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51 - Chapter 60

231 Chapters

50화 모래

바가지를 돌려받은 초하가 그 자리에 굳어 섰고, 마당에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다.섬돌 위에서 육정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팔이라, 그 손을 숨길 데가 어디에도 없었다.북으로 군량을 실어 올린 배는 심가의 것이었다.이 몸의 친정이었다.군량에 모래가 섞였다면, 그 배를 띄운 집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것이었다.북변에서 굶는 군졸들의 셈이 그러했고, 도성의 셈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그런데 같은 날 같은 길로 북에 간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저 사람의 이름이 얹힌 육가의 군약 궤짝이었다.북에 보낸 금창약이 밀가루일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처음 짐작한 것은 보름 전이었다.시약장에서 사내가 게워 낸 검은 환에서는 약재 골목의 한 줌에 서 푼짜리 뿌리 냄새가 났고, 그 약을 먹고 셋이 죽었다는 말을 주씨가 절에서 주워 왔다.그렇다면 북으로 간 것은 심가의 모래와 육가의 가짜 약이었다.우연이라 하기에는, 두 집의 이름이 너무 나란히 한 길에 실려 있었다.지난 삶에 명주는 십일월이 되어서야, 편원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시녀들의 입으로 아버지가 옥에 갇힌 것을 들었다.그런데 모래는 그보다 넉 달이나 먼저, 칠월에 이미 있었다.명주가 기억하는 십일월은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었다.칠월부터 한 걸음씩 다가오던 것이 그날 문을 두드렸을 뿐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한경의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것이 천천히 내려갔다.지난 삶의 명주는 그 넉 달 동안 아무것도 몰랐다.그러나 이번에는 그 넉 달을 아는 사람이 이 몸 안에 있었다.다섯은 창 든 군졸 사이에 끼어 대문을 나갔고, 부엌 문간에서는 유삼의 딸이 오 어멈의 품에서 끝내 소리를 내어 울었다.유삼은 두 번 돌아보았지만, 조 노인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귀가 어두워 뒤에서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북변의 보루에는 칠월에도 새벽마다 뼈에 스미는 찬 이슬이 내렸다.보루의 군졸들은 지난달부터 반 그릇의 죽으로 버티고 있었다.배가 닿은 날 풀어 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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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칠석

"비단 두 필. 바늘 일곱. 분합 하나."늙은 태감은 종이를 들고 있지 않았으며, 곁의 젊은 태감이 물목을 펴 들고 있었는데도 거기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글을 모르는 사람이 외운 것을 읊듯, 그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높고 마른 목소리로 천천히 읊었다.정청에는 향이 피워지고 붉은 보를 덮은 탁자가 놓였다.태후전이 해마다 어공을 맡은 집의 안주인들에게 내리는 칠석 하사였다.혼인한 뒤로 열 번을 받은 것이라, 이 몸의 무릎은 머리보다 먼저 꿇을 자리를 알았다.하사를 받는 날의 차림은 따로 있었다.깊은 청색 비단 겉옷 위로, 목 뒤에서 가슴 앞으로 노을빛 비단 띠 두 줄이 길게 늘어졌다.노을을 걸친다 하여 하피라 불렀다.띠마다 원앙이 한 쌍씩 수놓였고, 두 끝이 만나는 자리에 달린 금 추가 무릎을 꿇을 때 바닥에 먼저 닿았다.곁에는 검은 사모에 푸른 비단 포를 입고 가슴에 흰 꿩 수를 단 육정이, 낯선 사람처럼 서 있었다.이윽고 함이 내려왔다.궁의 물건은 두 손으로 받는 법이었다.한경은 소매에서 손을 꺼냈고, 검은 칠에 자개로 까치를 놓은 함이 그 손바닥 둘 위에 얹혔다.받는 순간 손목이 조금 처졌다.바늘 일곱과 분합 하나가 든 함의 무게가 아니라는 것을, 저울 없이 무게를 재며 십칠 년을 산 손이 먼저 알았다.그녀는 눈을 느리게 들었다.함을 놓고 물러가는 손과 남빛 소매, 그리고 수염이 난 적 없는 턱이 차례로 보였다.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한 달 전 약재 골목의 막다른 담 앞, 흰 얼굴의 사내 뒤에 서 있던 늙은 종이었다.그 늙은 종이 지금 태감의 옷을 입고, 가슴에 까치 떼가 다리를 놓은 수를 단 채 서 있었다.그의 눈은 처음 보는 안주인을 보듯 그녀의 얼굴을 무심히 지나가더니, 내려와 함을 받친 손에서 멎었다.길지 않은, 숨 한 번이었다."바늘은 일곱이옵니다.부인께서 손수 세어 보시지요.""…태후 낭랑의 은혜에 사은하옵니다."해마다 하던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고 인형은 다시 눈을 내렸지만, 등줄기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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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싫어요

