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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 Kapitel von 부정맥 메이커: Kapitel 21 – Kapitel 30

66 Kapitel

20.

“오빠는, 아직도 똑같아?”​​유나는 그 질문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답을 재촉하지도,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카페 안은 마감 시간을 앞둔 기계음만 낮게 깔려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눅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나가 식어버린 커피잔을 밀어내며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한 잔 더 할래? 이번엔 제대로 된 걸로.”망설임이었을까, 혹은 체념이었을까. 윤오는 끝내 별다른 대꾸 없이 유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추천으로 주세요. 최대한 무거운 걸로.”그녀는 메뉴판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바텐더는 잠시 선반을 훑더니 병 하나를 꺼냈다.Glen Virel 30.두꺼운 병목 위로 황금빛 라벨이 조명 아래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하이랜드 계열의 싱글몰트입니다. 셰리 캐스크에서 오래 숙성되어 건과일 향이 짙게 올라오실 겁니다.”​바텐더가 잔을 채우자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짙은 호박색 액체가 차올랐다. 유나는 짧게 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잔을 바로 내려놓지 않았다. 입 안에서 한 번 더 머물고, 삼키고 나서야 천천히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음미했다.​“좋네.”잔을 바라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웃었다.​“미국에서도 자주 보이더라. 아르벨라(Arbella).”박제되어 있던 이름 하나가 유나의 입술 사이를 미끄러져 나왔다.“선우언니 회사 거잖아.”윤오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유나는 그런 윤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굴렸다.“오빠는 아직도…….”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나직하게 웃었다.“그 언니 생각하면서 마시는 거지?”정곡이었다.아니, 굳이 피해 가지 않고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러 넣은 한마디였다. 그 틈을 타 유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 사람. 나한테 프로포즈했어.”유나는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그래서 끝냈어.”​“이상하게 그 순간에 딱 질리더라. 웃기지?”씁쓸한 웃음기가 그녀의 입꼬리에 스쳤다.​“오빠랑도 그렇고……. 난 맨날 결혼 준비만 하나 봐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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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윤오가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뗐다.“그럼 넌.“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곧게. 유나의 눈동자를 붙잡았다.“나에 대해선 뭐가 기억나는데?”얽힌 시선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지난 2년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유나가 먼저 눈을 거두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다른 남자들은 다 비슷했어.”씁쓸한 웃음이 입가를 스쳤다.“시간문제였지.”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근데 오빠는 끝까지 안 잡히더라.”​특유의 권태로운 여유가 섞인 목소리였으나, 이어지는 말에는 웃음기가 없었다.​“그래서 확인하고 싶었어. 내가 정말 그 안에 있기는 한 건지. 근데 오빠 너는, 잡지도 않더라고 나를.”“…….”“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내가 없었던 거지.”​유나는 잔 속에 남겨진 피트 향처럼,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 재가 된 제 마음을 윤오 앞에 쏟아놓았다.“…….”긴 정적이 흘렀다. 윤오는 끝내 부정하지 못했다. 아니, 부정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게 더 정확했다.​의사로서 수천 번은 들어왔을 타인의 심박수. 규칙적이고 정직한 그 소리들과 달리, 지금 제 가슴 안쪽에서 느껴지는 맥동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유나의 고백 앞에서도 파동 하나 일지 않는 이 무미건조함이, 어쩌면 그녀가 말한 ‘부재’의 증거일지도 몰랐다. “…….”윤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았다.내 안에 누군가를 들인 적이 있었나.유나와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마치 휘발성이 강한 알코올처럼 코 끝만 스치고 금세 증발해 버렸다.잔상은 남았으나 온기가 없었다.그때였다.유나의 짙은 향수 냄새 사이로 윤오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이 있었다. 아주 익숙하고 담백한 향. 그 익숙함은 십 수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옆을 지키던 선우의 정수리 냄새 같기도 했다.김선우.순간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윤오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가봐야겠어.”윤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치고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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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 안에, 정말 아무도 없었던 건지.” 윤오의 낮은 고백이 흩어졌다. 내 안에 정말 아무도 없었던 건지 확인하러 왔다는 말. 그 이기적이고도 절박한 확인 작업에 선우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먼저 찾아온 건, 코끝을 찌르는 낯선 이질감이었다. 선우의 코끝에 닿은 윤오의 머리칼과 옷깃에서, 섞여서는 안 될 향이 났다. 독하고 세련된, 지나치게 인위적인 여자의 향수 냄새. 선우의 눈빛이 서서히 식어 내려갔다. 그녀가 단호하게 윤오의 어깨를 밀어냈다. “술 마셨어?” 