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Bab 21 - Bab 30

215 Bab

21화 대답

"그럼 대답할게요."소반 위에 식은 찻잔이 있었다.그것을 옆으로 밀어 자리를 만들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육정은 아직 서 있었다.두 걸음 들여놓은 자리에서 발을 옮기지 않았고 관복 깃이 반쯤 풀린 채였다."약재 파는 골목이 성 서편에 있다고 하던데요."그의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 올라왔다."…약재.""보고 왔어요.""부인이 약재를 어찌 아시오.""몰라요. 그래서 보고 왔죠."바깥 행랑 쪽에서 문 닫는 소리가 두 번 나고 그쳤다."그런 것은 사람을 시키면 되오.""시키면 그 사람이 보잖아요."그가 이쪽으로 한 걸음 왔다.오면서 손이 옷자락 아래에서 나왔다가 갈 데를 못 찾고 도로 들어갔다."오늘 성 안에서 사람들이 부인을 어떻게 보았는지 아시오.""알아요.""…아신다.""길 한복판에서 소반 놓친 사람도 있었어요.물이 다 쏟아졌는데 줍지도 않더라고요."그가 이마를 한 번 짚었다.손이 이마에서 눈두덩까지 내려왔다가 거기서 멈추고 한참 있었다."앞으로는 아뢰고 나가시오.""그럴게요.""부인.""예.""아뢰고, 내가 아니 된다 하면.""그럼 아뢰고 나갈게요."촛불 심지가 타면서 소리가 났다.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닫은 뒤로 아랫입술 안쪽을 한 번 물었다.눈썹 사이가 좁아지지 않았다.십 년 동안 그가 무언가를 참을 때 거기가 좁아졌었다."…부인은 말이 언제부터 그러셨소.""뭐가요."그가 대답을 못 했다."…주무시오."문까지 세 걸음이었다.문지방에서 그가 멈췄다."부인.""예.""오늘 무엇을 보고 오셨든.""예.""…내게 물으시오.그 일을 하는 사람이 나요."문이 닫혔다.닫힌 문을 오래 봤다.그가 제 입으로 그 말을 했다.이튿날 아침에 물이 늦게 왔다.초하가 그릇을 들고 들어오면서 문턱에 발이 걸렸다.물이 조금 넘쳐 손등을 타고 흘렀고, 흐른 자리를 치맛단에 문질러 닦았다."늦었습니다.""데었어?""…아닙니다."그릇을 받아 놓고 초하의 손등을 봤다. 붉지 않았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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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붉은실

실이 풀리고 접힌 것이 펴지는 동안 마당의 소리가 하나씩 사라졌다.빗자루 소리가, 물동이 내려놓는 소리가.그리고 마지막에는 발소리마저 뚝 사라졌다.태감이 문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태후께서 부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초하의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고 나서야 한경은 상황을 이해했다.마당의 사람들이 전부 같은 높이로 몸을 낮추고 있었다.이윽고 뒤채 쪽에서 서란이 나와 조금 더 뒤쪽에서 무릎을 꿇었다.태감이 높고 얇은 특유의 목소리로 마디마디 힘을 주어 읽었다.태후께서 육 부인에게 채단 열 필과 백옥 노리개 한 쌍을 내리신다는 짧은 내용.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읽기가 끝나자 붉은 보로 싼 두 개의 함이 천천히 마당으로 들어왔다."직접 받으시지요."태감의 말에 한경은 두 손을 내밀었다.함은 무거웠고, 비단 보 아래로 나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태감은 선녀 같은 자태로 두 눈을 반짝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한경의 얼굴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문서를 읽으면서도, 함이 건너가는 찰나에도 눈이 얼굴에서 발끝으로 몇 번을 훑었다.이미 남성성이 사라진 태감의 눈에도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었다.태감은 덩달아 미소 지으며 말했다."소문이 모자랐습니다."한경이 태감의 턱 밑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까만 눈동자를 또르륵 위로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무얼 들으셨는데요?"태감은 감히 그 용모 앞에서 무엄하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차가운 돌덩이 같은 태감의 가슴조차 살랑살랑 간지럽게 만드는 이 여인이 경이롭기도 했다.태감은 슬며시 벌어지는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느라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다음 말을 이었다."물론 부인의 덕행이지요."태감의 돌아서는 소매가 조금 넓게 돌았다.말 두 필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담을 따라 멀어지고 나자, 한경이 벌떡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묵직한 함 두 개가 덩그러니 마당 가운데 내려져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먼저 만지려 하지 않았다.한경은 본래 살던 세계에서도 명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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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생강

