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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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이렇게만 하면 단미에게는 온전히 단미만의 아이가 생긴다.어차피 이혼하고 나면 호건과 더는 얽힐 일도 없었다. 아이는 아무도 모르게 데리고 가서 혼자 키우면 될 것이다.지금 단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어떻게든 호건의 의심을 피해서 오후에 무사히 이혼 절차를 끝내는 것.아직 배가 불러올 시기는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대비하려면 준비해 두는 편이 나았다....오후에 집을 나서기 전, 단미는 일부러 창백해 보이도록 화장했다.거울 속에는 핏기 하나 없는 입술과 창백한 피부, 방금 수술대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 비쳤다. 단미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집을 나섰다.가정법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두 시였다.호건과 약속한 시각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오는 길에도 단미는 작은 거울을 몇 번이나 꺼내 화장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법원 앞에서 안심하고 기다렸다.두 시 반이 가까워지자 협의이혼 확인 절차를 밟으러 온 사람들이 하나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호건은 보이지 않았다.단미는 점점 초조해졌다.‘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전화를 걸어 보려던 때,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조용히 앞에 멈췄다.단미가 핸드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차에서 내린 호건의 반듯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호건이 이쪽으로 걸어오자 단미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괜히 말을 많이 했다가 들킬 것 같았다.“시간은 잘 맞췄네. 들어가자.”단미가 돌아서려 하자 호건이 입을 열었다.“아이... 지웠어?”단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을 죽인 채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응. 지웠어.”일부러 창백한 얼굴을 들이밀듯 올려 보였다.호건은 단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진료확인서 보여줘.”단미의 눈이 커졌다.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 정도로 죽을 사람처럼 꾸몄는데도 안 믿는다고?’“당신 진짜 이상하다. 누가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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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가정법원 근처의 한 카페.두 사람은 구석진 자리에 마주 앉아 있었다.호건은 따뜻한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단미를 바라봤다.“네 생각부터 말해 봐.”단미의 짙은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숨긴 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의사가 내 몸 상태 때문에 임신중절을 권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야. 그건 거짓말 아니야.”“그러니까 아이는 낳겠다는 거지?”뜻을 읽기 어려운 호건의 시선을 마주하자 단미가 컵을 감싼 손가락을 오므렸다.“응, 낳을 생각이야. 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 아이를 핑계로 당신한테 매달리거나 귀찮게 할 생각 없어.”단미는 진지한 눈으로 호건을 바라봤다.“우리 이혼만 하면 나 바로 해외로 나가도 돼. 아이는 내가 혼자 키울게. 약속할게. 평생 이 아이가 당신 앞에 나타나는 일 없게 할게. 그러면 되지?”“평생 내 앞에 안 나타나게 하겠다고?”호건의 눈이 깊어졌다.“이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해.”“네가 하려는 일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 안 해?”단미는 호건의 속을 가늠하지 못했다.“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호건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선택지는 두 개야.”컵을 천천히 내려놓은 뒤 단미를 바라봤다.“첫째, 이혼을 취소한다.”“둘째, 이혼은 한다. 아이 양육권은 네가 가져. 대신 임신 기간에는 나랑 같이 살아.”첫 번째 말을 들었을 때 단미의 표정에는 싫다는 기색이 선명했다.하지만 두 번째 안에서 이혼도 하고 아이도 자신이 키울 수 있다는 말을 듣자 눈이 반짝였다.문제는 마지막 조건이었다.단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황당하다는 듯 호건을 봤다.“내가 임신해 있는 동안 왜 당신이랑 같이 살아야 하는데?”결혼 전에 같이 산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이혼한 뒤에 같이 사는 경우는 처음 들었다.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호건은 태연했다.