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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가까워진 거리.눈이 마주친다.도시의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비친다.강민재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망설임은 길지 않다.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깊게 덮는다.처음엔 숨을 고르듯 부드럽게, 곧 더 깊어지고, 더 뜨겁게.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체온만 또렷해진다.그녀의 손이 그의 코트 깃을 움켜쥔다.그는 그녀를 더 끌어안는다.짧지 않은, 진한 딥키스다.숨이 모자라 떨어질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는다.일주일의 그리움도 그 입맞춤 안에서 녹아내린다.입술이 천천히 떨어진 뒤에도 이마를 맞댄 채 숨을 나눈다.“이틀이면 부족하겠네요.”그가 낮게 말한다.유봄은 붉어진 얼굴로 웃는다.뉴욕의 밤은 깊어가고, 두 사람의 온도는 더 짙어진다.허드슨강 위로 바람이 분다.차가운 공기와 달리, 두 사람 사이의 온도는 여전히 뜨겁다.조금 전의 깊은 입맞춤 뒤, 강민재는 아직 그녀를 놓지 않은 채 숨을 고른다.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사랑합니다.”잠깐 멈췄다가“아주 많이.”유봄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은 채, 심장이 빠르게 뛴다.그 말은 생각보다 무겁고, 생각보다 깊다.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인다.“저도… 사랑해요.”너무 작아서 바람에 흩어질 것 같은 목소리다.강민재의 눈빛이 달라진다.그는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양 어깨를 잡고 천천히 바로 세운다.“뭐라고 했습니까.”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본다.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다시 말해보십시오.”유봄의 뺨이 붉어진다.“왜 이래요.”“처음 아닙니까.”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분명하다.“나한테 사랑한다는 말.”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한다.맞다.처음이다.그는 조금 더 다가선다.“제대로 듣고 싶습니다.”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아는 눈빛이다.유봄은 결국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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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그는 그녀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데려간다.조용한 전시실에서 나란히 선다.그녀가 그림을 보며 말한다.“사람이 이렇게 오래 남을 수 있다니 신기해요.”그는 그녀를 본다.“당신도 오래 남을 사람입니다.”그녀는 웃으며 그의 팔을 살짝 잡는다.오후에는 허드슨강가 보이는 산책로를 걷는다.바람이 분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다시 병원으로 가면 또 힘들겠네요.”“괜찮아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어디에 있어도 당신은 제 편이잖아요.”그의 눈이 깊어진다.마지막 밤.둘은 다시 호텔 앞에 선다.이번엔 말이 길지 않다.그가 그녀를 천천히 안는다.오래, 아주 오래.“다음에 만날 땐.”“네.”“더 못 참을지도 모릅니다.”그녀는 웃는다.“그때 생각해요.”그는 이마에 입을 맞춘다.“잘 자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녀는 벽에 기대 선다.함께 자지 않은 밤들.그러나 그 어떤 밤보다 뜨겁고 깊었던 이틀이다.아껴둔 시간만큼 사랑은 더 단단해진다.이틀은 정말 꿈처럼 지나갔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시의 시간은 흐르는데, 두 사람의 시간만 유난히 빨랐다.아침, 호텔 로비.유봄은 작은 캐리어를 끌고 서 있고 강민재는 그녀 옆에 서서 말없이 손잡이를 대신 잡아준다.“제가 데려다주고 싶은데…”그가 낮게 말한다.“회사 일정이 겹쳐서 공항까지만 함께할 수 있습니다.”그의 표정에 미안함이 묻어난다.“괜찮아요.”유봄이 부드럽게 웃는다.“바쁜 사람인 거 이제 알겠어요.”그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애매해서 그는 더 아쉽다.차 안은 조용하다.라디오도 켜지 않는다.신호에 멈출 때마다 그는 괜히 그녀의 손을 찾는다.꽉 잡는다.“볼티모어 가면 바로 수술 일정 있어요.”유봄이 먼저 말한다.“외래도 밀려 있고요.”“압니다.”그가 고개를 끄덕인다.“그래서 더 보내기 싫습니다.”“저도 이번 주는 거의 밤샘입니다.”그가 덧붙인다.“프로젝트 마감이라 사무실에서 살 것 같습니다.”유봄이 그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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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학회 이후, 유봄의 이름은 빠르게 퍼져나간다.국내 의료 기사에는 '세인트 존 병원 소속 외과 펠로우, 로봇복강경 수술의 새로운 지평 열다’라는 제목이 연이어 오른다.대한병원 이사장실은 조용히 들썩인다.이사장, 그녀의 할아버지는 신문을 몇 번이나 다시 펼쳐 본다.