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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Kapitel

30.

삐빅. 불이 켜졌다. 에단은 홀린 듯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또 뵙네요.” 낮은 목소리에 윤오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차 문에 가볍게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웃었다. “아, 본부장님.” 꼭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차분한 태도. “아직 안 가셨네요.” “선우 씨 차 키를 원장님이 가지고 계시는군요.” 에단의 시선이 윤오의 손끝으로 향했다. 작은 인형 하나가 달린 자동차 키. 선우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건이었다. 저 남자에게 너무 당연한 것처럼 쥐여 있었다. 윤오가 키를 가볍게 흔들었다. “주치의 허락 없이는 운전 금지라 제가 수거하러 왔습니다.” 직장 상사인 에단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시간의 두께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여유로웠다.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회복 잘 하고 있어요.” “…….” “선우가 워낙 책임감이 강해서 아픈 걸 잘 숨기거든요. 본부장님께서 미리 알아채 주셔서 다행입니다.” 에단은 그제야 알았다. 질투를 느끼게 만드는 건 친밀함이 아니었다. 당연함이었다. “수액 맞으면서 안정을 좀 취하면 금방 일어날 겁니다. 제가 잘 회복시켜서 건강하게 출근시킬 테니까…….” “…….” “앞으로도 우리 선우,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정중함은 에단이 그동안 가까스로 얻어냈다고 생각했던 거리들을 전부 지워버릴 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그럼.” 윤오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이 걸리고 선우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에단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후미등을 응시했다. 저 남자가 긋고 있는 선은 무력으로 넘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겁니까. 도대체 왜, 다 가진 사람처럼 굴면서도 끝내 숨어 있는 겁니까. 왜 스스로를 선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지,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선우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윤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병실 문이 열렸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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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선우는 달아오른 뺨을 식히느라 애를 먹었다. 팀원들은 “본부장님 최고!”를 외치며 신이 났지만, 선우는 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보냐, 김선우? 진짜 자의식 과잉이네. 애먼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 뒤에서 따라오던 발걸음이 옆으로 다가왔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그렇게 거절할 만큼 내가 위협적이었습니까?” “아니요!” 선우가 거의 비명처럼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다행이고요.” 저 사람,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과장님, 안 오세요? 오늘 메뉴 빨리 골라야죠!” 팀원들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선우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북적이는 팀원들 사이에서도 에단의 시선은 가랑비처럼 선우의 등을 자꾸만 적시고 있었다. *** 식당은 회사 근처의 정갈한 한정식집이었다. 선우는 최대한 구석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세상은 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으려다 팀원들에게 떠밀려 에단의 맞은편에 앉게 됐다. 정면. 정확히 정면이었다. “마음껏들 시키세요. 김 과장님 몸보신 시켜줘야 한다면서요.” 에단이 메뉴판을 덮으며 팀원들에게 미소를 보였다. 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갈비찜. 낙지볶음. 보쌈. 된장찌개. 메뉴가 쏟아졌다. 소란 속에서 선우는 조용히 물만 따랐다. 어디 투명망토라도 줍고 싶은 간곡한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과장님, 진짜 괜찮으신 거예요? 아까 얼굴 되게 빨갛던데, 열 다시 오르는 거 아니죠?” 눈치 없는 막내의 한마디에 선우는 하마터면 물을 뿜을 뻔했다. “식당이 좀 더워서 그래.”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추웠다. 거짓말도 성의 있게 해야지, 김선우. 분명 망신살. 굿을 알아봐야겠다. 선우가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맞은편에서 에단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선우의 이마에 머물렀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식탁 위는 젓가락질 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선우는 입맛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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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가깝나요?”낮은 목소리. 회의실의 소음이 순간 멀어졌다. 팀원들 목소리도.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도. 