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과부촌의 밤도깨비: Chapter 21 - Chapter 30

34 Chapters

21화

“나를 지키고 어디로 가는 것이오?”이겸은 매향의 문과 연화의 문 사이에서 멈춰 섰다.매향의 문고리에 걸린 붉은 댕기가 밤바람에 문짝을 두드렸고,연화의 손에서는 걸리지 못한 천 끝이 문밖으로 흘러나와 있었다.그는 어느 쪽에도 다가가지 않은 채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연화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그의 시선을 붙들고 있었고,목덜미 아래로 이어진 곡선이 밤기운 속에서 희미하게 일렁였다.“그대가 넘지 말라 한 것은 그대 문이오.”“그러니 다른 문은 넘겠다는 뜻이오?”“그 문을 여는 일은 매향의 선택이오.”연화는 문을 당겼다.붉은 천이 틈 사이로 끌려 들어갔고,빗장이 홈 끝에 닿는 소리가 골목을 잘랐다.매향의 문고리도 잠시 뒤 잠잠해졌으며,이겸의 발소리는 그쪽으로 꺾이지 않은 채 골목 밖으로 멀어졌다.연화는 빗장에 얹은 손을 풀지 못한 채,손안의 붉은 천만 더 깊이 구겼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천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밤중에 빗줄기가 굵어졌다.묵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겸은 대장간 처마 아래 긴 의자에 앉아 있었고,새벽에 화덕을 살피러 나온 난실은 벽에 기대 둔 칼과 젖은 도포부터 보았다.그녀는 문을 열어 둔 채 안으로 들이라는 말 대신 마른 홑이불을 처마 끝에 놓았다.난실의 가슴이 이겸의 젖은 어깨를 스치듯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살짝 부풀어 있었다.“왜 여기서 밤을 새웠어?”“방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소.”“내 방에 들어올 마음은 있고?”이겸은 난실의 문턱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들어오라 하지 않았소.”난실은 더 묻지 않았다.젖은 도포를 받아 기둥에 걸고 화덕 안의 재를 긁어냈으며,이겸도 홑이불을 어깨에 두른 채 젖은 장작과 마른 장작을 나누었다.손등이 한 번 스쳤으나 누구도 붙들지 않았고,빗물이 처마 끝에서 가늘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을 했다.난실의 손끝이 이겸의 손목을 스칠 때마다 미세한 전류 같은 긴장이 두 사람 사이를 타고 흘렀다.해가 오른 뒤 연화가 숫돌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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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문을 열지 않은 것도 내 선택이오.”빗장이 홈 끝에 닿자 이겸은 더 머물지 않았다.산마루에 남은 빛이 사라지기 전 연화의 집 앞을 떠났고,골목 건너 옥련의 주막을 지나칠 때 반쯤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문고리의 긴 붉은 댕기는 안으로 거칠게 끌려 들어갔으며,끝자락이 문지방에 한 번 걸렸다가 사라졌다.문 안에서는 술잔이 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옥련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골목 끝 염색집에는 짧은 댕기 하나가 늦은 바람을 타고 있었다.초희는 처마 밑의 쪽빛 천을 걷다가 그의 발소리에 손을 멈췄고,이겸이 두 걸음 밖에 서자 문고리보다 그의 얼굴을 먼저 바라보았다.쪽물을 머금은 천 끝에서 떨어진 한 방울이 발등 가까이 번졌으나 그녀는 닦지 않았다.“연화가 문을 닫아서 왔소?”“그대가 댕기를 걸어서 왔소.”“오늘은 내 얼굴을 보고 들어오시오.”“보고 있소.”“문에 걸린 댕기만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이겸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문턱에 번진 쪽물이 신발 끝에 닿을 때까지 초희의 눈을 피하지 않다가 짧고 분명하게 이름을 불렀다.“초희.”초희의 손이 문짝에서 멎었다.