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11 - Chapter 20

231 Chapters

10화 지워지는두자

"그건 이제 제 것이에요."명주의 손가락이 향낭을 놓지 않았다.서란이 다가와 그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향낭을 가져갔다.펴는 손이 따뜻했다.---정월에 족보를 손보는 자리에 명주가 불려 나갔다.편원에서 정청까지 가는 동안 시녀가 붙지 않았다.길은 물을 것도 없었다. 십 년을 산 집.정청에 병풍이 둘러쳐지고 화로가 넷 놓였는데, 화로는 전부 어른들 쪽에 있어 명주가 선 가운데 자리에는 볕도 불기도 오지 않았다.육가 사람이 스물 남짓 모였고 명주는 가운데 섰다.누가 긴 글을 읽었으나 명주는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종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명주의 이름을 짚으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심씨.그 두 자가 나올 때마다 어른들 쪽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명주는 절반쯤에서 듣기를 그만두었다.칠출(七出)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일곱 가지로 내친다는 것인지 일곱 번을 내친다는 것인지 명주는 한참을 고민했다.무자라는 말도 나왔는데 그것은 알아들었다.읽는 소리가 중간에서 한 번 끊겼다."심가 일은 아직 판결이 안 났소이다.이달인가 내달인가에 회심(會審)이 다시 열린다는데, 열리기도 전에 붓을 대는 법이 어디 있소.""열려서 무엇이 달라진다고—""기다리는 것이 순서지요!"어른 하나가 일어섰다가 도로 앉았다.의자가 밀리면서 탁자 끝의 구리 문진이 굴러가 병풍 아래에서 멎었는데 아무도 줍지 않았고, 읽던 사람이 종이를 다시 들었다.읽기가 끝나자 족로 하나가 말했다."할 말이 있느냐?"스물 남짓한 얼굴이 명주를 빤히 바라보았다."저는."명주가 입을 떼자 모두 숨을 죽였다.명주는 숨을 삼키고 처음부터 다시 했다."저는… 무엇을 잘못했습니까?"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던 어른이 이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명주의 이름에 힘을 주어 읽었던 사람이 이내 탁자 위에 펼친 족보를 쭉 훑다가 어느 부분에서 붓을 움직여 두 번 한 일 자를 그렸다.가로로 한 번, 또 한 번."어. 먹이 아직 안 말랐소."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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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독

쿵, 쿵.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장독들이 낮게 울었고, 울음이 가라앉기 전에 또 두드렸다.명주가 낮은 문을 밀자 육가의 옷을 입지 않은 사내 넷이 뒤뜰에 서 있었다.우물가에 있던 하녀가 행주를 떨어뜨렸고, 부엌 뒷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문지방을 넘어온 바람 끝이 아직 찬 삼월이었다."나오시오."명주는 방 안을 한 번 돌아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온 찬밥 덩이가 문지방 안쪽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그녀는 문턱에 앉아 신을 신었다.사내 하나가 다가와, 명주가 일어서기도 전에 팔이 등 뒤로 꺾이고 무릎이 흙바닥에 부딪혔다.누군가 내원 쪽으로 달려가다가 다른 사내에게 붙들렸다.가늘고 낯선 비명이 뒤뜰을 찢었다.사내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두 사람이 양팔을 잡고 한 사람이 턱을 들었다.마지막 사람이 작은 병의 마개를 뽑자 아가리에 맺힌 검은 물이 잠깐 붉게 빛났다.사내가 입을 눌러 열었고, 검은 물이 목을 타고 흘러들자 목 안이 불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사내의 손이 막았다.삼키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약은 더 깊이 넘어갔다.얼마 뒤부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숨은 그대로 드나들었다.누군가 흐트러진 머리에서 백옥 비녀를 뽑아 소매에 넣었다.---명주는 뒷광으로 옮겨졌다.흙바닥에서 겨 냄새가 났고, 문이 닫히자 빛은 문틈 한 줄만 남았다.여러 손이 어깨를 눌렀고, 무릎 위에도 사람의 무게가 실렸다.처음은 다리였다.몸 한쪽 끝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아 정수리까지 꿰뚫었다.명주는 비명을 질렀고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벌어진 입으로 숨만 새어 나갔고, 눌린 팔다리가 퍼덕이다 하나씩 조용해졌다.살 지지는 냄새가 겨 냄새를 덮었다.사내들은 말이 없었고, 일 사이사이 숫돌 가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났다.눈은 남겨 두었다.누가 그리 시켰는지는 닷새째에 알았다.일이 끝났을 때 명주가 보고 있던 것은 천장의 들보였고, 들보의 먼지가 문틈 빛에 희게 일어서 있었다.---그날 육가의 내원은 정오 전에 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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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밝은구슬