에어컨 소리마저. 전부 다."본부장님."선우가 작게 채근했다.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회의실 반대편.모니터를 보는 척하고 있는 대리. 자료를 넘기는 척하고 있는 주임. 그리고 이미 귀는 이쪽으로 열려 있는 막내 사원이 보였다.“…….”에단은 그제야 몸을 바로 세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펜을 들어 도면의 한 구석을 툭툭 쳤다."디자인은 2안으로 뽑아보죠."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정리했고, 팀원들은 본부장의 결정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회의실을 나가는 에단의 뒷모습을 보며 선우는 책상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은 틀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분명 조금씩 젖고 있었다.***12년간 긴 가뭄이었던 땅에, 가랑비가 추적 추적 내렸다. 잔잔하다고 생각했던 수면 위로 자꾸만 작은 파동이 번지고 있었다.라벤더 향초는 밤새 타들어가다 하얗게 식어 있었다. 선우는 멍한 정신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 비로 메마른 땅이 달라질 리 없지 않은가.씻고 화장을 하는 내내 거울 속 제 얼굴이 낯설었다. 회사 건물 위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맑은데, 상하게도 옷깃 어딘가에는 달콤한 코냑 향이 배어 있는 것도 같았다.이 향의 주인은 아마도.“과장님.”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이 가방이 눈에 띄었다.“뭐야, 민지 씨?”“이거 본부장님이 아침 일찍 오시더니 과장님 자리 위에 꼭 올려두라고 하셨어요.”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선우의 책상 위로 슥 밀어 넣었다. 평소답지 않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선우를 빤히 바라보는 민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과장님 자리 한 번 보고, 시계 한 번 보고, 또 과장님 자리 한 번 보고.”“…….”선우의 시선이 종이봉투 위에 내려앉았다.“근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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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후 업무는 에단과의 외부 시장 조사였다. 10월 런칭을 앞두고 강남권 주요 백화점과 하이엔드 리빙 편집숍을 돌며 브랜드 공간 매핑을 확정하는 일정이었다. 위스키는 단순히 맛으로만 팔리는 게 아니었다. 어떤 조명 아래 놓이는지. 어떤 재질 위에 올려지는지. 어떤 공기 속에서 존재하는지가 가격표를 바꾼다. "백화점 주류 매장보다는, 오히려 5층 수입 가구 섹션의 조도를 참고하는 게 좋겠군요." 에단의 마세라티 안. 좁은 차 안에는 익숙한 엔젤스 셰어 향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선우는 괜히 창밖만 바라봤다. 아침에 마신 비타민 앰플의 씁쓸한 뒷맛이 아직 혀끝에 남아 있었다. “아침에 주신 거 잘 마셨습니다.” 에단이 짧게 웃었다. “그거라도 마셨으니 지금 버티고 있는 겁니다.” 선우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한 연산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몸 관리도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하세요.” 잠시 후 그가 덧붙였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거봐. 역시 일이잖아. 선우가 안도했다. *** 도착한 백화점에서 에단과 선우는 나란히 서서 명품 가구들이 전시된 쇼룸을 걸었다. "이 원목 테이블의 질감, 어제 우리가 정한 라벨 텍스처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에단이 걸음을 멈추고 아주 낮게 설치된 펜던트 조명 아래 선우를 세웠다. 선우가 대답을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조명 빛이 굴절되며 에단의 얼굴에 기묘한 음영을 만들었다. 잘생긴 사람은 조명도 편애하는 모양이었다. "직접 만져보세요. 굴절률이 어쩌고 하더니, 정작 중요한 질감에는 왜 이렇게 소심하게 굽니까." 에단이 선우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테이블 위로 이끌었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에단의 온기가 수액 바늘 자국이 남은 선우의 손등을 홧홧하게 달궜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손을 뺐다. 에단은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선우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본부장님, 여기 사람들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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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구두 굽이 돌바닥을 울렸다. 터벅, 터벅. “질투를 걱정으로 포장하는 건.” 터벅. 그가 윤오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의사들의 특권입니까?” 그게 그리 잘나신 네 특권이냐고. 감청색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중정의 공기가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김 과장이 약속을 어긴 게 아니라.” 에단이 말했다. “내가 안 보내준 겁니다.” 서늘한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회사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건 프로로서 당연한 선택이죠. 저급한 표현으로 깎아내리지 마시죠.” “…….” 윤오의 턱 근육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만.” 선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이만 들어가세요.” 그리고 윤오를 돌아봤다. “너도 그만해.” 