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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 Kapitel von 부정맥 메이커: Kapitel 41 – Kapitel 50

66 Kapitel

40.

“오늘은 퇴근하고 시간 좀 내주시죠.” “…….” 입술 안쪽을 조용히 깨물던 그때. “원액 이야기입니다.” 또 또. 이 정도면 이 사람이 날 들었다 놨다하는거지. *** 모두가 퇴근한 금요일 밤.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간 사옥 지하 연구실에는 기계의 미세한 진동음만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샘플 병이 정교하게 늘어선 스테인리스 테이블, 호박빛 원액들이 차가운 조명 아래에서 유리처럼 반짝였다. 에단은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린 채 스포이드 끝으로 원액을 한 방울씩 옮기고 있었다. “…….” 정확한 각도. 망설임 없는 손끝. 마치 위스키가 아니라 시간을 블렌딩하는 사람 같았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한참 바라봤다. “……김 과장님.” 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에단이 작은 테이스팅 글라스를 내밀었다. “이쪽으로.” 선우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글라스를 건네는 순간 손등이 아주 스치듯 닿았다. 에단이 아무렇지 않게 잔을 그녀의 코앞까지 가져왔다. “어떤 향이 먼저 잡힙니까.” 업무로 돌아온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철저히 배제돼 있었다. 선우는 천천히 잔을 돌렸다. 잔 안에서 호박빛 액체가 느리게 원을 그렸다. 눈을 감자 수십 겹의 향이 차례대로 피어올랐다. “……스페이사이드 특유의 화사한 사과 향, 그리고 끝에 걸리는 묵직한 건과일 풍미가 느껴집니다.” 짧은 정적. “그게 답니까?” 선우가 눈을 떴다. 에단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검지로 잔 아랫부분을 가볍게 두드렸다. 팅. 맑은 진동이 유리잔을 타고 울렸다. “단순한 풍미가 아니라 의도를 읽으란 뜻입니다.” 에단은 낮게 말을 이었다. “그게 없으면 이건 그냥 흔한 술일 뿐이에요.” 실험실 공기가 조금 더 조용해졌다. 에단은 차트에 시선을 내리며 말을 맺었다. “가장 완벽한 숙성은 폐쇄된 오크통 안에서 완성됩니다. 우리 위스키도 그래야 하죠.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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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토요일 오후. 햇살이 카페 창가를 느긋하게 훑고 지나갔다. 따뜻한 홍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선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오랜만에 술이 아닌 향이었다. 쓴맛도, 알코올도, 머릿속을 파고드는 오크의 잔향도 없는 향. 그게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맞은편에 앉은 수정이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더니 선우를 빤히 바라봤다. “언니.” “응?” “피곤해 보여.” 선우는 찻잔을 내려다봤다. 윤오 때문인지, 에단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 때문인지. 이제는 그것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새 위스키 론칭 준비하느라.” 덤덤하게 웃어 넘겼다. “안 그래도 완전 기대중이야.” 수정은 금세 눈을 반짝였다. 선우도 자연스럽게 연구실 이야기를 꺼냈다. 새 블렌드. 원액. 캐스크. 에단과 한 시간 넘게 주고받았던 토론을 이야기하는 동안만큼은 이상하게 피곤함도 잊혔다. “유독 즐거워보이시네요, 요즘?” 수정이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 선우의 손이 순간 멈췄다. “즐겁긴.” “즐거운데?” 선우가 피식 웃었다. “뭐, 재미는 있는 거 같아.” “프로젝트?” 수정이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면 그 본부장?” “에헤이. 그 사람은 그냥 비즈니스.” “응~ 업무.” 그때 수정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윤오 오빠는? 요즘 같이 안오네?” 수정의 질문에 찻잔을 내려놓던 선우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뜨겁지도 않은 차가 괜히 목에 걸렸다. “…….” 윤오는 늘 선우의 반경 1미터 안에 공기처럼 머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부재를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받는 건 생경했다. “서로 좀 바빠.”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수정은 더 묻지 않았다. 괜히 분위기를 바꾸듯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응?” “쇼핑 가자.” “갑자기?” 선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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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대시보드 중앙의 와이드 디스플레이가 부드럽게 켜졌다. [본부장님] 선우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오늘은. 주말인데. 잠깐의 망설임 끝에 핸즈프리 버튼을 눌렀다. “네, 본부장님.” 잠시 정적.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ㅡ “저녁 약속 있습니까.” 바로 본론이었다. 선우는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봤다. “……아뇨, 없습니다.” ㅡ “식사 같이 하죠.” 그렇게 도착한 시내 중심가의 호텔. 높은 천장 아래 샹들리에가 은은한 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선우가 로비에 들어서자, 에단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늘 보던 검은 수트는 없었다. 옅은 그레이 린넨 셔츠. 팔꿈치까지 자연스럽게 걷어 올린 소매. 짙은 네이비 슬랙스. 넥타이 하나 벗었을 뿐인데,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격식을 차린 듯하면서도 한결 여유로운 실루엣. 에단을 따라 호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저음이 바닥을 타고 은은하게 번졌다. 드럼 브러시가 리듬을 쓸어내리고, 색소폰이 느긋하게 밤을 열고 있었다. 에단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와인 리스트를 펼쳤다. 몇 장 넘기던 그가 선우를 바라봤다. “와인 한 잔 하시겠어요? 여기 셀러가 꽤 훌륭한데.” 선우는 린넨 냅킨의 결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아뇨.