 다른 조작이었다.대신 배아 이동, 동의 없는 시술 구조, 허위 기록, 감금과 서류 조작, 아이 이동 과정은 각각 확보된 문서와 증언, 접속 기록, 보관 경로를 기준으로 판단됐다. 태강이 한 문장으로 지워 버린 사람들을 법원은 한 사람씩 다시 나눠 적었다.재판부는 해야의 이동과 관련해서도 누구의 지시가 어디까지 입증됐는지를 따로 적었다. 예라의 출산 기록, 간호사의 이동 기록, 백문우의 수정 내역, 선재의 승인 흔적은 서로 다른 증거로 다뤄졌다. 어떤 부분은 연결됐고, 어떤 부분은 끝내 의심으로 남았다.나는 그 미완성을 견뎠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쓰지 않는 판결이야말로 우리가 태강과 다르다는 마지막 증명이었다.판결문 중간에는 내가 요구했던 이름들이 있었다. 하겸, 해야, 예라, 윤서정, 그리고 재단이 복원한 피해자들. 숫자나 코드로 묶이지 않았다.나는 판결문 첫 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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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상속받지 않는 아들

“받아야 버릴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사람에게서 뺏은 자리로 돌려놓겠습니다.”기자들 앞에서 이록이 한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보다 더 큰 소란을 만들었다. 상속을 받겠다는 말만 잘라 속보를 올리던 기자들이 다시 질문을 쏟아냈다.“태강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뜻입니까?”“재단과 합치는 겁니까?”“피해자들에게 지분을 나눠 주겠다는 겁니까?”이록은 공증 문서를 접지 않았다.“아무것도 오늘 결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포기부터 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법원을 빠져나온 뒤 도겸과 독립 자문단이 곧바로 선을 그었다. 권태겸의 공증 문서가 존재한다고 해서 지분이 당장 이록에게 넘어오는 것도 아니었고, 상속이 개시된 뒤에도 세금과 채권자, 소수주주 권리, 피해 회복 절차를 검토해야 했다. 감정적으로 전부 피해자에게 넘긴다고 선언하면 오히려 다른 권리가 꼬일 수 있었다.도겸이 서류 첫 장에 메모했다.“목표와 방법을 분리해야 합니다. 상속을 안 받는 게 가장 깨끗해 보일 수는 있어요. 그런데 포기한 지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권태겸이 만든 소유 구조가 다른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그러면 제가 일단 받는 쪽으로 가야 합니까?”“받겠다고 결론내리는 게 아니라, 취득이 필요한 범위와 이후 환원 구조를 검토하는 겁니다. 개인 재산으로 확정해 놓고 선심 쓰듯 나누는 방식은 안 됩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태강의 아들.그 이름 때문에 이록은 평생 원하지 않은 것을 상속받아 왔다. 이름, 자리, 재산, 죄책감까지. 이제 마지막에 또 그 신분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잔인했다.“당신이 다시 태강 중심에 서는 건 싫어요.”“나도 싫어.”“사람들은 당신이 받는 순간 권태겸이 결국 승계에 성공했다고 쓸 거예요. 해야에게까지 태강 지분이 내려갈 거라고 할 수도 있고요.”“그래서 내 이름으로 붙들고 있지 않을 거야. 의결권부터 떼어내고, 해야에게 넘기는 일도 없게 할 거야.”“당신이 대표가 되라는 요구가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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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화. 남편과 처음 잡은 약속

“청혼 날짜를 미리 말하는 남자는 처음 봐요.”“당신은 기습을 증거인멸로 받아들이잖아.”나는 달력 위에 올려둔 펜으로 이록의 손등을 툭 쳤다.“그걸 배려라고 생각한 거예요?”“최소한 현장에서 압수수색당할 일은 없겠지.”“반지는요?”“그건 말 안 해.”“장소는?”“그것도.”“사람 부릅니까?”이록이 나를 빤히 보다가 달력을 덮었다.“봐. 미리 말하길 잘했잖아. 벌써 청혼이 아니라 사전조사야.”태강 재판이 끝난 뒤 처음으로 우리 둘에게 사건이 없는 하루를 만들기로 했다. 비서에게는 외부 미팅을 잡지 말라고 했고, 경호 일정도 최소 인력만 남겼다. 재단 온에는 그날 내 자문 일정을 비워 달라고 요청했다. 해야는 예라가 맡기로 했다.그렇게 하루를 통째로 비워 놓고 우리는 뜻밖의 문제 앞에서 막혔다.“뭐 하고 싶어요?”내 질문에 이록이 대답하지 못했다.“당신은요?”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었다.재판이 있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증거를 확인하고, 사람을 만나고, 시간표를 맞추면 됐다. 해야와 함께라면 수유와 낮잠, 병원 일정이 있었다. 재단에 가면 결재할 안건이 있었다.그런데 둘만 남으면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이록이 웃었다.“우리 연애 진짜 못한다.”“결혼은 했잖아요.”“그 결혼부터 정상적인 연애의 결과가 아니었고.”반박할 말이 없었다.나는 결국 노트북을 열었다. 첫 데이트 후보지를 4곳 골랐고,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주차장 진입로와 비상구 위치를 확인하고,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를 제외했다. 식당은 독립된 방이 있는 곳으로 좁혔고, 숙박 여부를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호텔 주변 CCTV 설치 위치까지 확인하고 있었다.이록이 내 화면을 한참 보더니 마우스를 가져갔다.“이거 데이트 계획표야, 경호 작전표야?”“사람 많은 곳에서 문제 생기면 바로 빠져나와야 하니까.”“무슨 문제?”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그가 화면을 돌려 내 쪽으로 밀었다.“재판 끝났어.”“알아요.”“선재도 우리 뒤를 쫓지 못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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