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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부정맥 메이커: Chapter 11 - Chapter 20

104 Chapters

10.

“새로 온 본부장님이랑 말이야. 압구정에 그 바 알지.” “어디, 누아르 오크?” “어, 거기. 둘이 같이 나갔어. 어제.” 아뿔싸. 선우의 몸이 하마터면 크게 휘청일 뻔했다. “…….” 선우가 황급히 벽에 손을 짚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벽 너머로 튀어나갈 뻔했다. 부정맥이고 나발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누가 봤어? 어제 누아르 오크에서 에단과 함께 나왔던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망설이면 원액까지 오염됩니다.’ ‘김선우 씨라고 다르진 않을 텐데요.’ 요상한 이야기도 되게 많이 했는데. 혹시 들었나? 생존을 위한 상황 파악. 선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가 황급히 거두었다. “그것뿐만이 아냐. 어제 점심에도 난리였다니까.” “아, 그건 나도 들었어.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며?” 선우가 결국 벽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낮에는 사랑싸움하고, 저녁에는 새로 온 본부장님한테 붙어 있고. 능력도 좋아.”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을까. 선우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한 채 코너를 돌아, 저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목표였다. 발끝이 바빠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코너를 돌아서야 했다. “후우…….” 모퉁이를 돌아서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제야 어깨에 들어갔던 힘도 조금 풀렸다. 본의 아니게 전시된 사생활이 타인의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본인도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남의 입을 거치자 아주 그럴듯한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하…….” 여러모로 아주 엿 같은 하루였다. 그제야 어제 수정이 던졌던 경고가 뒤늦게 떠올랐다. ‘이 바 오는 사람들 절반은 언니 업계 사람들이라니까.’ ……그러게. 발 없는 말은 천 리가 아니라 만 리도 갈 판이었다. 술에 취해서였는지, 분위기에 절여져서였는지. 어제의 선우는 평소답지 않게 경계심이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술이 문제야! 점심의 소란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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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하루를 끝낸 사람들의 피곤함과 해방감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선우는 틈새에 몸을 바짝 붙였다. 빨리 회사를 나가고 싶었다. 정확히는 빨리 윤오를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익숙해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 어젯밤 바에서도 맡았고, 오늘 아침 회의실에서도 맡았던 향. 선우의 몸이 먼저 알아챘다. 안 봐도 알았다. 에단이었다. 뒷덜미가 서늘했다. 괜히 확인했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 선우는 시선을 바닥으로 푹 떨어뜨렸다. 제발. 그냥 조용히 내려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좁은 공간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선우도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슬쩍 바닥을 내려다봤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검은 정장 구두. 잘 재단된 슬랙스의 끝단만 봐도. 진짜 바로 옆에 있네. “…….” 선우는 솔직히 새로 온 본부장이 좀 불편했다.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이 이상할 만큼 사람을 신경 쓰이게 했다. 마치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집요한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남의 생각을 읽을 리가 있나. 그런데 에단 앞에만 서면 자꾸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우는 더 고개를 숙였다.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15F.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10F. 7F. 4F. 층수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선우의 긴장도 조금씩 올라갔다. 괜히 말을 걸지 마라. 그리고 제발 빨리 내려가자. 띵. 1F.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빠져나갔다. 선우도 그 틈에 섞여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후. 살았다. 유쾌. 상쾌. 통쾌! 선우가 기분 좋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권윤오한테 연락해야지.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으악!” 선우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 본부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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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빌딩 숲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었다. 늘 보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회의실 문이 닫히는 순간, 익숙한 서울과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 테이블을 둘러앉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번 프로젝트에 아르벨라 코리아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스크린에 프로젝트명이 떠올랐다. ㅡ HEARTBEAT. ㅡ 이제는 단순한 프로젝트명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자리와 실적, 그리고 아르벨라 코리아의 다음 행보까지 걸려 있는 이름이었다. 에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컨셉이 생명입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원액의 방향성이 어긋난다면, 그건 마케팅이 아니라 기만입니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박 팀장이 조심스럽게 원액 확보 계획을 물었다. 