손녀의 이름이 활자로 또렷하게 박혀 있다.“우리 집안에… 이런 아이가 있었구나. 역시 내손녀”낮게 중얼거리지만 눈빛은 자랑스럽다.한국 의학계는 오랜만에 나온 ‘젊은 인재’라며 떠들썩하다.인터뷰 요청, 공동 연구 제안, 학회 초청이 이어진다.그 소식을 접한 유재원도 오랜만에 환하게 웃는다.그는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유지원 때문이었다.결혼이 성사되는 줄 알았던 자리.그러나 거짓말이 드러났고, 상대 집안에서 파혼을 통보했다.그가 믿고 감싸주던 딸은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숨기고 있었다.유재원은 크게 실망했다.결국 그는 결단을 내린다.“강릉 분원으로 내려가 있어라.”대한병원 강릉분원.서울 본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화려함도, 중심도 아니다.조용하고 실무적인 자리다.유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변명도, 눈물도 이번엔 통하지 않는다.짐을 싸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유재원은 오래 서 있다.그리고 그날 밤,신문에 난 유봄의 기사를 다시 펼쳐 본다.한쪽은 실망.한쪽은 자랑.같은 집안,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서 있는 두 사람.유재원은 깊게 숨을 내쉰다.대한병원 본원 이사장실 옆, 유재원의 집무실 문이 세게 닫힌다.김지숙의 목소리가 먼저 터진다.“강릉이요? 그 촌구석에 우리 애를 보내겠다고요?”“거기서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아요?”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다.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여 있다.“차라리 해외로 보내요.”“요즘 다들 연수도 가고, 해외 병원으로 빠지잖아요.”“유봄처럼 세인트 존 메디컬터 같은 데라도 보내면 되잖아요.”그 순간,유재원의 표정이 굳는다.“그 이름을 왜 여기서 꺼내.”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김지숙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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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지만, 딸 하나는 점점 사라졌다.재잘거리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방문 닫히는 소리만 남았다.그때 붙잡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봄아.”낮게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다.그 아이가 웃지 않게 된 이유를 그는 알고 있다.자신 때문이라는 것도.유지원을 탓하기 전에,김지숙을 탓하기 전에,가장 먼저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가정을 지키지 못한 것도,아이의 마음을 놓친 것도.그래서 더 괴롭다.요즘은 유지원의 일로 화가 나 있지만, 정작 가슴 깊은 곳에서 아픈 건 오래전 잃어버린 웃음 때문이다.유봄은 한 번도 그에게 매달리지 않았다.한 번도“왜 그랬어요”라고 묻지 않았다.그래서 더 잔인했다.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포기한 눈이었으니까.유재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대한병원 원장으로서는 늘 냉정했고 단호했지만,아버지로서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서툴렀다.집 안은 여전히 조용하다.재잘거리던 딸의 웃음은 이제 기억 속에만 있다.그리고 오늘 밤, 그는 처음으로 인정한다.딸이 변한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무너뜨린 거였다는 걸.이진성의 이름이 걸린 병원 간판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개원식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로비는 벌써 환자들로 붐볐고, 그는 하루 종일 차트를 넘기며 쉴 틈 없이 움직였다.“원장님, 다음 환자 들어오셨습니다.”이제는 누군가의 밑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건 자리였다.책임도, 부담도, 자존심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그 와중에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렸다.대학 동기 단톡방.— 야, 니 여친 기사 봤냐?— 진짜 대박이던데.— 술 한잔 사라, 이진성!— 너 이제 성공한 남자네?화면 속에는 유봄의 이름이 또 떠 있었다.해외 학회, 수술 성공, 인터뷰 기사.“대한민국에 이런 인재가 나왔다”는 말이 댓글에 줄지어 달려 있었다.이진성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 입가를 올렸다.“그래. 대단하지.”그 말은 사실이었다.그녀는 원래부터 저렇게 빛날 사람이었다.전화가 또 울렸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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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존댓말이었다.그녀의 엄마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짧은 사이에 수많은 후회와 세월이 스쳐간 듯했다.“한 번만… 보고 싶었어.”그 말은 너무 늦었다.