이윽고 사람 하나 지날 자리를 만들자 이겸은 그제야 문턱을 넘었고,그녀는 스스로 댕기를 거두어 빗장을 걸었다.등잔 아래 물그릇에 번진 쪽빛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뒤에도 닫힌 문 안에서는 더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이겸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초희는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을 파고들며 거칠게 물었다.이겸은 초희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고 그녀의 몸을 벽에 밀착시켰다.숨이 거칠어진 채로 두 사람의 입이 서로를 탐하듯 맞물렸다.초희의 손이 이겸의 도포를 거칠게 벗겨내고,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이겸은 초희의 옷깃을 풀며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초희의 숨이 크게 흔들렸고,그녀는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대로 몸을 비틀며 신음을 삼켰다.이겸이 초희를 바닥에 눕히고 몸을 포개자,두 사람의 체온이 하나로 녹아들며 격하게 뒤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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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그대에게 진실인 일이, 내게는 어째서 배신이 되는 것이오?”창호 밖의 이겸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저녁빛이 걷힌 얼굴은 어둠 속에 반쯤 묻혔고,연화의 손에서는 붉은 천이 더는 구겨질 자리 없이 말려 있었다.“그대가 닫은 문과 초희가 연 문을 한데 묶기 때문이오.”“그대에게는 모두 서로 상관없는 일이오?”“문을 연 사람도, 그때의 뜻도 저마다 다르오.”“그러니 어느 문을 넘든 다른 문에는 빚이 없다는 말이구려.”“없는 빚을 있다고 말하지 않겠소.”연화는 창호를 닫았다.창호짝이 맞물린 뒤에도 그의 발소리는 한동안 들리지 않았으나,밤이 깊기 전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그녀는 식은 밥상을 물리지 않은 채 물주전자를 기울였고,잔이 넘쳐 상 아래로 흐른 뒤에야 손을 멈췄다.넘친 물이 치맛자락 가까이 번졌으나 닦지 않은 채 닫힌 창호의 가는 틈만 바라보았다.이튿날 약초를 말리는 마당에는 쑥과 당귀 냄새가 햇볕에 짙어져 있었다.매향은 묶어 둔 뿌리를 길이대로 나누었고,옥련은 주막에 쓸 말린 귤껍질을 받으러 와 바구니를 내려놓았다.연화가 약초 위에 덮어 두었던 베를 걷어 접자 옥련은 술독 마개 안쪽에 비녀 끝으로 짧은 금 하나를 냈다.“문을 연 밤이라도 새겨 두면 누가 먼저였는지는 잊지 않겠지.”“밤을 세기 시작하면 허락이 차례가 되오.”매향이 부러진 뿌리를 따로 놓자 옥련은 짧게 웃었다.“차례가 없으니 먼저 연 사람만 우스워지는 것 아니오?”월선은 옥련의 손에서 마개를 받아 뒤집어 놓았다.새긴 금은 바닥을 향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밤을 새긴 금이 차례가 되는 순간, 댕기는 허락이 아니네.”옥련은 다시 웃으며 마개를 되찾았다.웃음은 가벼웠으나 비녀 끝은 아까보다 깊이 파고들었고,보이지 않는 자리에 금 한 줄이 더 선명해졌다.마당 밖을 지나던 이겸은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늦췄다.연화와 눈이 마주친 뒤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연화가 먼저 베 끝으로 고개를 숙이자 손아래에서 펴 놓았던 주름 하나가 다시 접혔다.해가 기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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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그대에게 나는 여자가 아니라, 지켜야 할 문일 뿐이오?”연화의 물음이 우물 위에 오래 남았다.이겸은 두 걸음의 거리를 지킨 채 소매 안으로 사라진 붉은 천을 바라보았다.“그대가 열지 않은 문을 내가 정할 수는 없소.”“또 내 선택을 지킨다는 말이오?”