사내가 세 번째 것을 코에서 뗐다."이 황기."목소리가 낮고 넓었다.마당 건너까지 오는데 힘을 들이지 않는 소리였다."남방 것이 아닌데요.""남방 것이오."육정이 말했다."문서에 그리 되어 있소.""문서는 그렇지요."사내가 황기를 궤짝에 도로 놓고서 손끝을 제 소매에 천천히 문질렀다."뿌리가 이리 희면 북쪽 밭입니다.남방 것은 흙이 붉어서 씻어도 골에 붉은 기가 남지요."육정이 대답하지 않았다.사내가 다음 궤짝을 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루 끝을 봤다.한경은 마루 끝, 볕과 그늘의 경계에 서 있었다.여름 홑적삼 소매가 바람에 얕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볕에 걸린 반쪽 낯이 희게 빛났다.강목은 미인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궁을 드나드는 몸이라 이름난 얼굴이라면 웬만큼 보고 살았다.그런데도 잠깐, 뿌리를 쥔 손이 멎었다."부인께서도 약재를 보십니까."마당에 있던 종 둘이 손을 멈췄다."봤어요.""시전 서편 골목이라 들었습니다.""거기요.""무엇을 보셨습니까.""파는 거요."사내의 눈썹이 한 번 움직였다.굵은 눈썹이었고 미간에 세로 주름이 하나 있었다."볼 줄 아십니까.""몰라요."즉답이었다. 사내가 잠깐 말이 없었다.그러더니 뿌리를 내려놓고, 처음으로 궤짝이 아니라 마루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그가 궤짝에서 마른 것 하나를 집어 들었다."그럼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시겠습니다."세 번째 물음이었다.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당귀였다. 뿌리 갈래가 굵고 단면에 기름이 도는 것.사내가 당귀를 내려놓았다."…다음에 또 여쭙지요."점검은 낮이 기울도록 이어졌다.궤짝이 열리고 닫혔다.사내는 물건마다 코에 가져갔고, 어떤 것은 꺾어서 소리를 들었고, 어떤 것은 혀끝에 댔다가 뱉었다.손이 큰 사람인데 마른 꽃잎 하나 부수지 않았다.물건을 놓는 손은 집는 손보다 늘 느렸다.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손이 굵고 빨랐다.문서 차례가 되자 그가 붓을 놓고 이름을 밝혔다."태의원 심약 강목입니다."그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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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먹

