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Chapter 51 - Chapter 60

100 Chapters

제51화

“걱정하지 마. 셋 다 밖에서 함부로 말할 사람 아니야.”호건은 단미의 설명을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여린과 준호가 단미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건 호건도 알고 있었다.그 두 사람에게 이혼 얘기를 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또 단미에게 강성훈이라는 스승이 있고 사이가 가까운 선배가 있다는 이야기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그런데 경남은 그 선배의 제자일 뿐이었다.‘왜 연경남에게까지 이혼 이야기를 했을까?’‘둘이 그렇게 가까운가?’‘또 연경남은 왜 단미의 결혼 상태에 저렇게 신경 쓰는 거지?’호건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차마 더 묻지 못했다.모처럼 단미가 차분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괜히 캐묻다가 또 화를 내고 자신을 무시할까 봐 겁이 났다.“그럼... 이제 다 얘기했으니까 우리 풀린 거지?”호건이 단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단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풀리다’라는 말을 둘 사이에 쓰는 게 조금 이상했다.그래도 답답했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건 사실이었다.“어쨌든... 이 일은 여기까지 하자.”호건에게는 그 말이 화해하자는 뜻으로 들렸다.눈가가 밝아진 호건이 바로 약속했다.“앞으로는 어떤 행사든 너랑 같이 가면 네 옆을 꼭 지킬게. 오늘 같은 일 다시 없게 할게.”‘앞으로?’단미는 다시 이런 돈벌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난 앞으로 당신 행사에 같이 안 갈 거야.”호건은 잠깐 멈칫하더니 곧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너 임신했으니까 사람 많은 데 자주 가는 건 좋지 않지.”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단미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더 설명하기도 싫었다.호건은 단미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지 못했다.시선이 단미 앞의 빈 그릇에 가 있었다.“냄비에 국수가 좀 남았는데 한 그릇 더 줄까?”단미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됐어. 배불러.”“그래도 국수는 고마웠어.”말을 마치고 일어나 그릇을 들려 하자 호건이 물었다.“뭐 하려고?”“먹었으면 설거지해야지.”호건이 그릇을
Read more

제52화

두 사람이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인지 조명 아래 호건의 인상이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였다.단미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고 손을 빼며 두 걸음 물러났다.“사과는 받았어. 그래도 돈은 별개야.”단미가 호건을 바라봤다.“이렇게 하자. 서로 손해 볼 필요도 없고, 내가 한 만큼만 받을게.”호건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무슨 뜻이야?”“행사에 같이 가긴 했는데 중간에 나왔잖아. 일이 반만 끝난 셈이니까 원래 정한 금액의 절반만 받을게. 2천5백만 원.”단미는 진지하게 계산했다.“1억에서 2천5백만 빼면 7천5백만 원이니까 그건 다시 보낼게.”“그러지 마.”호건이 바로 막았다.“7천5백만 원은 아이 분윳값이라고 생각해.”단미가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엄마인 너는 아이 분윳값 벌어도 되고, 아빠인 나는 안 돼?”호건은 여유롭게 말했다.“아버지인 내 권리야. 네가 거절하면 안 돼.”“당신 진짜...”단미는 눈을 크게 뜨고 뭔가 반박하려 했지만 적당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 답답해하는 얼굴을 보던 호건이 손을 들어 달래듯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됐어. 우리 방금 겨우 풀렸잖아. 돈 문제로 또 싸우지 말자.”단미가 피하며 눈을 흘겼다.“말로 해. 자꾸 손대지 말고, 룸메이트.”마지막 ‘룸메이트’에 일부러 힘을 줬다.두 사람은 이제 부부가 아니라 같은 집을 쓰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호건은 말없이 단미를 바라봤다.“좋아. 당신이 그렇게까지 주고 싶다는데.”단미가 턱을 살짝 들었다.“그럼 우리 아기 대신 분유값 잘 받아 둘게. 고마워. 잘 자.”단미는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곧 닫혔다.호건은 잠시 닫힌 문을 보다가 서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다음 날 아침.단미가 8시에 내려왔는데 호건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식탁에 앉으며 시간을 확인했다.오전 8시 6분.오정란이 단미를 보고 주방에서 두 사람 몫의 아침을 가져왔다.단미가 미리 말했다.“이모님, 저 오늘 점심 약속 있어서 집에
Read more