유봄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어릴 적, 현관 앞에서 끝없이 기다리던 밤들.졸업식 날 텅 비어 있던 자리.혼자서 견뎌야 했던 병실의 냄새.그 모든 시간이, 단 한 문장으로 지워질 수는 없었다.“저는 바쁩니다.”차분한 목소리였다.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듯, 감정을 배제한 어조.“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예약을 잡으세요.”돌아서려는 순간“봄아… 너무 보고 싶었단다.”그녀의 엄마는 두 손을 모은 채 한 발 다가섰다.조심스럽고, 두려운 발걸음이었다.“너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그때… 너를 데려오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유봄은 가만히 서 있었다.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눈동자 깊은 곳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후회.그 말은 너무 가벼웠다.“그때가 언제죠.”담담한 질문이었다.“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날이요?비 오던 저녁이요?아니면… 현관 앞에서 세 시간 기다리던 날이요?”엄마의 얼굴이 무너졌다.“그때는… 상황이 나도 너무 힘들었어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어. 나도 그때는 어려서…”“그래서 저를 두고 가셨어요?”말은 높지 않았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엄마가 아니라… 보호자였던 거죠.책임이 끝난 보호자.”“아니야!”엄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너를 버린 게 아니야. 지키려고 한 거야.그 집에 있는게… 더 너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어.”유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저를 위한 거락구요?…”짧은 침묵.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그 공간만은 마치 고립된 듯 조용했다.엄마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말했다.“난 늘 네 소식을 들었어.의사가 됐다는 것도… 여기까지 온 것도…다 알고 있었어.”“아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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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평범한 오후였다.수술을 마치고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던 최진희는 낯선 번호로 온 메시지를 받았다. —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유재원 씨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순간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유재원과 관련된 이야기라니.병원 일인가 생각했지만, 메시지 말투는 어딘가 사적이었다.약속 장소는 병원 근처의 조용한 카페였다.카페 안은 한산했다.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단정한 차림, 그러나 눈빛에는 오랜 시간 눌러온 감정이 서려 있었다.“최진희 선생님… 맞으시죠.”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로—”여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저는 김지숙입니다.”잠시 뜸을 들인 뒤, 또렷하게 말했다.“유재원 씨의… 과거 연인이었습니다.”공기가 조용히 식었다.진희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의사로서 수많은 위급한 상황을 겪은 사람의 얼굴이었다.“과거라면, 결혼 전 말씀인가요.”“네. 결혼까지 약속했었습니다.”그 말은 칼처럼 곧았다.“하지만 집안 반대로 헤어졌어요.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과 결혼하셨죠.”진희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아주 조금 굳었다.“그래서… 저를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지숙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그때 이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정적.카페의 잔 부딪히는 소리마저 멀어졌다.“딸입니다. 이름은 유지원.”진희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유재원 씨는 몰랐습니다.제가 말하지 않았으니까요.”“왜 지금 와서—”“얼마 전, 아이가 아버지를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지숙의 눈이 붉어졌다.“그래서 며칠 전, 유재원 씨를 만났습니다.그 자리에서… 모든 걸 말했습니다.”진희의 숨이 얕아졌다.“그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지숙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미안하다고 했습니다.그동안 몰라서,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고.”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지금이라도… 책임지고 싶다고.”