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161 - Chapter 170

231 Chapters

160화 무너진다

서하당에 등이 둘 켜져 있었다.한경이 상 앞에 앉아 종이를 펴 놓았는데, 궁에서 받아 온 종이라 결이 곱고 귀퉁이가 한 번도 접히지 않았으며, 붓은 아직 마른 채였다.마당 쪽에서 중문 여는 소리가 났는데 평소보다 컸다.부엌에서 오어멈이 물 붓다 말고 뭐라 하는 소리가 잠깐 나다가 그쳤다.문 앞에 사람이 선 것은 그러고 한참 뒤였다.육정이 문지방을 넘지 않고 서서 방 안을 봤다. 며칠 만이었다."…부인.""오셨어요.""…""들어오세요. 거기 서 계시지 말고."육정이 들어와 앉았다.앉고 나서 오른팔을 뒤로 한 번 돌렸는데, 왼 어깨가 늦게 따라 올라갔다."저녁은 드셨어요.""…들었소.""아. 그럼 됐고요.""이 집에서 요새 처가 이야기가 돈다고 들었소.물이 어떻고 하는—"말끝에 숨이 모자랐다.육정이 한 번 삼키고 다시 시작했다."…아니오. 저. 그건 됐소.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 *"오늘 어공서에서 사람들이 나한테 축하를 하였소.""무슨 축하를 받으셨는데요.""모르겠소. 나한테 축하를 하는데 내가 무엇을 받는지를 나만 모르오.웃는 낯으로 손을 잡길래 나도 잡았고, 잡고 나서 저녁내 그 손이 무슨 손인가만 생각하였소."육정이 엄지로 왼쪽 광대를 한 번 문질렀다."오늘 궁에 드셨소.""예.""태후전에.""예."육정이 상 위의 종이를 봤다.한 자도 적히지 않은 종이였다."…무엇을 적으시오.""아직 안 적었어요.""무엇을 적으라 하였소.""…""부인. 나는 열 해 동안 부인한테 아무것도 안 물었소.물어야 할 것을 몰라서 안 물은 것이 아니라, 물으면 부인이 이 집에서 못 산다고 여겼고, 그래서 안 물었는데, 지금은—""나리.""—지금은 물어야겠소.오늘 무엇을 받아 오셨소.""…"* * *"부인."한경이 종이 끝을 손끝으로 눌렀다."말을 해."한경이 육정을 봤다.육정이 제가 한 말을 저도 듣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명주.""…""열 해를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Read more

161화 이름 없는 사람

살구가 익어 가지 끝이 처져 있었다.한경이 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모으는 동안 떨어진 열매 몇이 돌길 위에 뭉개져 단내를 올렸고, 후원 담 안쪽에 그 냄새가 고여 있었다.오늘 입은 것은 옥색 모시 적삼에 쪽빛 치마였고, 끝동과 옷끈만 짙은 남빛으로 둘렀다.머리에는 나무 비녀 하나만 꽂았고, 장식이 없어서 볕에 되비치는 데가 없었다.앞에 선 사람의 소매가 손목 위로 한 뼘 남아 있었다."골랐느냐.""못 고르겠던데요.""…""사람은 못 골라요.뭐, 물건 고르는 것도 아니고요.고르려면 그 사람이 얼마짜리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되잖아요.저는 값 매기는 건 잘하거든요.그래서 안 골랐어요."잎이 흔들리자 볕이 그의 손등에서 물러났다."짐이 그날 그 말을 한 것을 뉘우쳤다."한경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어선방에서 그대에게 무엇을 물은 자가 있느냐.""아무도 안 물었어요.""…""열흘 사이에 물은 자가 없느냐.""없었다니까요. 아무도요.""…달걀은.""열흘째 잡숫고 계시죠. 하루에 둘씩요.파는 안 드셨고요.국에 뜬 걸 젓가락으로 밀어 놓으셨다면서요.""…짐이 파를 싫어한다.""싫어하셔도 드셔야죠.""…""아 맞다. 마늘은 생으로 드시지 마시고요.구워서 드셔야 돼요.""…""살구 떨어진 건 안 주우시나 봐요.""…""밟으면 신에 다 묻는데요."* * *회랑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마당으로 내려서던 사람이 섬돌을 헛디뎠고, 신 한 짝이 벗겨져 돌길 위로 굴러갔다.사내가 벗겨진 신을 도로 신지 않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무명 적삼에 소매를 걷어붙였는데, 걷은 자리 아래로 마른 물때가 팔뚝에 허옇게 앉아 있었다."소, 소인은 궁의 나무를 패고 물을 긷습니다.""누가 보냈느냐.""아무도 아니 보냈습니다.""…""…그저께 밤에 혼자 왔다가 돌아갔습니다.아니, 그끄저께입니다.어제도 왔다가 돌아갔습니다.오늘은 안 돌아가려고 왔습니다."한경이 두 걸음 다가가 그 손을 들여다봤다.벤 자리가 손바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Read more