등잔이 꺼진 방은 창지에 스민 푸른빛만으로 희미하게 밝았다.그가 침상에 반듯이 눕자 요가 한쪽으로 그만큼 꺼졌는데, 십 년 동안 이 침상에 앉았다가 나가기만 하던 사람이었다.이 몸은 그 기울기를 처음 알았고, 그쪽으로 쏠리지 않으려고 등을 벽에 바싹 붙였다.벽은 얼음처럼 찼다.명주가 열 해 동안 몸을 붙이고 잠든, 바로 그 벽이었다.손목은 여전히 그의 손 안에 있었으며, 한경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들이쉬는 숨은 짧았고 내쉬는 숨은 중간에서 한 번씩 걸렸으니, 그것은 결코 잠든 사람의 숨이 아니었다.그믐밤의 그는 불덩이였지만, 지금 이 손은 미지근했고 손바닥에는 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오늘 이 사람은 약 없이, 제정신으로 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그녀는 그 사실을 손목으로 먼저 알았다."부인.""…예.""자오?""아닙니다."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요가 다시 움직였는데, 그가 그녀 쪽으로 천천히 돌아눕는 것이었다."싫으면."목소리가 갈라졌다.그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싫으면 말하시오."그것은 분명 묻는 말이었다.십 년 동안 한 번도, 무엇도 묻지 않던 사람이 지금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한경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셈을 했다.겁이 날 때마다 셈부터 하는 것이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셈으로는 받는 것이 맞았다.후원의 여자가 이 침상을 먼저 가지면, 밤마다 이 손목에 오는 손도 결국 그 여자의 것이 될 것이었다.내가 먼저 가지면 이 손은 내 것이 된다.무엇을 넣는지, 언제 넣는지, 넣다가 떠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쪽이 이기는 법이었다.그런데 셈은 거기서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다.그믐밤 뒤로 이 몸은 저녁이면 문 쪽으로 돌아누웠고, 그녀는 그것을 증상, 남의 것이라고 적어 왔다.그러나 서안 위에서 눈이 감기려던 것이 명주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약 없이도 저 손이 놓치면 죽을 것처럼 사람을 쥐는지, 그녀는 알고 싶었다.저 손이 밤마다 무엇을 넣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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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차

