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41 - Chapter 50

231 Chapters

40화 언니 손

스무하루 아침, 내원의 문안 자리에는 염주 알 넘어가는 소리만 고르게 났으며, 그믐까지는 여드레가 남아 있었다.발을 내린 방 윗자리에 노부인이 앉아 있었고, 금박을 놓은 자색 옷의 시누이 육설과 손아래 동서 주씨가 그 아래 걸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한경은 정실의 자리에 인형으로 앉아, 느린 눈을 무릎에 내려놓고 있었다.서재에서 쓰러진 날부터 장복이 그녀의 세 걸음 뒤를 따라다녔고, 지금도 문밖 섬돌 아래에 묵묵히 서 있었다.주씨는 어제 절에 다녀온 사람이었고, 절에서 주워 온 말을 오늘 아침 이 방에 풀어놓을 참이었다.그 얼굴에는 남의 일을 걱정하는 사람의 다정함이 곱게 떠 있었다."어머님, 우리 그이가 지고 간 궤짝 말이에요.성문에서 묶였던 까닭이 그거였대요.그 약을 시약장에서 먼저 먹여 봤는데 셋이 죽었대요, 셋이나요.그런데 태후 낭랑 친정 댁에서 말 한마디 하니까 그날로 풀려서 북으로 갔다지 뭐예요.""준이가 지고 간 것은 육가의 약이다."노부인의 대답은 짧았지만, 염주는 조금도 멎지 않았다."그럼요, 어머님.저는 그저 그이가 걱정이 돼서요."주씨가 서둘러 덧붙였지만, 방 안의 긴장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그녀는 그 약의 냄새를 알고 있었다.시약장에서 사내가 게워 낸 검은 환에서는, 약재 골목의 한 줌에 서 푼짜리 뿌리 냄새가 났었다.셋이 죽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게우게 한 석두는 넷째가 될 뻔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인 채, 육설의 손가락에서 반지 둘이 천천히 도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약 궤짝 이야기에 왜 저 반지가 도는지, 그녀는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주씨는 방 안의 공기를 읽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그리고요, 시약장 사람 둘이 골목에서 칼을 맞고 죽었대요.계집종 하나가 죽을 사람을 살렸는데, 그 계집을 찾느라 그랬다나 봐요.손이 백옥 같았대요."그 순간 육설이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언니 손 같네요."반지가 멎었고, 곧이어 염주도 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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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매신계

곳간은 내원 뒤편에 있었고, 한낮인데도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다.진 어멈이 열쇠를 받아 무거운 문을 열었으며, 머리를 대충 다시 틀어 올린 육설이 그 뒤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노부인은 문지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한경을 돌아보았다."명주 너도 들어오너라.네 궤가 여기 있다."그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노부인이 왜 정실까지 이 어두운 곳간으로 데려왔는지를 짐작했다.혼수는 시집오는 딸에게 친정이 들려 보내는 것이었고, 끝까지 그 딸의 것으로 남았다.시가에서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었다.그래서 혼수 궤는 그 주인이 곁에 서야만 열 수 있었다.한경은 인형의 느린 걸음으로 문지방을 넘었고, 장복은 문밖에 묵묵히 남았다.진 어멈은 먼저 육가의 비단을 쌓아 둔 선반을 한 칸씩 꼼꼼하게 세었는데, 이상하게도 비단은 한 필도 비지 않았다.육설의 어깨가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을 그녀는 곁눈으로 보았고, 그 안도가 너무 이르다는 것도 알았다."저것도 열어라."노부인의 눈이 선반 맨 끝에 놓인 붉은 칠 궤에 가 닿았다.뚜껑 모서리에 심가의 표지가 찍힌, 열 해 동안 아무도 열지 않은 궤였다."노부인, 그것은 부인의 혼수 궤입니다."진 어멈이 조심스럽게 아뢰었지만, 노부인은 대답 대신 한경을 턱으로 가리켰다."주인이 여기 섰다."그것은 명령이었지만, 동시에 정실을 이 자리의 증인으로 세우는 셈이기도 했다.뚜껑이 열리자 안쪽에 붙은 누런 종이 한 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혼수를 낱낱이 적은 장이었고, 맨 윗줄에 비단 열두 필이라고 적혀 있었다.그런데 궤 안에 남은 비단은 여섯 필뿐이었다.곳간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으며, 그 침묵 속에서 육설의 숨이 한 번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어머님, 그건 제가…언니는 열 해 동안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으시길래, 좀이 슬어 썩히느니 장에 내다 팔아서 곳간 축난 것을 메우려고…정말 그것뿐이에요, 어머님…"육설은 말끝을 흐리며 변명했지만, 그 말은 누구의 귀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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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그믐 앞