독 위에 사람이 왔다.명주의 얼굴이 기척을 따라 들렸다.보이는 것은 없었다.진분홍 치마가 광문을 넘어간 뒤로는 계속 밤이었다.누가 안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물러나는 숨소리가 났다."뚜껑."다른 사내가 마주 들어 올린 나무판이 독 위로 그림자를 끌고 왔다.정수리에 닿던 바람과 볕의 온기가 절반으로 잘렸다.명주가 몸을 움직였다.마른 어깨가 독 벽에 쓸리며 사각, 소리를 냈다.나무판이 독 가장자리에 닿았다.쿵.빛이 가느다란 틈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다.바깥에서 새끼줄이 감겼다.젖은 볏짚이 독 겉을 긁는 소리가 안에서 웅웅 맴돌았다.줄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매듭을 잡아당길 때마다, 나무판이 조금씩 내려앉았다."진흙 가져오시오."누군가 뛰어나가는 발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멀어졌다.남은 틈으로 빛이 한 줄기 비껴들었고, 먼지가 그 안에서 반짝이며 천천히 떠다녔다.틈으로 드는 바람이 명주의 정수리에 닿았다 말았다 했다.밖에서 진흙 이기는 소리가 철벅철벅 나더니, 사내 하나가 손바닥으로 독의 입구를 둘러 바르기 시작했다.손이 한 번씩 틈을 가릴 때마다 바깥 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틈이 점점 짧아졌다.바람이 가늘어졌다.마당에서는 사람들이 저녁 준비를 했다.우물에서 두레박이 오르내리고 부엌에서는 도마가 울렸다.어린 하인이 빈 소쿠리를 들고 광 앞을 뛰어갔다.담장 너머로 장사꾼의 느린 외침이 지나갔다.육정은 서재에 앉아 있었다.찻잔은 한 번도 들리지 않은 채 식었다.맞은편 의자는 비어 있었다.광 쪽에서 무딘 소리가 한 번씩 건너올 때마다 찻물 위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진흙 바르는 소리가 멎고, 마지막 틈이 닫혔다.---명주는 잠들지 않았다.잠들면 깨지 못할 것 같았고, 다만 아직 남은 것이 하나 있었다.물어봐 주시면 대답할 수 있었는데.숨이 얕아지는 동안 어둠 속에서 술 냄새가 짙어졌다.시고 달고 마른 냄새가 입안까지 차올랐다.명주는 뺨을 독 벽에 기대었다.독의 거친 면이 차가웠다.마지막으로 생각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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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깨어난 날

눈을 뜨기도 전에 낯선 향이 먼저 코끝에 와 닿았다.한경은 그것이 소독약 냄새가 아니라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어."목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분명 제 것이 아니었다.실험실에서 십칠 년을 쓴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메말라 있었다.그런데 지금 목을 타고 나온 것은 물에 헹군 비단처럼 가늘고 고왔다."부인? 깨셨습니까."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다.한경은 대답하지 못한 채 낯선 천장의 들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누구의 부인이며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답을 묻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여기는 육가의 서하당이었고 문밖의 여자는 춘월이었다.춘월은 아침마다 물그릇을 들고 들어오는 열아홉 살 아이로, 열 해 동안 명주의 손발 노릇을 해 왔다.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집인데 그 집의 아침이 제 집처럼 머릿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천천히 깨달았다."부인,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세숫물이 식습니다.""…조금만 더 있다가."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겨우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조차 제 뜻이 아니라 입이 저절로 고른 말처럼 느껴졌다.문밖의 여자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순하게 말을 이었다."예. 가주께서는 새벽에 관아로 나가셨고, 연회 전에는 돌아오신다 하셨습니다.단아가 옷을 세 벌 챙겨 두었으니 천천히 고르셔요.""…연회가 오늘이었느냐."한경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예, 부인. 북으로 가는 배가 오늘 떠납니다.가주께서 부인은 정청에 앉아만 계시면 된다고 하셨어요."앉아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춘월은 아무 뜻도 없는 듯 담담하게 전했다.가주라는 말에 한경은 저도 모르게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가늘고 흰 손목 안쪽에 비단 끈이 왼쪽으로 조금 기울게 매여 있었다.그 끈 끝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향낭이 달려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이 몸의 이름을 알았다.심명주, 궁에 약재를 올리는 벼슬아치 육정의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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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남색