밤에 육정이 벼루를 들고 왔다.문서 상자와 벼루와 붓 두 자루.종을 시키면 될 것을 제 손으로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사은 문서요. 내일까지 올려야 하오."소반 위에 종이가 펼쳐졌다.그가 먹을 갈기 시작했다.먹 가는 소리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돌 위에 물이 마르며 무거워지는 소리.방에 낮게 깔려서, 듣고 있으면 다른 소리들이 하나씩 물러났다.등불이 그의 손등에서 벼루로 미끄러졌다.물이 조금씩 짙어지고, 짙어진 것이 돌의 파인 자리에 고였다.벼루 가운데가 얕게 파인 돌.서재의 십 년이 이 돌에도 있었다.그는 말없이 갈았다.소매를 걷은 팔목에 힘줄이 두 개 서고, 손목은 움직이는데 어깨는 흔들리지 않았다.십 년을 밤마다 서재에서 갈았을 손놀림.다만 이 방에서 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글은 내가 쓰겠소.""그러세요.""이름은 부인이 쓰셔야 하오."붓이 종이 위를 갔다.그의 글씨는 획이 가늘고 끝이 굽지 않았다.문서의 말은 길고 뜻은 하나였다.성은이 망극하다는 것.이름 자리가 비워진 채 종이가 이쪽으로 돌아왔다.빈자리는 두 치가 못 되는데, 그 두 치가 소반 위에서 이상하게 넓어 보였다.붓을 받았다.가벼웠다. 전생의 손은 펜과 칼을 쥐던 손이라, 붓은 쥐는 것부터가 낯설었다.그런데 손가락이 저 혼자 자리를 잡았다.엄지와 검지가 붓대를 세우고 새끼손가락이 종이 위에 떴다.이 몸이 십 년 넘게 잡아 온 자세.심(沈) 자를 썼다.첫 획은 몸이 그었다.둘째 획에서 손과 머리가 서로 밀었다.획이 가다가 반 박자 어긋나고, 삐침이 짧게 끊겼다.명(明) 자에서 한 번, 주(珠) 자에서 두 번.종이 위의 석 자는 낯선 사람의 이름 같기도 하고, 이제 겨우 제 것이 된 이름 같기도 했다.등불이 이쪽 소매에도 닿아 있었다.낮에 입던 옥색 적삼이 불빛 아래서는 물빛으로 가라앉았고, 옷끈 끝이 숨을 따라 얕게 오르내렸다.풀어서 한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가 어깨 앞으로 넘어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끝이 종이 가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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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부엌

부엌은 중문 지나 왼편에 있었다.문지방을 넘자 더운 김이 먼저 얼굴에 닿았다.화덕이 둘, 솥이 셋.벽에 걸린 소쿠리와 조리들이 김에 절어 색이 깊었다.화덕 모서리는 손 닿는 자리만 둥글게 닳아 있었다.몇 대의 손이 짚고 지나갔을 모서리.안에 있던 여자들이 하나씩 굳었다.도마질 소리가 멎고,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가 부지깽이를 든 채로 돌아봤다.늙은 부엌 어멈 하나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소채를 버무리던 손.힐끗 보고, 도로 소채를 봤다.행주치마가 국물에 절어 얼룩덜룩했다.일하는 사람의 옷이었다."부인께서 어인 일로."제일 젊은 여자가 행주에 손을 닦으며 달려 나왔다."물 뜨러.""소인이 올리겠습니다.""물은 내가 뜰 거야.자리만 알려 줘."부엌이 조용해졌다.솥에서 무언가 끓는 소리만 남았다.오어멈이 소채 그릇을 내려놓고 턱으로 뒤쪽을 가리켰다."우물은 부엌 뒤에 있습니다.두레박은 왼쪽 것을 쓰십시오.오른쪽 것은 줄이 삭았습니다.""고마워."여자들이 오어멈을 봤다.오어멈은 도로 소채를 버무렸다.우물가에 서서 두레박을 내렸다.줄이 손바닥을 쓸며 내려갔다.물에 닿는 소리가 깊은 데서 올라오고, 당기자 어깨가 놀랄 만큼 무거웠다.이 몸은 물을 길어 본 적이 없는 몸이었다.두 번을 쉬고 올렸다.물은 차고 달았다.손바닥이 화끈거렸다.줄이 쓸고 간 자리가 붉게 일어나 있었다.이 몸의 첫 물집이 잡히려는 참이었다. 나쁘지 않았다.돌아 나오는데 부엌 안쪽 작은 솥에서 냄새가 났다.달고, 그 아래가 쓰고, 김이 무겁게 가라앉는 냄새.무언가를 달이고 있었다.문턱.불이 낮았다. 사람이 여럿 있었다. 냄새가 무거웠다."부인?"오어멈이 앞에 서 있었다.손에 든 국자에서 김이 올랐다."대부인마님 약차입니다.엿물을 좀 넣어 달입니다.쓰다고 안 잡수셔서.""…그래."목소리가 반 박자 늦게 나왔는데, 오어멈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국자를 든 채 잠깐 서 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아씨가 또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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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곳간

