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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담다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98 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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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강민재는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들려온 유봄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담담했다.“오늘도 늦었네요.” 그는 잠시 웃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지난번 당신 발표… 그렇게 대단했다면서요.”전화기 너머로 잠시 숨 멈추는 기척이 느껴졌다.“그런 얘기, 왜 나한테는 한 번도 안 했습니까?”서운함이라기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운 목소리였다.“나는…”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낮게 덧붙였다.“당신 일이라면 사소한 것까지 다 알고 싶은데.”잠깐의 정적.“앞으로는,”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당신의 모든 걸,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줘요.”질투도, 자랑도, 걱정도 아닌 그저 그녀의 삶을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사람의 고백이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강민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진심으로 축하합니다.”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진짜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당신 정말 대단해요.”전화기 너머에서 유봄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고마워요.”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앞으로는… 제일 먼저 당신한테 말할게요.”그 한마디에, 강민재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제일 먼저.그 말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가슴이 괜히 벅차 올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눌러야 할 정도였다.“약속한 겁니다.”애써 담담한 척 말했지만, 지금 그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질 만큼 행복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유봄의 로봇 복강경 발표 소식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번졌다.미국 의료계에서 시작된 반응은 곧 한국으로도 전해졌고, 특히 외과 의사들 사이에서는 “젊은 한국인 의사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퍼져나갔다.국내 학회 단체 채팅방과 의료 전문 기사에도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그 무렵.병원 아침 회의실.세인트 존 메디컬센터로 떠난 딸의 소식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유재원 원장은 평소처럼 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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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이라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책임.가정.미래.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그를 향해 다가오는 단어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안에서는 기쁨이 올라오지 않았다.설렘도, 벅참도 없었다.대신,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 묵직함.마치 보이지 않는 족쇄가 천천히 발목을 감아오는 느낌이었다.도망칠 수 없는 선택.되돌릴 수 없는 현실.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그가 꿈꾸던 순간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자신이 그려왔던 미래는 늘 한 사람과 함께였다.유봄.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고, 자신과 그녀를 닮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녀와 웃으며 살아갈 삶.그 그림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다른 여자를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다른 이름을 미래에 대입해본 적도 없었다.그래서 지금 이 현실이 더 낯설었다.그날을 그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유지원은 울먹이며 말했다.“책임지세요.”그날 밤, 당신이 자기의 순결을 빼앗아갔고 지금배 속에 당신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그 말은 그에게는 충격이었다.순간적으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하지만 그녀는 무너질 듯 울며 매달렸다.“그럼 나 죽어버릴 거예요.”“내 인생은 이미 망가졌어요…”눈물과 절박함, 극단적인 말들.그녀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고 그는 그 앞에서 쉽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사실인지 아닌지, 자신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결국 그는 도망치지 못했다.떠맡는 쪽을 선택했다.사랑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이름으로.하지만 그 선택은 그가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삶의 방향으로 그를 밀어 넣고 있었다.그는 문득 깨달았다.자신이 알고 있던 ‘행복’이라는 단어가 어디선가 사라져버렸다는 걸.한때는 너무도 선명했다.누군가와 함께 웃고, 서로를 닮은 아이를 안고, 하루의 끝에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삶.그 그림 속에는 늘 한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 있는 현실은 그가 그려온 미래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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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가운데, 따뜻한 차가 놓인 테이블 앞에서유지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니께는 이미 말씀드렸어요.”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며 덧붙였다.“이제 할아버님이랑 아버지께도 정식으로 말씀드리고… 상견례 날짜를 잡으려고 해요.”차분하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그 말을 듣는 순간, 최윤정 여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그래, 그래야지.”이미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어른들께 먼저 말씀드리고, 좋은 날로 잡자. 배부르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어.”