제53화

“그런 뜻 아니야.”채림이 급히 설명했다.“그냥... 어제 그렇게 급하게 가 버리면서 부드 대표도 두고 갔잖아. 그분한테 실례였을 것 같아서.”“실리그룹의 아시아권 총괄 대표잖아. 우리한테 중요한 파트너고.”“그렇게 중요한 상대라는 걸 알면서 왜 그런 사람과의 첫 미팅을 다른 사람 행사장에서 잡았어?”호건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하게 대하는 방식인가?”실리그룹은 해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는 신에너지 기업이었다.주성그룹은 JF그룹의 신에너지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실리그룹과 협력을 성사시키고 핵심 반도체 연구 기술을 프로젝트에 연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지난주에는 주성그룹 회장인 채림의 아버지가 직접 호건에게 부드와 만날 일정을 잡자고 제안했다.다만 호건은 주성그룹이 첫 만남을 남의 개인 행사에 갑자기 끼워 넣을 줄은 몰랐다.너무 경솔한 방식이었다.중요한 파트너에게도 예의가 아니었고, 그 탓에 단미까지 혼자 두고 마음을 상하게 했다.“너 원래 일 처리는 신중하게 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어제 부 대표를 최민찬 회장 부부의 결혼 25주년 기념행사에 부른 건... 네 판단이었어?”호건의 추궁에 채림이 당황했다.“나, 나도 부드 대표가 최민찬 회장님과도 안면이 있다고 해서... 또 너도 어제 참석한다고 들었고. 그래서 공식 미팅 전에 편하게 한 번 만나면 좋을 것 같아서...”“하지만 우리 쪽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자리였어.”이 정도 규모의 중요한 미팅은 일반적으로 민석과 일정부터 조율하는 게 순서였다.어제는 호건의 사적인 일정이었다.아내와 행사에 참석하는 자리였고 수석비서인 민석조차 데려가지 않았다. 애초에 업무를 할 생각이 없었다.그런데 주성그룹 측에서 중요한 고객을 데려왔으니 기본적인 예의를 생각하면 호건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평소라면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부드와 이층에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원에게 단미가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그 상태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채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Read more

제54화

JF그룹 건물에서 나온 채림은 이를 악물었다.정성껏 화장한 얼굴 위로도 분노와 불만이 감춰지지 않았다.호건은 원래 채림의 사람이었어야 했다.처음부터 집안에서도 채림을 호건의 배우자로 생각했다.단미는 자신이 버린 자리를 우연히 차지한 사람일 뿐이었다.이제 자신이 돌아왔는데 윤단미는 왜 아직도 그 자리와 남자를 차지하고 있는 걸까?...같은 시각, 단미는 다이닝 룸에서 여린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어젯밤 일을 들은 여린은 화를 냈다.“너 이혼까지 해 주고 지호건도 알아서 가져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주채림이 왜 굳이 너한테 와서 둘이 잘 지낸다고 자랑해? 이상한 거 아니야?”단미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내가 원래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을 2년 동안 차지한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무슨 자격으로?”여린은 코웃음을 쳤다.“그때 본인이 먼저 떠났잖아. 법적으로 따지면 네가 아내였고 주채림이 끼어든 쪽이야. 네가 물러나 줘야 자기 차례가 생기는 거지.”“사랑 못 받는 사람이 내연녀라는 식의 헛소리도 싫어. 가정 있는 사람인 걸 알고도 끼어드는 쪽이 잘못한 거야.”“주채림이 뭘 하든 관심 없어. 알고 싶지도 않고.”단미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다만 요즘 지호건의 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무슨 뜻인데?”“분명 처음에는 내가 아이 갖는 걸 원하지 않았어. 같이 살자는 것도 날 가까이 두고 상황을 관리하려는 거라고 생각했고.”“근데 자꾸... 뱃속 아기한테는 꽤 진심인 것 같아.”최고 수준의 영양사를 불러 식단을 관리해 주고 임부복과 플랫슈즈도 준비했다.단미가 화를 내면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먼저 사과했고, 배가 불편했다는 말에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어떤 때는 호건이 이 아이가 태어나는 걸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여린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처음 갖는 아이한테 특별한 감정 느끼는 사람 많다잖아. 처음 아빠 되는 거니까 책임감이나 부성애가 생기는 건 자연스럽지 않을까?”단미는 완전히
Read more