“아이를 낳기로 했으면 아버지인 나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때까지 책임질 의무가 있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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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그렇게 되면 호건 개인은 물론 JF그룹의 이미지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채림 역시 남의 가정을 깨뜨린 상간녀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결국 호건과 채림의 평판을 지키려면 적어도 단미의 배가 불러 있는 동안만큼은 이혼 사실이 밖으로 새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그래서 같이 살자는 거였구나.’자신을 눈앞에 두고 상황을 통제하려는 것, 그것이 호건이 원하는 것이었다.단미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말했다.“알았어.”“그래서 네 선택은?”단미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차분하게 식어 있었다.“두 번째.”임신 기간이라고 해 봐야 거의 10개월 남짓이었다.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데리고 떠나 자기 삶을 살면 됐다.호건은 원래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왔고 출장도 잦았다.예전에는 집에서 마주하는 시간보다 침대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제 이혼했으니 같은 침대를 쓸 이유도 없었다.한 지붕 아래에서 거의 10개월을 지낸다고 해도 얼굴을 맞댈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거의 10개월을 견디고 남은 인생의 자유와 아이를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단미가 호건을 살피듯 바라봤다.“당신 정말... 양육권 나한테 줄 거야?”“거의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고 버티는 건 너잖아. 엄마인 네가 우선해서 선택할 권리가 있어.”호건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단미의 눈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대신 나도 아버지로서 가질 권리는 있어야겠지. 예를 들면 면접교섭권 같은 거. 인정해?”“인정해.”단미가 호건을 바라봤다.“당신이 양육권을 뺏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 권리를 막을 생각 없어.”“네가 약속을 지키면 나도 약속을 지켜.”단미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얌전히 루아힐에서 지내고 임신 기간 동안 이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호건도 양육권을 다투지 않겠다는 뜻.“나도 조건 하나 있어.”“뭔데?”“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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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두 사람은 가정법원에서 협의이혼 확인 절차를 마친 뒤 곧바로 이혼 신고까지 끝냈다. 모든 절차를 마치는 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건물 밖으로 나온 단미는 접수 확인서를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토록 원하던 이혼이 끝났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다.단미가 서류를 내려다본 채 멍하니 서 있자 호건이 물었다.“짐 챙길 거 있어?”단미가 고개를 들었다.“짐은 왜?”호건이 짧게 답했다.“집에 가야지.”단미의 눈이 커졌다.“이렇게 바로?”‘이혼 신고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말했잖아. 이혼신고가 접수되는 때부터 두 번째 조건 시작이야.”호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단미를 내려다봤다.“오늘 바로 루아힐로 들어와.”안 간다고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저렇게 엄하게 약속을 되새길 필요가 있나 싶었다.단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호건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짐 없어도 괜찮아. 집에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그냥 바로 들어와도 돼.”“싫어. 내가 자주 쓰는 물건은 챙겨서 가져가야 해.”“그래. 같이 가.”단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호건을 봤다.“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짐 몇 개 가지러 가는 데까지 따라붙겠다는 건가.호건은 짧게 숨을 내쉬고 단미의 배 쪽을 한 번 봤다.“대신 운전해 주고 짐도 들어주려고 가는 거야.”단미가 위아래로 호건을 훑었다.“대표는 출근 안 해도 돼?”호건은 분 단위로 일정이 꽉 차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지금은 안 바빠.”“그럼 뭐, 좋아. 가자.”단미는 차 키를 호건에게 툭 던졌다. 대기업 대표가 기꺼이 운전기사와 짐꾼을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집으로 돌아온 단미가 현관문을 열고 뒤에 선 호건에게 말했다.“들어와.”호건이 안으로 들어섰다.단미가 살던 이 아파트에는 전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다.2년 전,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마친 날에도 호건은 이렇게 단미의 짐을 옮기러 왔다.오늘도 짐을 가지러 왔다는 사실은 같았다.