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21 - Chapter 30

231 Chapters

20화 붉은손

후원 끝방은 오래 비어 있던 방이라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서란은 젖은 단삼을 벗어 횃대에 걸지 않고 바닥에 개어 두었다.젖은 옷을 걸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는 방은 남의 귀를 모은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전에 배웠다.그녀는 합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밀랍과 기름, 그 밑에 쓴 뿌리 하나가 있었다.손끝에 조금 찍어 혀에 대 보니 평범한 연고였고 독은 없었다.그런데 그 연고를 건네준 여자의 눈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들은 것과 달랐다.물도 제 손으로 못 마시고, 무엇을 물어도 늦게 고개를 들고, 눈이 늘 젖어 있고, 무엇을 보아도 그 너머를 보는 여자라고 들었다.그러나 들은 것 가운데 맞는 것은 큰 눈동자 하나뿐이었으며, 그 사실이 그녀를 긴장시켰다.그 큰 눈이 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읽고 지나갔으며, 읽고 지나간 자리마다 살갗이 조였다.서란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런 눈은 약을 사람에게 먼저 먹여 보는 곳, 그 아래 칸에서나 보던 것이었다.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어디가 먼저 상할지 보는 눈이었다.그런 눈을 가진 여자가 왜 이 집 내원에 인형처럼 앉아 있다고 알려졌는지, 그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지만 서란은 일어서지 않았다.일어서서 맞아야 할 사람이라면 저렇게 발소리를 죽이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문이 아주 조금 열리고 그 틈으로 밤의 축축한 냄새가 들어왔다.그런데 문틈에 선 사람에게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옷이 말라 있었다.대신 향 냄새가 났는데, 집 안의 향이 아니라 절에서 오래 피운 침향과 재의 냄새였다."어떻더냐. 들은 대로더냐."낮은 목소리였고, 서두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문틀에 손 하나가 얹혀 있었다.등잔 빛이 겨우 닿는 자리에서 그 손등이 붉었다."…들은 것과 다릅니다.제 발로 계단을 내려와서 사람을 똑바로 봅니다.""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눈이 맑아요. 들은 것처럼 젖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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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밤의손

"그건 무슨 향입니까."바람도 없는데 등잔 불꽃이 한 번 흔들렸는데, 그것은 그의 숨이 흔들린 것이었다.열 해 동안 이 여자는 무엇도 묻지 않았고, 물을 줄을 몰랐다.그가 무엇을 넣는지, 왜 밤마다 넣는지, 무슨 향인지 한 번도 묻지 않았으니 그는 대답을 준비해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는 준비하지 않은 대답을 어둠 속에서 한참 더듬어 찾고 있었다."…부인을 살리는 것이오.그것만 알면 되오."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으며 거짓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이 사람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그런데 소매 안에서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해야 할 말을 숨길 때 나오는 손이었다.이 몸이 열 해 동안 보고 외운 버릇이었으니, 한경은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믿는 것도 참이고, 숨기는 것도 참이다."무엇에서 살리는데요.저는 어디가 아픈 것입니까."그가 아내를 보았다.이번에는 등잔도 중문도 아닌 아내의 얼굴을 오래 보았으며, 그 눈이 그녀의 눈에서 무엇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갔다.육정은 아내의 눈 속에서 열 해 동안 늘 보던 것을 찾고 있었다.그러나 거기에는 겁도 없고 기다림도 없었으며, 다만 저를 가만히 재고 있는 낯선 침착함만 있었다.그 침착함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밤이 늦었소."그는 대답을 피해 일어섰고, 문까지 가는 동안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문고리에 손을 얹고서야 겨우 멈추었다."내일 또 오겠소."명주에게는 그 한 마디가 다음 날 하루의 전부였다.한경에게는 그 한 마디가, 이 사람이 무엇을 숨기든 내일 밤에도 숨기러 온다는 약속으로 들렸다.문이 닫혔고, 발소리가 회랑 끝으로 느릿하게 멀어졌다.---그가 남긴 온기가 손목에 그 손 모양대로 남아 있었다.명주는 그 손목을 뺨 밑에 넣고 잤지만, 한경은 구리 대야의 찬물에 손목을 담갔다.온기가 빠져나가는 데 한참이 걸렸고, 이 몸은 그것을 몹시 아까워했다.그녀는 손목을 물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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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문안