162화 심가

광 앞 멍석에 어제 겹쳐 놓은 종이가 그대로 펴져 있었고, 바람에 뜨지 말라고 노영감이 나무판을 귀퉁이마다 얹어 두었다.총관이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앉는데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글쎄요. 밤에 다시 봤더니 소인이 어제 놓친 것이 있습니다.겹치는 날마다 대문 앞에 선 자들 가운데 하나가 등짐을 안 지고 있었습니다.등짐 진 자들은 값을 부르는데 그자는 한 번도 값을 안 불렀고요.""그럼 뭘 하고 서 있었대요?""…이 댁 지붕을 봤답니다."류가가 제 종이를 그 옆으로 밀어 놓았다."소인이 어제 아뢴 항아리 말입니다.넉 달을 보고도 그것이 어느 문으로 드는지를 몰랐는데, 밤에 생각이 났습니다.궁문에서 안 세우는 것은 조량 물목에 얹혀 든 것뿐입니다.""어. 류가님 손등에 뭐 묻었어요.""…아. 먹입니다.""그거 물로는 안 지워져요.이따 밥알로 문지르세요."류가가 손등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가 도로 꺼냈다."물목에 얹으려면 배가 있어야 합니다.배가 없는 집은 못 얹습니다."노영감이 나무판을 눈에서 멀찍이 떼어 들고 금 그은 자리를 훑었다."…성 남쪽에서 배를 부리는 집이 이 댁하고 사돈입니다.소인이 서른 해 전에 그 집 배에서 소금을 받았습니다.소금만 받은 것은 아니고요."멍석 위가 조용해졌다.총관이 종이를 도로 접다 말고 손을 멈췄다."부인. 소인이 이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하세요.""…어제 지붕을 본 자가 오늘도 왔습니다.지금 대문 밖에 서 있습니다."한경이 짚고 있던 날짜에서 손끝을 뗐다.뗀 자리에 먹이 옮아 있었고, 손끝이 식어 있었다."영감. 오늘 것도 하나 그어 두세요."* * *부엌에서 오어멈이 솥뚜껑을 열자 김이 처마까지 올라갔다.소하가 그 김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뒤로 물러났다."뜨거워요!""뜨거우니까 솥이지.""부인, 저 눈썹 그슬렸어요?그슬린 것 같은데.""반쪽 없어졌어."소하가 두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자 오어멈이 참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광 쪽에서 노영감이 영문도 모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3화 친정