다만 그날은 결혼을 시작하러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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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루아힐 집 엄청 비싸잖아. 아이 태어날 때까지 살면 월세도 꽤 나올 텐데?”“식비도 따로 내야 해?”오정란이 해 주는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 식비라면 낼 의향도 있었다.자기 손으로 매 끼니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호건은 앞을 보며 말했다.“임신한 사람 하나 먹이고 재울 정도의 형편은 돼.”“네 생활이 편해야 아이도 건강하게 자라. 그러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단미는 그 말을 제멋대로 해석했다.‘결국 다 아이 때문에 해 주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거네?’‘흥.’굳이 그렇게 선을 그어야 하나 싶었다.자기에게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줄 아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호건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우기지만 않았어도 같은 집은커녕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단미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남은 길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사십 분 뒤 차가 루아힐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단미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손을 뻗기도 전에 뒤따라온 호건이 단미의 큰 캐리어와 작은 캐리어를 먼저 꺼냈다.“내가 들게.”단미는 호건을 한 번 보고 굳이 말리지 않았다.아이 다칠까 봐 그러는 거라는데 막을 이유가 없었다.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오정란이 단미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았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단미가 얼른 정정했다.“이모님, 저 지 대표하고 이제 이혼했어요. 앞으로는 단미 씨라고 불러 주세요.”“네? 이, 이혼이요?”오정란은 깜짝 놀라 호건에게 사실이냐는 듯 시선을 보냈다.단미가 이혼 신고 접수 확인서를 꺼내 보였다.“진짜예요. 여기까지 다 끝냈어요.”이혼 사실은 밖에 숨겨야 했지만 같은 집에서 생활할 오정란에게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계속 사모님으로 알고 있다가는 생활하는 동안 괜한 오해가 생길 수 있었다.오정란은 종이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이혼하신 거예요?”‘대표님이 사모님을 설득해서 다시 데려온 줄 알았는데...’‘오히려 이혼까지 하고 돌아오다니 이해가 안 돼...’“네, 끝났어요.”단미는 확인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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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안방?”단미가 놀란 눈으로 호건을 봤다.“당신이 안방 안 쓰고... 나더러 쓰라고?”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왜?”‘집주인이면 당연히 안방을 쓰는 게 맞지 않나?’단미가 속으로 말했다.호건은 캐리어를 안방 문 앞까지 끌어다 놓고 돌아섰다.“원래 네 취향에 맞춰서 꾸민 방이잖아. 네가 쓰는 게 제일 익숙하고 편할 거야. 그래야 아이한테도 좋을 거고.”또 아이 이야기였다.괜히 단미는 남의 안방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그래도 궁금해서 물었다.“그럼 당신은 어디서 자?”“서재 옆방.”“아.”단미는 시큰둥하게 답했다.호건이 문을 열고 캐리어를 안으로 옮기려 하자 단미가 먼저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막았다.“여기까지만 와. 이제 내가 들고 들어갈게.”“또 하나. 우리 이제 이혼했잖아. 이 방을 내가 잠깐 쓰기로 했으면 여기부터는 내 사적인 공간이야. 같이 사는 동안 내 허락 없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단미가 고개를 들어 큰 키의 호건을 바라봤다.“이 정도 요구는 무리 아니지?”호건은 철저히 선을 긋는 단미를 잠시 바라보다 한 걸음 물러났다.“무리 아니야.”잠깐 뒤 덧붙였다.“안에 내 물건은 하나도 없어. 편하게 방 써.”단미의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내가 나간 뒤로 이 사람도 안방에서 안 잤던 거야?’“고마워.”단미는 시선을 내린 채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호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밖에 남은 호건은 말없이 닫힌 문을 바라봤다.문을 닫자마자 꼿꼿하게 힘주고 있던 단미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한동안 제자리에 선 채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한 달 넘게 떠나 있었지만 방은 달라진 게 없었다. 단미가 살던 때 그대로였다.단 한 곳만 빼고.안방으로 들어선 단미의 걸음이 멈췄다.시선은 침대 머리맡 벽에 닿았다.그곳의 어색한 빈자리 하나가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모든 게 달라졌다고.소파에 잠깐 앉아 있던 단미는 몸도 마음도 피곤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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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단미가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호건에게 답이 왔다.