“그대가 싫다 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오.”연화는 물동이를 들어 올렸다.넘친 물이 치맛단을 적셨으나 닦지 않았고,그가 비켜 준 길로도 가지 않았다.우물 반대편을 돌아 집으로 향하는 동안 뒤따르는 발소리는 없었지만,등을 향한 시선은 골목 끝까지 남아 있는 듯했다.한낮에 연화는 빈 술병을 돌려주러 옥련의 주막에 갔다.평상에는 씻은 잔 여섯 개가 엎어져 있었고,옥련은 술독 마개 하나를 손바닥 아래 감춘 채 병을 받아 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연화의 눈이 손등에 머물자 옥련은 웃으며 마개를 뒤집었다.안쪽에는 비녀 끝으로 깊게 그은 금 하나가 있었다.“숨겨 새기니 더 초라하더군.”“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오?”“아직은 나한테만 보이려 하오. 내가 연 밤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려고.”“기억과 차례는 다른 것이오.”“알고 있소. 사람 마음이 아는 대로만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옥련은 마개를 손안에서 돌렸다.깊게 그은 금의 가장자리가 거칠게 일어나 있었고, 손끝은 그 자리를 자꾸만 더듬었다.“한 번 열었던 문을 다시 여는 것이 우습소?”“그대가 고를 일이오.”“그 반듯한 대답을 들으면 내가 묻지 않은 것까지 들킨 기분이오.”마침 곡식값을 적으러 온 월선이 마개를 보자 옥련은 손바닥으로 금을 덮었다.“기억을 내거는 순간부터 차례가 되는 법이네.”“내가 연 밤만 기억할 것이오. 남의 문까지 셀 생각은 아직 없소.”옥련은 웃음을 한 번 더 보탰으나 비녀를 꽂는 손이 머리카락을 비껴갔다.손님이 들어오자 그녀는 마개를 상 아래로 밀어 넣었고,비어 있는 술독 입구에 얹은 손은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연화는 주막을 나서며 문턱을 한 번 돌아보았다.마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옥련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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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해가 뜨면 남이 되는 건, 나뿐이오?”옥련의 웃음은 우물가까지 닿았지만 이겸은 대답하지 못했다.두 줄이 새겨진 마개는 문턱 위에 놓여 있었고,연화는 물동이를 들어 올린 채 어느 쪽도 보지 않았다.이겸의 발이 뒤따라 한 번 움직이자 그녀는 골목 어귀에서 멈췄다.“따라오지 마시오.”그는 더 가지 않았다. 연화가 담장 너머로 사라진 뒤 옥련은 마개를 거두어 들였고,두 번째 금을 엄지로 눌러 보며 웃었다.문이 닫힌 뒤에도 이겸은 한동안 우물가에 남아 있었다.옥련의 잔이 놓였던 문턱과 연화가 사라진 골목 사이에서 그의 발은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한낮의 대장간에는 이웃 고을에서 온 목수가 문고리와 빗장에 쓸 쇠붙이를 고르고 있었다.연화는 금이 간 제 집 빗장쇠를 보자기에 싸 들고 왔고, 난실은 새것으로 바꾸는 편이 낫다며 길이를 재 주었다.목수가 문틀 안쪽도 살펴야 한다고 하자 연화는 필요한 값과 시간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해 지기 전에 가서 달아 드리겠습니다.”“오늘 값을 치르겠소.”연화가 전대를 꺼내기 전 이겸이 새 빗장쇠를 집어 들었다.쇠의 무게를 재듯 손바닥 위에서 뒤집는 동안 목수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 갔다.“그대가 고칠 것이오?”“아니오.”“그러면 놓으시오.”이겸은 빗장쇠를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목수가 쇠못의 수를 설명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연화의 얼굴과 그의 손 사이를 떠나지 않았다.난실은 모루 옆에 놓아 둔 붉은 천을 집어 망치 자루에 감았고,문고리에 눌렸던 주름을 펴지 않은 채 매듭을 단단히 조였다.“그 천을 거기 쓰는 것이오?”“한 번 연 문을 자네 차례로 남겨 두진 않아.”이겸의 눈이 목수가 사라진 길로 향하자 난실은 망치를 모루 위에 내려놓았다.“연화는 자네 것이 아니야.”“내 것이라 한 적 없소.”“말은 안 했지. 