거실에서 다정하게 며느리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이미 머릿속에서는 웨딩홀과 날짜를 고르고 있었다.상견례 날짜, 어른들께 드릴 말씀, 예식장 이야기까지 거실을 오가는 대화는 들뜬 공기로 가득했지만 이진성의 마음은 점점 더 가라앉고 있었다.모든 말이 마음 위에 하나씩 얹히는 짐처럼 느껴졌다.결국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방에 좀 들어갔다 올게요.”아무도 붙잡지 않았다.이미 결혼은 기정사실처럼 굳어가고 있었으니까.문을 닫고 혼자 남은 방 안.숨이 조금은 편해졌다.그리고, 어김없이 한 사람이 떠올랐다.유봄.만약 지금 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녀였다면.자신의 어머니가 “우리 며느리”라 부르며 미소 짓는 대상이 그녀였다면.그는 아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것이다.가슴이 이렇게 답답하지도, 발목에 족쇄를 찬 듯 무겁지도 않았을 것이다.눈을 감자 그녀의 담담한 표정과 차분한 목소리가 떠올랐다.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미 멀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진짜로 원했던 미래는 아직도 그 이름을 중심으로 서 있었다.유지원은 평창동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들떠서 말이 많았다.“아기 태명은 뭐로 할까요?”“신혼집은 병원 근처로 잡으면 좋지 않을까요?”“어머니가 해주신 그 요리, 다음 주에도 먹고 싶어요!”이진성의 차량이 평창동 저택 앞에 들어서자마자,골목 끝에서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자 유철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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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재와 유봄은 각자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서로를 챙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낮에는 병원과 일터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이 맞으면 함께 저녁을 먹으며손을 맞잡고 조용한 거리를 산책했다.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발걸음을 맞추고, 가벼운농담과 웃음 속에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주말이면 볼티모어 근처의 한적한 공원으로 향했다.푸른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 유봄은 책을 읽고, 강민재는 그녀의 옆에서 몰래 웃으며 관찰했다.가끔은 서로의 입에 과일이나 간식을 먹여주며 사랑스럽게 장난을 치고,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며 속삭였다.햇살 아래, 서로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며 한창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처럼 다정하고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온기 속에서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그리고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그들이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걸을 때,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 지나가는 행인들, 모두가 그 아름다운 한 쌍에게 한 번쯤은 시선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들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근한 설렘과 부러움을 남기고 있었다.햇살과 웃음 속에서 걷는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쩌면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겨울의 시작, 공기는 차갑지만 맑고 맑은 하늘에 햇살이 희미하게 내려앉았다.강민재는 어깨가 넉넉한 베이지 톤 울 코트 위에 짙은 네이비 스웨터와 검은 슬랙스를 매치했다.부드러운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장갑을 낀 그의 모습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도 묘하게 따뜻함을 풍겼다.유봄은 아이보리 색 롱코트에 깔끔한 흰 니트와 검은 스키니 팬츠를 입었다.그녀의 머리칼은 가볍게 바람에 흩날리고 맑은 피부와 하얀 얼굴은 겨울 햇살 아래 더욱 빛났다.목도리로 살짝 얼굴을 감싼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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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과 이진성이 들어선 아파트는 40평대, 넓고 여유로운 구조였다.거실은 큰 통창으로 채광이 충분히 들어와 밝고 환했다.소파는 부드러운 베이지 톤 가죽으로, 그 앞에는 깔끔한 원목 소파 테이블이 놓여 있어 세련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벽 한쪽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TV와 음향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 책장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책과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었다.주방은 최신형 가전으로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인덕션과 오븐, 냉장고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통일되어 있고, 상부장과 하부장은 화이트 톤으로 마감되어 밝고 깔끔했다.식탁은 6인용 원목 테이블로, 유리로 덮인 상판이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침실과 방들도 넓고 채광이 좋아, 깔끔하게 정장과 서랍장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모던하면서도 따뜻한 톤으로 꾸며져 있어 집 안 전체가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유지원은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하지만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그럼… 밖에서 물이랑 음료 좀 사올게요.”그녀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사이, 이진성은 손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그 순간, 유지원은 문득 자신이 핸드백을 이진성의 차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멈칫했지만, 곧 식탁 위에 놓인 그의 지갑과 차키를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일단 그의 돈으로 사야겠다.’유지원은 지갑을 열었다.그 안에는 이진성과 유봄이 함께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이진성은 유봄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고 활짝 웃고 있었고, 유봄은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유지원은 예상치 못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손에 든 지갑이 조금 흔들리며, 가슴 한켠이 묘하게 뜨거워졌다.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이진성이 유지원의 손에 든 지갑을 재빨리 낚아채듯 빼앗았다.