[고 실장... 이 정도도 제시간에 못 해 오면 그 연봉을 왜 받겠어?]‘결국 자기 비서가 얼마나 일 처리를 잘하는지 자랑한 거야?’단미는 어이없다는 표정의 강아지 얼굴이 담긴 짤 하나를 보내고 더는 답하지 않았다.점심에 여린을 만나기로 했으니 옷장에서 원피스 하나를 골라 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한편, 민석에게 업무 보고를 듣던 호건은 단미가 보낸 강아지 짤을 한참 들여다봤다.강아지 옆에는 큼직하게 ‘ㅇㅈ?’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대체 무슨 뜻이지?’보고를 이어 가던 민석은 호건이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방금 보고드린 사업안에 문제라도 있으십니까?”호건은 민석을 보더니 그 짤을 그대로 전달했다.“이거 무슨 뜻이야?”민석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아, ‘인정?’이라는 뜻입니다.”“인정?”“네. 요즘 온라인에서 ‘내 말 맞지?’나 ‘이건 인정할 만하지?’ 같은 의미로 줄여서 많이 씁니다.”“온라인 표현이라고?”“네. 요즘은 메신저에서 짤이나 이모티콘을 많이 쓰잖아요. 글만 적는 것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대화도 재미있어지니까요.”민석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다만 같은 짤이라도 상황에 따라 뜻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대표님이 받은 건 강아지 표정까지 보면... 앞에서 하신 말씀을 살짝 비꼬거나 어이없다는 뜻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설명할수록 호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민석은 뒤늦게 자신이 호건의 약점을 너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말을 돌렸다.“물론 이런 표현은 업무나 공식적인 대화에서는 잘 안 쓰니까 대표님이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호건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됐어. 계속 보고해.”“네...”괜히 말을 길게 했다고 느낀 민석은 곧바로 업무 얘기로 돌아갔다.“해외 확장 사업 1차 일정은...”호건은 민석의 보고를 듣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단미가 이혼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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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식당의 조용한 룸.먼저 도착한 여린이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아 단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여린은 흰 원피스에 플랫슈즈를 신고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단미를 보며 웃었다. 편안하면서도 나른한 분위기가 났다.“오, 옷 스타일도 바뀌었네? 임산부 정체성 제대로 챙겼는데?”여린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단미의 의자를 빼 줬다.“말해도 안 믿을걸.”단미가 앉으며 말했다.“이 임산부 세트, 전부 우리 아이 아빠가 준비한 거야.”“지호건?”여린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빨리 얘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어쩌다 같이 살게 됐어? 벌써 이혼 후회해서 다시 잡으려는 거야?”“상상력 대단하네.”단미는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어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설명했다.다 듣고 난 여린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그러니까 자기 이미지랑 주채림 지켜 주려고 아이 낳을 때까지 같이 살자고 한 거야?”“응.”“지호건 너무한 거 아니야? 자기가 옛사랑이랑 다시 잘해 보고 싶은 거면서 왜 네가 본인 체면까지 세워줘야 하는데?”“아이 양육권만 확실히 지킬 수 있으면 상관없어.”단미는 컵을 내려놓고 옅게 웃었다.“지호건은 좋아하는 사람 지키고, 난 아이를 갖고 싶어.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거래라고 생각하면 돼.”여린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근데 같이 살다가 지호건이 너한테... 음흉한 마음 품으면 어떡해?”단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나 임산부야. 아무리 그래도 임신한 사람한테 달려들 정도로 굶주렸겠어? 더구나 좋아하는 사람까지 돌아왔는데 굳이 대체품을 찾겠냐고.”“같이 산다고 해도 주채림 돌아왔으니까 지호건은 앞으로 집에 더 안 들어올걸. 보름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할지도 몰라.”여린은 단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너 정말 괜찮겠어?”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였다.이제는 그 남자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도 한집에서 살아야 했다.“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단미가 웃었다.“그냥 비싼 집 빌려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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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오후 4시 반이었다.