목소리가 떨렸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선우는 그대로 야외 계단을 올라 자신의 집 현관으로 향했다. 삐삐삑. 신경질적인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건물 위로 비친 두 남자의 그림자만 중정 바닥에 길게 엇갈렸다. “위스키 마케팅을 한다더니, 향까지 몸에 배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본부장님 취향입니까?” 그의 시선이 에단 재킷 깃을 스쳤다. 거슬린다. 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감정은, 아마 위화감. 윤오는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에단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를 바라봤다. “취향이라기보다는 업무의 흔적이죠. 위스키는 텍스트가 아니라 감각으로 파는 거니까요.” “…….” “원장님께서 환자를 돌보듯, 저도 제 팀원을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드는 중입니다.” 에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람의 감각은 생각보다 쉽게 변합니다.” “…….” “본인도 몰랐던 취향을 깨닫는 순간도 있고요.” *** “거기 서세요. 제가 직접 조도를 맞출 테니까.” 에단이 주머니에서 레이저 포인터를 꺼내 벽면의 한 지점을 찍었다. “…….” 선우는 그가 찍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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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가 지금 서있는 곳은 가로등조차 드문 골목 어귀였다. 늦은 밤 특유의 적막.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 찬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멀리서 낮고 묵직한 배기음이 밤공기를 가르며 다가왔다. 곧이어 어둠을 찢듯 마세라티의 헤드라이트가 골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새하얀 빛이 선우를 비췄다. 꼭 술래가 숨어 있던 사람을 찾아낸 것 같았다. 차 문이 열렸다. “······.” 흐트러진 머리카락. 구겨진 옷깃.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상처받은 눈동자. 그는 한눈에 읽어냈다. “이 시간에 여기 혼자, 무슨 생각으로 온 겁니까.” 목소리는 낮았다. 그는 선우의 앞에 멈춰 서서,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선우가 입을 뗐다. 눈동자가 젖어있었다. “······생각이 좀 필요해서요.” 그저. 도망칠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상처를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멍 자국까지 확인하려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생각의 끝이 여깁니까.” 에단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서늘함은 선우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불러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는 속임수가 어찌됐든 기꺼이 넘어가 줄 작정이었다. “선우 씨.” 늘 그렇듯 어느새 익숙해진 감청색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확인받아야 할 도구가 아닙니다.” “······.”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모양을 바꿔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밤공기가 조용히 흔들렸다. “나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에단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당신이 숨을 곳이 필요해서라면.” 에단은 선우의 뺨 근처로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끝이 민재가 휘두른 상처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기꺼이 들어오세요. 내 안에서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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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위스키는 숫자가 아니라 기억으로 마시는 거라면서요.” 그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소중한 기억 하나가 생기면, 그 향기가 예전의 구차한 기억들을 가둬두는 감옥이 되어줄 거라고.” 당신이 했던 말이잖아.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본부장님이.” 선우의 목소리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 따위가 아니었다. 너무 익숙했다. 단어 하나, 문장의 순서 하나까지. 기억을 조금만 더듬으면 그 말을 내뱉던 순간의 공기마저 되살아날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우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까. “내가 만들어주죠. 당신이 평생 망각하고 싶지 않을 기억들을.” 툭. 유리잔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 하나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 당신, 나를 알아요? 선우의 시선이 천천히 에단의 얼굴을 훑었다. 십여 년 전의 잔향이, 이젠 한 남자의 숨결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 에단 로웰의 인생은 언제나 숫자로 치환되었다. 숙성 연도. 알코올 도수. 원액 손실률. 분기별 매출 그래프. 스코틀랜드 본사에서 원액 관리와 글로벌 마케팅을 총괄하며 그가 배운 것은, 위스키란 결국 철저히 계산된 '공학'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혈관 속에는 한국인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뜨겁고 예민한 감각이 흐르고 있었고, 로웰이라는 성(姓)이 주는 무게는 스코틀랜드의 안개처럼 무거웠다. 