그런데 남이 고칠 쇠를 먼저 집고, 저 여자가 정한 일을 끝까지 지켜보잖아.”“저 사내를 문 안까지 들였소.”“연화가 부른 목수야. 자네 허락이 필요한 사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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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그대는 다른 여자의 문을 넘으면서, 내 문은 그대 뜻대로 잠가 두려 하오?”이겸은 무릎 위의 낡은 빗장쇠를 내려다보았다.금이 간 자리를 누르던 손끝이 멎었고,연화는 새 빗장에 손을 얹은 채 창호 틈을 닫지 않았다.골목 사이로 스민 달빛이 낡은 쇠의 갈라진 면과 새 빗장의 매끈한 모서리를 서로 다른 빛으로 드러냈다.“잠그려 한 것이 아니오.”“다시 부르지 말라 한 것이 잠그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오?”“그 사내가 다시 오지 않아도 되게 하려 했소.”“내 문이 고장 나면 내가 부를 것이오.”“내가 고칠 수도 있소.”“내가 부탁하지 않은 일까지 그대 몫으로 만들지 마시오.”연화가 창호를 닫자 이겸은 낡은 쇠를 돌바닥에 내려놓았다.이번에는 다시 집지 않았으나 새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연화는 문 안에서 그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빗장에 손을 둔 채 서 있었고,이겸은 대장간 처마를 벗어나면서도 닫힌 창호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아침에 초희는 바느질감을 들고 연화의 집을 찾았다.전날 문에 걸었다가 거둔 붉은 댕기는 쪽빛 천 아래에 접혀 있었고,연화의 바느질감에는 같은 자리를 뜯었다 꿰맨 흔적이 세 겹으로 남아 있었다.초희는 비뚤어진 바늘땀을 손끝으로 짚다가 붉은 천을 꺼내 상 위에 놓았다.“내가 거둔 것이오.”“알고 있소.”“그 사람이 내 문이 아니라 그대 집만 보고 있었소.”“그러니 거둔 것도 그대 선택이오.”초희는 붉은 천을 다시 접었다.“그 말은 늘 옳은데, 들을 때마다 내가 진 것 같소.”“누구에게 이기려 문을 여는 것은 아니지 않소.”“알고 있소. 그런데 그 사람이 보는 곳을 알게 된 뒤부터는 내 마음까지 나 혼자 고른 것인지 모르겠소.”연화는 바늘을 천에 꽂지 못한 채 내려놓았다.초희도 흐트러진 땀을 바로잡지 않았고,두 사람 사이에는 접힌 붉은 천과 엉킨 실만 남았다.바깥에서 염색천이 서로 스쳤으나 어느 쪽도 먼저 고개를 들지 않았다.한낮에 이겸이 염색집 앞을 지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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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그 칼은 누구를 위한 것이오?”이겸은 허리에 다시 맨 칼집에서 손을 떼었다.초희의 담장 아래에는 밤새 칼을 세워 두었던 젖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연화는 두 걸음을 사이에 둔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지며 숨이 가빠지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대 앞에서는 놓지 못했소.”“놓지 못한 까닭을 묻는 것이오.”“다른 사내가 그대 문을 넘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소.”“아무렇지 않은 것과 막을 권리가 없는 것은 다른 일이오.”연화가 돌아서자 이겸은 따라가지 않았다.칼집의 새 검은 끈만 손안에서 한 번 당겨졌다가 놓였고,초희의 집에서는 빗장이 다시 걸리는 소리가 났다.연화의 손가락 끝이 문설주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며,몸이 저린 듯한 열기가 배 속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한낮에는 공동 마당에서 보리쌀을 고르는 일이 이어졌다.금옥은 키에 담긴 낟알을 까불다 갈라진 테에 감아 둔 붉은 천이 풀리자 얼른 붙잡았다.옥련이 그 색을 알아보고 웃었으나,금옥은 천을 등 뒤로 감추지 않고 키 위에 펼쳐 놓았다.그녀의 손길이 천을 매만질 때마다 손목 안쪽이 부드럽게 떨렸다.“문에 걸 것은 아니에요.”“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먼저 답하는군.”