서란은 그믐을 나흘 앞둔 오후에 서하당을 찾아왔다.장복이 문밖에서 후원 사람이라고 낮게 아뢰었고, 서란은 문지방 안쪽에 얌전히 꿇어앉아 두 손을 모았다.유월 초닷새에는 여섯 손가락 끝이 갈라져 검은 피가 말라붙어 있던 손이었는데, 지금은 열 손끝이 다 분홍빛이었다.그 고운 손으로 문지기의 등에 고약을 정성껏 펴 발랐다는 사실을, 한경은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부인, 주신 연고를 다 썼어요.귀한 합이라 돌려드리러 왔어요."서란은 빈 합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쳐 내밀었다.합이 건너갈 때 분홍 손끝이 그녀의 손등을 아주 가볍게 스쳤는데, 그 손끝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그러고 나서 서란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걱정하는 사람처럼 다정하게 웃었다."부인은 밤에 걸으신다면서요.소인이 어릴 때 있던 곳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밤에 걷는 사람은요, 걷다가 꼭 봐서는 안 될 걸 봐요.그러니 부디 밤에는 문을 꼭 닫고 주무세요."도와주고 싶게 고운 얼굴이었고, 걱정으로 들으면 분명 걱정인 말이었다.그러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문지기는 열흘 전에 죽었다.그녀는 인형의 느린 눈으로 서란의 이마 언저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했다."…나는 모른다. 자고 있으니.""그렇겠네요. 주무시는 분이 뭘 아시겠어요."서란은 다시 한번 웃고, 머리를 조아린 뒤 소리 없이 물러갔다.알아듣지 못할 사람이라 마음 놓고 한 말일 수도 있었고, 알아듣는 줄 알고 일부러 한 말일 수도 있었다.어느 쪽이든 그 말은 경고였으며, 동시에 정실의 속을 떠보는 말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그리고 그 다정함이 이 여자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칼이라는 것도, 그녀는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독을 다루는 손이 다정함까지 다룬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어떤 독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이틀 뒤 아침 문안에서 돌아오자, 한경은 아무도 없는 틈에 조용히 옷궤를 열어 보았다.맨 위에 개어 두었던 연둣빛 단삼이 감쪽같이 없어져 있었다.그녀는 그 빈자리를 내려다보며, 덫이 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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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빗장