찻주전자는 두 손으로 들어야 했다.십 년 동안 제 잔 하나 들어 본 적 없는 손목이라, 손잡이를 쥐자 팔꿈치부터 가늘게 떨렸다."부인, 그러다 쏟아요.근데 그거 참말 넣으시게요? 가주님 잔에요?"초하는 말해 놓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제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벌써 넣었어."잔 바닥에는 이미 그것이 들어 있었다.약재상에서 사 온 잿빛 껍질, 사람을 깊이 재우는 것이었다.한경은 그것을 제 몸으로 먼저 시험해 보았는데, 꿈 없이 깊이 잤고 깨고 나서도 숨은 고르고 머리는 맑았다."소인은 못 봤어요.소인은 물만 끓였어요. 물만요.""응. 너는 물만 끓였어."들키면 매를 맞는 것은 찻물을 나른 쪽이라는 것을, 그녀는 형틀의 서른 대가 남긴 기억으로 잘 알고 있었다.칠석 밤부터 그는 나가지 않았다.이 침상에서 그녀의 손목을 쥔 채 얕게 잠들었다가, 새벽에 한 꼬집을 넣고 갔다.골라낼 틈이 없으면 알갱이는 손목 위에 얹힌 채 밤을 넘기니, 빼지 못한 밤은 곧 먹은 밤이었고 이 몸이 다 익는다는 삼월은 그만큼 당겨질 것이었다.그러니 재워야 했다.그가 내 손목에 넣는 동안 나는 그의 잔에 넣는다.공평하다.걸리는 것은 가면이 들킬 위험이었다.느리고 묻지 않고 제 잔도 남이 들어 주는 인형이, 남편에게 차를 낸 적은 열 해 동안 한 번도 없었다.그래도 사내를 방에 들인 여자가 그 사내에게 차를 따르는 것은, 깨어난 것이 아니라 길든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그녀는 셈했다.회랑에서 발소리가 나자 초하가 물러났고, 한경은 주전자를 고쳐 쥐었다.문가에서 멎은 육정의 눈에, 주전자를 두 손으로 안듯이 든 아내가 들어왔다.한경은 차를 따랐다.물줄기는 잔 밖에 먼저 떨어졌다가 잔 안으로 옮겨 갔고, 전까지 차올라 받침으로 넘쳤다.독을 다루는 방에서 십칠 년을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따르던 사람에게는, 서툰 것을 꾸미는 일이 따르는 일보다 훨씬 어려웠다."…부인.""쓴 것을… 드신다 들었습니다."그는 자리에 앉아 넘친 잔을 두 손으로 들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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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위