제55화

저녁 6시 정각, 호건은 정확히 집에 들어왔다.두 사람은 같이 저녁을 먹었다.단미는 맞은편에 앉은 호건을 보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요즘에는 야근이나 저녁 약속도 없는 건가?’‘일이 없으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게 맞지 않나?’‘왜 꾸역꾸역 집에 들어와 밥을 먹지?’‘주채림이랑 싸웠나?’‘그럴 리 없을 것 같은데...’‘진짜 다퉜다면 오히려 더 달래고 위로하러 다녀야 하지 않나?’호건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왜 계속 봐?”단미는 시선을 얼른 피하며 반찬을 집었다.“안 봤어. 그냥 여기저기 본 거야.”‘나도 참 한심하다.’‘지호건이 다른 여자랑 어떻게 지내든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왜 신경 쓰고 있어?’단미는 괜히 밥을 바쁘게 먹었다.호건은 그런 단미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추석까지 보름도 안 남았는데, 가족들 선물 준비해야 하지 않아? 네 생각은 어때?”단미의 젓가락이 잠깐 멈췄다.이런 일을 호건이 먼저 물어본다는 게 의외였다.지난 2년 동안 명절 선물이나 집안 인사는 전부 단미가 챙겼다.호건이 하는 말은 늘 비슷했다. 하기 싫으면 민석에게 시키라고.지금처럼 같이 준비하자는 태도는 아니었다.단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내 친척이나 친구 선물은 내가 알아서 할게.”밖에서는 여전히 부부처럼 보이더라도 둘이 이혼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이제 서로 집안의 경조사와 명절까지 챙길 관계가 아니었다.“당신 집안은 당신이 직접 챙겨.”호건이 가족들에게 어떤 핑계를 댈지는 호건이 고민할 일이었다.단미는 더는 그 집안 며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명절 선물을 하나하나 정성 들여 골라서 직접 본가에 찾아갈 의무도 없었다.문득 떠오른 게 있어 덧붙였다.“또 우리 아버지가 당신 찾아가서 뭘 부탁해도 들어줄 필요 없어.”“윤성산업이랑 거래할 때도 그냥 회사 대 회사로만 판단해. 우리가 아직 이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특별히 챙겨 줄 필요 없어.”윤성산업은 최근 2년 동안 JF그룹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성
Read more

제56화

준호의 의류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게 아니었다.단미는 전부터 기회가 되면 지분 투자를 해 보고 싶었다.지금은 임신 때문에 본업을 잠시 쉬어야 하니 오히려 이 기간을 이용해 다른 투자처를 알아보는 것도 적절하다고 생각했다.준호와 여린도 단미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마침 며칠 뒤 준호가 쇼핑몰 매장들을 점검할 예정이라 단미와 여린에게 같이 가보자고 했다.단미에게 회사와 브랜드 운영 상황을 직접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었다.세 사람은 점심에 쇼핑몰 4층 식당가에서 같이 식사한 뒤 2층 남성복 구역으로 내려갔다.준호가 삼 년 전 만든 남성 패션 브랜드 ‘어반제이’는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캐주얼 럭셔리 스타일을 내세웠다.젊은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짧은 기간 안에 브랜드 인지도도 빠르게 올라갔다.아직 성장할 여지는 충분했다.세 사람이 어반제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여린과 단미는 팔짱을 낀 채 앞서 걸었고, 뒤의 준호는 두 사람 가방을 전부 들고 있었다.오늘은 대표가 아니라 일반 손님처럼 매장을 보러 온 터라 직원들도 준호의 정체를 몰랐다.“어서 오세요, 어반제이입니다.”밝은 표정의 남자 직원이 다가왔다.“신상품이 막 들어왔는데, 필요하시면 제가 추천해 드릴까요?”“좋죠.”여린이 뒤따라온 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아저씨한테 어울릴 걸로 부탁해요.”직원은 준호가 이미 어반제이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단골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고객님, 이쪽 제품이 이번 신상품인데요...”준호가 직원의 설명을 듣는 동안 단미는 천천히 매장 안을 둘러봤다.상품 진열은 깔끔했고 손님도 몇 팀 있었다.젊은 직원들은 모두 활기차고 친절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때 앞쪽 피팅룸에서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나왔다.짙은 녹색 계열의 상의에 흰색 바지를 입었는데 간결하면서도 세련됐다.단미가 얼굴까지 확인하고 놀라 불렀다.“경남아?”경남도 목소리를 듣고 이쪽을 봤다.“단미 누나? 누나가 여긴
Read more

