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211 - Chapter 220

231 Chapters

210화 문 하나

궁 서문 쪽문이 사람 하나 지날 만큼 열려 있었다.문지기 둘이 그 앞에 서 있었고, 문지방 아래로 문 그림자가 안쪽 흙에 금을 하나 그어 놓았다.한경이 그 금 안쪽에 섰다.문 밖은 마른 흙길이고 길 건너에 나무가 셋 있었는데, 잎이 다 떨어져서 가지 사이로 성벽 아랫도리가 보였다.문 밖에 강목이 서 있었다.관복이었고, 왼팔을 몸에 붙이고 오른손에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나리.""예. 예."문지기 하나가 두 사람 사이로 반 걸음 들어와 문 밖과 안을 번갈아 봤다."소신이 오늘 아침에 태의원 패를 도로 냈습니다.새 패는 문서고에서 나오는데 아직 안 나왔습니다.패가 없으면 이 문을 못 듭니다.""저도 아직이에요."관복 왼쪽 소매가 팔목에서 두 번 접혀 있었다.접은 자리가 눌려 자국이 났는데 오른쪽 소매는 안 접혀 있었다.한경이 제 흰 명주 겹적삼 소매를 손등 위로 내렸다.강목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숙이고 나서 두루마리를 오른손에서 왼팔로 옮겨 안았다.한 번에 안 되어서 두 번에 나눠 안았다.* * *"소신이 여쭐 것이 있어 왔습니다.""…""…아닙니다. 여쭐 것이 아니라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강목이 두루마리를 문지기에게 내밀었다."석 달 치입니다.열이레부터 그제까지고요.곳간 출납을 옮겨 적었습니다.옮겨 적은 것이라 아래에 인이 없습니다.인이 없는 종이는 문서가 아니고, 문서가 아니면 문지기가 들여보내도 적히지 않습니다."문지기가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받아서 문지방을 넘어 들어와 한경에게 내밀었다."소신이 볼 수 있는 데까지만 적었습니다."소하가 회랑 쪽에서 뛰어왔다.문지기 옆을 지나 쪽문 앞까지 가서 목을 뺐다."나리! 나리 손 어떠세요!요새 비 왔잖아요!"문지기 둘이 다 소하를 봤다.소하가 그 눈을 보고 두 걸음 물러섰다가, 물러선 자리에서 또 소리를 냈다."비 오면 굳는다면서요!"강목의 귀가 붉었다."…예. 예. 소인은 성합니다."문지기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못 참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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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화 대신 적는다

서문 안쪽 담 밑에 흙이 얼어서 발이 안 들어갔다.한경이 두루마리를 편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말아 놓았던 것이라 손을 놓으면 도로 말려서, 아래쪽을 신코로 눌러 놓고 위쪽을 두 손으로 잡았다.손끝이 식어서 종이가 손에 안 붙었다.문지기가 쪽문에서 두 걸음 물러나 창을 고쳐 잡았다."…아까 그것 말입니다.봉이 없어서 소인이 펴 봤습니다.""펴 보셨어요?""폈다가 도로 말았습니다.다음에는 봉을 해서 보내시라 이르십시오.봉이 없으면 소인이 봐야 하고, 보고 나면 소인도 적힙니다.""…예."소하가 쪽문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도로 왔다."아! 저 알아요, 저.아까 나리께서 손을 이렇게 하셨거든요. 이렇게요.이게 그, 잘 지내시라는 거 아니에요?""어. 그건 나도 몰라.""아 그리고요, 제가 아까 문지기 어른한테 강 나리 오시면 알려 달라고 아뢰었더니, 그런 건 아뢰는 게 아니고 여쭙는 거라 하시던데요.그럼 저는 누구한테 여쭙고 누구한테 아뢰어요?"문지기가 창을 고쳐 잡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터뜨리고 나서 얼른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어른들은 다 아시나 봐요."두루마리 끝에 봉함을 떼어 낸 풀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떼어 낸 데는 종이 결이 일어나 보풀이 서 있었다.안에 열두 줄이 적혀 있었다.곳간에서 안 나온 약재 셋이 어느 날 어느 등록에서 빠졌는지 날짜만 있었고, 사람 이름은 한 자도 없었다.글씨가 누워 있었다.* * *태의원 서쪽 방에 자리가 셋 펴져 있었고 그중 둘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화로를 가운데 놓고 벼루를 그 전에 올려 두었는데, 먹이 얼어서 갈리지 않아 녹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늙은 서리가 벼루를 불 쪽으로 반 치 더 밀었다.벼루 바닥에서 딱 소리가 났다."어이쿠.""벼루를 불에 바로 올리면 갈라져요.물을 반쯤 붓고 그릇째 데우시면 돼요.""…예. 예. 그리하겠습니다."한경이 자리 끝에 앉았다."등록방에서 어제 본 장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요.""어느 장이시겠습니까.""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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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두 번째

