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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Kapitel

61. 너 놀리는 재미에 산다니까

“여기가 나인협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란 말이지.”모자를 푹 눌러쓴 기태는 경기도 어느 외곽에 위치한 식당 외관을 쭉 훑어보았다. 3층짜리 초대형 건물이었으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기태는 의아해하며 핸드폰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분명히 정현이 알려준 주소였다. “나 같으면 부모님 식당이나 집이라도 정리해서 소송이라도 제대로 걸었을 텐데. 미련한 놈….”기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현이 보내줬던 인협의 부모님에 대한 정보는 놀라웠다.족히 10억은 넘는 브랜드 아파트에, 대형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이었다. 이 정도의 재력이 있는, 아니면 인협을 통해 부를 쌓았을 부모가 왜 인협이 궁지에 몰렸을 적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진 그였다.보나 마나, 그 고지식한 놈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했겠지.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인협은 이전부터 늘 기태의 심기를 거슬렀다.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실력은 좋고 성실해서 알려진 것도 싫었고, 미련할 정도로 올곧은 게 보기가 싫었다. 꼭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인협은 묵묵하고 우직했다. 기태와는 다르게. 약간의 괴롭힘에 인협이 흔들렸다면, 기태는 그를 비웃고는 적당한 때 관뒀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고하고 꼿꼿했던 인협의 모습은 기태의 승부욕을 건드리고 말았다.그의 올곧음은 굽은 기태에게 거슬리는 걸림돌이 되고야 말았으니까.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하게 굴 수 있나 보자. 그렇게 하면서 기태는 속으로 되뇌었다. 사실 승부조작으로 얻게 될 돈에도 솔깃했지만, 동시에 이런 나락으로 자빠뜨리면 잘난척하는 인협의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 있을까 싶은 호기심도 컸다. 결과적으로 그 호기심은 기태를 잡아먹고 말았지만 말이다.“나인협 그 자식이 적당히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텐데.”인협의 경우에 승부조작 이슈를 크게 키우지 않아 경찰에게까지 넘어가지는 않았었다. 수사가 진행되면 진실이 파헤쳐질 거라는 생각에 정현이 내린 조치였다. 그러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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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천천히 함께 가보자

작은 기자회견장. 그곳에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서 인협이 강대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이곳은 우겸이 인맥을 동원해 깔아준 판이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케이비팀 소속이었던, 나인협 선수라고 합니다.”억울하게 누명을 쓴 직후에 이곳에 서는 걸 얼마나 꿈꿨던가. 인협은 제게 시선을 집중한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기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들은 특종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얼굴로 인협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저는 케이비팀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직접 그 증거들을 보여드리려 합니다.”우겸이 미리 공수해 두었던, 케이비팀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이들과 원티드 스폰서 측에서 주고받았던 문자 캡처본, 태우를 통해 만들어둔 녹취록, 그리고 정현과 모비팀 감독이 멱살을 잡고서 실랑이를 벌이던 장면까지. 그 외에도 자잘한 증거들은 더 많았다.인협이 증거들을 공개할 때마다 기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네, 보시다시피 저는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승부조작을 하는 이들로부터 배척받았었고요. 지속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었습니다.”인협이 차분하게 입장표명을 이어가자, 한 기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네, 말씀하세요.”“그렇다면, 왜 이렇게 뒤늦게서야 이 모든 입장을 밝히고 증거들을 밝히시는 건가요? 지금 반년이 좀 넘게 지난 거로 알고 있는데요.”“그건….”인협이 컨펌을 받기 위해 맨 앞자리에 앉은 우겸을 바라보자, 바로 옆자리에 앉은 변호사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그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승부조작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도 팀의 승부조작에 대해 심증만 있었을 뿐, 이렇다고 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요.”“정확히 어떤 협박이 있었죠?”찰칵찰칵. 시간이 지나며 좀 잦아들었던 플래시 세례가 다시 시작되었다. “일단 공식적으로 어떠한 발언이라도 하면 소송을 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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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랑 방식