"부인, 오늘은 눈이 맑으십니다."진 어멈이 소매에서 헌 향낭을 꺼내며 말했다.새벽 볕이 창호지를 지나 방 안을 반쯤 채운 시각이었다.늙은 여자는 꺼낸 것을 코에 대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그러고는 옷궤 아래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넣었는데, 서랍이 닫히기 전에 한경은 같은 비단 주머니가 서랍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열 해 치의 주머니가 거기 다 있었다.버리면 안 되는 것이거나 누가 세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녀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그러냐."한경은 눈을 반쯤 내리깔았는데, 그것은 이 몸이 열 해 동안 하던 눈이었다.진 어멈이 새 향낭을 소매에 넣고 물러났는데, 물러나는 걸음이 문지방에서 아주 잠깐 늦었다.그 잠깐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맑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어제 저녁에 매듭을 풀고 씨를 빼냈다.하룻밤 만에 눈이 맑아졌다면 그 씨가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 늙은 여자는 그 눈이 흐린지 맑은지를 날마다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누구한테 보고하려고.그녀는 그 물음을 소매 안의 씨와 함께 깊이 넣어 두고, 천천히 문안 길에 나섰다.---노부인의 처소는 내원 북쪽에 있어서 볕이 들어도 서늘했다.벽에 걸린 것은 글씨 한 폭뿐이었고, 향로에서 가는 연기가 곧게 올랐다.침향이었다. 이 집에서 제일 비싼 냄새였고, 이 집 안에서 이 향을 피우는 방은 여기 하나뿐이라는 것을 명주의 기억이 말해 주었다.한경은 그 냄새를 맡으며 아무 기색도 내지 않았지만, 그 냄새를 어디에 적어 두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노부인은 먹빛 사 단삼에 검은 비단 이마띠를 두르고, 검은 사로 감싼 머리에 옥비녀 하나만 꽂고 앉아 있었다.손에 든 염주는 며느리들이 절을 올리는 동안에도 알이 하나씩 넘어갔다.한경은 절을 하면서 그 손을 유심히 보았다.염주 알을 넘기는 엄지가 손가락 끝에서만 잘게, 고르게 떨렸다.노부인이 입을 열었을 때, 아랫니와 잇몸이 만나는 자리에 엷은 잿빛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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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내가널골랐다

한경은 웃으면서 소매를 들어 서란 쪽으로 천천히 내밀었다."나는 모른다. 네 코가 좋다니, 네가 맡아 보거라."서란의 웃음이 얼굴에 붙은 채 그대로 뚝 멎었다.정실의 소매가 첩도 아닌 사람의 코앞에 와 있었고, 그것도 노부인 앞에서였다.맡으라면 맡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았으며, 그것이 제가 판 함정에 제가 먼저 빠진 꼴이라는 것도 알았다.서란은 앉은 채로 반 자를 다가와, 천천히 몸을 숙여 한경의 소매 끝에 코를 댔다.이마가 한경의 손목에 닿을 듯했다."어머."육설의 반지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강아지 같네."문가의 시녀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고, 서란의 귀 끝이 금세 붉어졌다.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한경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그 얼굴을 위에서 가까이, 아주 가까이 내려다보았다.서란은 숨을 길게 들이쉬었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매화요. 백단도 있고요.""또.""…그뿐이에요."그 말을 하는 동안 서란의 눈이 저도 모르게 노부인 쪽으로 갔다.눈 한 번 깜박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었다.한경은 소매를 천천히 내렸다.이 소매에는 매화와 백단과 냄새 없는 꽃, 셋이 있었다.이 아이는 둘만 말했고, 셋째를 말하지 않는 동안 노부인을 보았다.맡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노부인을 볼 까닭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그것으로 충분했다.그러니까 셋째 꽃은 냄새가 없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이 몸에게만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둘이 한패구나.그 생각이 들자 가슴이 서늘해지기보다 오히려 차분해졌다.적이 둘이라는 것은, 적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매화와 백단이구나. 좋은 코다."한경은 더없이 순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음에 또 궁금하면 언제든 맡으러 오너라."서란이 고개를 숙였다.볼의 우물이 다시 패었지만 이번 웃음은 아까보다 늦게 왔다.서란은 조용히 물러나 문가에 앉았고, 다시는 한경 쪽을 보지 않았다.그녀는 제가 물어야 할 것을 물었고 들어야 할 답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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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뒷문