그리고 남의 지갑을 왜 함부로 만지냐고 화를 냈다.유지원은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채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아직도… 유봄을 못 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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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막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로비를 지나칠 때였다.멀리서 유지원이 로비 옆 카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이자 그는 서둘러 그쪽으로 향했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로비 밖에서는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던 유지원 앞자리에 의사가운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먼저 알은체하기 뭐해서, 유지원과 등을 맞대고 뒷자리에 앉았다.심미숙은 조심스레 아기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말했다.“나, 이거 들키면 병원에서 쫓겨난다. 아무도 모르게 조심해야 해.”그러자 유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고 말했다.“역시 너밖에 없다니까.”그녀는 초음파 사진을 소중히 받아들고, 살짝 웃음을 지었다.심미숙은 사진을 건넨 뒤,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사진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유지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뭐… 아침에 작은 접촉사고 하나 내고 유산됐다고 하면 되지.”그 말에 심미숙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유지원은 태연하게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심미숙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너랑 결혼하는 남자는 참 둔하긴 둔하다니까!아무리 인사불성이었어도, 자기가 관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의심도 안 하냐, 호호호.”유지원은 그 말에 얼굴에 살짝 웃음을 띠며, 친구의 거침없는 말투에 속으로 끄덕였다.그날 그는 그녀에게 격렬한 키스를 퍼붓고 유지원의 옷을 벗기다 말고 그녀를 안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유지원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게 바로 그 남자의 매력이야.얼마나 착하고 능력 있는지 몰라.유봄, 그 계집애한테 뺏기기 싫어서… 내가 선수쳤지.”말끝에는 장난 섞인 투정과 동시에, 그를 향한 애정과 속내가 묻어나 있었다.심미숙도 유봄이라는 이름을 듣자 웃음을 터뜨렸다.“유봄? 아, 나도 기억나.의대에서 완전 퀸카였지.남자애들 걔 보려고 강의실에 몰려들고…나도 유봄, 걔 재수 없었는데, 네가 이렇게 속 시원하게 해주니까 다 후련하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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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과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유지원 마음 한켠에는 혹시 그는 책임감이 강한 남자니 결혼식장에는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이미 여기저기 결혼 소식을 알린 하객들의 수를 떠올리면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양쪽 집안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서로 눈치를 보며 초조함을 감추려 애썼지만, 모두의 가슴 속에는 불안과 긴장이 뒤엉켜 있었다.결국 끝까지 이진성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유재원과 김지숙은 참다못해 분노를 터뜨리며 이진성의 부모에게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이진성의 부모도 아들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화가 치밀었다.속으로는 아들의 무책임함과 예의 없는 행동에 분노했지만, 겉으로는 체면과 상황 때문에 말 한마디 쉽게 내뱉지 못한 채 서로를 째려보듯 바라보며, 답답함만 커져갔다.신부대기실에 앉아 있던 유지원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화장이 다 번져 있었다.분노와 억울함을 참지 못한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부케를 힘껏 벽에 던져버렸다.꽃잎과 줄기가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고,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답답함과 상실감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유지원은 끝내 확신했다.이진성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라고.결국 그의 마음에는 아직도 유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고.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유지원의 가슴속에서는 참아왔던 분노와 질투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일주일이 흘렀다.유지원의 집은 초상집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한때 결혼 준비로 분주하던 거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고, 하객 명단이 놓여 있던 테이블은 치워졌지만 공기 속에는 아직도 수군거림과 망신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결혼식 당일 신랑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주변에 모두 퍼져 있었다.체면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던 집안에는 그 어떤 말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유철중조차 요즘은 말수가 부쩍 줄었다.평소라면 유지원 모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였지만,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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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은 굳은 얼굴로 문 쪽을 바라봤고, 유재원은 이를 악문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이 집을 초상집처럼 만들어 놓은 사람.그리고 일주일째 방에서 나오지 않는 유지원의 이유.문이 열리고, 이진성이 안으로 들어섰다.한층 야윈 얼굴.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거실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이진성과 유철중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몇 초간 아무 말도 없었다.말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공간의 중심이 어디인지 분명했다.회색이 섞인 머리칼, 깊게 팬 주름, 그러나 흐트러짐 없는 눈빛.분노를 드러내기보다 차갑게 가라앉혀 버린 사람의 표정이었다.집안의 기둥이자, 가장 마지막에 판단을 내릴 사람.