“묻지 않아도 다들 그렇게 보잖아요.”그 천은 먼저 입던 저고리의 안고름을 잘라 낸 것이었다.금옥은 닳은 끝을 안쪽으로 접어 키의 테두리에 다시 감았고,문고리에 걸 때와 달리 풀어 내기 어려운 매듭을 지었다.매듭을 지을 때마다 손가락이 천 사이로 미끄러지며,피부가 스치는 감촉에 은근한 열이 올라왔다.“붉은 천이 전부 그 사내를 부르는 물건은 아니에요.”연화가 깨진 낟알을 골라내던 손을 멈추자 금옥은 매듭을 한 번 더 눌렀다.손가락 마디가 단단히 힘을 주며 천을 눌러대는 모습이 선명했다.“지난번에 문을 열지 않은 걸 겁이 나서 그런 줄 아세요?”“그대가 열지 않기로 정한 일이오.”“어리다고 내 선택까지 대신 정하지 마세요.”마당 가장자리로 빈 자루를 나르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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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왜 나만 건드리지 않소?”붉은 천 끝이 이겸의 손등 가까이 흔들렸다.그는 손을 들었으나 연화의 손목에 닿기 전 멈추었고,문틈으로 드러난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손을 내밀어도 되오?”연화는 손목을 내주지 않은 채 붉은 천 끝만 문밖으로 조금 더 밀었다.“천까지만.”그제야 이겸이 손가락으로 천 끝을 잡았다.두 사람 사이에서 붉은 천이 팽팽해졌고,연화는 잠시 그 힘을 견디다가 안으로 당겼다.천이 당겨지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또 천뿐이오?”“그대가 허락한 것이 그것뿐이오.”“내가 묻지 않은 대답까지 참 반듯하게 하는구려.”“묻지 않은 것을 내 뜻으로 허락이라 만들 수는 없소.”이겸은 천을 놓고 두 걸음 밖으로 물러났다.연화가 문을 닫은 뒤에도 발소리는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으나,새 빗장이 걸리는 순간 골목 끝으로 멀어졌다.그녀는 붉은 천을 바느질함에 넣지 못한 채 문 안쪽 못에 걸었고,식은 저녁상도 물리지 못했다.등잔불이 낮아질수록 문밖에 내밀었던 천 끝만 더 짙어 보였다.이튿날 연화는 주막에서 쓸 술거름베를 손질하러 옥련을 찾았다.마당에는 막 걸러 낸 술독이 줄지어 있었고,옥련은 베 끝을 독 입구에 맞추며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드러난 손목을 연화가 바라보는 줄 알면서도 소매를 내리지 않았다.“그 사내가 어젯밤 그대 문에 섰다지?”“누구의 문도 넘지 않았소.”“넘지 않은 밤까지 헤아리게 됐군.”“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옥련은 술거름베를 팽팽하게 당겼다.두 사람이 쥔 천 사이에서 남은 물기가 독 가장자리를 타고 흘렀고,옥련은 웃으면서도 힘을 늦추지 않았다.“내 문에서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밖에 나오면 그대 눈부터 찾더군.이름을 불렸는데도 내가 없어진 기분이 어떤지 아오?”“그러면서도 다시 댕기를 걸 것이오?”“내가 원하는 밤을 그대 상처 때문에 버릴 생각은 없소.”옥련은 베를 술독 위에 단단히 묶었다.매듭 옆에는 붉은 댕기가 접힌 채 놓여 있었고,상 아래에서는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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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왜 연화의 이름은 문밖에 두고 오지 못하오?”이겸은 우물 턱의 세 번째 금과 연화를 번갈아 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옥련은 마개를 집어 들었다.“입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웃음은 여전히 환했지만 마개를 쥔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옥련은 주막으로 돌아가 문을 닫기 전,세 줄의 금이 모두 보이도록 마개를 문턱 안쪽에 세워 두었다.연화는 물동이를 들었고 이겸이 길을 비키자 반대편으로 돌아갔다.그가 따라오지 않았는데도 걸음은 쉽게 느려지지 않았다.한낮의 대장간에서 난실은 망치 자루에 감았던 붉은 천을 풀고 있었다.숯가루가 밴 천은 문고리에 걸렸을 때보다 어두워졌고 가장자리에는 오래 쥔 자국이 남아 있었다.