제57화

연인끼리는 정말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여린의 짐작대로 준호는 경남을 다음 시즌 룩북 모델로 쓰고 싶어 했다.경남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자 준호가 곧바로 단미에게 말했다.“진짜 우리 브랜드랑 잘 맞아. 키랑 체형도 좋고 얼굴 분위기도 완전 딱이야.”“단미야, 네가 한번 물어봐 줘. 모델 할 생각 없는지. 출연료는 맞춰 줄 수 있어.”“쉽지는 않을걸.”단미가 말했다.“경남이네 집이 대대로 옥공예와 고미술품을 다뤄 온 집안이야. 돈이 필요한 애도 아니고, 본인도 고미술 복원 쪽에만 관심이 있어서 모델 일에는 흥미 없을 가능성이 커.”여린이 조금 놀랐다.“그런 집안 아들이야?”“응.”집안의 인맥과 배경이 없었다면 경남이 그렇게 어렵게 이름난 강성훈 밑으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준호는 포기하지 않았다.“전속은 아니어도 이번 시즌만 찍는 건 어떨까?”단미가 잠깐 생각했다.“내가 따로 물어볼게.”지금 준호 앞에서 바로 묻는 건 조금 곤란했다.경남이 하고 싶다고 하면 문제없지만 거절하고 싶을 경우 서로 민망해질 수 있었다.준호도 그 점은 이해했다.“그래. 그럼 연락 기다릴게.”경남은 원래 세 사람에게 저녁까지 사주겠다고 했지만 준호가 다음 매장 점검 일정이 있다고 해서 다음으로 미뤘다.단미가 다음에는 자기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경남은 입어 본 옷값을 계산하고 먼저 떠났다.그 뒤 준호는 단미를 다른 외부 매장에도 데려갔다.매장 점검이 끝난 뒤에는 어반제이 본사까지 함께 가 회사의 운영 구조, 현재 팀 구성, 향후 확장 계획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단미는 꼼꼼하게 들었다.나올 때는 디자인 보드 일부와 스타일링 카탈로그도 챙겼다.투자할 생각이라면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회사 정도는 제대로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세 사람이 회사를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어서 다시 함께 식사를 했다.준호와 여린이 단미를 루아힐까지 데려다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8시가 넘었다.단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거실 소파에서
Read more

제58화

사흘 연속으로 호건은 정확히 제시간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식탁 맞은편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혼자 앉아 식사하며 빈 의자를 바라볼 때마다 허전함이 몰려왔다.그 허전함 뒤에는 짙은 죄책감이 따라붙었다.고작 사흘이었다.호건은 사흘 만에 혼자 기다리고 혼자 밥 먹는 적막함을 견디기 힘들다고 느꼈다.그런데 지난 2년 동안 단미는 셀 수 없이 많은 나날을 이렇게 보냈다.‘그때 단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이런 생활이면 나를 떠나고 싶어지는 게 당연했겠지.’오늘은 모델 촬영 마지막 날이었다.단미는 준호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경남이 보수도 받지 않고 촬영을 도와준 게 고마워 준호는 아껴 둔 와인까지 꺼냈다.경남이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반짝였다.“준호 형, 이거 맛있네요.”그러다 단미 앞에는 와인잔이 없고 따뜻한 물만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단미 누나는 안 드세요? 이거 진짜 괜찮은데.”단미가 웃었다.“나 임신했어. 술 못 마셔. 너희끼리 마셔.”경남은 이혼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두어 달만 지나면 배도 불러와서 티가 날 텐데 굳이 임신 사실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임, 임신이요?”경남은 놀랐다가 곧 이해한 듯 단미를 바라봤다.“그래서 지호건 대표님이랑 아이 태어날 때까지 이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 거예요?”“눈치 빠르네.”경남 왼쪽에 앉은 준호가 어깨를 두드렸다.“단미가 이런 얘기를 너한테 한다는 건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야. 밖에서 말해야 할 거랑 말하면 안 되는 거 구분할 수 있지?”“네. 당연하죠.”경남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다만 단미를 다시 바라보자 축하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임신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이미 이혼한 상태에서 임신중이라면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것 같았다.차마 ‘축하한다’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단미는 경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미소를 지었다.“나 지금 잘 지내. 우리 아기와도 행복하고.”“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아껴 주는
Read more