유월 그믐이라 하늘에는 달이 없었고, 불이 든 창은 서재 하나뿐이었다.한경은 서재 회랑 끝 기둥 그늘에 등을 바싹 붙이고 서서, 맨발의 발가락을 조용히 오므렸다.지금 저 안에서는 후원의 여자가 남편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고, 그 차에는 뒤뜰 빈 독에 숨겨 둔 흰 병의 것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지난 삶의 이 밤에 서란은 바로 그것 한 잔으로, 이 서재에서 첩이 될 명분을 얻었다.곧이어 안에서 사기잔이 나무에 닿는 소리가 높고 가볍게 났으니, 빈 잔이라는 뜻이었다.그는 마셨고, 다만 오늘 저 잔에 든 것은 반이라고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남은 것은 틈 하나였다.여자가 훔쳐 둔 옷으로 갈아입으러 후원에 다녀오는 동안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틈이었다.그녀는 넷에 들이쉬고 여섯에 내쉬는 숨을 서른 번 천천히 세면서, 터질 듯한 긴장을 숨 밑으로 꾹꾹 눌렀다.마침내 문이 열렸고, 서란이 빈 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조용히 나왔다.여자는 올 때 켜 들었던 등을 꺼 둔 채, 마당을 가로지르지 않고 처마 그늘을 따라 후원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무명 치맛자락이 기둥에서 세 걸음 떨어진 데를 지나갈 때, 그녀의 코에 쓴 냄새가 훅 끼쳐 왔다.그것은 병에서 나던 묵은 냄새가 아니라 불에서 막 내린 것의 냄새였지만, 그 순간에는 코가 받은 것을 머리가 미처 듣지 못했다.발소리가 모퉁이를 완전히 돌아 사라지자, 한경은 마침내 그늘에서 나왔다.---서재 문은 닫혀 있었지만, 다행히 걸려 있지는 않았다.그녀는 문을 밀고 들어가 등 뒤로 조용히 닫았는데, 문 안쪽에 나무 빗장이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손때는 없고 먼지만 하얗게 앉아 있는 빗장이었다.그녀가 그것을 당겨 맞은편 걸쇠에 지르자, 덜컥, 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날카롭게 깼다.이제 서란이 돌아와 이 문을 밀면, 이 빗장이 그 손을 받을 것이었다.먹 냄새가 코에 닿자 명치가 저절로 당겼다.이 몸은 십 년 동안 밤마다 이 냄새가 오는 쪽으로 돌아누웠다는 것을, 그녀는 살갗으로 기억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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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그믐밤

그가 거칠게 끌어당기자 한경의 등이 서안 모서리에 부딪혔고, 벼루가 밀려나며 문서가 바닥으로 쏟아졌다.뜨거운 입이 목덜미에 닿았는데, 바싹 마른 입술이 살갗을 긁을 때마다 그 자리로 열이 불씨처럼 옮겨붙었다.곱절로 탄 것이 언제 그를 꺾을지 전혀 모르는 채로, 이 몸이 본능으로 먼저 대답하고 있었다.목이 저절로 뒤로 젖혀졌으며, 두 손이 그의 홑옷 깃을 꽉 움켜쥐었다.밀어내려고 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경은 쥐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하루 한 번 손목에 오는 손을 전부로 알고 십 년을 견딘 몸이,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 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배 아래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무릎이 스르르 풀리는데도, 그녀의 이성은 그 감각을 끝내 말리지 못했다.그리고 말리지 못하는 것이 이 몸만은 아니라는 것을, 한경은 엉기는 숨 사이에서 그제야 어렴풋이 알았다.사람들은 늘 그녀의 손에 든 것을 보았지 그녀를 보지 않았다.놓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누가 그녀를 붙든 것은, 한경으로 산 세월을 통틀어 처음이었다."상공."약이 쥐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한경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그의 귀에 대고 낮게 물었다."궤에 무엇이 있습니까.""…편지."대답을 흘린 뜨거운 입이 쇄골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누구의 편지입니까.""태웠어야… 했는데. 못 태웠소. 부인의…부인 것이 거기.""삼월이 무엇입니까."그 순간 그의 몸이 얼어붙은 듯 멎었다.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구멍 같은 눈은 그녀의 얼굴이 있는 자리를 보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모르오."크고 뜨거운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으며, 그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모르오. 모르오, 부인. 물었소. 아무도… 아무도 내게는."그리고 그의 입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혀끝에 닿은 것은 그가 마신 차의 쓴맛이었다.한경은 그 쓴 것을 혀로 받으면서 이만큼으로 제 눈동자도 벌어질지를 차갑게 따지다가, 그 셈마저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그의 손이 등을 타고 내려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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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서찰