그 자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묵직하게 앉아 있었다.이진성이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김지숙의 날 선 시선도, 유재원의 분노도 아니었다.유철중의 눈.조용히, 그러나 피할 수 없게 정면으로 꽂히는 그 시선.그 앞에 서자 이진성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기분을 느꼈다.유철중이 입을 열었다.낮고 굵은 목소리.“앉게.”이진성은 말없이 소파 끝에 앉았다.등을 붙이지도 못하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잠시 고개를 숙였다.거실은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유철중은 천천히 등을 기대지도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흐트러짐 없는 자세, 감정이 비치지 않는 얼굴.잠시 이진성을 바라보던 그가 낮게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게나.”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꾸짖음도, 분노도, 실망도 모두 눌러 담겨 있었다.이진성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입을 열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김지숙은 팔짱을 낀 채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 않았고, 유재원은 이를 악문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러나 이 자리의 판단은 결국 유철중의 한 마디로 내려질 것이었다.이진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처음으로 정면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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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가운데서 누군가는 절박하게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분노와 걱정에 휩싸여 있었지만 이진성만은 그 모든 소란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그의 웃음은 점점 더 마른 소리로 변해갔다.유지원이 바닥에 웅크린 채 신음하고, 김지숙이 울먹이며 등을 쓸어내리고 있는 그 순간 유재원의 시선이 천천히 이진성에게 꽂혔다.딸은 쓰러질 듯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저 자식은… 움직이지도 않는다.눈빛이 순식간에 뒤집혔다.“이 자식이…”이를 악문 채 몸을 돌린 유재원이 성큼성큼 다가왔다.거실 바닥을 밟는 발걸음이 거칠었다.이진성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입가에 스친 그 비웃음 같은 흔적을 지우지도 않았다.그 순간짝.건조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거실을 갈랐다.유재원의 손이 그대로 이진성의 뺨을 후려쳤다.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짧은 침묵이 떨어졌다.김지숙이 숨을 삼켰고, 유철중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유재원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남아 있었다.분노로 떨리고 있었다.“네가 사람이냐?!”목이 갈라진 듯한 목소리였다.“지원이 저렇게 쓰러져가는데… 네가 지금 웃어?!”이진성은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웠다.붉게 달아오른 뺨 위로 손자국이 선명했다.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혀로 입안의 피 맛을 한번 굴리듯 느끼고는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재원을 마주봤다.붉게 달아오른 얼굴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바닥에 웅크린 채 배를 움켜쥐고 흐느끼는 유지원.그녀를 향한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조금 전까지의 어이없는 웃음조차 사라진, 완전히 식어버린 눈이었다.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낮게 말했다.“유지원.”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거실의 공기가 다시 긴장으로 조여들었다.“있지도 않은 애 내세워서 연기 그만해.”짧고 단정한 말이었다.김지숙이 벌떡 일어났다.“뭐라고?"유재원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유철중의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그러나 이진성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지원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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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3월 저녁.해가 길어져 노을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유봄은 토론토 출국을 이틀 앞두고 있었다.병원 일을 마치고 나오자, 병원 앞에 서 있는 강민재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일주일은 너무 긴데.”그는 다가오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그게 뭐가 그렇게 길어요?.”유봄이 웃으며 말했지만, 강민재는 진지했다.“난 하루도 길어요. 일주일이면 거의 한 달이야.”둘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볼티모어 항구 쪽을 천천히 걸었다.강민재는 유봄의 손을 놓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더 꽉 잡고 있었다.“나 진짜 싫은데.”그가 중얼거렸다.“뭐가요?”“딴 남자들이 당신 발표 듣고 반해서 명함 주고 그러는 거.”유봄이 피식 웃었다.“학회라구요. 소개팅 아니고.”강민재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괜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딴 남자 접근금지.특히 캐나다 남자들. 키 크고 수염 있는 교수들. 다 안 돼.”“왜요?”“그냥 안 돼. 명함 받으면 나한테 검사 맡아요.”“무슨 검사.”“위험도 평가.”유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강민재는 한순간도 그녀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일주일이나 어떻게 떨어져 있어.”진짜로 어린애처럼 툴툴거렸다.“영상통화 하면 되잖아요.”“하루 세 번.”“과해요.”“그럼 두 번.”“협상 잘하네요.”그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낮게 말했다.“농담 아니고…당신 없는 시간은 이제 상상도 안된다구요.”그 말은 장난기가 빠진 진심이었다.유봄은 그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봤다.누군가가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건 이상하게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강민재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빨리 다녀와요.일주일 뒤 공항에 제일 먼저 가 있을 거니까.”유봄은 웃으며 대답했다.“나 도망 안 가요.”“혹시 모르지.세계적인 스타 교수 돼서 캐나다에 눌러앉을지.”“그러면?”강민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나도 따라가요.”장난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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