태후 처소에 창이 넷 다 닫혀 있었고 문 앞에 발을 두 겹 쳤다.방 가운데 놓인 화로에 숯을 새로 얹었는지 위에 것만 붉었다.서리가 궁첩을 펴서 상 위에 올리고 무릎을 물렸다.펼친 데가 지난달에 적은 장이었고, 아래에서 셋째 줄에 이름 석 자가 있었다.그 옆 칸이 비어 있었다."앉거라.""예."한경이 자리 끝에 앉았다.앉으면서 화로 쪽을 한 번 봤다."숯을 아래부터 놓으셔야 오래가요.위에 것만 붉고 밑에 것은 아직 안 붙었거든요."태후가 호갑을 낀 손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저 아이가 오늘 아침부터 저 칸 하나를 두고 세 번을 다녀갔다.네 이름 옆에 적을 말이 없다는구나.""예. 예. 소인이 아뢰옵기는, 궁첩은 이름 옆에 소속을 적사옵니다.태의원 의녀는 칙첩이 붙는 자리라, 칙첩 없이 그 칸을 채우면 아래에서 도로 옵니다.""위엣 줄들을 읽어 보아라."서리가 붓대를 놓고 손끝으로 줄을 짚어 가며 읽었다."어선방 궁녀. 상침국 궁녀. 완의국. 상공국. 상복국. 태의원 의녀.""거기서 멎었지.""…예. 거기서 옆이 비었사옵니다.아니, 비운 것이 아니옵고 적을 것이 없어서 비었사옵니다."* * *"그 칸에 태의원이라고만 적으면 되잖아요.""그건 안 된다.""…""적어 놓으면 그 말이 네가 된다.태의원이라 적힌 사람은 태의원이 지키고 태의원이 버린다.나는 아직 너를 그 방에 넣을 생각이 없어."한경이 마른침을 삼켰다."마마.""말해 보아라.""저 위엣 줄 사람들은요, 옆 칸에 적힌 데가 저를 지키는지 아닌지 아나요?""모르지. 모르는 편이 낫고."태후가 궁첩을 제 앞으로 반 치 끌었다.끄는 데 호갑 낀 손가락이 종이 전을 두 번에 걸어 잡았다."넉 달 전에 태의원에 들어온 줄이 있다더구나.한 손을 못 쓰면 못 든다는 것.""…예.""내가 낸 것이 아니다.나도 어제 처음 읽었다.등록을 스무 해 본 사람이 내 앞에 셋인데 셋 다 모른다더라.셋 다 모르는 줄이 어떻게 등록에 앉느냐.""…""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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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화 서쪽 방