“인협 선수 부모님 빚투 건은 어느 정도 이렇게 넘어가지는 것 같네요.”“아직도 여론이 반반쯤 되는 것 같습니다. 한번 확 뒤집어줄 이슈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그러게요.”우겸과 변호사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우겸은 잠시 생각에 깊이 잠긴 채로 앉아 있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인협 선수, 남동생이 있다고 했죠?”“네.”“그 동생을 한번 포섭해 볼까요? 그분이 목소리를 좀 내주면, 인협 선수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양날의 검이죠. 만에 하나 남동생 측이 인협 선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면 반대가 될 수도 있고요.”“아하…. 그러네요.”“숱한 케이스를 봐오며 느낀 건, 뭐든 저희가 생각하는 정상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겁니다.”“고로, 인협 선수 동생도 일반적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네, 맞습니다.”“…….”변호사의 말에 우겸의 얼굴이 한결 진지해졌다. “너무 대놓고 접근하지 않고 적당히 떠볼 방법이 없으려나….”“글쎄요.”두 사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 봉길 감독님을 한번 보내보죠.”“네? 곧 신생팀 감독을 맡게 되실 분이요?”우겸의 제안에 변호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언론에 많이 노출도 안 되어서 적당히 인협 선수 지인인 것처럼 접근해서 떠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흐음….”“이 방법도 어느 정도의 리스크가 있긴 한데, 다른 방법보다는 좀 더 나을 거 같네요.”“그렇긴 하죠.”“그럼, 일단 이 방법으로 가볼게요.”우겸은 무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정렬의 집 앞. 또다시 반찬을 들고 그곳을 찾은 지혜가 현관문에다가 노크를 하고 있었다. 초인종을 몇 번 눌렀음에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똑똑똑.“계세요? 정결이 어머니-.”기탁의 아내 지혜의 두드림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정렬과 아이들이 그녀의 집에서 지내게 된 지는 벌써 두 주째. 며칠에 한 번씩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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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나는 그냥 널 사랑해

“아, 가기 싫다.”인협은 에스더가 지내는 방 안 침대에 누운 채로 칭얼거렸다. 그런 그의 옆에 마주 누운 채로 바라보던 에스더는 피식 웃고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어여 가.”“싫은데….”인협은 오히려 에스더에게로 거리를 좁혀올 뿐이었다. “어쭈?”“아니, 좀 아깝잖아.”“도대체 뭐가 아까운 거지?”늦은 저녁 시간. 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협은 이내 에스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제 품 안에 꽉 가둬버렸다.“아, 나인협! 숨 막혀!”“이렇게 안고만 잘게.”“이거 놔라!”인협과 에스더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내 그의 등짝에 에스더의 매서운 손이 꽂혔다.짝! 그의 등짝에서 찰진 소리가 나며 인협은 에스더를 놓아주었다.“아으윽!”“그러게. 놓으라니까!”인협이 알싸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에스더는 재빠르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너무해….”“은근슬쩍 이러는 네가 더 너무한데.”에스더의 반격에 인협은 입술을 내밀고 있다가 그대로 고개를 침대에 묻어버렸다. 팔짱을 끼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더는 그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잠시 표정을 풀었다.“많이 아파?”“쪽팔려.”“뭐가?”침대에 고개에 묻은 채로 고개를 저은 인협이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깜짝이야.”“본능 하나 어쩌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이러고 있는 내가 쪽팔려서 그래.”“…….”인협의 솔직한 고백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한 에스더였다. 그러나 재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고서 무표정을 유지했다.“뭐, 그럴 수 있지. 내가 워낙 매력적이니까.”“응.”어라, 웃자고 한 소린데.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더 울상이 되고 말았다. “네가 너무 매력적인 게 문제야.”“…….”조금 전까지만 해도 멋있는 모습으로 기자회견에서 자기 이야기를 잘도 하더만. 화면 속에서는 그렇게 대단하고 커 보이던 사람이. 핸드폰 속 인협을 보며 에스더는 새삼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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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그깟 돈이 뭐라고