아들은 전돌 바닥에 꿇은 채 벌써 한 시진째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노부인은 그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염주를 천천히 넘겼다.칠석부터 사흘 밤, 아들이 서하당에서 해가 뜨도록 잤다는 사실은 진 어멈이 아침마다 빠짐없이 올린 말이었다.잠자리에 사내가 드나들면 몸이 놀라는 법이었고, 놀란 몸은 제 때를 잊기 쉬웠다.삼월은 정해진 날이었으며, 정해진 날까지는 아무것도 놀라면 안 되었다.그 셈 앞에서는 아들의 마음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처음부터 없었다."후원의 사람을 들여라. 달포를 넘겼다.""어머님, 저는… 부인 곁에 있겠습니다."아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열 해 동안 한 번도 어미 앞에서 내 본 적 없는 고집이 그 끝에 걸려 있었다."네가 서하당에서 자는 것은 내가 안다.그것과 이것은 다른 일이다."아들의 어깨가 굳었으나, 노부인은 그것이 무엇을 참는 어깨인지 잘 알았다.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아끼는 것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깨진 사발 조각도 쥐고 잤고, 놓으라 하면 손바닥이 베이도록 더 세게 쥐었다.그럴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 준 것은 늘 어미였다.놓게 하는 것은 어미의 일이었다.후원의 아이가 새벽 마당에서 정실의 옷을 입고 섰다는 것도 노부인은 알았다.그래도 위에서 보낸 사람은 위가 부를 때까지 두는 것이 이 집의 오랜 예법이었다."위에서 보낸 사람이다."노부인은 거기서 한 번 숨을 고른 뒤, 마저 말했다."네 아비도 위에서 보낸 것을 받았다."아들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지만, 그 눈에 떠오른 물음을 노부인은 끝내 보지 않았다.염주 한 알이 엄지 밑에서 조용히 넘어갔다.스무 해 전의 일은 그 한 알로 충분했다.그녀는 아들을 일으키지 않았다.무릎이 저려야 손이 펴진다는 것을, 사발 조각을 쥐던 아이를 키우며 이미 배웠기 때문이었다.---초하는 이경이 훨씬 지나서야 돌아왔다.내원 창 밑에 웅크려 있다 온 아이의 치맛단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입술은 추위인지 공포인지 모를 것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늘 말이 넘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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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그게 무엇입니까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밤새 밴 먹 냄새가 먼저 와 닿았다.한경의 손이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한쪽만 접힌 그의 깃을 펴 주려던 손이었는데, 그녀는 그 손을 깃 앞에서 간신히 멈췄다.명주는 열 해 동안 낮에 남편의 옷에 손을 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믐밤 서재에서 그의 옷깃을 여민 손이라는 사실은, 낮의 인형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멈춘 손을 그가 감싸 쥐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아내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부인. 내가…"소매 안에서 그의 다른 손이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말을 삼킬 때마다 나오는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명주는 열 해를 보고도 그 손가락 안에 무슨 말이 쥐여 있는지 끝내 알지 못했지만, 한경은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후원의 사람을 이 집에 둘 것이오."그는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한참 만에야 뒷말을 힘겹게 이었다."…첩으로 들일 것이오.""첩."인형의 입이 그 글자를 느릿하게 따라 했다.거기까지는 지난 삶과 꼭 같았다.지난 삶의 명주는 여기서 물었다.설 립 아래 계집 녀, 글자는 알아도 뜻이 늦게 오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한경은 첩이 무엇인지도, 그 한 글자가 방을 옮기고 이름을 지우는 순서의 첫 칸이라는 사실도 똑똑히 알았다.물을 것이 없었는데도 그녀는 묻기로 마음을 정했다.사흘 밤을 이 침상에서 그녀의 손목만 쥐고 잔 사내가, 그 입으로 아내에게 첩이 무엇인지를 풀어 말하는 얼굴을 꼭 보고 싶었다."그게 무엇입니까."맑고 느린,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그 순간, 단단하던 그의 얼굴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그것은…"말은 거기서 끊겼고, 그의 눈이 아내의 얼굴에서 떨어져 침상으로 갔다.사흘 밤의 요가 아직 한쪽으로 꺼져 있었는데, 그 눈은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려갔다.초닷새에 대문을 밀고 든 군관의 낯을 조문 몇 줄로 하얗게 만든 사람이었다.첩이 무엇인지 그는 법으로도 예법으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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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중원

"보름 지나서 오라고 해."후원에 그 말을 전하고 돌아온 초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알겠대요. 그러고 웃더래요, 부인. 그 웃는 게 좀…아니, 웃는 거야 좋은 거지만요."칠월 보름, 중원이었다.아침부터 집 안에 종이 타는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죽은 사람이 문턱까지 온다는 날이라 집마다 지전을 사르고, 해가 지면 물가에 등을 띄워 돌아갈 길을 밝혀 준다고 했다.초하는 아침부터 세 번이나 같은 말을 진지하게 일렀다.오늘 밤에는 누가 뒤에서 불러도 절대 돌아보면 안 되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을 가져간다는 것이었다.저녁이 되자 정청에 제탁이 놓였는데, 위패는 하나뿐이었다.스무 해 전 겨울에 죽은 이 집의 앞 가주, 육정의 아버지였다.육정과 육설과 주씨가 차례로 절했고, 한경도 인형의 느린 무릎으로 절했다.노부인은 맨 나중에 혼자 천천히 절했다.이마가 바닥에 닿고 나서도 오래 들리지 않았으며, 손목에 감긴 염주는 한 알도 넘어가지 않았다.초사흘에 그녀의 배를 재던 의파는, 때가 가까우면 밤에 걷는 수가 있다며 스무 해 전 그분도 걸으셨다고 했다.노부인은 그 말을 막았다.이 집에서 스무 해 전에 죽은 사람은 저 위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한경은 조용히 마음에 새겨 두었다.---제가 끝나자 종들이 등을 들고 뒷문으로 나갔다.죽은 이의 날에는 물가로 가는 문을 밤에도 걸지 않는 법이었다.오 어멈은 맨 나중에 나섰는데, 종이로 접은 연꽃등 하나를 두 손으로 소중히 받쳐 들고 있었다.지난달에 죽은 남편 염 노인의 첫 중원이었다.등 옆구리의 이름은 낮에 한경이 초하의 손을 거쳐 써 보낸 것이었으니, 오 어멈은 글을 몰랐다.한경이 그 뒤를 따라 걸음을 떼자 육정의 눈이 따라왔다."…등을 보고 싶습니다."소매 안에서 그의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유월 열이틀 밤, 종의 옷으로 돌아온 아내의 터진 발을 제 손으로 씻긴 사람이었다."물가가… 미끄럽소.장복이 따를 것이오."막지 않고 사람을 붙였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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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노 소리