십일월 초순에 태의원 앞마당 흙이 아침마다 얼었다가 사시께 풀렸다.서리 하나가 종이를 들고 와서 늙은 어의 앞에 두 손으로 폈다.늙은 어의가 종이를 팔이 닿는 데까지 뻗어 들고 읽었다.읽고 나서 도로 당겨 한 번 더 읽었다."서쪽 방을 비우라 하였는가.""비우고 의녀에게 내주라 하였사옵니다.""누가.""소인은 등록방에서 받아 왔사옵니다.등록방에서는 어제 저녁에 받았다 하옵고, 위에서 이관된 것이라 하옵니다.""위라니 어느 위인가.""…적힌 것이 없사옵니다."종이 아래쪽에 인이 없었다.봉함을 떼어 낸 자리에 풀 자국만 두 군데 말라붙어 있었고, 종이 결이 그 자리에서만 일어나 있었다."어. 이건 내가 낸 것이 아닐세."늙은 어의가 종이를 한경 쪽으로 밀어 놓았다."태후 마마 처소에서도 아침에 사람이 왔습니다.어느 자리에서 내린 것이냐 물으셨습니다.""근데 물어서 뭐라 하였는가.""모른다 하였사옵니다.그 어른도 모르시겠다 하시고 가셨습니다."한경이 종이를 들여다봤다.열 줄이 안 되었고, 획이 눕지 않고 서 있었다.가로획 끝을 눌러 떼지 않고 그냥 뽑아 놓아서 끝이 가늘었다.늙은 어의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의녀. 자리는 있으십니다.이번에는 방도 있으시고.""…예.""…예. 그렇습니다."* * *서쪽 방에서 자리 셋 가운데 둘이 걷혀 나갔다.걷어 가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 신을 벗지 않고 팔만 들여 밀어 뺐다.늙은 심약이 뒤에 서서 그것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창을 두 번에 나눠 밀어 열었다.안에서 마른 종이 냄새와 오래 안 쓴 먹 냄새가 같이 나왔다.방 안 바닥에 상자를 오래 놓아 둔 자국이 넷 있었다.자국 안쪽만 바닥 빛이 밝았고 그중 하나는 다른 셋보다 컸다."자리 셋 중에 둘은 그냥 두시면 돼요.저 혼자 쓸 거 아니거든요.""…의녀 어른. 오늘은 그냥 받으시지요."젊은 의관 하나가 문 앞까지 왔다가 안 들어오고 늙은 심약 쪽을 봤다.늙은 심약이 고개를 반쯤 저었고, 젊은 의관이 도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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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스물세 자국

서쪽 방에 아침 볕이 들어오는 동안 소하가 걸레를 두 번 빨아 왔다.두 번째로 들어오다가 대야를 발등에 걸어 물을 자리 끝에 쏟았다."아이고. 아이고 이걸 어째.""두고. 마르니까.""안 마르는데요. 여기 볕이 아침에만 든다면서요."소하가 제 치맛단으로 자리를 눌렀다.누르면서 귀가 붉었다."저 창은 아침에만 열어 놓을 거야.오시 지나면 담 그늘이라 열어 두면 방이 더 식거든."한경이 상 위에 어제 떼어 온 종이 귀를 놓고 창 쪽으로 돌려 봤다.손톱만 한 조각이었고 그 위에 획이 반쯤 있었다.세로로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꺾이는 데서 끊겨 있었다.끊긴 데가 칼로 자른 것처럼 곧지 않고 결을 따라 뜯겨 있었다.뒷면에 마른 풀이 얇게 앉아 있었고, 손톱으로 긁으니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새로 붙은 종이의 석 자와 대 보았다.널에 붙은 것은 획이 서 있었고, 조각의 것은 누워 있었다."물 길어 오면서 뭐 들은 건 없고?""저 물 길으러 갔는데요, 거기 어른이 셋 계셨거든요.제가 서쪽 방 쓰시던 분 안부를 여쭈었더니 한 분은 작년에 들어와서 모른다 하시고, 한 분은 대야를 들고 그냥 가시고, 남은 한 분이 저더러 어느 방 얘기냐고 세 번을 물으셨어요.제가 세 번 다 서쪽 방이라 했는데도요.""…""그 어른이 서쪽 방을 모르시겠어요?바로 저 담 너머신데요.근데 제가 세 번째 말씀드릴 때는요, 그 어른이 두레박을 놓치셨어요."한경이 종이 귀를 등록 사이에 끼워 넣었다.끼워 넣고 나서 그 장 귀를 한 번 접었다가 도로 폈다."소하야. 너 거기 다시 가지 마.""…그럼 물은 어디서 길어 와요?""물은 내가 길을게.아침에 한 번만 나가면 돼."* * *문을 반쯤 닫으니 안쪽 문설주가 볕에 드러났다.나무에 그은 자국이 있었다.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짧게 짧게, 손톱이 들어갈 만큼만 파여 있었다.손가락으로 훑으면 걸리는 데가 있고 안 걸리는 데가 있었다.먹으로 그은 것이 아니었다.붓대 끝으로 눌러도 저렇게는 안 되고, 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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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내린 자리