에단은 손가락 사이에서 펜을 천천히 굴리다가 멈췄다. “직접 가죠.” 짧은 침묵. “스코틀랜드로.” 에단의 한마디에 회의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현지 창고에서 캐스크를 직접 확인하고, 샘플링까지 끝내겠습니다.” 에단이 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를 한 장 넘겼다. “원액의 상태를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가장 빠르니까요.”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말을 덧붙였다. “김선우 과장님과 제가 가겠습니다.” “…….” 선우의 손에 쥐어진 펜이 멈췄다. 나? 저요?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설계한 사람이 현장에 있어야 조율도 빠를 겁니다.” 선우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스코틀랜드. 비행기만 열 시간. 그것도— 저 남자와 단둘이. “…….” 삐걱삐걱. 기름칠이 덜 된 로봇처럼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 마침 맞은편에 있던 에단과 눈이 마주쳤다. “김 과장님. 문제없죠?” “……물론입니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거부할 수 있을리가. 한국 지사의 최고 결정권자가 직접 지목한 출장이었다. ​회의는 그렇게 번복 불가능한 결론으로 마침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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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비에 젖은 풀밭과 흙, 멀리 침엽수림에서 흘러온 송진 향이 차가운 공기 사이로 섞여 들었다. “으…….” 선우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춥죠.”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에단이 물었다. 눈치 하나는 귀신같았다. “조금요.” 선우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에단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벗어드릴 옷은 없는데.” 그가 장난스럽게 코트 자락을 잡았다. 정말 벗어줄 것처럼 상체를 살짝 움직이는 시늉까지 했다. “푸흡.” 선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사람. 농담 따먹기도 할 줄 알고. “5월의 스코틀랜드입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젖은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싱그럽고 묵직한 냄새가 따라왔다. 선우가 낯선 공기를 가만히 들이마셨다. 한국에서 맡던 공기와 달랐다. 차갑고, 습하고, 낯설었다. 그리고 어쩐지 위스키와 닮아 있었다. “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바로 이동하시죠.”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가느다란 빗줄기가 쉬지 않고 떨어졌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회색 하늘이 길게 번졌다. “…….” 선우는 우산 아래에서 무심코 에단을 바라봤다. 비행기 안에서 보여주던 느긋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코트 깃을 세운 그는 빗속에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에단은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 선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제 발걸음도 조금 빨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 반나절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본사에 들어선 시각은 고작 오후 두 시였다. 로비를 지나려던 순간이었다. “Ethan!”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우도 함께 돌아봤다. 회색빛 머리칼에 짙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Good to see you.” 오랜만이라는 인사와 함께 남자가 에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Long flight?” “Coul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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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Still like the old way, I see.” (여전히 예전 방식을 좋아하는군.) 캘럼이 뒤편 작업대로 향했다. 잠시 후, 길고 가느다란 금속관 하나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단이 손을 내밀었다. “Give it to me.” 에단이 직접 캐스크 안으로 시프를 밀어 넣었다. 오래된 오크를 통과해 금속관 끝이 원액에 닿았다. 툭. 투둑. 금빛 액체가 유리잔 안으로 떨어졌다.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창고의 희미한 빛을 머금은 위스키가 잔 안에서 깊은 호박색으로 출렁였다. 에단은 곧장 마시지 않았다.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잔을 천천히 기울여 빛을 통과시키고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 잔 속의 색을 좇는 감청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잔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두 번째 숨을 들이마신 순간, 에단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서두르지 않고 아주 작은 양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 입안에 퍼지는 향과 맛을 하나하나 짚어내듯,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 단맛. 오크. 스파이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올라오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이. “…….” 에단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Got something?” 캘럼이 물었다. 에단은 삼킨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 선우도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봤다. 에단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눈. 그리고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눈이었다. 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 “Try.” 그의 시선이 곧장 선우에게 꽂혔다. “……저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다. 네가 가진 감각을 직접 증명해 보라는 것. 