그날 밤 한경은 끝내 잠들지 못했다.뒷창 너머로 물소리가 났다.등을 띄운 밤이라 물길은 늦도록 웅성거렸지만, 그 사이에 섞인 소리 하나가 그녀의 귀를 붙들었다.삐걱, 하고 무엇이 물을 미는 소리였다.흘러가는 등은 노를 젓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장복은 늘 그렇듯 서하당 앞문에 서 있을 것이었고, 뒷문은 죽은 이의 날이라 걸려 있지 않았다.그녀는 신을 신지 않은 채 뒷창을 넘어 뒤뜰을 가로질렀다.그믐밤에 이미 한 번 걸어 본 길이라, 어둠 속에서도 발이 먼저 길을 알았다.뒷문 판자에는 사람 얼굴 높이에 손바닥 두 개만 한 살창이 나 있었고, 거기 바른 창지가 바깥의 등불을 받아 희미하게 밝았다.그녀는 문을 열지 않고, 창지에 손가락으로 작은 구멍 하나를 뚫어 밖을 내다보았다.보름달 아래, 이름 적힌 등들이 줄을 지어 떠내려가고 있었다.그 사이를 등 하나 달지 않은 작은 배가 물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배는 돌계단 맨 아랫단에 소리 없이 닿았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섬돌로 올라섰다.그때 그의 발이 젖은 돌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키가 컸고, 등이 꼿꼿했다.골목의 막다른 담 앞에서 그 등을 본 것이 벌써 한 달 전이었다.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정실이 한밤에 뒷문에서 외간 사내와 마주 선다는 것이 이 집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발은 물러서지 않았다.문 하나와 종이 한 겹이 있다는 핑계가, 그녀의 위험한 호기심을 그 자리에 붙들어 두었다.그는 문 앞까지 올라와 멈추더니, 살창의 창지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처음부터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등불이 그의 얼굴을 아래에서 비추었고, 한경은 그것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숨에 훑었다.입술이 텄고, 눈 밑이 거뭇했으며, 소매 밖으로 나온 손끝이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사흘 걸렀죠, 게우는 거."창지 너머에서 숨 한 번 쉴 동안 대답이 없었다."…어찌 아오."골목에서는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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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호첩