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물로 마실게요.” 에단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컨디션이 별로입니까?” “아뇨.” 선우가 작게 웃었다. “오늘은 금주하기로 했어요.” 윤오 때문이라는 말은 삼켰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에단이 나직하게 웃었다. “금주라.” 에단은 웨이터를 불러 리스트를 덮어 건넸다. “파트너가 맨정신인데 나만 취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선우가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본부장님은 드셔도 되는데요.” “선우 씨가 정한 리듬을 제가 깨고 싶진 않습니다.” 선우 씨. 회사에선 늘 과장님이라고 하면서. 에단이 물잔을 들어 가볍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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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성인이 되고 처음,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맥캘란 증류소에 갔을 때였습니다.” 에단이 물잔을 천천히 굴렸다. 유리잔 안에서 물결이 한 번 흔들렸다. 선우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그랬다. 크지 않은데도 사람을 듣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 앞이었어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던 그가 옅게 웃었다. “일흔이 훌쩍 넘은 마스터 블렌더가 갓 증류한 원액을 건네며 그러더군요.” ㅡ 위스키는 갇힌 시간입니다. “좁고 어두운 오크통 안에서 계절을 견디고, 나무의 결을 받아들이고, 증류소의 공기까지 온몸으로 삼켜낸 뒤에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자격을 얻는 술이라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즈 피아노가 조용히 그 빈틈을 메웠다. “그땐 그 말이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작게 웃었다. “그런데 어제 선우 씨가 모틀락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시선이 조용히 선우에게 머물렀다. “우리가 만들 모틀락도 그랬으면 합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듬어진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견뎌낸 끝에.”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비로소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술.” “…….” “그리고 선우 씨라면, 그 투박한 매력을 아주 근사하게 포장해낼 것 같고요.” “…….” “그리고.” 에단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만든 근사한 술을 세상에 소개할 사람도.” 짧은 침묵. “선우 씨일 테고요.” 선우는 숨을 삼켰다. “이번 프로젝트.” 에단이 물잔을 내려놓았다. “김 과장님과 함께라서 기대됩니다.” *** 에단과 헤어진 뒤. 선우는 음악을 끄지 않았다. 차 안에는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비슷한 재즈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그녀의 손끝은 무심코 핸들을 두드렸다.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감듯. '이번 프로젝트. 김 과장님과 함께라서 기대됩니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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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나 안 볼 거냐고 물었어.”윤오가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왜 대답 안 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권윤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잠시 시선을 피했다.“그냥.”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정신이 좀 없었어.”“……”윤오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짧은 침묵이 밤공기보다 무거웠다.“김선우.”그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난 네가 누구를 만나든.”“……”“어디를 가든.”“……”“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근데.”권윤오가 잠시 말을 삼켰다.“적어도 무사한지는 알고 싶어.”과연.권윤오다웠다.“내 걱정이 그렇게 답답해?”늘 걱정이라는 이름으로만 마음을 내미는 사람.한 걸음.그가 가까워졌다.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늘 깨끗한 비누 향이 먼저였는데.낯선 냄새만큼이나,윤오의 표정도 낯설었다.“내가 널 보호하는 게.”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당연한 거잖아.”“……”“지금까지 계속 이랬잖아.”윤오가 씁쓸하게 웃었다.***김선우를 사랑한다.어느새 제가 내리고 만 결론이었다.언제부터였지.불쑥 다시 나타난 도유나를 정리하던 그날이었을까.아니.미국 파견 첫날.시차를 계산해가며 한국 시간을 확인하던 밤이었나.그것도 아니었다.아.네가 술에 취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난 것 같다며 울먹이던 첫 음주의 순간이었나.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정확한 시작을 정의할 수는 없다. 이리도 해묵은 감정이었다.그래.어느 순간부터 김선우의 하루는 늘 자신의 하루보다 먼저였다.오늘 밥은 먹었는지.감기는 다 나았는지.야근은 또 하는지.퇴근길은 안전한지.그 모든 걸 확인하는 일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친구니까.가장 오래된 친구니까.그런데.왜.연락이 닿지 않는 하루가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걸까.왜.집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화가 아니라 걱정부터 앞설까.왜.다른 남자의 차에서 내린 너때문에 가슴이 이토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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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선우가 현관문 안으로 사라졌다.철컥.