그날 밤 한경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이 몸은 원래 잠이 많은 몸이었는데, 안에 든 사람이 잠을 잊은 것이었다.문밖에서는 초하가 자고 있었다.명주가 시집올 때 친정에서 따라온 아이로, 열두 해 동안 명주의 옷을 개고 머리를 빗기고, 밤이면 문지방 너머에 요를 깔았다.문지방 너머에서 고른 숨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명주의 기억 속에서 이 아이는 시월의 젖은 마당에 이마를 박고, 아가씨가 시키셨습니다, 하고 말했다.그날 밤부터 문밖 자리가 비었고, 명주는 그 아이가 왜 그랬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그녀는 그 왜를 오늘 밤 반드시 알아낼 생각이었다.사경이 가까워지자 숨소리가 달라졌다.자는 숨에서 깨어 있는 숨으로, 그리고 깨어 있으면서 자는 척하는 숨으로 바뀌었다.요가 접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고, 먹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먹은 오래 갈지 않았고, 붓이 종이를 짧게 여러 줄 긁었다.한경은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그 줄을 세었는데, 다섯 줄, 여섯 줄이었다.붓이 멎고 종이가 접히고, 발소리가 문 앞을 조심스럽게 떠났다.그녀는 소리 없이 덧신을 꿰고 어깨에 짙은 피풍을 걸친 뒤 문을 조금 열었다.회랑 끝에서 초하의 등이 꺾여 사라졌다.뒤뜰 쪽이었고, 뒤뜰 끝에는 뒷문이 있었으며, 뒷문 밖에는 그제 밤 젖은 신이 올라온 물길이 있었다.---새벽의 물은 먹을 풀어 놓은 듯 검었다.물안개가 수면에서 한 자쯤 떠 있었으며, 그 안개 속에 작은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와 닿아 있었다.노를 쥔 늙은 사내는 삿갓을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초하가 섬돌을 내려가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사내가 받아 품에 넣고, 대신 무엇을 초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초하는 그것을 받아 쥐고 오래, 아주 오래 고개를 숙였으며, 그 모습은 무엇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빌고 있는 사람 같았다.배가 물안개 속으로 미끄러져 나갔다.한경은 뒷문 기둥 그늘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사내의 삿갓 끈을 보고 있었다.끈을 묶은 매듭이 눈에 익었다.명주가 어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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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선물

"초하야."한경은 아이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고, 초하는 흙바닥에 엎드린 채 겨우 대답했다."예, 예.""오늘부터 적은 것은 보내기 전에 내가 본다."초하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울음이 아직 얼굴에 남아 있는데 그 말의 뜻이 들어오지 않는 듯, 아이는 잠깐 멍하니 정실을 올려다보았다."열사흘부터는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적어라.부인께서는 오늘도 물을 남의 손으로 드셨고, 연회에서는 한 마디도 안 하셨고, 가주께서 오셨을 때 등잔만 보셨다. 그렇게.""그, 그건 거짓— 아니, 거짓말은 아니고, 아니 거짓말인데—""숙부께서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을 보내 드리는 거다.거짓말이 아니라 선물이다."그녀는 더없이 담담하게 말했고, 초하는 입을 벌린 채로 그대로 굳었다.그녀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 안쪽을 지그시 물었다.겁에 질린 아이 앞에서 웃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지만, 이 아이가 입을 벌린 채 굳은 얼굴은 정말로 조금 우스웠다."그리고 네 어미는."그녀는 쪽지를 접어 떡과 같이 초하의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내가 꺼낸다."초하가 앞치마를 입에서 놓았고, 침 묻은 붉은 잎사귀가 앞자락에 힘없이 늘어졌다."…부인이요? 어떻게요?"아이는 들은 말을 믿지 못하는 얼굴로 되물었다."아직 모른다."그녀는 숨기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은 십칠 년 동안 몸에 박힌 버릇이었고, 이 아이에게도 그 버릇대로 말하기로 한 것이었다.초하의 얼굴이 무너질 듯하다가 멈추었다.정실의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무너질 틈을 놓친 것이었다."모르는데 꺼낸다고요?""꺼낸다."명주의 아버지가 옥에 갇히는 것은 십일월이었다.그 전에 저 물길 너머의 집에 손을 넣을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며, 그 길이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찾을 생각이었다.초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정실을 올려다보았다.열두 해 동안 이 여자의 옷을 개고 머리를 빗겼지만, 이 여자가 저를 이렇게 똑바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초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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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채찍