연화가 낫을 찾으러 들어오자 난실은 새 천을 덧대지 않고 같은 것을 다시 감았다.“버리지 않는구려.”“내가 고른 밤을 부끄러워하진 않아. 그렇다고 다시 열겠다는 표식으로 둘 생각도 없고.”난실은 망치를 들어 무게를 가늠한 뒤 매듭을 손바닥 아래로 돌렸다.연화의 소매 안에서 붉은 천 끝이 잠깐 드러나자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오늘 걸 셈이야?”“내가 정할 일이오.”“그래. 그러니까 다른 여자 말에 밀려 걸지는 마.”연화가 낫날을 천으로 감싸는 동안 이겸이 부러진 호미를 들고 들어왔다.난실은 호미보다 먼저 그의 빈 허리를 보았다.칼은 없었고 초희가 갈아 준 검은 끈 자국만 도포 위에 남아 있었다.“연화가 댕기를 걸면 좋겠나?”이겸은 연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대가 원해서 건다면.”난실은 망치를 모루 위에 내려놓았다.“자네가 받아도 되는 마음인지까지 고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다른 여자에게 상처받아 여는 문이라면 기다리겠소.”“상처도 저 여자 마음이야. 자네가 골라 버릴 찌꺼기가 아니고.”연화는 낫을 품에 넣고 대장간을 나섰다.이겸의 발이 따라 움직였으나 난실이 부러진 호미를 그의 앞에 밀어 놓자 멈췄다.연화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소매 속 붉은 천만 더 깊이 밀어 넣었다.해가 기울 무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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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아니면 내 문을 넘지 않은 그대 자신이오?”이겸의 손이 문설주 앞에서 내려갔다.문턱에 걸친 붉은 천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떨어지지 않은 채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그 천 끝이 연화의 손가락을 스치듯 흔들리며,이겸의 숨결이 문밖으로 스며 나오는 듯한 긴장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그대가 무너진 틈을 타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소.”“무너졌는지는 내가 정하오.”“아침이 되면 그대가 스스로를 미워할 것 같았소.”“그 미움까지 그대가 대신 짊어질 셈이오?”연화는 붉은 천을 거두어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새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고, 이겸은 닫힌 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발소리는 곧장 골목 끝으로 멀어졌지만 연화는 등잔이 다 타도록 천을 접지 못했다.손끝이 천의 매끄러운 감촉에 계속 머물렀고, 그 촉감이 몸 안쪽까지 퍼지는 듯했다.문 안에서는 밥그릇의 뚜껑이 기울어 있었고 바느질감에는 바늘 하나 꽂히지 않았다.연화는 붉은 천을 무릎 위에 펼쳤다가 다시 접었으며,닭이 울고서야 문 안쪽 못에 걸었다. 천이 무릎을 스칠 때마다 몸이 미세하게 반응했다.아침이 밝자 연화는 못에 걸린 붉은 천을 접어 소매에 넣고 우물로 향했다.우물가에서는 붉은 댕기의 차례를 정하자는 말이 나왔다.옥련은 술독 마개를 무릎에 올려 세 줄의 금을 가렸고,초희는 젖은 실타래 끝을 거듭 비틀었다.월선이 빈 물동이를 뒤집어 놓자 둥근 바닥이 돌 위에서 한 번 울렸다.“한밤에 두 집이 댕기를 걸면 사내가 고르는 꼴이 되네.”“그러니 먼저 건 집부터 지키게 해야지요.”옥련의 말에 초희가 실타래를 내려놓았다.“먼저 건 사람이 밤까지 먼저 가진다는 법은 없소.문을 여는 때까지 마음은 바뀔 수 있지 않소.”월선은 뒤집어 둔 물동이 바닥에 손을 올렸다.“차례를 적는 순간 허락이 몫이 되고, 몫은 곧 빚이 되네.”옥련이 마개를 소매 아래로 밀었다.“그럼 먼저 건 사람 앞에서 다른 댕기가 흔들려도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보는 일과 빼앗는 일은 다르지.”연화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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