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윤오는 굳어 있던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볼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은 부드럽게 깨어났지만,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조금 전까지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손끝엔 아직도 선우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윤오는 운전대를 움켜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희게 드러났다.“……김민재, 이 개새끼가 진짜.”이를 악문 입술 사이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선우가 스쳐 지나온 수많은 연애 중에는 윤오의 속을 뒤집어놓는 놈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데이트 비용 몇 만 원도 아까워 계산기부터 두드리던 놈.툭하면 잠수를 타 놓고 되레 선우를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가던 놈.선우가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때마다 ‘여자치고는 운이 좋네’라며 그녀의 노력을 후려치던 열등감 덩어리까지.하지만 김민재는 결이 달랐다. 그놈은 염치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었다.결국 마지막은 바람이었다.김민재는 선우와 끝난 뒤에도 윤오를 따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굳이 그 사실을 선우에게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오전 아홉 시.선우가 스코틀랜드로 출장을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목요일.병원은 평소처럼 차분하게 하루를 열고 있었다.재즈 피아노가 낮게 흐르고 접수 데스크에서는 키보드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다.환자들은 번호표를 손에 쥔 채 조용히 순서를 기다렸다.그때, 병원의 유리 자동문이 매끄럽게 열렸다.“……?”터벅터벅.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어딘가 어색했다.5월의 햇살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데스크로 다가왔다. 푹 눌러쓴 모자,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스크, 그리고 목을 칭칭 감은 두꺼운 목도리까지.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꽁꽁 싸맨 상태였다.직원은 순간 달력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안녕하세요. 접수 도와드릴까요?”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네.”목소리마저 이상했다. 일부러 낮게 깔고 누르는 듯한 음성. 직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키보드를 두드렸다.“성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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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다시, 현재. 선우의 집을 나온 윤오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늦은 밤 불이 모두 꺼진 병원 복도를 홀로 지나 원장실 문을 잠갔다. 철컥. 적막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윤오가 한동안 눈을 감았다. ㅡ “놔두세요. 저런 정성은 무시하는 게 예의입니다.” 그날의 내가 그랬었지. 그땐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 윤오가 펜을 천천히 굴렸다. 병원 리뷰. 솔직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익명의 악의 하나쯤으로 흔들릴 병원이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제가 쌓아 온 신뢰는 별 하나보다 훨씬 무거웠고, 이딴 짓을 하는 김민재가 우스울만큼 가소로웠다. 하지만. 인내는 병원 로비에서 끝났다. 윤오가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 속에서 이름 하나를 골라냈다. 한태준. 서울대 학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 지금은 굵직한 민·형사 사건을 도맡는 변호사였다. *** 퇴근하자마자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풀어 던진 민재가 소파에 몸을 처박았다. 띠리리리. 현관 인터폰이 울렸다. “……?” 민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한 번 더. 띠리리리. “아, 누구야.”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ㅡ “김민재 씨 맞으십니까?” “맞는데요.” ㅡ “법원 특별송달입니다.” 잠깐 귀를 의심했다. “예?” ㅡ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나온 특별송달입니다.”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민재는 인터폰 화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잠시만요.” 민재는 얼떨떨한 얼굴로 운전면허증을 보여줬다. “여기 수령 확인 부탁드립니다.” 카드 연체가 있나? 별생각 없이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문이 닫히자 민재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 “뭐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봉투를 대충 찢었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민재가 첫 장을 집어 들었다. “…….”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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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번 주말 사이, 원액 베이스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회의실의 시선이 일제히 에단에게 쏠렸다.에단은 스크린에 띄워진 수정안을 한 번 훑은 뒤, 천천히 선우를 바라봤다.“김 과장님이 낸 아이디어입니다.”잠시.“방향성이 아주 명확해서, 오늘 회의에서 공유할 가치가 있겠더군요.”에단이 턱짓했다.“김 과장님. 직접 설명하시죠.”갑작스러운 지목이었다.하지만 선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에단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자신의 실력으로 답할 차례였으니까.선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샘플 바이알들을 하나씩 챙겨 들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금요일 밤.