제59화

차 안에서 갑자기 나타난 호건을 본 단미는 당황했다.“당신 왜 여기 있어?”“네가 기사님한테 전화했을 때 마침 나도 밖에 볼일 보러 나가는 길이었어.”운전석의 기사는 백미러로 거짓말하는 호건을 슬쩍 봤다.‘그랬던가?’단미는 얼른 말했다.“그럼 난 다른 차 불러서 갈게. 당신 일 보러 가야 하잖아.”“볼일 끝났어. 나도 집으로 가.”호건이 차에서 물러나려는 단미를 바라봤다.“타.”“알았어.”단미가 차에 올랐다.차가 출발하자 안에는 묘한 어색함이 흘렀다.단미가 먼저 헛기침했다.“당신이 차 쓰고 있으면 기사님이 말해 주면 되잖아. 나 혼자 차 불러도 편해. 굳이 굳이 돌아서 데리러 올 필요 없어.”“이 근처에서 볼일 보고 있었어.”“아, 그래?”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조금 뒤 호건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네 선배 제자랑 밥 먹었어?”“응.”조금 전 경남이 계속 자기 옆에 있었으니 차 안에서도 봤을 것이다.“둘이 친해?”호건의 말투에는 묘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그냥 괜찮은 사이야.”“며칠째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오던데 뭐 했어?”단미는 대충 둘러댔다.“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친구들 만나서 놀았지.”“연경남 만났어?”말투가 차가워진 걸 느낀 단미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누구 만나든 당신이랑 상관없잖아, 전남편 씨.”‘전남편 씨’라는 말에 호건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숨을 한 번 고른 뒤 말했다.“네가 누구 만나는지 내가 막을 수는 없어.”“그런데 단미야, 너 임신했어.”단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임신하면 집 밖에도 못 나가?”“너 며칠째 집에서 저녁 안 먹었어?”호건의 눈에는 은근한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밖에서 먹는 게 집에서 맞춰 주는 식단보다 나을 것 같아?”“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단미가 임신한 걸 아는 여린은 어반제이 회사에서 먹을 때도 집에서 건강한 음식을 따로 준비해 보내 줬다.루아힐의 영양식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이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해. 내
Read more

제60화

단미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자 호건은 말없이 키위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가슴 한가운데가 묘하게 시큰했다....민석은 마당에 세워진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호건이 나오자 뒷문을 열었다.“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그래.”호건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탔다.차는 곧 강울시 외곽을 향해 달렸다.민석은 자기가 잘못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대표의 기분이 유난히 가라앉아 보였다.헛기침을 한번 한 뒤 업무를 시작했다.“대표님, 앞으로 며칠간 일정을 먼저 보고드리겠습니다.”“응.”“오늘 현장 점검이 끝나면 사업기획 발표회의가 있고, 회의 뒤에는...”JF그룹 대표인 호건의 일정은 이런 식으로 언제나 빈틈이 없었다.지난 몇 년 동안도 쉴 새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그런데 오늘은 빼곡한 일정을 듣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답답했다.머릿속에는 단미가 했던 말만 반복됐다.“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친구들 만나서 놀았지.”“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누가 맨날 임산부랑 놀아 주겠어.”민석이 계속 일정을 설명하던 중 호건이 갑자기 말했다.“추석 당일 일정 비워.”민석이 멈칫했다.일 년 내내 쉬는 날이 거의 없는 대표가 한 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추석 당일... 쉬시려고요?”호건이 눈을 들었다.“직원들도 연휴 다 쉬는데 나는 하루도 못 쉬어?”“아닙니다. 당연히 쉬실 수 있죠.”민석은 바로 눈치챘다.아침에 집에서 나온 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갑자기 휴일까지 잡는 걸 보니 십중팔구 단미 때문이었다.“명절은 가족과 보내는 날이잖습니까. 대표님께서 바쁜 일정 중에 일부러 시간을 비워 같이 보내신다고 하면 사모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호건의 가라앉은 눈에 희미하게 빛이 돌아왔다.결혼 첫해 추석이 떠올랐다.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 마당에는 작은 상이 차려져 있었다.예쁘게 담은 과일과 송편을 비롯한 달맞이를 하며 먹으려고 준비한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얇은 옷을 입은 단미는 혼자 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Read more
PREV
1
...
45678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