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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 Kapitel von 부정맥 메이커: Kapitel 11 – Kapitel 20

66 Kapitel

10.

​“그것뿐만이 아냐. 어제 점심에도 난리였다니까.”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며?”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어디 쥐구멍이 없을까. 선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대로 코너를 돌아 그들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표였다. “후우.” 코너를 돌자 ​그제서야 메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본의 아니게 전시되어버린 제 사생활이, 타인의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히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여러모로 아주 엿 같은 하루였다. 머릿속에서 어제 수정이 던졌던 경고가 뒤늦게 스쳐 지나갔다.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은 언니 업계 사람들이라니까.’ ​정말 그랬다. 술에 취했었는지, 분위기에 절여졌었는지. 어제의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조심성이 없었다. 점심의 소란과 저녁의 동행이 겹쳐지니, 자신의 처지가 낱낱이 해부되는 기분이었다. 흑역사를 스스로 채굴한 기분이라 선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만 하자. 진짜, 일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쏟아져 나온 인파 사이로 선우가 밀려 들어갔다. 가볍게 치이는 흐름 속에서 형식적인 인사들이 오갔다. 1층 로비로 내려온 선우는 카페 구석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맛은 단 십 원어치도 없었다. 하지만 버티려면 뭐라도 씹어 삼켜야 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공간에는 서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선우는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 봉투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속은 모래를 씹은 듯 까칠했다. 손은 샌드위치를 쥐고 있었지만, 포장지를 뜯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 참았던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땅이 꺼져라 내뱉는 숨결마다 명치의 통증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사랑싸움이니 뭐니 그런 가십 따위는 저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익숙해지면 그만인 소음일 뿐이었다. 그런데. “…….”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책상 위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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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인파가 전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루를 끝낸 사람들 특유의 피곤함과 들뜸이 뒤섞인 공기 그 속에서 선우는 틈 가장자리에 몸을 붙였다.그때였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젯밤 바에서도. 오늘 회의실에서도.안 봐도 알았다.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시선이 따가워 선우는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괜히 확인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좁은 공간 안으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제 직감이 맞다면 에단이 바로 곁에 서 있었다.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그 위로 보이는 검은 구두 한 켤레.잘 재단된 슬랙스 끝단.맞네.“…….”​선우는 솔직히 새로 온 본부장이 좀 불편했다. 침마냥 가늘고 날카롭게 사람 속을 콕콕 찔렀다. 게다가 눈빛 하나로 생각을 읽는 것도 같았다(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그래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더 숙였다. 15F.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갔다.10F.7F.4F.층수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띵.1F.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우도 작게 숨을 내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유쾌, 상쾌, 통쾌!선우는 기분 좋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권윤오한테 연락해야지. 그 순간.​“오늘 수고하셨습니다.”으악. 선우가 흠칫 놀라 뒤돌아봤다.에단이었다.​“본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형식적인 인사 딱 그 정도였다. 에단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선우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오렌지빛 가로등 아래, 풍경처럼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서 있었다.권​윤오였다.눈은 정확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어 있던 선우의 입가가 헤벌쭉해졌다.“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선우의 말 끝이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윤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거의 뛰듯이 달려갔다. 윤오가 헛웃음을 흘렸다.“초딩이냐. 뛰지마.”짐짓 엄한 척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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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전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빌딩 숲은 평소와 다름없이 견고했으나, 문을 닫고 들어선 회의실 안은 전혀 다른 농도의 세계였다. 베이스 작업을 위해 모인 팀원들의 눈빛에는 ‘아르벨라 코리아’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에 대한 거대한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스크린 위로 프로젝트의 이름이 선명하게 내려앉았다.