수십 개의 원액을 비교하고, 향을 맡고, 수치를 뒤집어가며 고민했던 시간들이 손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적었다.[HEARTBEAT]“이번 Heartbeat의 핵심은 단순한 풍미 설계가 아닙니다.”선우가 돌아섰다.“사랑의 기승전결을 한 잔 안에 담는 겁니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우리가 팔아야 하는 건 맛있는 위스키 한 병이 아니에요.”누구의 말을 인용해봤다.그러면서 아주 잠깐.그 누구를 바라봤다.“…….”그는 팔짱을 낀 채 선우를 지켜보고 있었다.시선이 맞닿았다.그런데 에단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입꼬리가 한쪽만 살짝 올라가있었다.꼭 금요일 밤, 실험실에서 나눴던 그 대화를 둘만의 암호처럼 꺼내놓은 기분이었다.선우는 모르는 척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파는 건 한 병의 술이 아니라…….”목소리를 가다듬었다.“그 술을 마시는 순간의 경험이에요.”선우의 시선이 샘플 바이알 위를 천천히 훑었다.“심박수를 바꾸는 경험.”첫 번째 바이알을 들었다.“시작은 버번 캐스크입니다.”뚜껑을 열자 은은한 바닐라 향이 퍼졌다.“처음에는 가벼워야 합니다. 화사하고 달콤해야 해요. 누구든 한 번쯤 손을 뻗어보고 싶을 만큼.”화이트보드에 적었다.[FIRST — 설렘]“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요.”몇몇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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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회의실 바닥을 두드렸다. 그녀가 회의실 따위는 이미 자신의 무대인 것처럼 망설임 하나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짙은 레드 립. 허리선을 따라 매끈하게 떨어지는 화이트 수트.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블랙 헤어와 커다란 선글라스.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밀어 올리는 순간 드러난 눈매가 선명했다. “…….” 그녀가 회의실을 한 바퀴 훑었다. 그리고. “Ethan!” 낯선 친근함이 회의실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Long time no see.” 선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에단 역시 예상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Lucy.”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웃음이 오갔다. 악수로 끝날 거라 생각했던 선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루시가 에단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곤 아무렇지도않게 에단의 팔을 감싸 안았다. “…….” 눈썹 근육이 쑥 올라갈 뻔한걸 겨우 다잡았다. 뭐야, 저 자연스러움은? “You look even better than the last time I saw you in New York.” (뉴욕에서 봤을 때보다 더 좋아 보이네.) 루시가 긴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Still so… charming.” (여전히… 매력적이야.) 루시의 목소리는 전형적인 뉴욕식 영어였다. 끝음을 살짝 끌어올리는 화려한 억양. 자신감이 넘쳤고, 말 한마디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Welcome, Lucy.” (환영해, 루시.) 이어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Still as loud as ever.” (시끄러운 건 여전하군.) 에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영어는 루시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혀를 강하게 굴리는 'R' 발음과 낮고 거칠게 긁히는 듯한 스코틀랜드 특유의 억양. “Loud?” (시끄럽다니?) 루시가 에단의 팔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Oh, honey.”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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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I know a great place nearby.” (나 이 근처에 괜찮은 곳 알아.) 루시가 자연스럽게 에단의 옆에 붙었다. “The steak there is quite similar to the New York style.” (스테이크가 뉴욕 스타일이랑 꽤 비슷하더라구.) Great place. 그 단어를 말할 때만 유독 끝음을 길게 늘였다. 에단은 별다른 표정 없이 재킷을 걸쳤다. “Go ahead, Lucy. I’m fine with anything.” (먼저 가 있어, 루시. 난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선우는 그 말을 듣고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거나면. 누구랑 먹든 상관없다는 뜻이잖아. “Oh, come on!” 그녀가 에단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남자는 별 저항없이 순순히 끌려간다. 퍽 다정한 뒷모습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왜 이렇게 꼴 보기가 싫지? 루시인지 루니인지가 저렇게 팔짱까지 끼고 있는데도 떼어내지 않았다. “…….” 역시 글로벌 카사노바 맞잖아. 선우는 괜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깍. 엑셀 창이 넘어갔다. 딸깍.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 두 사람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에단은. 끝까지 선우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그게 이상하게 서운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선우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사이 팀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장님, 저희도 슬슬 점심 먹으러 갈까요?” 선우는 딱히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할 정신머리가 없었다. 띵. 저 너머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가 사라지는 마지막까지도 그의 팔에 손을 얹고 있었다. “과장님? 안 가세요?” 문이 닫혔다. 그제야 선우가 노트북을 쾅! 닫았다. “가야죠.” 선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안 가요?” 민지가 눈을 동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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