열쇠 셋은 문갑 안에 있었다.육설이 보내온 그대로, 무명 헝겊에 싸인 채였다.놋쇠가 굵고 이가 낡아 반들거리는 것 둘, 새것처럼 각이 선 것 하나.많이 열린 광과 덜 열린 광.열쇠는 제가 한 일을 제 몸에 적어 두고 있었다.낡은 열쇠가 곳간 것이었다.오래 쓴 열쇠와 덜 쓴 열쇠.헝겊을 풀 때부터 그것이 눈에 걸렸다.아침에 곳간지기를 불렀다.등이 굽고 눈이 밝은 영감이었다."곳간 열 거야. 장부 가져와."영감이 마당 건너를 한 번 봤다. 동쪽 별당 쪽.보고 나서 허리를 굽혔다."…예, 부인."곳간 문이 열리자 안에서 찬 공기가 흘러나왔다.쌀섬이 벽을 따라 쌓였고 콩과 팥이 독에 담겨 줄을 섰다.천장 가까이 매단 시렁에 마른 것들.쌀섬 겉에는 분필로 그은 표시가 희미했다.오래된 것은 지워지고 새것은 진했다.드나든 순서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장부는 손때가 앉아 귀가 말려 있었다.한 장씩 넘기며 곳간을 돌았다.적힌 자리에 물건이 있는지, 있는 물건이 적혀 있는지.셈은 필요 없었다.눈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빈자리는 빈자리 티를 냈다.비단 시렁이 그랬다.장부의 줄은 길고, 시렁의 자리는 반이 비었다.영감이 등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겨울에 문중 어른들 댁에 세찬으로 나간 것이 있습니다.""장부에 적혀 있어?""그것이.""적혀 있냐고.""…적는 장부가 따로 있습니다. 별당에."고개만 끄덕였다. 장부 그 장을 접어 표시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반찬광을 보고 나오는데 마당 건너에서 치맛자락 소리가 왔다.육설이었다. 아침부터 자색에 금박.걸을 때마다 장신구가 울었다."언니.""왔어요?""곳간을 여셨다길래…제가 뭐 도울 게 있나 해서요.""거의 다 봤어요."육설이 열린 곳간 문 안을 봤다.접어 둔 장부가 영감 손에 들려 있었다."장부까지 보시고.언니가 이런 걸 언제 다 배우셨대."말끝이 흐려졌다. 흐려진 자리에 칼이 있었다."배울 게 있어야죠.적힌 대로 있나 보는 건데.""…어머니가 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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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재작년

장마 전 마지막 갠 날이라고 부엌에서들 했다.볕이 얇고 바람이 잦은 날.서란이 바느질감을 들고 왔다.옥색 적삼에 남색 치마, 동정이 눈처럼 희었다.머리는 한 갈래로 곱게 땋아 끝에 다홍 실끈을 물렸는데, 감은 지 오래지 않은 머리가 가르마에서 빛을 갈라냈다.문지방을 넘을 때 살구씨 기름 냄새가 옅게 따라 들어왔고, 치마 아래로 새 버선의 코가 나란히 얌전했다."부인 버선을 짓다가, 치수를 몰라서요."들어와 앉는 자세가 아침 볕처럼 얌전했다.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 위에 바느질감을 놓고, 눈은 반쯤 내리고.버선 한 짝을 벗어 주었다.서란이 그것을 종이 위에 대고 본을 떴다.본뜨는 손이 빨랐다.바늘겨레의 바늘들이 굵기 순으로 꽂혀 있고 실패의 실이 색 순으로 감겨 있었다.손끝이 갈라졌던 아이의 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고른 세간이었다.밤에 앉아서 무언가를 만드는 아이.그 말이 사물로 앞에 있었다."부인.""응.""친정 뜰에 매화가 그리 곱다지요.행랑 사람들이 그러던데요.""글쎄. 안 세 봤어."서란의 손이 반 박자 멈췄다가 다시 갔다."…나무를 세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왼쪽 볼에 자국이 얕게 팼다."부인은 향을 정말 안 쓰시게요?소인이 지은 것이 마음에 안 드셨으면 다시 지어 올게요.""향이 무거워서 그래. 네 탓 아니야.""백단이 무거우셨나.매화만 넣어 볼까요.""됐어. 손 아프게.""소인 손은 이제 안 아파요."서란이 제 손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아문 자리가 분홍빛으로 차오르고 있었다.서란이 실을 끊었다.이로 끊지 않고 가위로 끊었다.강가에서 빨래하던 아이의 손이 어느새 가위를 쓰는 손이 되어 있었다.본을 다 뜨고도 서란은 일어나지 않았다.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문갑, 장, 소반, 그리고 창."저 얼룩은 오래되었나 봐요."창호지 왼쪽 위. 손바닥만 한 자국."재작년 장마."말이 생각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 있었다.얼룩은 왼쪽 위에서 십 년째 같은 모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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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약차