ㅡHEARTBEAT.ㅡ이제는 모두의 심박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에단이 먼저 침묵의 벽을 깼다.​“컨셉이 생명입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원액의 방향성이 어긋나면, 그건 마케팅이 아니라 기만이죠.”​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동의를 표했다.박 팀장이 조심스럽게 원액 확보 계획을 묻자, 에단이 손가락 사이로 펜을 가볍게 굴리며 답했다.​“직접 가죠. 스코틀랜드.”​무심하게 던져진 단어였으나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현지 창고에서 캐스크를 직접 확인하고, 즉석에서 샘플링까지 끝내겠습니다. 김선우 과장님과 제가 가죠. 프로젝트를 설계한 사람이 현장에 있어야 조율이 빠를 테니까.”나? 저요?​주변에 앉아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선우의 머릿속에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코틀랜드? 비행기만 10시간을 타야하는데, 거길 이 인간이랑 단둘이 가야 한다고?​“김 과장님. 문제 없죠?”​“물론입니다.”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국 지사 최고 결정권자의 명령을 거역할 배짱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회의는 그렇게 번복 불가능한 결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선우는 왼손에 캐리어를, 오른손에 여권을 쥔 채 출국장 특유의 소음 속에 서 있었다.파도처럼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전광판을 확인하던 그때였다.“시간 맞춰 오셨네요.”고개를 돌린 선우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커졌다. 평소처럼 각이 살아 있는 수트 차림이 아니었다. 짙은 네이비 니트에 가볍게 걸친 코트. 힘을 뺀 듯 자연스러운 차림인데도 꾸미지 않은 여유가 오히려 더 어른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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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이 열리자마자 스코틀랜드 특유의 차갑고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으, 진짜 쌀쌀하네. 선우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춥죠.” 새로 온 본부장은 눈치 하나는 귀신인 듯했다. 선우가 대답했다. “조금요.” “벗어드릴 옷은 없는데.” 에단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가볍게 상의를 벗는 시늉을 했다. 선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짧게 웃은 에단이 앞장섰다. “5월의 스코틀랜드입니다.” 에단의 낮은 음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공기에는 이 땅의 진짜 주인인 침엽수림의 짙은 송진 향과, 방금 비를 머금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동하시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가느다란 빗줄기는 쉬지 않고 내렸고, 젖은 아스팔트는 회색 하늘을 그대로 품은 채 묵직하게 빛났다. “…….” 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 주던 느긋한 미소는 어느새 흔적도 없었다. 코트 깃을 세운 그는 망설임 없이 빗속을 걸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안도감이 선우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었다. *** 반나절이 넘는 비행 끝에 스코틀랜드에 도착했지만, 시차 덕분에 본사에 들어선 시각은 겨우 오후 두 시였다. “Ethan!” 낮고 굵은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에단과 선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Good to see you.” (오랜만이네요.) 스코틀랜드 특유의 거칠고 묵직한 억양이 귀를 두드렸다. “Long flight?” (비행 길었죠?) “Could’ve been worse.” (나쁘진 않았습니다.) ​에단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상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단의 옆에 선 선우에게 멎었다. “And you are…?” (이쪽 분은?) “She’s with me.” (저랑 같이 온 사람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에단이 선우를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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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Thief.” 캘럼은 곧바로 기다란 금속 도구를 건넸다. 쇠끝이 캐스크를 파고들었다. 툭. 투둑. 이윽고 잔 속으로 떨어지는 액체는 창고의 희미한 잔광을 머금고 짙은 호박색으로 출렁였다. 에단은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잔을 천천히 들어 빛에 비췄다. 색을 보고. 잔을 기울여 점도를 확인하고. 눈을 감은 채 향을 들이마셨다. “…….” 창고 안은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그 짧은 침묵이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한 모금을 머금었다. 혀끝에서 굴리고. 입안 전체에 퍼뜨린 뒤. 천천히 삼켰다. “Too young.” (아직 덜 길들여졌네요.)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친 에단이 말했다. 캘럼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Figured.” (그럴 줄 알았어요.) 에단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방금의 캐스크에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쓸 가치가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벌써 다음 오크통을 향해 있었다. “…….” 선우는 말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압도하던 것은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거대한 창고조차 한 남자의 감각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이 공간의 진짜 주인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심판하는 저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선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 에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말없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Try.”