대부인 처소는 낮에도 등을 낮게 두었다.며느리가 절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굳은 손이 소매를 잡았다."…혼자 가지 마라.""소하 데려가요. 낮에 가서 낮에 올 거고요.""…둘도 적다.""장복 아저씨도 붙여 주셨어요. 나리가요."대부인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며느리의 손등을 두어 번 눌렀다.염주는 이불 위에 내려놓은 채였다."…해 지기 전에 와라."* * *심가 골목 어귀에서 한경이 가마를 세우고 내렸다.걷는 동안 소하가 뒤에서 따라오며 치맛단에 올라앉는 흙먼지를 두 번 털어 주려다 두 번 다 그만두었다.오늘 입은 것은 회장을 두르지 않은 흰 모시 적삼에 팥빛을 옅게 들인 치마였고, 머리에는 은비녀 하나만 꽂았다.상을 벗은 뒤로 이 집에 드는 것이 처음이었다.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문 안쪽 마당에 물을 뿌린 자국이 아직 젖어 있었다.문 앞에 심경이 나와 서 있었는데,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한경이 골목 끝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조카님.""…""이레 전부터 기다렸습니다."마당에 종들이 늘어서 절을 했다.그 가운데 늙은 종 하나가 무릎을 꿇다가 반쯤 주저앉았고, 옆에 선 아이가 팔을 받쳤다."…아씨.""…""아이고, 아씨. 소인이 눈이 어두워서 문간에서는 아씨인 줄을 몰랐습니다."한경이 그 앞에 서서 대답했다."괜찮아. 나도 영감 몰라볼 뻔했어."소하가 뒤에서 마른침을 삼켰다."아유, 부인. 여기서는 부인을 아씨라고 불러요?""응.""…이상해요. 여기서는 부인이 부인 아닌 것 같아서요."* * *서재에 상이 둘 차려져 있었다.여름인데 방에 불을 넣어 두어서 아랫목이 따뜻했고, 심경이 손수 방석을 옮겨 놓았다."…아저씨.""앉으십시오.""불은 왜 넣으셨어요.""조카님이 궁에 드시는 분이라 그렇습니다."한경이 방석을 두고 문지방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저 덕 볼 게 없어요.""작위가 내려온다지요.""저잣거리 소문이에요.우리 집 대문에 금을 바른다는 소문도 같이 돌던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4화 봉함

심경이 소매에서 칼을 꺼내 봉함 종이를 가로로 그었다.갈라지는 자리에서 마른 풀 냄새가 났다."이 봉함 아저씨가 붙이신 거예요?""예.""언제 붙이셨는데요.""…""안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장복이 회랑 끝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부인. 소인은 여기 서 있겠습니다.""그냥 들어와도 되는데요.""…나리께서 문 밖에 서 있으라 하셨습니다. 문 밖에요."심경이 문설주에서 손을 떼고 반 걸음 물러섰다."저도 들어가지 않겠습니다.조카님이 부르시면 그때 들어가지요.""아저씨. 저 말고 안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어요?""있었습니다."문이 안으로 밀리다 아래가 뻑뻑해서 걸렸고, 소하가 어깨를 붙여 밀자 삐걱 소리를 내며 놓였다.먹과 마른 약재 냄새가 먼저 나왔다.* * *안은 마당보다 어두웠다.소하가 등잔에 불을 붙여 들자 불빛이 닿는 데마다 책장이 한 칸씩 나타났다.벽을 두른 책장이 천장까지 올라가 있었고 위쪽 칸에는 책이 아니라 빈 함이 얹혀 있었다.아랫목 자리에 방석이 하나 놓였는데 눌린 자국이 얕았다."어우. 부인, 여기 왜 이렇게 추워요? 밖은 더운데.""북쪽으로만 창을 냈어.볕 안 드는 데다 종이를 두거든.나도 여기 앉으면 손이 시려서 오래 못 있었어."책장 아래 칸에 상자가 넷 들어 있었다.겉에 붙인 종이의 글씨가 다 같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만 종이가 새것이었다."부인. 이 상자들은 다 뭐예요?""삼대 치 문서라던데.곳간 장부하고, 논 문서하고, 사람 산 문서하고.""사람 산 문서요?""종문서. 너도 어디엔가 한 장 있어."소하가 등잔을 조금 내렸다."…부인. 거기 제 이름도 적혀 있어요?""몰라. 봐야 알지.""…안 볼래요. 아니, 볼래요.아니다, 나중에요."한경이 새 종이가 붙은 상자를 끌어냈다.끌어낸 자리에 바닥 자국이 두 줄 났고, 그 옆에 같은 자국이 이미 나 있었다.먼저 난 자국은 걸레로 닦였는데 아직 마르지 않았다.* * *한경이 나머지 상자 셋의 뚜껑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5화 아저씨