등록방에 화로가 둘 있었고 둘 다 상 밑에 있었다.늙은 서리가 대장을 펴 놓고 한경이 가져온 종이를 그 옆에 놓았다."방을 받으셨으면 여기 한 줄이 오릅니다.방은 사람보다 먼저 적히거든요.""…예.""사람은 나가면 그만인데 방은 안 나갑니다.그래서 방부터 적고 사람을 뒤에 붙입니다."늙은 서리가 붓을 인주 갑 옆에 놓고 손바닥을 화로 위에 잠깐 폈다."이관처를 적어야 하는데 이 종이에는 없습니다.그러면 이관 대장을 봅니다."늙은 서리가 다른 상자에서 두꺼운 묶음을 꺼냈다.실로 꿴 데가 헐거워서 장을 넘길 때마다 위아래가 어긋났다.목이 잠겼는지 한 번 가다듬고 읽었다."초닷샛날 등록방이 광록시에서 받았고, 광록시는 초사흗날 받았고, 그 위는 편전입니다."젊은 서리가 상 건너에서 목을 뺐다."편전에서 태의원 방을 내리는 일이 있습니까.""자네가 볼 대장이 아닐세.""소인은 그저 여쭌 것인데—""자네가 여쭈면 여기 적힌 사람이 대답을 해야 하네!"늙은 서리가 대장을 손등으로 밀었다.묶음이 상 끝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면서 꿴 데가 벌어졌고 장이 부챗살처럼 퍼졌다.젊은 서리가 일어서서 나갔다.나가면서 문을 안 닫았다.찬 것이 문으로 들어와 화로 위의 재가 한쪽으로 쏠렸다.* * *늙은 서리가 바닥에 앉아 벌어진 데를 손으로 여몄다.여미면서 한경 쪽은 안 봤다."…소인이 스물두 해 이 방에 있었습니다.""어. 저 어른 안 돌아오시겠는데요.""돌아옵니다. 문을 안 닫고 나갔으니 돌아옵니다.닫고 나가면 안 돌아오는 겁니다.여기 사람들은 다들 그렇습니다."한경이 떨어진 장 몇을 주워 결이 같은 쪽으로 맞춰 내려놓았다.한 장은 아래 귀가 접혔고 접힌 자리에 먹이 옮아 있었다."그건 지우면 더 남아요.긁어낸 자리는 먹을 먹으니까 다음에 적는 사람이 알아보거든요.""…예. 그래서 안 지웁니다.""아, 접힌 것도 펴면 자국이 남고요.""…""아이고. 이거 꿴 실이 다 풀렸습니다."늙은 서리가 묶음을 상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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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첫눈

새벽에 태의원 뒤뜰이 하얬다.밤사이에 온 것이 발등에 조금 못 미쳤고, 담 밑으로 갈수록 두꺼워져 있었다.소하가 싸리비를 들고 나와 마루 앞부터 쓸었다.쓸어 모은 것을 마루 밑으로 밀어 넣다가 두 번 밀어 넣었다."소하야. 그건 담 밑으로 몰아.마루 밑에 쌓이면 낮에 녹아서 도로 들어와.""예!"한경이 마루 끝에 서서 소매 안에 손을 넣고 있었다.명주 겹적삼 위로 솜 둔 것을 하나 더 걸쳤는데도 어깨가 시렸다."어. 근데 어른, 이거 밤새 온 거 맞아요?어제 저녁에는 하늘이 멀쩡했거든요.저는 자다가 지붕에서 소리 나서 깼는데, 그게 눈 소리인 줄 알았더니 고양이였어요.고양이가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소하야, 눈 먼저.""예. 예. 쓸겠습니다."늙은 심약이 뒤뜰 쪽 문으로 들어왔다.어깨에 눈이 앉아 있었고 그것을 안 털었다.손에 든 약절구를 옆구리에 붙여 안고 있었다."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르신!"늙은 심약이 걸음을 멈췄다."…여기서는 어르신이라 안 합니다.""예?""직함을 부릅니다.소인은 심약입니다.""시먁이요?""심. 약.""심약 어르신.""…어르신을 빼십시오.""심약… 심약님?""…님도 뺍니다.""아이고, 그럼 뭐가 남아요."* * *소하가 비를 안고 서서 입술을 두 번 움직였다.한경이 마루 끝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늙은 심약이 절구를 마루에 내려놓고 소매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뺀 손이 굳어서 비 자루를 두 번에 쥐었다.그러고는 뜰 가운데로 가서 눈 위에 자루 끝으로 두 자를 썼다.획이 굵게 파이면서 파인 데 아래로 언 흙이 났다."이렇게 부르십니다.""저는 글자를 못 읽는데요.""모르셔도 됩니다.모양만 외우십시오."소하가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눈 위에 따라 썼다.오른쪽 자부터 시작해서 왼쪽으로 갔다.늙은 심약이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약. 심. 이라 쓰셨습니다.""예?""거꾸로 쓰셨습니다."소하가 제가 쓴 것을 보고 손으로 눈을 문질러 지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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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화 스치는 법