나흘이 지났고, 그 나흘 동안 한경은 완벽한 인형이었다.아침이면 춘월의 손이 기울이는 만큼만 물을 마셨고, 문안 자리에서는 등잔만 보았으며, 밤이면 그 발소리가 오기 전에 문 쪽으로 돌아누웠다.그가 손목을 쥐면 맥이 빨라졌고, 그가 나가면 손목을 찬물에 담갔다.씨는 밤마다 다섯 알씩 늘어 손수건이 조금씩 무거워졌으며, 그 무게가 늘어 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이상하게 든든했다.그는 그날 밤 뒤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다시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두 사람이 밤마다 한 침상 가에서 한 꼬집을 주고받았으며, 둘 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서란은 여전히 후원에 있었다.문안 자리에 한 번 더 왔지만 정실 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으며, 손끝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인형 노릇은 지루했다.그러나 지루한 것이 다행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는, 그만큼 그녀가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닷새째 아침, 대문에서 말이 사납게 울었다.---한경이 중문에 닿았을 때 대문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다.문틈으로 말 머리 셋이 들이밀어져 있었고, 그 뒤로 창을 세운 군졸 여남은이 보였다.앞장선 말 위의 군관은 흙 묻은 장화가 등자에서 반쯤 빠져 있었으며, 술 냄새가 문지방을 넘어왔다.대문 문지방에는 문지기 염 노인이 서 있었다.스물두 해를 이 문에서 산 노인이었고, 굽은 등으로 두 팔을 벌려 문을 막고 있었다.그 팔이 조금도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한경은 보았고, 이 노인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는 몰라도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것은 알았다."가주께서 출타 중이십니다요.수레는 어공서 것이라, 가주 말씀 없이는 한 바퀴도 못 내드립니다요.""어공서?"군관이 비웃듯 되물으며, 말 위에서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북에서는 지금 사람이 얼어 죽는다.너희 집이 보낸 금창약은 밀가루였다더구나.그런 집 수레가 어공서 것이면, 어공서가 밀가루를 진상하는 데냐."닷새 전 이 마당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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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꿀

군관은 끝내 문서를 내놓지 못했다.술 냄새를 풍기며 욕을 몇 마디 남기고, 말에 다시 오르는 데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에 겨우 올라 군졸들을 데리고 물러갔다.대문이 무겁게 닫힌 뒤에도 한경은 중문 기둥 그늘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녀가 본 것은 채찍도 낙마도 아니었고, 장복이었다.창을 빼앗은 뒤 장복은 그것을 문간에 세워 두고 다시 말고삐를 쥐었다.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의 몸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돌아가는 사이에 그의 눈이 지붕을 한 번 훑었다.대문 지붕과 담 위와 하방 지붕 꼭대기를, 위험이 어디서 올지 늘 위를 먼저 보는 버릇이 있는 눈이었다.고삐를 쥔 손바닥의 굳은살은 고삐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엄지와 검지 사이, 무엇을 오래 쥐고 휘두른 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신은 밑창이 얇아서 걸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헝겊신이었다.이 집에 종이 아닌 종이 하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그것도 남편 바로 옆에 있었다.누구 사람이지.장복의 눈이 지붕에서 내려오다가 중문 그늘에서 멎었다.아주 잠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그의 눈이 그녀를 읽었고, 그녀가 방금 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읽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종의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염 노인은 대문 안쪽 섬돌에 앉아 있었다.찢긴 단삼 사이로 붉은 줄 두 개가 부어오르고 있었으며, 하방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보기만 했다.가주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가주 눈 밖에 날까 봐서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부엌 쪽에서 늙은 여자 하나가 앞치마를 쥐고 뛰어왔다.염 노인의 아내 오 어멈이었다.뛰어와서 노인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손을 어디에 대야 할지 몰라 허공에서 떨었다.한경은 허공에서 떨리는 그 손을 기억하고 있었다.명주의 기억 속 십일월, 서재 앞 섬돌에서 밤을 새우던 명주 앞에 이 여자가 나무 대야를 내려놓고 한참 서 있었다.그날 밤 명주 앞에 멈춰 선 사람은 이 집에서 이 여자 하나였으며,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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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종의 옷