평온한 소원리의 월요일 아침. 소원 초등학교 교실. “선생님! 서울은 어때요?”“서울에는 진짜로 지하철이 왕 많아요?”첫 교시 수업을 맡은 인협은 온갖 질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얘들아, 선생님은 질문을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준비물 꺼내라고 했는데.”“피이…. 좀 알려주세요! 우린 서울에 한 번도 못 가봤단 말이에요.”인협의 심드렁한 말에 토라진 아이 몇몇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잠시 멈칫한 인협이었다. 아아, 우리에게 당연한 게 이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게 아니구나.읍내에서 차로 30분은 더 들어와야 있는 시골의 한 자락. 대체로 조부모님들과 사는 아이들에게 서울 구경의 기회라고는 없었을 것이다.“서울을 한 번도 안 가봤다고?”이 와중에 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치 외국인을 보는듯한 시선으로 서울을 못 가봤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구재형, 쉿. 조용.”평소에 잘난척하기 워낙 좋아하는 재형이라, 그의 말실수를 막기 위해서 인협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재형에게 말했다. 그러자 입술을 한참 동안 씰룩이던 재형은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의 조부모도 못 말리는 재형을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건 인협뿐이었다. “서울 좋지. 선생님이 원래 뭐하던 사람인지 들어본 사람?”“어…. 무슨 선수라고 했었는데.”“맞아요. 메달도 따고 해서 되게 유명하다고 했어요.”기훈과 기정의 말에 인협이 씩 웃었다. 시골 아이들에게 핸드폰이란 아직 사치이기에,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좀 느린 편이었다. 아이들답게 들판을 뛰어다니고, 술래잡기나 하며 노는, 요새 보기 드문, 조금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는 아이들.“리그 오브 카오스 선수잖아. 그것도 한국 전체랭킹 2위라고.”재형은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잘난 척을 시작했다. 우쭐대며 턱을 치켜든 재형을 본 아이들은 ‘쟤 왜 저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고맙다. 구재형. 리그 오브 카오스라는 게임의 프로 선수인데, 선생님이 이제 9월이 되면 선수 생활에 복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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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당연하고 맞는 말

“뭐? 게, 뭐?”“게임이요, 할머니.”“그게 뭐야?”매미 소리가 소원리 하늘을 울리는 어느 여름날. 잠시 할머니 집 공사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갔던 인협이 길로 나오던 중에 갑순과 복란을 마주쳤던 것이다. 그리고 인협은 갑순으로부터 취조를 당하는 중이었다. 인협이 프로 선수라는 소식은 들었으나, 아무래도 그가 어떠한 종목을 맡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인협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갑순의 주름진 얼굴에 더 깊은 물음표가 생겨났다.“그게….. 컴퓨터 아세요? 컴퓨터 안에서 하는 경기인데요.”“으음….”“리그 오브 카오스라는 게임을 하는 거예요. 그게 5대5, 팀으로 경기하는 건데요.”“그렇구나.”“5대5로 대결하고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대의 성을 무너뜨리면 이기는 게임이에요.”갑순의 얼굴에는 주름이 더 깊이 패였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인협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무튼 그렇게 이기면 스포츠 선수들처럼 상금도 받고, 팀에서 절 원해서 돈을 많이 주고서 데려가기도 하고요.”“쯧, 근데 보나 마나 돈은 네 엄마한테 다 털린 거지?”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매우 무례하게 들렸을 질문이었으나, 상대는 갑순이었다. “네, 아주 다 털린 건 아닌데, 거의 다 털렸어요.”“어어? 그래도 남겨둔 돈은 좀 있나 보네.”“제가 번 것의 1퍼센트도 안 되는 돈이긴 해요.”“1퍼세? 뭐?”“백분의 일이요. 백 개 있었으면 그 중에 하나 남았어요.”“뭐어?”인협의 말에 갑순과 복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눈빛 교환을 하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세상 똑똑하게 생겨서는, 완전 헛똑똑이였네.”“네, 제가 그랬더라고요.”인협의 후회가 묻어나오는 말에 갑순은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제 속이 속이겠어. 가족들에게 평생을 다 바쳐 헌신한 뒤, 짐짝처럼 버려지는 건 갑순의 때에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부모는 모든 자식을 사랑한다던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라고, 갑순은 일찌감치 결론을 내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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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여자들의 우정이란