윤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누구랑.” 선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윤오는 대답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한 번도 거짓에 능숙한 적이 없었다. “……도유나 만났어.” 그 이름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선우의 표정에서 마지막 온기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윤오의 이마가 닿아 있던 무릎 위로 소름이 번져 갔다. “하.” 선우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유나를 만나고, 걔 향수를 온몸에 묻히고 와서. 지금 나한테 확인을 하러 왔다고?” 선우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얼굴로 말했다. “권윤오, 너 진짜 미쳤냐?” 윤오가 급히 일어섰다. “선우야, 그런 게 아냐. 나는 그냥…….” “뭐가 아닌데?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니까 또 흔들려서, 그래서 그 확인 작업에 나를 도구로 쓰겠다는 거야?” 선우는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비참해서였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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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오늘같은 날엔 너무 독하지 않습니까?” 익숙한, 아니 익숙하지 않은. 그러나 낯설지 않은 감각이 선우의 발목을 집어 삼켰다. 낮은 목소리. 이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붙잡았다. “…….” 여기에, 또 본부장이 있을 리가 없는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수트가 아닌 편안한 니트 차림의 에단이 서 있었다. “제가 한 잔 골라드려도 될까요?” “본부장님? 여긴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놀라움이 먼저 목을 막았다. 도대체 또 어떻게? 정말 우연이라는 단어가 이 사람 앞에서는 성립하기나 하는 걸까. “서울에서 글렌모렌지 시그넷을 제대로 핸들링하는 바는 세 곳뿐입니다.” 그가 바 테이블의 나무 결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선우 씨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라프로익을 제대로 마시러 올 만한 곳도 결국 이 세 곳 중 하나죠. 그중 한 곳은 선우씨 지인이 운영하고, 다른 한 곳은 오늘 휴무에요.” “…….” “나머지 한 곳이 여기입니다. 당신이 혼자 숨고 싶을 때 선택지가 여기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우연이 아니라는 건가. 선우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에단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일종의 데이터 분석입니다. 취향이 너무 선명한 사람이라.” “하지만 저는 여기 처음 와보는데요.” 선우의 발목을 휘어감는 위화감은 에단과 같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는 좀처럼 생길 수 없는 감각이었다. 고작 며칠 전에 처음 본 사람이, 마치 내 취향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단은 느긋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데 익숙한 남자였다. “가끔은 사람도 위스키처럼 디캔팅이 필요합니다.” “…….” “병 안에 너무 오래 갇혀 있으면 숨을 못 쉬거든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무 향이 밴 공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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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오늘 밤, 선우 씨에게 내가 필요할 거라는 직관.” 에단의 낮은 목소리가 선우의 입술 바로 앞에서 부서졌다.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짧은 거리에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에단 로웰의 눈 속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김선우라는 사람. 오직 그 자체를 향한 집요한 집중뿐이었다. “무모하시네요, 본부장님은.” 선우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위스키 블렌딩도 결국 마지막엔 직관이 모든 걸 결정하니까요.”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공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하지만 선우의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나갑시다. 소독약 냄새가 아니라, 진짜 좋은 향이 나는 곳으로.” 에단이 먼저 일어섰다. “…….” 선우는 잠시 멈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락스물에 불어 거칠어졌던 손끝이, 에단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묘하게 화끈거렸다. ***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차가운 밤공기가 선우의 뺨을 스쳤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이 에단의 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차체는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움직이지 않는 맹수처럼, 언제든 밤을 가르고 달려나갈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차 옆에 서 있던 기사가 에단을 발견하자 곧바로 다가와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태워다 주시는 건가요?” 선우가 물었다. 에단은 차체에 기대어 선우를 바라봤다. “선택권을 드리죠. 그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혼자 한숨을 쉬거나.” “…….” “아니면, 아직 채우지 못한 시그넷의 피니시를 마저 완성하러 가거나.” 선우는 에단의 눈 속에서 답을 읽었다. 그녀가 차에 올랐다. 망설임은 없었다. 육중한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도시의 소음도. 차가운 바람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오래된 기억들도. “집으로는 안 가시는 거군요.” 에단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선우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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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월요일 아침의 공기는 늘 정직했다. 