사시에 대부인이 불렀다.건넌방은 지난번처럼 어두웠다.창을 반만 열어 두고, 아랫목에 대부인, 그 옆에 부채 든 여자.절을 올리고 앉으니 소반이 하나 들어왔다. 찻잔이 둘.찻잔 둘이 놓인 소반은 이 방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마셔 보아라."약차였다. 잔은 백자, 차는 오래 달인 대추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잔 안벽에 진이 얇게 둘러 있었다.김에서부터 쓴 것이 올라왔다.한 모금 머금으니 혀뿌리가 오그라들고, 단맛이 뒤에 아주 얇게 따라왔다. 엿물.부엌 작은 솥의 그 냄새였다."어떠냐.""써요.""쓰지."대부인이 제 잔을 내려다봤다. 마시지는 않았다."엿물을 넣어도 쓰고, 더 넣으면 속이 아리다.십 년을 마셨는데 요즘은 넘기기가 싫구나.""언제 드시는데요.""아침에. 일어나서 바로.""빈속에 드시니까 쓰죠."염주가 멈췄다."약이 쓴 게 아니라 속이 비어서 더 쓰게 받아요.미음 두어 술 뜨시고 반 시진 있다가 드세요. 엿물은 빼고.""…엿물을 빼면 더 쓸 것 아니냐.""단맛이 먼저 오면 쓴맛이 더 오래 남아요.빼는 게 덜 써요."부채 든 여자가 부채질을 멈추고 있었다.대부인이 잔을 들었다.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고, 이쪽을 봤다."해 보고 아니면 네 탓을 하마.""그러세요."대부인이 잔을 마저 비웠다.쓴 것을 삼키는 목이 가늘게 움직였다.이레 뒤에 다시 불렀다.같은 방, 같은 자리.다만 창이 다 열려 있었다.방에 볕이 들어와 아랫목까지 닿았다."미음을 먹고 마시니 넘어가긴 하더구나.""예.""쓴 것은 그대로다.""약이 원래 써요.안 쓰면 그게 이상한 거예요."대부인의 입가에 무엇이 지나갔다.웃음이라기엔 얕고, 다만 세로 주름이 잠깐 부드러워졌다."명주야.""예.""그런 것은 어디서 배웠느냐."지난번과 같은 물음.염주는 이번에는 돌아가고 있었다. 천천히.볕이 대부인의 무릎까지 와 있었다.철에 맞지 않게 한 겹 더 입은 어깨가 볕 속에서 조금 얇아 보였다."어머니가 가르쳐 주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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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빈광