[저는 일 때문에 지금 일어났어요. 오늘도 화이팅이예요.]달달한 봉길의 안부 문자에 유진은 출근을 하는 길에 싱긋 미소 짓고 말았다. 카페 오픈 준비를 위해 영애와 함께 출근하기 위해 그녀의 집까지 걸어가는 길. 어슴푸레한 빛, 그리고 저 멀리 연보랏빛과 파란색이 어우러져 물이 들어있는 이른 아침의 하늘. 단 한 번도 보면서 기분이 좋은 적이 없었던 풍경이 오늘따라 예뻐 보이는 날이었다. 봉길이 떠난 지는 벌써 한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봉길은 떠나있을 때도 유진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이전 연애에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불안했던 적이 워낙 많았던지라, 유진은 자신이 연애에서만큼은 불안형이라고 굳게 믿어왔었다. 그러나 봉길은 그런 그녀를 불안감을 느끼도록 두는 법이 없었다. 매 끼니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는가 하면, 지나가다 보이는 사소한 물건이나 풍경을 찍어서 유진에게 보내주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고는 했기 때문이다. 유진이 물은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신기한 사람이야.”누군가는 이런 봉길을 유난하거나 피곤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는 터였다. 그러나 퍼즐이 들어가고 나온 곳이 딱 맞는 것처럼, 봉길의 방식은 유진에게 딱 맞는 방식이었다. “이런 게 짚신도 다 짝이 있다고 하는 건가.”누군가는 비정상이라고 치부했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아무렇지 않은 일부로 만들어 주는 그였다. 그와는 불안해서 안달복달할 일도 없고, 충만한 안정감을 선물해 주는 관계였다. 무표정이 늘 날마다 이어졌던 것 같은데. 늘 버티듯이 쳇바퀴처럼 굴러가던 매일이 조금은 기대되고 아주 조금은 신이 나기도 했다.앞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살겠지 했던 삶이었다. 부모님과 주아와 이렇게 공기 좋고 조용한 소원리에서 오손도손 살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했던 삶.그런데 그런 더할 나위 없음에 더할 것이 있었던가 보다. 더 이상의 행복을 좇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서 새로움을 몽땅 포기하고 살던 삶에도. “누군가는 아무 고민 없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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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절대 안 놔줘

“서울 가고 싶어! 갈 거란 말이야!” “재형아, 아이고….” 그 시각 본용의 집.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있는 재형에게 정 씨가 한마디를 하자,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재형은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었고, 정 씨는 그 광경에 쩔쩔매고 있었다. 부모의 사랑보다는 다 늙어버리고 서툴기만 한 시골 할머니의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겠거니, 라는 생각에 늘 미안해지고 마는 정 씨였다. “재형아….” “왜 나는 엄마랑 아빠랑 못 사는데. 왜.” 어엉-. 서러운 울음소리가 집안을 울리자, 정 씨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말았다. 재형이 소원리에 남겨지고는 처음으로 직접 언급한 부모님이었다. 조그마한 아이가 뭘 안다고. 어린 재형도 그것이 제 조부모의 가슴을 후벼팔 것을 알았는지, 여태까지는 한 번도 부모를 찾는 법은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고 투정은 여러 번 부렸어도. “왜 나는 이 시골 마을에 있어야 해. 엄마, 아빠-. 왜 날 여기에 두고 간 거야. 어어엉-.” 재형의 울음소리에 정 씨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앞에 다가가 재형을 안아주었다. 그러자 몸부림을 치던 재형이 점점 잠잠해졌다. “미안해. 이 할미가 미안해.” 이전 같았으면, 이 할미가 못 해준 게 뭐냐며 재형을 다그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이 소원리에 부족한 게 뭐냐며 호통을 치며 서운해했을 것이다. 그게 정씨가 나고 자라며 배웠던 유일한 방식이었으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용납받아 본 경험은 다른 이를 또 안아줄 힘을 선물해 주었다. 정 씨는 재형을 꼭 안아주었다.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이 어린 것이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서 이 시골에 와있다는 사실에. 어쩌면 아들의 이혼 과정에 제가 일조했을 수도 있다는 죄책감에. “흑…. 엄마, 아빠….” 3학년짜리였지만, 겨우 3학년짜리였다. 다 큰 척하며 떠들어대도 속은 아이일 뿐이었다. 그만큼 부모의 품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할. “미안하다, 할미가 다 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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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물음표로