본사 이사진들에게 그는 가장 효율적인 아시아 시장의 열쇠였다. 하지만 에단 스스로에게 그는 다른 의미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완성된 이방인. 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 그에게 결과는 성취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사소한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서열의 서슬 퍼런 감시 아래, 에단은 지독한 번아웃과 함께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천만 달러짜리 원액의 향조차 무미건조한 공기처럼 느껴지던, 그가 가장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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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내가 만들어주죠. 당신이 평생 망각하고 싶지 않을 기억들을.” 선우의 가슴 한가운데에 아주 얇은 금이 간 것처럼, 오래 굳어 있던 무언가가 소리 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위스키 잔을 흔들며 웃었고, 그저 조금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조금은 세상을 다 안다는 얼굴로 내뱉었던 문장이었다. 그 말은 자신에게조차 오래 남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고, 실패를 배우고, 사랑을 오래 혼자하는 동안. 그 문장은 낡은 영수증처럼 기억의 구석에서 조용히 바스라졌다고 믿었다. “기억 안 납니까? 지독하게 비가 오던 청담동, 지하 바.” “…….” “당신은 숫자 따위 상관없다며 웃었고, 옆의 남자는 전공 서적에 파묻혀 있었지. 그날 당신이 마시던 건 발베니 12년이었어.” 그 버려진 문장을. 이 남자는 십일 년 동안 닳도록 품고 살아왔다. “나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위스키를 숫자로 마신 적이 없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끝없이 하나의 질문만 맴돌았다.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도, 훨씬 아름다운 사람도, 훨씬 오래 기억할 만한 순간도 있었을 텐데. 그 모든 시간을 지나온 끝에, 이 남자가 아직도 붙들고 있는 기억이 고작 스물셋의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시절의 자신은 불완전했고, 철없었고, 정말 많은 것을 착각하던 사람이었는데. 에단은 그런 자신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선우는 처음으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오래 바라본 사람의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에단이 상체를 숙여 선우에게 밀착했다. 좁은 다찌석 사이로 그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선우씨가 얼마나 빛나던 사람이었는지 잊고 사는 동안, 나는 당신이 만든 그 기억의 감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거든.” “…….” “이제 대답해요. 그 구차한 기억들을 가둬버릴 새로운 감옥, 내가 만들어줘도 되겠습니까?” 타오르는 금빛 위스키 같은 눈이 선우의 혼란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제가 무너질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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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보내주기 싫어지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지 않는 눈. 그렇다고 쉽게 놓아줄 것 같지도 않은 눈. 시선을 돌리자 창밖으로, 창밖의 윤오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몇 번이고 입구를 올려다보던 그는, 스포츠카의 헤드라이트가 골목을 환하게 비추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에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선우가 차에서 내렸다. 차는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는 걸 확인하고서야 부드럽게 출발했다. “전화는 왜 하루 종일 안 돼. 내가 얼마나…….” 윤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전등 불빛 아래 드러난 선우의 뺨은 평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끼쳐오는 위스키 향. 가슴 한복판을 무언가가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골골대던 게 엊그제인데 또 술이야?” 윤오의 시선이 선우의 붉어진 뺨을 훑었다. “제정신이야, 김선우?” 힐난을 가장한 걱정이었다. 선우는 제 팔목을 붙든 윤오의 손을 차갑게 떼어냈다. “술?” 짧게 웃음이 새었다. “지금 나 술 마셨다고 화내는 거야?” 비스듬히 올려다본 눈빛이 서늘했다. “권윤오.” “…….” “나 위스키 회사 다녀.” 한 걸음 다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술 마시는 게 내 일이고. 술을 읽는 게 내 커리어야.” 선우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 윤오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답답했다. 셔츠 첫 단추를 풀었다. 손끝이 조급하게 목깃을 벌려 보았지만, 숨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무력감. 누군가 자신을 아주 천천히 밀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알아.” 이를 악문 목소리였다. 윤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몸 추스를 시간은 가져야지.” 속이 뒤틀렸다. 그런데 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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