사경이 지나도록 한경은 끝내 눈을 붙이지 못했다.초하가 미리 궤 옆에 챙겨 둔 무명옷 꾸러미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떠 있었다.그녀는 초조함을 누르며 그 덩이를 거듭 바라보았다.그런데 창지에 손톱으로 작은 구멍을 뚫고 눈을 대자, 대문간의 등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이 똑똑히 보였다.그 등 아래에 장복이 마치 말뚝처럼 서 있었다.어젯밤 말을 씻기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은 듯, 담 쪽으로 반쯤 돌아선 채 밤새 한자리를 지킨 경계의 자세였다.그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저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 것 같았다.더구나 아침에는 진 어멈이 온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제야 떠올렸다.회색 손톱은 날마다 아침에 이불을 들추고 매듭을 살폈으며, 빈 침상은 그 의심에 아무 대답도 못 할 것이었다.한경은 소리 없이 다시 누웠다.새벽은 안 된다는 판단을 그녀는 침착하게 받아들였다.그녀는 십칠 년 동안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지만, 이 몸은 아직 기다림에 서툴러서 심장이 새장 속 새처럼 자꾸 제멋대로 뛰었다.---진 어멈은 여느 아침처럼 침묵 속에서 이불을 들추고 매듭을 살핀 뒤 조용히 물러갔다.문안 자리에서 그녀는 오늘도 등잔만 보는 시늉으로 자리를 넘겼다.그런데 문안에서 돌아오는 회랑에서 대문 쪽이 갑자기 소란했다.가주가 말에 올라 있었다.북에 보낸 금창약이 밀가루였다는 그 말 때문에 어공서로 간다고 하방 사람들이 수군거렸다.그리고 말고삐는 장복이 쥐고 있었다.그녀는 이 집에서 가장 밝은 눈이 가주를 따라 담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중문 그늘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다.그리고 바로 오늘, 온 집의 눈이 대문에 몰려 있었다.한경은 서하당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살얼음을 밟듯 고르게 걸었다.빨리 걷는 인형은 없기 때문이었다.---초하가 부엌 화덕에서 치마폭에 싸 온 식은 재를 그녀의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문질렀다.재는 차갑고 꺼끌거렸으며, 열 해 동안 백단 냄새만 묻었던 살결이 처음으로 부엌 냄새를 입었다."목은 됐고요, 손 주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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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시약장

주점 모퉁이를 돌아 큰길로 나서자, 냄새가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다.돼지기름에 밀떡 지지는 냄새와 노새 똥과 숯불과 생선 내장과 사람의 땀이, 열 해 동안 백단과 약탕 냄새만 맡고 산 코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그런데 코는 굶은 사람이 음식을 가리지 않고 삼키듯 그것을 다 받았으며, 그녀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그녀는 머릿수건을 다시 한 번 깊이 내리고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북변과 삼 년째 싸우는 나라라는 것도 그녀는 그저께 연회에서 겨우 주워들었다.그리고 그 전쟁은 이 큰길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담벼락에 붉은 인이 찍힌 방이 붙어 있었는데, 수염 흰 노인이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 느릿하게 읽어 주고 있었다."사내가 셋인 집은 하나를 낸다.노새와 수레는 있는 대로 낸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 가운데로 새끼줄 한 가닥에 목이 꿰인 사내 열둘이 수레에 실려 묵묵히 지나갔으며, 보퉁이를 안은 여자 하나가 체념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북으로 간 약 궤짝 하나가 저 수레 몇 대를 먹이는지, 그녀는 아직 그 셈을 알지 못했다.---돌다리의 난간 기둥 셋에 이레 전에 벤 머리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사람들은 소매로 코를 막고 일부러 물 쪽을 보았지만, 한경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입술이 말려 올라가 이가 드러났으며, 눈가에 파리가 앉았다 일었다.그녀는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한 번도 서지 않았다.죽은 것 앞에서 멈추는 습관은 십칠 년 전에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었다.---마침내 다리를 건너자 쓴 냄새가 왔다.마른 뿌리와 껍질과 볕에 익은 풀의 냄새가 골목 하나에서 통째로 밀려 나왔다.그러나 그녀는 그 골목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맞은편 관아 담을 따라 쌀가게 것보다 훨씬 긴 줄이 서 있었으며, 담에 박힌 패에는 시약(嘗藥) 두 자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약을 맛본다는 글자였고, 줄은 이상하게 침묵하고 있었다.줄 맨 앞 탁자에서는 서리가 이름을 적었다.곁에 선 사내가 내민 손을 잡아 엄지 바닥을 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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