소하가 마루에서 새 등에 불을 붙여 문지방 안쪽에 놓고 물러났다.기름이 쏟아진 자리에는 화덕 재를 덮어 두어서 발밑이 서걱거렸다.심경이 들고 온 등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앉았다.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그 무릎에 손등을 얹었고, 손등이 두꺼웠다."이레 전에 사람이 왔습니다.""…""궁에서 왔다 하였고 표를 보였습니다.이 방에 들어와 상자를 열었고, 봉함을 뜯어 안에 있던 것을 가져갔습니다.저는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어. 잠깐만요.""…""아저씨. 손등에 아직 흙이 있는데요.오늘 뭐 심으셨어요?""…낮에 마당 앞의 나무를 한 그루 옮겼습니다.조카님 드실 길이 좁아서요.""…""그럼 막으시지 그러셨어요.""실을 끊은 것이 제 손입니다.""…""어제 조카님이 오신다는 기별을 받고 문을 다시 봉했습니다.먹이 안 말랐을 겁니다.마르지 않은 것을 보시라고 그냥 두었습니다.""…왜요.""조카님이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그럼 누가 보냈는지도 아시겠네요.""모릅니다.""…""물어보지 않았습니다.""테가 둥글었어요, 네모였어요?""…""아, 표에 찍힌 인이요.""둥글었습니다. 아래가 젖어서 뭉개졌고요."한경이 종이를 쥔 손바닥을 치맛단에 한 번 문질렀다."그 사람 나가는 것도 보셨어요?""문간까지요. 문간까지만 봤습니다.가마도 말도 없이 걸어 나갔고, 골목 끝에서 남쪽으로 꺾었습니다.""남쪽으로 가면 나루밖에 없는데요.""나루로 갔는지 나루를 지나갔는지는 모릅니다.저는 거기까지입니다."* * *"물어보면 되잖아요.""조카님.""아니, 그러니까 궤가 들어오면 열어 보면 되고, 열어 보고 이게 뭐냐고 물으면 되잖아요. 스무 해를요?스무 해 동안 한 번을요?"심경이 세웠던 무릎을 내리고 일어섰다."…스무 해라고 하셨지요.예, 스무 해입니다.제가 배를 받은 것이 스물둘일 때입니다.형님이 물목을 주시면서 장부를 보라고 하셨지 궤를 열라고는 안 하셨습니다.""…""열었으면 그날로 배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6화 뜯긴 이름

중문 빗장이 안에서 벗겨지는 소리가 나자 소하가 등을 들고 뛰어나왔다.뛰어나오다 등을 문설주에 부딪쳐 불이 한 번 꺼졌다가 도로 붙었다."아이고, 부인! 이 밤에 걸어오셨어요? 가마는요?""두고 왔어.""두고 오시면 그건 누가 끌고 와요.가마꾼들이 알아서 오기야 하겠지만 오늘 비 온 뒤라 길이 질고, 그, 상궁마님이…아니, 류가님이 저녁을 안 드시고 기다리세요.제가 자꾸 틀려요.어제도 이름을 세 번 틀렸어요."마루 끝에서 류가가 붓을 놓았다."…소인도 아직 제 이름이 낯섭니다."소하가 웃음을 터뜨렸고 한경도 따라 웃었다.류가가 웃는 낯을 얼른 종이 쪽으로 돌렸다."류가님. 저녁은 그냥 드세요.나 기다리다 식으면 어멈만 두 번 일해요."부엌 문지방 너머로 오어멈이 국자를 든 채 내다봤다."참, 국을 두 번 데웠습니다.세 번은 못 데웁니다.""오늘 것은 다 적으셨어요?""예. 그런데 부인.뒤채 아기씨가 낮부터 마루를 안 내려왔습니다."한경이 치맛단의 흙을 털지 않고 그대로 마루에 올라섰다.* * *뒤채 방에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문 가까이 앉은 서란이 무릎 위에 소하의 적삼을 펴 놓은 채 겨드랑이 밑 터진 자리를 한 땀씩 물어 가고 있었다."들어가도 돼?""…부인께서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한경이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 앉았다."어. 그거 소하 거지?겨드랑이 또 텄네.""…물을 길으면서 두 번 텄다 합니다."한경이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방바닥에 폈다.접힌 자리가 두 번 눌려 도로 펴지지 않았다.서란의 바늘이 천에 반쯤 들어간 채로 멎었다."이걸 어디서.""아버지 돌아가시던 밤에 심가 서재 문지방 밖에서 주웠어.밟혀서 귀가 한 번 찢어졌더라."한경이 손끝으로 종이 위쪽을 짚었다.「입회」라 적힌 칸에 이름이 둘 있었고, 아래 이름 자리가 손으로 뜯겨 나가 있었다."…""서란아.""…부인.""네가 왜 뜯었는지를 나는 아직도 몰라."* * *서란이 바늘을 천에 꽂아 무릎 옆에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7화 아버지