그 말은 돌처럼 무거웠다.“지금 사는 여자와 정리하고,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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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유재원은 답하지 못했다.그의 침묵은 부정이 아니었다.진희는 그 순간 깨달았다.그가 아직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그가 책임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그게 더 잔인했다.“그 아이는… 죄가 없어.”진희가 먼저 말했다.“그렇지.”“근데 우리 아이도 죄 없어.”유재원의 눈이 흔들렸다.“봄이는… 아무것도 몰라.”그 이름이 나오자 공기가 무거워졌다.진희의 시선이 서서히 식어갔다.“나는 당신을 뺏은 적 없어.”그녀는 조용히 말했다.“몰랐으니까.”“알아.”“근데… 이제 알았잖아.”그 말은 선언에 가까웠다.유재원의 숨이 가빠졌다.“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그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순간, 진희는 선택을 느꼈다.남편의 흔들리는 사랑을 붙잡고 상처 난 자존심을 삼키며 남을 것인가.아니면 스스로 떠날 것인가.그날 밤, 진희는 유봄의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잠든 아이의 얼굴은 평온했다.아빠를 닮은 눈썹,자신을 닮은 입술.‘이 아이는 지켜야 한다.’그 생각이 또렷해졌다.며칠 뒤, 진희는 미국 의사시험 자료를 꺼내 들었다.처음엔 막연한 도피였다.하지만 점점, 그것은 결심이 되었다.흔들리는 사랑을 붙잡기 위해 남는 대신,자신의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리로 물러나기로.그 선택이 훗날 유봄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밤이 깊었다.유봄의 방 안은 고요했다.아이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오르내렸다.최진희는 침대 옆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작은 손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조심히 잡았다.따뜻했다.‘이 손을 놓는 게 맞을까.’그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떠올랐다.미국 시험 자료는 꺼냈지만, 떠나는 것이 정답인지 확신은 없었다.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었다.단 하나, 흔들리는 사랑 속에서 딸이 상처받는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며칠 뒤.유재원은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병원에서도 말수가 줄었고, 집에서는 유봄과 더 많이 시간을 보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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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첫해는 지옥이었다.최진희는 뉴저지의 허름한 원룸에서 시작했다.대한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로 집도하던 손이 이제는 다시 교과서를 넘겼다.낯선 영어 의학용어,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청취,그리고 끝없이 밀려오는 외로움.USMLE 1차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책상에 앉아 있었다.벽에 붙여둔 한 장의 사진.어린 유봄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웃고 있었다.1차를 통과하고,2차를 통과하고,임상 술기 시험까지 마쳤다.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외과 레지던트 매칭.이미 한국에서 전문의였지만 미국에서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그녀의 나이, 경력 단절, 그리고 이민자 신분은 불리했다.첫 해는 떨어졌다.두 번째 해, 한 지방 병원의 외과 레지던트 프로그램에서 겨우 자리를 얻었다.중서부의 작은 도시였다.응급실은 늘 바빴고, 총상 환자와 교통사고 환자가 뒤섞였다.그녀는 누구보다 많이 남았고, 누구보다 많이 집도했다.한국에서 다져진 손놀림은 곧 인정받기 시작했다.“Dr. Choi, you’re steady.”지도교수의 그 한 마디는 그녀가 몇 년 만에 들은 칭찬이었다.밤마다 기숙사 침대에 누우면 딸 생각이 밀려왔다.레지던트 수료 후, 그녀는 보드 인증까지 마쳤다.대도시 병원에서 오퍼도 들어왔다.하지만 그녀는 선택하지 않았다.대신 북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인구 8천 명 남짓한 곳이었다.외과 의사는 단 한 명.그 자리에 최진희가 들어갔다.병원은 작았고, 수술실은 두 개뿐이었다.맹장 수술,담낭 절제,탈장 수술,가끔은 농기계 사고로 실려 오는 응급환자.화려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숨을 쉬는 느낌을 받았다.창밖으로는 옥수수밭이 펼쳐졌고, 퇴근길에는 사슴이 도로를 건넜다.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닥터 최”라고 불렀다.아이들은 쿠키를 가져왔고, 노인들은 직접 기른 사과를 건넸다.