강목이 다시 온 것은 이레 만이었다.이번에는 궤짝을 열지 않았다.바깥채에서 한나절 문서만 봤다.점심상도 물리고 봤다는 말이 부엌까지 내려왔다.그 대목에서 부엌 어멈의 혀 차는 소리가 났다.오후에 물을 길으러 나가는데 뒤뜰 쪽에서 목소리가 넘어왔다."광이 하나 더 있다 들었습니다.""빈 광이오."육정의 목소리. 낮보다 반 키 낮았다."빈 것을 보는 게 제 일입니다."장독들 옆에서 걸음이 멎었다.독들 어깨 너머로 뒤뜰이 보였다.육정과 강목, 그리고 뒤따르는 종 하나.뒷광 문 앞에서 육정이 잠깐 서 있었다.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그가 문을 밀었고,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반 뼘 열려 있던 문이라 경첩이 울 새도 없었다.강목이 안으로 들어갔다.한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광 안에서 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있을 것이었다.물건마다 코에 가져가던 사람.빈 광에서 맡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광 자체였다.이윽고 그가 나왔다.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비었지요."육정이 말했다."예. 비었습니다."강목이 광 문을 도로 닫았다.닫고 나서 문틀을 한 번 쓸어 봤다.굳은살 앉은 손바닥이 나무 위를 천천히 갔다."바닥 가운데만 닳았습니다.""오래된 광이오.""예. 오래됐지요."두 사람 다 그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강목이 돌아서다가 우물을 봤다.뒤뜰 끝, 담 밑의 우물.뚜껑 삼아 얹은 판자가 반쯤 삭아, 틈에 낀 이끼가 기울어 가는 볕에 짙푸르게 젖어 보였다.그가 판자를 걷고 두레박을 내렸다.줄이 짧게 감겼다 풀렸다.물 닿는 소리가 부엌 우물보다 얕은 데서 났다.두레박이 올라왔다.그가 물을 코에 가져갔다. 한참 있었다.그러고는 마시지 않고 흙에 버렸다.물이 마른 흙에 검게 번졌다가 금세 졸아들었다.그가 이쪽을 봤다.장독들 사이, 물그릇을 든 채 서 있는 것을 언제부터 봤는지 모를 눈이었다."부인.""예.""이 우물 물, 부엌에서 씁니까.""안 써요. 쓰대요, 물이.""누가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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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앞섶

아침에 어멈이 왔다.문밖에서 한참 기척만 있다가, 초하가 문을 열어 주고서야 들어왔다.흰 적삼에 검은 치마.동정이 여러 물에 삭아 노르스름했고, 굽은 손가락 마디마다 실에 눌린 자국이 골처럼 앉아 있었다.왼쪽 눈꺼풀이 처진 눈이 방바닥만 봤다."부인.""응.""소인이… 여쭐 것이 있어서요."손이 앞섶을 쥐고 있었다.들어올 때부터 쥐고 있던 손이었다."앉아서 해."어멈이 무릎을 꿇었다.앉으라는 말에 꿇는 사람.그 무릎을 두고 말을 기다렸다.십 년 넘게 아침마다 남의 소매만 상대한 손이라, 제 앞섶을 쥐는 것 말고는 갈 데를 모르는 손이었다."아기씨께서.""응.""부인 향낭을 소인더러 다시 지으라 하십니다.부인이 안 쓰신 지 오래니 새로 지어 올리면 마음이 풀리실 거라고.""그건 네가 지을 것 없어.아기씨가 짓겠지.""그런데."어멈의 손이 앞섶을 더 깊이 쥐었다."아기씨가 넣는 것을 묻습니다.""넣는 거.""백단이 얼마고 매화가 얼마고…연옥화는 얼마나 넣는지.소인이 아는 대로 말씀드렸는데, 자꾸 되물으십니다. 연옥화를요."연옥화.못 듣던 이름은 아니었다.어멈이 언젠가 백단에 매화, 연옥화를 조금 섞는다고 했다.꽃 이름이 다 그렇듯 곱기만 한 이름."많이 넣으면 향이 달라지나.""아니오. 그것은 향이 없다시피 합니다.살빛이 맑아진다고 넣는 것이라.""향이 없는데 향낭에 넣어?""…예. 예전부터 그리 지어 왔습니다."누가 언제부터 그리 지으라 했는지는, 어멈도 모른다고 지난번에 말했다.어멈이 고개를 더 숙였다."부인. 소인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없어.""향낭 일을 그만두라 하셔서, 소인은 그저…"말이 거기서 무너졌다.앞섶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십 년 동안 아침마다 남의 소매에 손을 넣던 사람이었다.그 일 하나로 이 집에서 늙은 사람.일이 없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편함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것을, 이 사람의 손이 말하고 있었다."어멈.""예.""뒤뜰 마른 것들, 어멈이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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