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선우에게 꽂혔다. 네가 가진 본질을 증명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저요?” 곁에 서 있던 캘럼이 투박한 웃음을 섞어 거들었다. “Go on.” (해보시죠.) 선우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 수천 개의 시간이 잠든 숲. 손에 쥔 Thief의 차가운 금속이 긴장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투둑. 나무의 틈 사이로 도구를 밀어 넣자, 둔탁한 마찰음이 고요를 깼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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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직 안 주무십니까.” ​환청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 본부장님.” “시차 때문인지 잠이 안 와서요.” 에단이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금방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낮 동안 몸에 배어 있던 오크와 알코올 향은 사라지고, 깨끗한 비누 향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맑은 액체가 담긴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잔을 선우 앞으로 밀었다. “괜찮으시면.” 권유였다. 거절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우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버번이네요.” “맞습니다.” 에단이 옅게 웃었다. 선우가 한 모금 머금었다. 버번 특유의 결. 옥수수를 베이스로 만든 위스키라서 단향이 또렷하고, 복잡하게 꼬이지 않는다. 순간, 낯익은 손 하나가 기억 속에서 겹쳐졌다. ‘먹어.’ 무심한 얼굴로 고기를 잘라 접시에 올려주던 손. “…….” 선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제는, 윤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지나가야 하는데, 지나가지 않는 것. 정리해야 하는데,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 더 이상은 한계다. 선우는 요즘 그런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짧은 진동.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 휴대폰 화면 위로 선명하게 박힌 이름은 윤오였다. 언제나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선우를 지탱해 온 견고한 지지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다정함이 손끝에 닿을 듯 선명했다. 전화를 받으면, 평소처럼 밥은 먹었는지 묻고, 입국날 몇 시에 데리러 가겠노라 약속하며 선우를 다시 아늑하고 안온한 평화로 복귀시킬 터였다. “…….” 선우의 손끝이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 하지만 끝내 화면은 뒤집힌 채 테이블 위에 내려놓였다. “…….” 에단은 맞은편에서 잔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재촉하지 않는 얼굴. 얼음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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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이랜드의 아침은 태초의 지구를 닮아 있었다. 낮게 깔린 안개가 끝없이 이어진 구릉을 감싸 안고, 짙은 초록과 갈색, 보랏빛 헤더가 겹겹이 쌓인 대지는 수백 년의 시간을 침묵으로 품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그 적막마저도 이 땅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선우의 감각은 전날보다 한층 또렷해져 있었다. 웨어하우스의 묵직한 철문이 열리자, 선우의 감각이 단숨에 깨어났다. 젖은 목재의 냉기. 비를 머금은 흙내음. 오랜 세월 이끼를 품은 돌벽의 습기. 그 위를 수십 년 동안 증발한 원액이 남긴 달콤한 잔향이 천천히 덮어씌웠다. 마치 시간을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압도당했던 공간이, 오늘은 읽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작해볼까요.” 에단의 낮은 목소리가 창고의 정적을 갈랐다.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확히는, 망설임이 사라지고 있었다. 에단이 하나의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거친 오크통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제 확인했던 구간입니다." 선우는 대답 대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이 거대한 오크통 위를 천천히 훑었다. 세월이 조각해 놓은 나무의 결, 미세하게 벌어진 틈, 압력을 견디며 부풀어 오른 나무의 호흡. “…….” 아주 희미한 향 하나가 코끝을 스쳤다. 선우는 손바닥을 캐스크 위에 올렸다. 거친 결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다가. 툭. 짧게 두드렸다. “이건…….” 천천히 입이 열렸다. "생각보다 숙성이 빠르게 진행됐네요." 에단이 묻는다. "근거는요?" "오크가 많이 열렸습니다." 손끝으로 결을 매만지며 선우가 말을 이었다. “숙성 과정에서 알코올과의 교환이 더 빠르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구요. 그래서 초반 임팩트는 분명하지만…….” 잠시 멈춘 뒤 확신을 담아 말을 이었다. "피니시는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합니다. 중간에서 한 번 힘이 풀릴 가능성이 커요. 정적. 창고 안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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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렇다면…….”선우가 잔을 내려놓았다.“혹시 더블캐스크(Double Cask)로 가는 건 어떨까요?”동시에. 조밀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단은 잠시 생각의 심해에 잠긴 듯 멈췄다가, 이내 확신을 베어 문 목소리로 답했다.“그 방향으로 가죠.”​결단은 짧았다."버번으로 골조를 세우고."그가 첫 번째 잔을 밀었다."셰리로 입체감을 만든다."이번에는 두 번째 잔."그 방향으로 갑시다."​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모든 설계가 끝난 듯한 톤이었다.“NAS로 갑니다.”