회랑 벽돌이 낮에도 안 풀려서 걸을 때마다 신 바닥에서 딱딱 소리가 났다.아래에서 한기가 올라와 상자를 안은 팔까지 왔다.한경이 등록 상자를 고쳐 안고 상궁 뒤를 따라 걸었다.상궁이 걸으면서 말했다."어른께서 이 회랑을 쓰시게 되었으니 오늘 한 번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앞에서 사람이 비키기 시작하면 어른도 비키십니다.무엇이 오는지 보고 비키는 것이 아니라, 비키는 것을 보고 비킵니다.""…예.""기둥과 기둥 사이에 서지 마시고 기둥 뒤로 반 걸음 드십니다.무릎을 굽히시고 고개는 안 드십니다.소매는 내리십니다.""…반 걸음만 물러서면 되는 거네요.""물러서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그다음입니다.지나가시고 나서도 한동안은 일어서지 않습니다.앞줄이 일어서면 그때 일어서십니다.""그건 아까 들었어요.""두 번 들으실 만한 것이라 두 번 말씀드립니다."상궁이 걸음을 늦추고 뒤를 한 번 봤다."저, 그리고 이것이 오늘 제일 중한 것입니다.회랑에서 어른 옆에 사람이 없으면 그것부터가 적힙니다.무엇을 하셨는지가 아니라, 곁에 누가 있었는지가 적힙니다.소인이 오늘 어른을 따라 걷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어른께서 혼자 다니시면 소인이 적힙니다."한경이 상자를 고쳐 안았다.안는 사이에 상궁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손목 안쪽이 부어서 옷 아래로 자국이 나 있었다."어른, 그 손목은 밤에 아프시죠.자기 전에 팔을 심장보다 높이 얹어 놓고 주무시면 아침에 덜하거든요.""…""높이만 두시면 돼요.괴는 건 아무거나요.""…소인은 괼 것이 있습니다."* * *회랑 저쪽 끝에서부터 사람들이 벽 쪽으로 붙기 시작했다.붙는 것이 물결처럼 이쪽으로 왔다.앞쪽에서 무엇이 오는지는 안 보이고, 사람들이 접히는 것만 차례로 왔다.상궁이 걸음을 멈추고 기둥 뒤로 들어갔다.한경이 그 옆으로 들어가 무릎을 굽혔다.젊은 궁녀 하나가 늦게 따라 들어오다가 들고 있던 놋그릇을 놓쳤고, 그릇이 벽돌 위에서 한 번 돌다가 기둥에 닿아 멎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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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입 모양