주말 내내 선우를 흔들어 놓았던 것들은 회사 건물의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희미해졌다. 락스 냄새. 호텔 최상층 라운지의 짙은 에스프레소 향. 그리고. '오늘 밤이 끝나면, 선우 씨는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를 떠올리게 될 겁니다.' 아니,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선우는 평소보다 더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깃을 매만졌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무장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과장님.” 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오늘 밤이 끝나면, 선우 씨는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를 떠올리게 될 겁니다.' ​“아니, 무슨 저주 인형이라도 심어놨나? 왜 자꾸 생각나는데!” ​선우가 저도 모르게 마우스 패드를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옆자리 민지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과장님?” “아니. 마우스가…… 말을 안 들어서.” 선우는 서둘러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자판을 두드리는 척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제멋대로 '에단 로웰', '본부장 끼 부리기', '첫 만남에 플러팅' 따위의 검색어를 조합하고 싶어 근질거렸다. 한국 지사에 부임한 지 고작 며칠이었다. 비즈니스로 엮인 사이라고 하기엔 그가 선우의 사생활을 헤집는 방식이 너무나도 노련하고 저돌적인것이 아닌가. [첫 만남에 직원 호텔 데려가는 상사 심리] 입력. 삭제. “아니.” 선우가 순간 멈칫했다. 설마…….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거나? 짝. 바로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려, 김선우.” 냉정하게 생각하자.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 에단 로웰은 그냥 뛰어난 사업가다.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고, 상대를 설득하는 법을 알고,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는 법을 아는 사람. 둘. 태생적으로 모든 여자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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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잠깐만요, 김선우 씨.”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올라갔다.그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한 걸음.또 한 걸음.별것 아닌 거리인데,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섰다.선우는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세웠다.왜 이쪽으로.대답을 찾기도 전에 에단이 바로 앞에 멈춰 섰다.가까웠다.조금만 고개를 들면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힐 만큼. 한 발만 더 다가오면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질 것 같은 거리였다.선우는 애꿎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그때서야 에단의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병. 꼭 보석처럼 정교한 컷팅이 빛을 흩뿌렸다.“데이터 복구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환경 설정은 즉시 바꿀 수 있죠.”에단은 선우가 왜 긴장했는지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주말에 우리가 완성했던 시그넷의 잔향입니다. 기억납니까?”그가 향수 한 방울을 자신의 손목에 떨어뜨렸다.그러고는 선우의 코끝 가까이로.손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에는 도무지 향수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향이 퍼졌다.킬리안(Kilian)의 엔젤스 쉐어(Angels' Share).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한 코냑의 첫 향 뒤로, 달콤한 시나몬과 묵직한 오크통의 나무 향이 체온을 타고 선우의 감각을 점령해 들어왔다.순간 다시 그날의 호텔 라운지로 돌아간 것 같았다.향은 조금 더 짙고, 부드럽고, 위험할 만큼 달았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한 번 더 들이마셨다.“……네. 기억나요.”“다행이네요. 로비에서 본 선우 씨는.”에단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다시 청소하러 갈 거 같았거든요.”선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사람을 놀리나 싶었는데.에단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선우의 어깨에 남은 긴장이라도 털어내듯 옷깃 근처를 가볍게 쓸었다.아주 짧은 접촉이었다.그런데 손끝이 스쳐 지나간 자리만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선우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에단은 이미 한 걸음 물러난 뒤였다.“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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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윤오를 본 순간.제 어깨에 얹혀 있는 향기가 낯설게 느껴졌다.자신을 과거에서 꺼내준 향이었다.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준 손길이었다.하지만 지금.윤오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희미해졌다.분명 멈추기로 했다. 하지만 수천 번 쌓아 올린 다짐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흝어졌다. 비겁한 변명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또 욕심이 났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 익숙한 온도 속에 머물고 싶다는 감정만이 눅눅하게 차올랐다.딱 오늘까지만.오늘까지만 이 다정함에 기대보자.“가자.”잠시 숨을 고르고.“배고파.”그 말에 윤오의 얼굴이 환하게 풀렸다.