선우가 되묻자, 곁에 서 있던 캘럼이 투박한 웃음을 흘렸다. “Go on.” 선우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끝없이 이어진 캐스크. 수천 개의 시간이 잠든 숲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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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 목울대가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삐이이이이이익—. 뇌내 비상경보가 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하하하.” 선우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딱딱거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고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방금 전까지 본부장님의 목울대를 아주 구체적으로 복기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님 말고요.” 에단이 태연하게 맞은편 의자를 빼냈다. 너무 태연해서 선우만 혼자 사고 현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 아니. 왜 또 앉는데. 그의 손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잔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에단은 그것을 선우 앞으로 밀었다. “괜찮으시면.” 권유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없어야 했다. “……감사합니다.” 정상적인 척. 그게 지금 선우의 최우선 과제였다. “…….” 정상적인 척. 선우가 잔을 들었다. 잔을 코끝에 가져가자 달큰한 향이 먼저 올라왔다. “버번이네요.” “맞습니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버번 특유의 결이 느껴졌다. 옥수수를 베이스로 한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 셰리처럼 여러 향이 복잡하게 겹쳐들기보다는, 시작부터 끝까지 비교적 선명하고 직선적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낯익은 손 하나가 기억 속에 겹쳐졌다. ‘먹어.’ 무심한 얼굴로 고기를 잘라 제 앞접시에 올려주던 손. “…….” 선우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아, 그놈의 권윤오. 이제는 윤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저렸다. 지나가야 하는데 지나가지 않는 것. 정리해야 하는데 손을 대는 순간, 더 엉망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선우는 요즘 자신이 거대한 문 하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열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손잡이를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는 안 되겠다. 요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늘 비슷했다. 언젠가는 끝내야 한다. 언젠가는 이 마음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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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하이랜드의 아침은 태초의 지구를 닮아 있었다. 낮게 깔린 안개가 끝없이 이어진 구릉을 타고 흘렀다. 짙은 초록의 목초지 사이로 젖은 갈색 흙이 드러났고, 보랏빛 헤더가 바람을 따라 낮게 흔들렸다. 사람이 이 땅에 이름을 붙이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대지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풀잎을 흔드는 바람과 희미한 새소리뿐이었다. 웨어하우스의 묵직한 철문이 열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선우가 본능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음.” 젖은 목재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냄새. 밤새 비를 머금은 흙의 묵직한 향. 수십 년 동안 습기를 품어온 돌벽의 냄새.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진, 달고 따뜻한 알코올의 잔향. 오랜 시간 동안 캐스크에서 증발한 원액이 공기 속에 남긴 흔적이었다. 선우는 문턱을 넘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어제와 똑같은 웨어하우스였다. 수없이 늘어선 캐스크도, 천장 가까이 쌓인 먼지도, 오래된 나무와 돌벽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선우의 감각이었다. 어제는 끝없이 이어지는 캐스크와 묵직한 냄새, 그 안에 갇힌 시간의 양에 압도당했었다. 오늘은 달랐다. 냄새 하나에도 출처가 느껴졌다. 나무의 습도와 상태가 눈에 들어왔고, 캐스크마다 조금씩 다른 온도와 향이 피부에 닿았다. 어제는 시간을 들이마셨다면, 오늘은 시간의 결을 읽고 있었다. “시작해볼까요.” 에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망설임이 줄어든 만큼 시선은 또렷해졌다. 에단이 한쪽에 놓인 캐스크 앞에서 멈췄다. 그가 손끝으로 거친 오크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어제 확인했던 구간입니다.” 선우가 한 걸음 다가섰다. 거대한 캐스크 위로 시선이 움직였다. 세월이 나무에 새겨놓은 굵은 결. 미세하게 벌어진 틈. 습도와 압력을 견디며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한 나무의 흔적. 선우는 캐스크 앞에서 호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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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렇다면…….” 손끝에 남아 있던 온기가 테이블 위로 옮겨갔다. “혹시 더블 캐스크(Double Cask)로 가는 건 어떨까요?” 말이 떨어진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에단의 시선이 버번과 셰리, 두 잔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 선우가 괜히 무릎 앞으로 손끝을 모았다. 내가 너무 나갔나? “그 방향으로 가죠.” 확신이 실린 목소리였다. “네? 정말요?“ 에단이 첫 번째 잔을 선우 쪽으로 밀었다. “버번으로 골조를 세우고.” 이번에는 두 번째 잔을 밀었다. “셰리로 입체감을 만듭니다.” 두 잔이 나란히 놓였다. 꼭 처음부터 한 세트였던 것처럼. 에단의 목소리에는 이미 완성된 그림이 들어 있었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NAS로 갑니다.” 선우의 눈이 커졌다. “……NAS요?” “No Age Statement.” 라벨에서 숙성 연도를 빼겠다는 뜻이었다. 선우가 토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니…….” 