열쇠는 손 안에서 금방 따뜻하게 데워졌지만, 그것을 쥔 손끝이 여전히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한경은 열쇠를 쥔 채 먼저 그를 서안에서 내렸는데, 이 가는 팔로는 그 큰 몸을 받칠 수가 없었다.그녀는 그의 겨드랑이에 어깨를 넣고 함께 주저앉다시피 하여, 그를 바닥에 천천히 뉘었다.모로 눕히고 위쪽 팔을 접어 뺨 밑에 받친 것은, 게우더라도 숨이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그 순서를 알았다.십칠 년 동안 실려 온 사람들 곁에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그러나 문살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는 저 여자가 끝내 문을 두드리지 못하리라고 짐작했다.소리를 내면 하방이 깨고, 하방이 깨면 저 여자는 정실의 옷을 입고 한밤에 가주의 서재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그 셈을 믿고, 한경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문에 등을 돌렸다.벽 쪽의 검은 궤는 칸이 셋이었으며, 맨 아래 칸에만 자물쇠가 단단히 물려 있었다.열쇠는 걸리는 데 없이 부드럽게 돌았으며, 안에 든 것은 셋이었다.참빗 하나와 접은 흰 옷 한 벌, 그리고 그 밑에 깔린 누런 종이 한 장이었다.대를 깎아 만든 참빗은 살 두 개가 빠져 있었으며, 그 옆에 길고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이 감겨 있었다.쥐자마자 엄지가 저절로 빠진 살 자리를 찾아갔으니, 이 손이 쓰던 빗이라는 것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시집오던 해에 쓰다가 어느 날 없어진 빗이었는데,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그 머리카락 한 올을 십 년 동안 떼어 내지 않았다.그것이 미련인지 집착인지, 그녀는 가늠하지 않기로 했다.종이는 접힌 모서리가 솜처럼 닳아 일어나 있었으니, 여러 번 펴고 여러 번 접은 종이였다.펴는 순간, 눈이 글자를 읽기도 전에 명치가 당기고 가슴이 먼저 뛰었다.세로획 끝을 한 번 눌렀다 떼는 그 버릇을, 이 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아버지의 글씨였다.딸의 향을 끊지 말게.끊으면 그 밤이 돌아오고, 돌아오면 그 집이 딸을 거두러 오네.밤마다 자네 손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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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새벽 마당

빗장을 풀고 서재 문을 밀었을 때, 섬돌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하늘은 아직 먹빛이었지만, 동쪽 담 위로 물에 갠 듯한 잿빛이 아주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한경은 회랑으로 가지 않고, 맨발로 처마 그늘을 밟으며 뒤뜰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밤새 식은 흙이 발바닥에 차갑게 달라붙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뛰지 않았다.그때 담 너머 어디선가 첫닭이 길게 울었다.그녀는 부엌 쪽에서 넘어오는 화덕 냄새를 희미하게 맡았다.이 집 부엌의 여자들이 늘 닭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그녀는 이 몸의 열 해 묵은 기억으로 알았다.장독 줄이 끝나는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덜컥, 하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깼다.간밤 서재에서 그녀가 지른 빗장과 꼭 같은 소리였다.곧이어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고, 오 어멈의 쉰 목소리가 뒤뜰을 날카롭게 갈랐다."거기 누구요!"그녀는 장독 그늘에 선 채 잠시 눈을 감았다.그믐날 새벽닭이 울기 전에 후원 협문에 빗장을 지르되 뒤뜰 쪽에서 지르라고, 그녀는 오 어멈의 귀에 대고 그렇게 일렀었다.후원에는 문이 둘뿐이었다.뒤뜰로 드는 협문과, 물길가로 난 바깥문이었다.협문이 막히면 바깥문으로 나가 담을 돌아야 하는데, 뒷문은 밤마다 안에서 걸리니 남는 것은 대문 하나였다.유월 열이틀, 서란이 뒷문에 지른 빗장이 그녀에게 남겨 준 셈이 바로 그것이었다.한경은 그 셈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뿐이었다.그리고 초하루 아침에 진 어멈이 옷궤를 연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이 집에 춘월 하나뿐이었다.그러니 저 옷은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이 뒤뜰을 지나 서하당으로 돌아가야 했다.저 여자는 그 옷을 벗어 들고 오지 않고 입은 채로 올 것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어스름 속에서 연둣빛 단삼을 입고 걷는 사람을 보면, 이 집 사람들은 누구나 밤에 걷는 정실을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밤에 걷는 사람은 걷다가 꼭 봐서는 안 될 것을 본다고, 바로 저 여자가 제 입으로 말했다.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지만, 그녀는 숨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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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초하루