심가 서재에 등이 켜져 있었으나 문은 닫혀 있었고, 한경은 마루 아래 마당에 서서 기다렸다.종이 아뢰러 들어간 뒤로 물확에 뜬 잎이 한 바퀴를 다 돌았다.발이 저려서 무게를 한쪽으로 옮겼다.옮기고 나서 반대쪽으로 또 옮겼다.담 너머에서 강바람이 들어와 마당의 등이 한 번 눕고 도로 섰다.나루가 가까워 밤에는 물 냄새가 담을 넘어오는데, 한경은 이 집에서 그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었다.늙은 종이 등을 들고 나와 마루 끝에 놓았다."아이고, 이 밤에 마당에 세워 두어 송구합니다.나리께서 안에 계신 줄 소인이 몰랐습니다.""안에 계신 줄 알고 왔어요."문이 열렸다.* * *"이 시각에 조카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낮에 오면 사람이 봐요."심경이 앞서 들어가 아랫목을 내주었다.소반에 잔이 둘 놓였는데 하나에만 김이 올랐다."어제 서재 봉함을 다시 하셨죠.""…예.""먹이 안 말라 있었어요.입회 칸은 나도 봤어요.이름이 둘인데 아래것이 뜯겨 나간 자리가 있어요."심경이 잔을 한 번 돌려놓았다."소인이 이 집에 들어와 그 문서를 다 폈습니다.삼대 치라 하였으나 삼대 치가 아니고, 위에서 열두 해 치만 따로 묶여 있었습니다.""…""시약을 한 번 치르려면 문서에 이름이 넷 있어야 합니다.부린 관원 하나, 도장을 찍는 심약 하나, 그리고 입회 둘입니다.입회는 그 집 사람으로 채웁니다.바깥 사람을 쓰면 이름이 하나 더 새니까요.""…""형님이 첫 칸에 당신 함자를 올리셨습니다.그런데 둘째 칸이 비었습니다.이 집에 어른이 형님 하나였습니다."한경이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그래서 누구를 올렸어요.""…조카님 함자를 올리셨습니다. 열 살에요."* * *"열 살짜리가 입회를 어떻게 서요.""서지 않았습니다."심경이 소매를 걷고 잔을 옮기다 놓치는 바람에 밑동이 소반 전에 부딪쳤고, 넘친 찻물이 소반 가장자리를 따라 번져 나가다 무릎 앞에서 멎었다."참, 조카님. 한 번은 세워야 이름이 붙습니다.그 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8화 열 살의 밤