숙성연도는 소비자가 병을 집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숫자이자, 가격표를 납득시키는 가장 쉬운 근거였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더 오래 숙성된 원액이라고 이해했고, 그 시간에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 특히 프리미엄 위스키라면 더했다. 그런데 그걸 지운다고? “숙성 연도를 버린다고요?” 황금빛 액체가 조명 아래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가 잔을 기울이자 빛이 액체를 통과하며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번졌다. “과감한 선택이죠.” 에단의 시선이 잔 너머로 선우에게 향했다. “하지만 숫자는 친절한 설명은 될지언정.”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결과까지 설명해주지는 않죠.” 선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가 팔려는 건 18년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그가 상체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거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선우의 시야에 에단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백색 조명을 받은 콧날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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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5월의 정원은 막 겨울의 흔적을 털어낸 사람처럼 싱그러웠다. 비에 젖은 잔디 위로 연둣빛 잎들이 바람도 없이 살랑였고, 작은 꽃들이 담장 아래에서 제멋대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출장이 끝났다. 제 집의 정원으로 들어선 선우의 머릿속에는 스코틀랜드의 풍경 대신 자꾸만 한 장면이 떠올랐다. “…….” 꿀꺽. 잔을 기울이던 목이 움직이던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 진짜.” 선우가 양손으로 제 볼을 꾹 눌렀다. ‘내 목울대가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누가 마음에 든다고 했어!” 정원 한가운데서 억울함을 호소한 선우가 주변을 휙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있었으면 진짜 이민 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I’d say it was mutual.’ “아니야.” 선우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야.” 역시 해외파라 그런가. 한국 정서와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It was mutual.’ 대체 어디까지 서로였는데. 선우가 괜히 발끝으로 잔디를 툭 건드렸다. 작은 물방울이 운동화 끝에 튀었다. “아, 몰라.” 더 생각하면 또 목울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선우가 얼른 고개를 털고 현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천천히 밀려들었다. 하이랜드에서 맡았던 알싸한 탄취 같은 낯선 이국의 향취는 이곳에 없었다. 대신 소파 가죽 냄새와 오래된 책 냄새 같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공기가 선우를 감싸 안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던 선우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어?”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윤오야?” 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생을 봐와서 이제는 풍경처럼 당연해진 얼굴이었다. “왔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음절이었지만 선우의 눈동자는 아주 미세한 진동을 그리며 흔들렸다. “너 왜 여기 있어?” “출장이었다며. 어머님한테 들었어.” “……아.” 거기까지였다.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이 그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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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도유나] 화면 위에 뜬 이름을 확인하는 데에는 찰나의 유예가 필요했다. 분명 익숙한 이름인데, 뇌의 회로가 인식을 거부하는 듯했다. “…….” 윤오는 무표정하게 발광하는 화면을 응시했다. 벨이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집요하게 이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계절이, 예고도 없이 눈앞으로 걸어 나온 기분. 예전 같았으면 이미 망설임 없이 정리됐을 선택이었다. 고민의 축에도 끼지 못했을 종류의 것. 하지만 지금은 그 단순함이 마모되어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수락 버튼 위에서 잠깐 멈췄다. 잠시후 그대로 화면이 꺼졌다. [부재중 전화 1건] 곧이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ㄴ 잠깐만 볼 수 있어? 간결한 만큼 의도가 선명했다.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과거는 그림자처럼 발치에 따라붙어 있었다. *** 윤오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했다. 약속 장소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어서오세요.” 익숙한 발걸음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예전 자리를 찾아갔다. 창가. 햇살이 가장 예쁘게 내려앉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은 유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가던 시선이 한 번쯤은 그녀에게 머물렀고, 그럼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물론 윤오도 창가 자리가 좋았다.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사랑했다. 햇살이 잘 든다는 이유로, 비 오는 날은 빗방울이 유리를 타고 흐르는 모습이 예쁘다는 이유로, 눈 오는 날은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는 이유로. “…….” 윤오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천천히 시선을 밖으로 흘렸다.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시간만은 잠깐 멈춰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표면적인 균열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결국 먼저 무너진 건 유나였다. ‘바람’이라는 단어로 요약됐지만, 그 안의 감정은 훨씬 복잡하게 얽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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