호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는 걸 발견한 단미가 멈칫했다.대화방을 열자 웬 이모티콘이 하나 떠 있었다.당근을 먹던 토끼가 윙크하며 ‘있어?’ 하고 묻는 이모티콘.단미는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비빈 뒤 다시 봤다.틀림없었다.호건의 계정이었다.호건은 메시지를 보낼 때 언제나 짧고 정확한 글자만 썼다.음성 메시지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이모티콘을 보낸다고?’‘그것도 이렇게 귀여운 토끼를?’‘무겁고 진지한 지호건의 평소 이미지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은데...’‘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내가 아직 잠이 덜 깬 건가?’단미는 대화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화면의 토끼를 몇 초간 노려봤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당신 어디 아파?]답은 빨랐다.[아니. 지금 사업 진행 회의 중이야.]단미는 화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머리가 정상이냐는 뜻으로 물었는데 지금 뭐 하는지를 답해 왔다.[나한테 할 말 있어?][오늘 저녁 집에서 먹을 거야. 이모님한테 말해줘.]단미는 황당했다.[당신이 직접 연락하면 되잖아.][이모님이 전화를 안 받아.][왜, 너 집에 없어?][있어. 이따 내려가서 말할게.]몇 초 뒤 호건은 또 토끼가 눈을 깜빡이며 ‘부탁해’라고 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단미는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봤다.이모티콘이라고는 쓰지 않던 딱딱한 남자가 갑자기 이런 짓을 시작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누군가를 즐겁게 해 주고 싶어진 것.최근에 나타난 사람 중 호건을 이렇게까지 바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주채림.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단미는 괜히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다.‘전처를 상대로 연애 연습을 한다고?’단미는 보기 싫은 토끼를 노려보다 빠르게 문자를 쳤다.[앞으로 나한테 이모티콘 보내지 마. 또 보내면 차단할 거야.]연애질은 다른 데 가서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회의 중이던 호건은 이 메시지를 읽고 눈가를 움찔했다. 곧 차갑게 굳은 얼굴로 옆의 민석을 바라봤다.‘여자들은 귀여운 이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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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단미가 아래로 내려갔을 때 김혜정은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앞에 서자 단미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이제 ‘어머님’으로 부르기에는 애매했다.그렇다고 이혼 사실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사모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결국 호칭을 빼고 말했다.“오셨어요?”김혜정이 눈을 들었다. 호칭이 없는 인사에 불쾌한 기색이 잠깐 비쳤지만 짧게 대답했다.“그래.”“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호건 씨 불러 드릴까요?”김혜정이 찻잔을 내려놓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단미를 봤다.“호건이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쁜데 사소한 일마다 불러들이니? 그러면 일은 언제 해?”김혜정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래도 지난 2년 동안 단미는 시어머니에게 늘 깍듯하고 순종적으로 대했다.하지만 이제는 훈계를 들어도 예전처럼 고개를 숙일 마음이 없었다.단미가 차분히 물었다.“그럼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모레 최민찬 회장 부부의 결혼 25주년 기념행사가 있어. 초대장이 본가로 왔다.”김혜정이 금박 초대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모레 저녁에 너랑 호건이가 참석해라.”단미는 초대장을 보고 바로 뜻을 알아챘다.결혼 25주년 기념행사라면 부부가 함께 참석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호건의 아버지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집안을 대표해 호건과 단미 두 사람이 가라는 뜻이었다.“호건 씨가 오늘 저녁 들어오면 전할게요.”김혜정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다 나가기 전 다시 단미를 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위치를 늘 잊지 마. 둘이 따로 나와 산다고 해도 집안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태도와 품격은 지키거라.”“할 일도 없이 집에서 늦잠이나 자는 건 보기 좋지 않다. 다음에 왔을 때는 이런 모습 보고 싶지 않아.”단미는 대꾸하지 않고 예의상 미소만 지었다.“이모님, 배웅해 주세요.”“네.”오정란이 얼른 다가갔다.“사모님, 제가 모시겠습니다.”김혜정이 나간 뒤 단미는 할 일도 없는 김에 소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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