관의 서리가 정청 탁자에 누런 종이를 폈다.이 집 문 안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한 줄에 하나씩 성과 이름, 나이, 난 곳, 부모를 적어 넣은 종이였으니, 그것을 호첩이라 했다.식구가 늘거나 줄면 관에서 붓을 들고 와 고쳐 적고, 한 벌은 집에 두고 한 벌은 관으로 가져가는 법이었다.오늘은 한 줄이 느는 날이었다.상석에 노부인이 앉았고, 그 곁에 육정이, 육정 곁의 정실 자리에 한경이 앉았다.그녀는 이 집이 십 년 동안 보아 온 대로, 느리고 묻지 않는 인형의 손을 무릎 위에 포개 두었다.서란은 탁자 앞에 꿇어 있었다.옥색 무명을 입고, 처녀의 머리를 오늘 아침 처음으로 틀어 올려 은비녀 하나를 꿴 채였다."적을 것만 적으시오.관에 가져갈 한 벌에는 내 인을 받아 가고, 그 밖의 것은 이 집에서 묻지 마시오."육정이 서리에게 막힘없이 말했다.아내 앞에서 두 마디를 못 잇는 입이 바깥사람 앞에서는 늘 저랬다.다만 그 눈은 탁자 앞에 꿇은 여자 쪽으로 한 번도 가지 않았다.서리가 붓을 적시며 물었다."이름.""성은 서, 이름은 란.""나이."숨 반 모금이 비었다."스물."정청에서 그 빈 데를 들은 사람은 한경 하나뿐이었다.중원 밤 물가에서 열두 살에 죽었다는 말은 곧장 나왔었는데, 오늘은 나이에서 숨이 멎었다.스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몇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난 곳.""강 아래 남포.""부모.""없습니다."서리의 붓이 부모 칸 위에서 잠시 떴다가, 무심하게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없으면 비워 둡니다.나중에 찾으면 그때 채우고요."빈칸이었고, 한경은 그 빈칸이 무엇에 쓰일지 알았다.지난 삶의 이월에 이 여자는 서하당의 주인이 되었다.부모 없는 여자가 정실의 방에 앉으려면 종이 위에라도 부모가 있어야 했고, 빈칸은 붓 한 번이면 찰 것이었다.노부인은 이 여자를 위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했다.위에 있는 손이라면 붓 한 번은 일도 아니었다.입을 여는 순간 값이 든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인형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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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잔 둘

한경은 끝내 눈을 내리지 않았다.지금 눈을 내리면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먼저 눈을 내린 것은 노부인이었고, 손목의 염주가 다시 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가 보아라. 스무날에 후원에 상이 든다."그 뒤 이틀 동안 노부인은 문안 자리에서 한경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았고, 늘 그랬듯 허리와 손목만 재었다.칠월 스무날 해 질 녘, 서하당 뒷창 너머로 담 위가 붉게 물들었다.후원 처마에 처음으로 내건 등이었다.정실을 들일 때는 여섯 가지 예를 갖추고 가마가 대문으로 들지만, 첩을 들이는 데는 아무 예법도 없었다.처마에 붉은 등 하나가 걸리고 방에 상 하나가 들어가며, 그날 밤 가주가 그 방에 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후원 담 밑을 한 바퀴 돌고 온 초하가 숨도 고르지 않은 채 말했다."상이 하나래요, 부인.닭 한 마리에 과실 세 가지요.술은 뺐대요, 가주께서 안 드시니까요.대신 후원에서 차를 손수 달인다고 부엌 물도 안 받아 갔대요.그리고 내원 어멈 하나가 벌써 후원 문간에 가 섰어요.가주께서 드시는 걸 보고 오라고 노부인께서—""찻물은."한경이 짧게 묻자, 초하가 화로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올렸어요. 끓어요."한경은 침상 널 밑에서 종이 봉지를 꺼냈다.사람을 깊이 재우는 잿빛 껍질로, 초여드레부터 밤마다 그의 잔에 조금씩 넣어 온 것이었다.오늘은 그것을 세게 넣을 작정이었고, 그녀가 따져 둔 셈은 이랬다.후원의 여자는 오늘 밤 분명 그 병의 것을 쓸 것이었다.그것을 마신 사람은 눈이 벌어지고 몸이 달아올라 저를 모르고 날뛰다가 꺾이듯 잠드니, 그 날뛰는 동안에 첫날밤이 치러질 것이었다.그러나 한경의 것은 처음부터 사람을 가라앉혔다.하나는 올리고 하나는 내리니, 잠 쪽에 미리 무게를 실어 두면 날뛰는 때가 오기 전에 꺾일 것이라고 그녀는 셈했다.자는 사람은 아무 일도 치르지 못한다.저 여자의 명분은 하룻밤 밀리고, 후원에는 가지 않겠다던 그의 말은 반쯤은 참이 될 것이었다.그 셈에 한경은 의심을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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