편전 앞마당에 눈을 쓸어 낸 데와 안 쓸어 낸 데가 한 줄로 갈려 있었다.태의원 사람 여섯이 쓸어 낸 쪽에 두 줄로 섰다.소하가 약 상자를 들고 모퉁이까지 따라왔다가 문 지키는 군사에게 붙들렸다."저 이거 두고만 갈게요! 두고만요!""소하야. 상자는 저 어른 드리고 담까지 가 있어.""예. 아니 저, 예."한경이 맨 뒷줄로 갔다.옆에 늙은 심약이 서고 그 옆에 젊은 의관이 섰다."저는 맨 뒤에 서 있으면 되는 거죠?""예. 그리고 앞줄이 굽히면 같이 굽히십니다.굽히실 때 상자를 앞으로 안으시고요.옆으로 안으시면 옆 사람 무릎에 닿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요.""…예. 그렇게 하십니다."기다리는 동안 앞줄 사람들이 발을 안 옮겼다.눈을 쓸어 낸 자리라 언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서 있으면 신 바닥으로 찬 것이 올라왔다."오래 걸려요?""물목이 두 장이면 반 시진입니다.오늘은 석 장이라 하였으니 더 걸립니다.""그럼 앞줄 어른들은 그동안 저러고 계세요?""예. 저러고 있습니다.뒷줄은 발을 옮겨도 됩니다마는, 옮기면 앞줄이 옮긴 줄 알고 같이 옮깁니다.그래서 다들 안 옮깁니다.""발 시리시겠어요.""…스물아홉 해 되었습니다.시린 것은 시린 것이고, 서 있는 것은 서 있는 것입니다."한경이 제 발끝을 신 안에서 한 번 오므렸다 폈다.젊은 의관이 소매 밖으로 나온 손등을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손등이 여러 군데 터져서 붉었다."그 손등은 물 닿고 안 닦아서 그래요.닦고 기름 한 번 바르시면 사흘이면 아물거든요.""…예.""기름은 등잔 기름 말고요.""…예. 예. 알겠습니다."젊은 의관이 손을 도로 소매에 넣었다.* * *편전 문이 열리고 발이 반쯤 걷혔다.앞줄이 굽혔고 뒷줄이 따라 굽혔다.늙은 어의가 앞으로 나가 월대 아래에 엎드려 아뢰었다.십일월 진어 물목과 지난달에 물린 것 둘을 읽는 소리가 마당 가운데까지만 왔다.읽는 데 오래 걸려서 뒷줄 사람들의 숨이 앞으로 하얗게 밀려 나갔다.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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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밥

밤에 서쪽 방 창이 아침보다 덜 울었다.안쪽에 종이를 한 겹 더 발라 놓아서 바람이 들어오다가 그 겹에서 걸렸다.한경이 등잔을 창 쪽으로 들어 대 봤다.새로 바른 종이 아래로 묵은 종이의 찢어진 데가 그림자로 비쳤다.찢어진 데를 안 때우고 그 위에 그냥 발라 놓았다.풀도 덜 말라서 아래쪽 귀가 아직 들떠 있었다.손끝으로 누르면 붙었다가 떼면 도로 떴다.화로에 숯이 반쯤 남아 있었고 그 전에 누룽지 두 조각이 올라가 있었다.속이 비어서 아까부터 아랫배가 당겼다.나부터 먹고 하자.한경이 누룽지 한 조각을 뒤집었다.뒤집는 손끝이 식어 있어서 뜨거운 데를 그냥 집었다."어른, 그거 뜨거운데요!""응."소하가 물그릇을 들고 와 옆에 놓았다."이 창 아침에 누가 와서 발랐어요.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풀 쑤고 한 사람은 바르고요.제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여쭈었는데 둘 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던데요.풀 그릇은 두고 갔어요. 저기 있어요.""…""근데 그 어른들 옷이 태의원 것이 아니었어요.저는 처음 보는 빛깔이었거든요."한경이 누룽지 반쪽을 소하 쪽으로 밀어 놓았다.* * *한경이 상 앞에 앉아 청구 종이를 폈다.칸이 셋 그어진 종이였고 위쪽 두 칸은 어제 적어 놓은 것이 있었다.붓을 들었다. 화로 옆에 둔 벼루라 먹이 안 얼어서 한 번에 갈렸다.첫 줄에 적힌 것이 감초였고 그 아래가 계피였다.셋째 줄이 비어 있었다.한경이 등록 사이에서 사흘 전에 받은 종이를 꺼내 상 옆에 놓았다.열두 줄 가운데 아래쪽 셋에 날짜만 있었다.곳간에서 안 나온 약재 셋이 등록에서 빠진 날이 사흘 안에 다 몰려 있었다.한경이 그 종이를 도로 접어 등록 사이에 끼웠다."어른, 그거 강 나리 글씨죠.""어떻게 알아.""저는 글자는 몰라도 나리 글씨는 알아요.서하당에서 물목 적으실 때 옆에서 먹 갈았거든요.근데 저거는 좀 다른데요. 좀 눕혀졌어요.""…그러네."붓끝을 벼루 전에 두 번 훑어 물기를 뺐다.종이 결이 거친 쪽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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