“봉길 씨!”“유진 씨.”유진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봉길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그를 불렀다. 분명히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봉길은 태연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꽃다발을 들고서,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보고 싶었어요.”“…….”봉길의 수줍은 고백에 유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간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간 쌓여있던 마음이 기쁨이 되어 벅차오르면서도, 유진은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게 될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유진 씨, 울어요?”“몰라요.”“어? 내가 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불시에 왔죠.”바보 같은 사람. 내 눈물에 당신이 왜 사과하는지.유진은 봉길의 품에 폭 안기면서 생각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그가 뿌린 향수 향과 함께 진득한 땀 냄새가 났다. 아마도 봉길은 바깥에서 긴 시간 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사랑에 실패하고 주아를 키우면서 마음이 많이 무뎌지고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봉길 앞에서는 말랑해지고 말았다. “바보.”“맞아요, 좀 바보예요. 어쩌죠? 유진 씨같이 예쁜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나랑 만나게 되어서요.”이런 게 정말 더 바보 같다니까.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유진은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봉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나도 봉길 씨를 닮아가나 봐요.”누군가를 한 명 바보 만드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일 줄이야.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어버려서 그런가. 유진의 말에 봉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그녀를 더 꼭 안아주고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차에 가요. 너무 덥겠다.”봉길이 유진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보며 걱정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머리는 이미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좋아요.”봉길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싸고선 그녀를 차 안으로 이끌었다. “주아 픽업은 언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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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강릉의 어느 오래된 경양식 돈가스집. 봉길과 유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입에 좀 맞아요?” “네, 맛있어요.” 유진의 소개로 오게 된 곳이었다. 봉길의 얼굴에 깃든 아쉬움을 포착한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되게 좋아하는데.” “네?” “첫 데이트인데, 더 좋은 곳으로못데려가서 지금 미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엇….” 자신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는 봉길을 본 유진은 쿡쿡 웃었다. “나한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맛집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식당이라, 봉길 씨랑 한번 와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요?” “네, 다른 곳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가장 특별한 곳이에요.” “아….” “그러니까, 첫 데이트다운 데이트, 잘 즐겨봐요.” 유진의 말에 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는 돈가스 진짜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파스타집 이런 곳을 데이트 장소로 선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어디서요? 인터넷에서요?” “네. 연애를 따로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도 힘을 빌릴 수 있는 데가 인터넷뿐이네요.” 봉길은 면목이 없는지 시선을 내리깔며 고해성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그런 봉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서툰 모습에서도 절로 묻어나오는 저를 향한 사랑에 유진은 고마울 뿐이었다.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도요. 아마도 평균적인 여자들은 좋아할 수도요?” “네?” “근데, 나는 평균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일단 대학생 때를 제외하고는 늘 이런 소도시에서 자라왔고, 지금은 시골에서 애 하나 키우는 미혼모인데요.” “…….” “그런 사람의 취향은 인터넷에는 알려진 게 많이 없어서 봉길 씨가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요?” “유진 씨.”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데 뒤지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이 키우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으니까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삶이 아주 심플해져요.” 유진의 말에 봉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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