“그래, 오늘 너 좋아하는 거 실컷 먹자.”권윤오.나는 네가 웃는 걸 보는 게 좋다.네가 나 때문에 웃는 게 아니어도.네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네가 웃는 얼굴 하나에 하루 기분이 결정되는 바보 천치가 바로 나였다.선우는 스스로에게 허락한 마지막 유예를 붙잡기로 했다.***윤오가 예약한 곳은 화려한 간판도, 거창한 이름도 없는 서촌 끝자락의 작은 다이닝이었다. 제철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는 이곳은, 선우가 입맛이 없을 때마다 ‘거기 파스타 먹고 싶다’고 흘리듯 말하던 곳이었다. “여기 예약하기 힘들었을 텐데 언제 한 거야?”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 하는 곳임을 알기에, 선우의 눈이 동그래졌다.“너 주기적으로 수혈해줘야 하잖아. 나 의사야.”윤오가 너스레를 떨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선우가 피식 웃었다.“오늘 원장 권한으로 탄수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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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한참이나 야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윤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선우의 옆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장난기가 서려 있던 그의 눈매가 의사 특유의 예리함으로 가라앉았다. “근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너 안색 안 좋은데.” 윤오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낮게 깔렸다. 그는 난간에서 팔을 떼고 선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저 놈 저거 직업병이야. “또 의사 모드야?” 윤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 올 수록 선우는 뒷걸음질 치고 싶었다. “너 지금 눈가도 좀 빨갛고, 기운도 없어 보여.”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비행기를 오래 타서 그런가 봐.” 애써 시선을 피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윤오는 물러나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시간 날 때 병원 들러서 수액 한 대 맞고 가.” “됐어. 무슨 수액까지.” “의사 말 들어. 너 그러다 진짜 크게 앓는다.” ​윤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훅,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바닥을 선우의 이마에 툭 얹었다. ​“미열이 있네, 있어.” ​윤오가 낮게 중얼거렸다. 선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찰나, 그의 손가락 끝이 이번에는 선우의 발그레해진 뺨을 스르르 타고 내려왔다. ​“얼굴은 더 뜨겁고.” 선우는 깨달았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건 권윤오였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뺨에 닿은 손가락 마디의 감촉이 너무 선명해서, 선우는 제 심장 소리가 울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쿵쾅, 쿵쾅. 자제력을 잃은 심장이 갈비뼈를 사정없이 두드려댔다. ​결국 폭발한 선우가 윤오의 가슴등을 퍽 밀어냈다. ​“아, 됐어! 저리 안 가?” “가자, 밤 되니까 춥다. 너 감기 걸리면 내가 원장 권한으로 강제 입원시킨다.” ​윤오가 아무렇지 않게 앞서 걸었다. “피곤하면 자. 도착하면 내가 업어서라도 내릴 테니까.” “말은 잘해요. 너 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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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회사 근처에 아는 병원이 있어서요. 거기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선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리킨 곳은 회사에서 차로 5분 거리인 권윤오 심장내과였다. 주차할 새도 없이 비상등을 켠 채, 다시 한번 선우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섰다. 지잉. 병원의 자동문이 열렸다. 깔끔한 대기실 안쪽. 흰 가운을 입고 간호사와 차트를 보던 윤오가 고개를 들었다. “야, 김선우. 너…….” 윤오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의 시선이 순식간에 선우에게 향했다. 식은땀에 젖은 얼굴. 힘없이 기대 있는 몸.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낯선 남자의 손. “…….” 선우를 지탱하고 있는 손길이 윤오의 눈에 가장 먼저 박혔다. 윤오가 빠르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겁니까?” “고열에 탈수 증세가 심합니다.” 윤오가 남자의 손이 닿아있는 선우의 어깨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어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회사동료분 되시나요?” 윤오가 물었다. “직장 상사입니다.” “아, 네. 직접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입가에는 직업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보호자인 제가 알아서 하죠.” 이미 선우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책망처럼 들리는데도, 그 안에는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손에 기대어 있던 사람이었다. 에단은 천천히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벽면에 걸린 양각을 바라봤다. 수백 번의 걱정. 수천 번의 익숙한 손길.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오래된 습관.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이름 아래 쌓여 있었다. 에단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 까무룩 다시 잠이 든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병원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수액 봉지에 비쳐 잘게 부서졌다. 선우는 몽롱한 정신으로 제 손등에 붙은 반창고를 내려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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