어느 날, 마을 교회 앞에서 한 할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당신이 와줘서 우리 마을이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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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왜요?”“널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무슨 얼굴로 가.”그제야 유봄의 눈도 젖었다.“저는… 지켜달라는 게 아니었어요.”작은 숨.“그냥… 엄마였으면 됐어요.”그 말에 진희가 무너졌다.딸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미안해.”진짜 후회가 담긴 말이었다.“지켜주지 못한 것도 후회하고안고 나오지 못한 것도 후회해.”유봄의 손이 천천히 엄마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저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어요.”“고맙다…”“근데 완전히 괜찮아지진 않아요.”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돼.”“대신”유봄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이제는 도망가지 마요.”진희의 눈빛이 단단해졌다.“안 가.”“시골 병원으로는 가야죠.”그 말에 둘 다 작게 웃었다.“그건 일이지.”잠시 후, 유봄이 먼저 다가와 엄마를 안았다.어릴 적처럼 매달리진 않았지만, 이번엔 스스로 선택한 포옹이었다.“가끔… 와요.”“올게.”“제가 내려가도 돼요?”그 말에 진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와줄래?”“별 보러요.”그 한마디에 수십 년의 간극이 조금 줄어들었다.완전한 용서는 아니었다.모든 후회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시골 마을의 외과의와 도시의 외과의는이제 서로의 거리를 시간이 아니라 의지로 좁혀가고 있었다.그날 밤, 유봄의 작은 아파트에는 낯선 온기가 머물렀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최진희는 유봄이 내어준 여분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소매가 조금 짧았고, 어깨는 조금 타이트했다.“엄마 살 빠졌네.”“일이 많아서 그래.”“밥 잘 챙겨 먹어요.”“그 말, 내가 하려던 건데.”짧은 웃음이 오갔다.침대는 싱글 사이즈였다.레지던트가 쓰기엔 충분했지만 두사람이 눕기엔 좁았다.잠시 머뭇거리던 유봄이 말했다.“같이 자요.”진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불을 끄자 창밖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둘은 나란히 누웠다.처음엔 어색하게 각자 등을 대고.그러다 유봄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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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두 사람은 서울의 조용한 모임에서 마주 앉았다.강두수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허드슨강 뷰 아파트, 분양 시작하면 자네 하나 빼주지.”유철중이 피식 웃었다.“난 필요 없네.”“왜?”“내 손녀는 이미 미국에서 제 자리 찾았으니까.”강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아, 그 세인트 존 메디컬센터인가.”유철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그래.”강두수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허드슨강 재개발에 의료 연구센터 들어가는 거 알지?”“알고 있네.”“그 설계 제안서에 첨단 로봇수술센터 모델도 포함됐어.”잔이 부딪혔다.“건설이 도시를 만들고, 의사가 그 안의 생명을 살리지.”강두수는 낮게 웃었다.“그러고 보니…우리 손주들 무대가 같은 나라군.”유철중은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허드슨강 프로젝트는 단순한 건설 사업이 아니었다.삼진건설이 미국 시장에 완전히 뿌리내리는 신호.그리고 강민재의 이름이 국제 무대에 각인되는 순간.강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민재를 전면에 세울 때다.’유철중 역시 생각했다.‘봄이는… 건물 안이 아니라 수술실에서 더 빛날 아이야.’서로 다른 방식으로 손주를 자랑하는 두 노인.하지만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허드슨강 위로 떠오른 이름들이 언젠가 서로의 인생과도 얽히게 될 거라는 걸.잔이 몇 순배 돌고 난 뒤였다.허드슨강 이야기가 오가고, 삼진건설의 이름이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게 될 거라는 강두수의 장담이 끝났을 즈음.강두수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문득 말을 꺼냈다.“사실 말이야, 유 이사장.”유철중이 시선을 들었다.“자네랑 사돈 맺고 싶었는데.”공기가 살짝 멈췄다.강두수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절반쯤 진심이었다.“우리 민재, 자네 손녀랑 잘 어울릴 것 같았어.”유철중은 잔을 천천히 돌렸다.“왜 그런 생각을 했나.”“비슷하잖나.머리 좋고, 독하고, 자기 분야에서 정상 노리는 애들.”잠시 침묵.강두수가 헛기침을 했다.“근데 말이야…우리 손주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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