그는 아침 물그릇보다 먼저 서하당에 왔다.새벽 마당에서 초하의 등불을 따라 돌아온 뒤, 한경은 침상에 앉아 끝내 눈을 붙이지 못했다.발은 일부러 씻지 않았다.그 흙이 곧 쓸 데가 있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문이 열리자 그가 들어와 창을 등지고 섰다.칠월 초하루의 볕이 그의 어깨 너머로 들어와 그녀의 얼굴에 닿았지만, 그는 그늘 속에서도 눈을 가늘게 찡그리고 있었다.갈아입은 옷의 허리끈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부인."그 한 마디에도 목소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갈라졌다.빛을 못 견디는 눈과 마른 입과 쉰 목은 간밤의 것이 지나가며 남긴 자리였으며, 하루면 빠질 증상이었다.그는 이따금 제 목 옆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는데, 왜 거기가 뻐근한지 모르는 손길이었다."간밤에… 서재에 오셨소?"다 기억하는 사람은 말끝을 그렇게 올려 묻지 않으니, 그에게 남은 것은 조각뿐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아니라고 하면 그 조각은 다른 여자의 것이 된다.간밤 그 문 앞까지 간 여자가 이 집에 하나 더 있었다.그러면 그는 후원으로 가서 책임을 질 것이고, 서란은 문밖에 서 있기만 하고도 지난 삶과 같은 것을 얻는다.그렇다고 하면, 정실이 한밤에 맨발로 마당을 건너 가주의 서재에 든 것이 된다.그가 붙여 준 밤에 걷는다는 이름이 굳어질 것이고, 문밖에 서는 사람이 늘고, 병을 보겠다는 사람이 올 것이었다.갇히는 쪽이 빼앗기는 쪽보다 쌌다.한경은 계산을 끝내고, 인형의 눈을 느리게 들었다."…모르겠습니다."그녀는 이불 밖으로 발을 천천히 내밀었다.발바닥에는 마당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걸었나 봅니다. 발에… 흙이."그는 무엇을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그 발을 오래 내려다보았다.그러고 나서 그의 눈이 천천히 올라오다가, 손목에서 한 번 걸렸다.밤마다 그의 손이 향낭을 묶어 주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십 년 만에 처음 거른 밤이었다.끊으면 온다는 서찰 한 장을 십 년 동안 믿어 온 사람의 목울대가, 마른 침을 삼키듯 크게 한 번 움직였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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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삼월이면