심가 중문 앞에 늙은 찬모가 등을 들고 서 있었다.한경이 나오는 것을 보고도 다가오지 않고 등만 조금 들어 올렸다."부인. 아니, 아씨.아이고, 소인이 부를 말을 여태 못 정했습니다.""아무거나 부르세요.""…소인이 이 댁 부엌에 서른 해 있었습니다.아씨 젖니 갈 적에 팥죽 쑤어 드린 사람입니다.""…나는 팥을 못 먹거든요.그런데 어멈 팥죽은 먹었나 보네요.""아씨는 그때 두 그릇 드셨습니다."한경이 걸음을 멈췄다."오늘 서재에서 하시는 말씀이 마당까지 들렸습니다.열두 해 전 그 겨울 말씀이지요.소인이 그 밤 이야기를 열두 해 동안 아무한테도 안 했습니다.물어본 사람도 없었고요."* * *찬모가 등을 낮춰 별채로 도는 길을 비추자 낮은 돌담이 드러났고, 담이 끝나는 데에 협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너머에서 나루 물 냄새가 넘어왔다."그 밤에 별채로 세숫물을 셋 냈습니다.대인 것 하나, 손님 것 하나.""…""…예. 하나 더 냈습니다."찬모가 등을 고쳐 잡는 동안 등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소인이 그날 상을 두 번 물렸습니다.한 상은 수저가 젖어 있었고, 한 상은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나왔습니다.손도 안 댄 상을 내면서 소인이 이상하다 하였더니 청지기가 소인 입을 막았습니다.""상은 둘만 냈고요.""…그 어른은 잡숫지를 않으셨습니다.물도 안 드셨고요.소인이 새로 떠 간 물을 그대로 들고 나왔습니다."찬모가 울먹이면서 소매로 눈가를 눌렀다."참, 그리고 그 밤에 대인께서 별채 등을 끄라 하셨습니다.협문 쪽에서 인기척이 나고 나서였습니다.소인이 서른 해 있으면서 이 댁에서 등을 끄고 손님을 받은 밤은 그 밤 하나입니다.""소인이 그날 이후로 별채 쪽으로는 안 갔습니다.서른 해를 있으면서 거기만 안 갔습니다."* * *찬모가 앞서 걸어 서재 앞까지 갔다.봉함 종이가 세로로 갈라진 채 아직 문설주에 붙어 있었고, 갈라진 자리에 손바닥으로 눌러 붙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한경이 어둠 속에서 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69화 값

노영감이 광 문턱에 앉아 나무판을 눈에서 멀찍이 떼어 들고 있었는데, 금이 두 줄 새로 그어져 있었고 그 두 줄 사이가 다른 데보다 붙어 있었다."영감. 어제 몇 사람 왔어요.""둘입니다. 둘인데 같은 사람입니다.""같은 사람인데 왜 두 줄이에요.""글쎄요. 두 번 왔으니 두 줄입니다.소인은 오는 것을 적지 사람을 적는 게 아니라서요.""어. 두 줄 사이가 붙었네요.""…붙여 그었습니다.같은 신이 두 번 왔길래요.""영감. 이제 밤에는 적지 마세요.어두운 데서 금 그으면 두 줄이 한 줄 돼요."중문에서 총관이 들어오는데, 문지방을 넘을 때 성한 다리부터 올리고 나머지가 뒤에서 천천히 따라 올라왔다."부인. 어제 온 사람이 뒤채를 물었습니다.이 댁 뒤채에 사람이 하나 있느냐고요.소인이 없다 하였습니다.없다 하였는데 그 사람이 웃었습니다."* * *뒤채 문이 열려 있었고 방 안에 보퉁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서란이 이부자리를 개켜 벽 쪽으로 밀어 놓는 중이었다.소하가 먼저 뛰어들었다."아기씨! 이게 뭐예요!어디 가시는데요!"서란이 한경 쪽을 보고 말했다."이레에 두 번이면 다음은 안 묻고 들어옵니다.""그게 무슨 상관인데요!""…사람을 뜰 때 그렇게 합니다.두 번 묻고, 세 번째에는 안 묻고 들어옵니다.소인이 궁에 있을 때 그 일 하는 사람 곁에 있었습니다."소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말은 멈추지 않았다."아니, 그래서요!그래서 오늘 가시게요?오늘 가시면 그다음은요?아기씨 갈 데도 없잖아요!갈 데가 있으면 지난번에 그렇게 오셨겠어요?신도 한 짝이었는데—"소하가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다 바느질 상자를 엎질렀고, 방바닥으로 굴러가는 실패를 줍지도 않은 채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서란이 몸을 숙여 실패를 하나씩 주웠다.* * *방에 둘만 남았다."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됐어. 안 물은 걸로 해."서란이 실패를 바느질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소인이 이 집에 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PREV
1
...
1516171819
...
24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