선우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짧은 정적 끝에 선우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히며 우려를 표했다."숙성연도를 버린다구요?"No Age Statement.라벨에 숙성연도를 표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선우가 토끼 눈을 했다.“……조금은 과감한 선택이 아닐까요?”에단이 잔을 들어 빛에 비췄다. 황금빛이 유리 안에서 조용히 흔들렸다.“과감하죠. 하지만 숫자는 친절한 설명은 될지언정, 결과까지 말해주진 않으니까요.”잠시 멈춘 그가 낮게 덧붙였다.“베이스가 되는 원액은, 18년 숙성으로 갑니다. 그 정도의 세월은 퇴적되어 있어야 무엇을 얹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뼈대가 굵어야 화려함도 무게를 갖는 법이죠.”“…….”“하지만.”​아주 짧고 강렬한 악센트. 그가 상체를 조금 더 선우 쪽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단 한 뼘 남짓으로 좁혀졌다. 은은한 위스키의 잔향과 그의 체온이 조용히 선우의 경계를 침범했다.​“우리가 팔려는 건 고작 18년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곧게 뻗은 콧대 아래로 단단한 턱선이 백색 조명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감청색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선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빈틈이 없었다.“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공기, 그리고ㅡ.”“…….”“그때의 감정. 그것들을 숫자가 남겨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할 만큼 사람의 정신을 흐트러뜨렸다.선우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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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출장이 끝났다. 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천천히 밀려들었다.하이랜드에서 맡았던 알싸한 탄취같은 낯선 이국의 향취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 소파 가죽 냄새와 오래된 책 냄새 같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공기가 선우를 감싸 안았다.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던 선우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어, 권윤오다.“윤오야?”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생을 봐와서 이제는 풍경처럼 당연해진 얼굴이었다.“왔어?”​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음절이었지만 선우의 눈동자는 아주 미세한 진동을 그리며 흔들렸다.“너 왜 여기 있어?”“출장이었다며. 어머님한테 들었어.”“……아.”​거기까지였다.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이 그대로 꺾여 접혔다. 선우는 생략된 뉘앙스를 단번에 읽어냈다.출장 내내 그녀는 윤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에단이 만든 혼란에 휩쓸려 다니느라, 혹은 윤오가 남긴 상처를 외면하느라.​ ​“어머니가 반찬 해주셨어. 냉장고에 정리해놨는데. 꺼내줄까?”​윤오는 제 집인 양 냉장고를 열고 반찬들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접시에 옮기고,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일련의 과정들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동선이었다. “…….”선우는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 그 뒷모습을 보았다.​평소 같았으면 벌써 쉼 없는 대화가 공간을 채웠을 시간이었다. 비행기는 어땠는지, 뭘 먹고 누굴 만났는지. 쓸데없는 감상까지 모조리 섞어 이어졌을 말들.그런데 오늘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위잉ㅡ.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대신했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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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 순간.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윤오는 천천히 화면을 꺼냈다.[도유나]​화면 위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데에는 찰나의 유예가 필요했다. 분명 익숙한 이름인데, 뇌의 회로가 인식을 거부하는 듯했다.“…….”윤오는 무표정하게 발광하는 화면을 응시했다. 벨이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집요하게 이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계절이, 예고도 없이 눈앞으로 걸어 나온 기분.​예전 같았으면 이미 망설임 없이 정리됐을 선택이었다. 고민의 축에도 끼지 못했을 종류의 것. 하지만 지금은 그 단순함이 마모되어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수락 버튼 위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화면이 꺼졌다.​[부재중 전화 1건]곧이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ㄴ 잠깐만 볼 수 있어?​간결한 만큼 의도가 선명했다.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과거는 그림자처럼 발치에 따라붙어 있었다.2년이라는 시간 동안 표면적인 균열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결국 먼저 무너진 건 유나였다. '바람'이라는 단어로 요약됐지만, 그 안의 감정은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외로움, 확인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충동적인 선택. 윤오는 그 지리멸렬한 과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붙잡지 않았다.끝낼 이유는 충분했고, 지속할 명분은 없었다.​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다시 시작할 마음 따위는 없다. 그 사실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윤오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했다. 약속 장소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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