의원이 사람을 보는 순서는 어느 세상이나 같아서, 낯빛을 보고 혀를 보고 손목을 쥔다.스무날 넘게 알갱이를 골라낸 몸이라 땀이 돌아왔고 눈이 제 빠르기를 되찾았으니, 아는 손이면 금방 알아챌 것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그래서 초사흘 아침, 한경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혀가 입천장에 붙게 두었다.그녀는 눈을 일부러 느리게 옮겼으며, 숨은 넷에 들이쉬어 여섯에 내쉬었다.그러나 그 준비는 하나도 쓸 데가 없었다.---내원 뒷방은 창이 하나뿐이었고, 발을 내린 벽에는 약차 냄새가 깊이 배어 있었다.노부인은 창 곁 의자에 앉아 염주를 돌렸으며, 진 어멈은 문 안쪽에 서서 등으로 문을 막고 있었다.의파는 쉰 남짓한 여자였는데, 머리를 바짝 틀어 올렸고 손톱을 살까지 깎아 두었다.그 여자는 한경을 평상에 눕히면서 낯을 보지 않았고, 혀를 내밀라 하지도 않았으며, 손목에는 손끝도 대지 않았다.단삼 앞자락이 걷히고 치마허리가 내려가자, 우물에 담갔다 꺼낸 것처럼 차가운 손이 배 위로 왔다.이 몸은 그 손을 기억하고 있었다.철이 바뀔 때마다 와서 배를 만지고 가던 손이었다.명주는 그것을 늘, 시어머니가 손주를 기다려 주시는 마음으로 알았다.찬 손가락 넷이 더듬지도 않고 오른쪽 갈비 밑으로 곧장 들어오자, 그 낯선 감각에 살갗마다 소름이 돋았다.한경이 이 몸에 들고도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알아챈 자리를, 이 손은 단번에 찾아왔다."부인, 숨 한 번 크게 쉬어 보셔요."인형은 시키는 대로 숨을 쉬었고, 깊은 데 있던 단단한 것이 숨을 따라 내려와 그 손가락 위에 얹혔다."옳지."의파는 그것을 지그시 누르고 손끝으로 좌우로 천천히 굴리더니, 엄지와 검지로 살째 집어 그 틈을 제 왼손 검지의 마디에 대어 보았다.한경은 그 손놀림을 단숨에 알아보았다.그것은 그녀가 하던 일이었다.기르던 것을 우리에서 꺼내 뒤집어 놓고, 엄지와 검지로 배를 집어 얼마나 찼는지를 재는 손이었으니, 그 손에 연민 같은 것은 없었다.그녀는 십칠 년을 그 손 쪽에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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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징발

하방 문짝을 창 자루로 치는 소리가 서하당까지 들려온 것은 칠월 초닷새 아침이었다.한경이 정청 회랑의 대발 뒤에 섰을 때, 큰마당에는 대문을 밀고 들어온 군졸 스물이 늘어서 있었다.절반은 창을 짚었고 절반은 칼을 찼으며, 군관 하나가 마당 가운데서 방을 펴 들고 큰 소리로 읽었다.북변에 짐 질 사람이 모자라니, 사대부가는 사내종 다섯에 하나를 오늘 안으로 내라는 것이었다.지난달 이 집 대문간에서는 군관 하나가 가주의 말 몇 마디에 말에서 끌려 내려온 일이 있었다.그래서 오늘 군관이 처음부터 스물을 데리고 걸어 들어왔다는 것을 그녀는 짐작했다.총관이 명부를 들고 섰지만, 종이가 그 손에서 가늘게 떨렸다."스물다섯이면 다섯이오.젊은 놈부터 세우시오."세울 것도 없이 군졸들이 사내들을 거칠게 끌어냈다.물지게꾼이 지게째 끌려 나오면서 통의 물이 마당에 쏟아졌고, 야경꾼은 허리에 찬 나무판을 붙든 채 끌려 나왔다.그 어미가 군졸의 다리를 끌어안고 절박하게 늘어졌다."밤에 담 도는 것밖에 못 하는 놈이오!짐은 못 지오, 이놈은 허리가—"창 자루가 어미를 밀어 넘어뜨리자, 장작을 패던 하방 사내 둘이 도끼 자루를 든 채 달려들었다.창 자루와 도끼 자루가 엉키는 소리가 마당을 울렸고, 한 사내가 이마가 찢어진 채 흙바닥에 나뒹굴었다.군졸 셋이 그 위를 짓밟듯 덮쳤으며, 하방 처마 밑에서 여자들의 울음이 터졌다.그 소란 사이로, 서재에서 등잔을 보는 아이가 팔을 잡혀 울지도 못하고 발만 끌려 나갔다.바로 그때, 소란을 가르듯 서재 문이 열렸다.육정은 집에서 입는 얇은 홑옷 차림이었는데, 관도 쓰지 않았고 소매는 팔뚝까지 걷혀 있었다.섬돌을 내려와 마당을 건너는 그의 걸음은 조금도 빠르지 않았다."병부 징발령 넷째 조요."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마당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져서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어공의 물목을 지고 나르는 자와 그 곳간을 지키는 자는 징발에서 뺀다.이 집 종은 하나도 빠짐없이 어공 물목을 지오."물목은 궁에 올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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