문이 열리고 여자 셋이 차례로 들어와 한꺼번에 무릎을 굽혔다.춘월은 물그릇을, 단아는 수건을, 막내 세류는 빗을 들고 있었다.그런데 셋의 눈이 거의 동시에 정실의 맨발에 닿았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는 듯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갔다."부인, 어찌 맨발로 내려와 계십니까.발이 차시게 맨바닥을 밟으시면 어쩌시려고요."단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며 서둘러 덧신을 가지러 갔다.춘월은 물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다가와, 그릇 전을 아주 조심스럽게 한경의 입술에 댔다.기울이는 것은 언제나 춘월의 손이었고, 물은 남의 손이 기울이는 만큼만 넘어왔다.명주는 열 해 동안 그 처지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한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 그릇을 받아 쥐었다.방 안의 숨이 한꺼번에 멎었고, 긴장이 등잔 연기처럼 조용히 퍼졌다.첫날 아침부터 이러네.그러나 그릇은 이미 제 손에 있었고, 물 한 그릇이 무거워서 흰 손목이 가늘게 떨렸다."…목이 말라서 그랬다.신경 쓰지 마라."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겨우 그렇게 둘러대고는,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쳐 들고 천천히 마셨다.이가 시리게 찬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곧이어 빗이 정수리에서 허리까지 느릿하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내려갔다.그녀는 창호지의 얼룩을 보며 묵묵히 그 수를 셌고, 스물여덟 번째에 빗이 멎었다.머리 빗는 것까지 날마다 같은 수로 세는 집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렇게 알았다.좋아. 나도 센다.세류가 머리를 낮게 감아 올려 뒤통수에 둥글게 틀고 백옥 비녀를 질렀다.한경은 그 비녀가 마지막에 누구의 소매로 들어가는지 알고 있었지만,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둔 채 아무 기색도 내지 않았다.---이윽고 단아가 옷을 한 벌씩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첫째는 연둣빛 단삼으로, 여름 사를 두 겹으로 지어 빛이 이른 봄 버들잎처럼 연했고 소매 끝에 은실로 놓은 넝쿨이 아침 볕에 물비늘처럼 반짝였다.아래에 받쳐 입을 쪽빛 마면군은 앞뒤가 판판하고 양옆으로만 잔주름을 접어 내린 치마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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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전별

유월의 볕이 한창인 오전, 연회는 정청 앞마당에서 열렸다.무명 양붕 셋 아래 탁자 스무 남짓이 놓였으며, 그 사이로 갑옷 입은 사내들이 절그럭거리며 분주하게 지나다녔다.그것은 북으로 가는 배를 보내는 자리였다.군량은 명주의 친정인 심가의 배가 싣고, 군약은 육가의 궤짝이 졌다.궁에 약재를 올리는 관아가 어공서였고, 남편 육정이 바로 그 관아의 우두머리인 어공서령이었기 때문이었다.한경은 정청 가운데에 앉아 그 모든 것을 가만히, 그러나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앉은 자리는 마당이 다 내려다보이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마당의 누구나 고개만 들면 올려다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보이면서 보는 자리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욱 등을 곧게 폈다.이윽고 길 떠나는 차림의 시동생이 정청 앞에 와서 공손하게 읍했다.남편의 아우 육준이었다.그는 형보다 어깨가 넓고 볕에 그은 얼굴이었다.그런데 무엇을 살필 때 눈썹 사이가 좁아지는 것만은 형과 똑같다는 것을 그녀는 금방 알아보았다."형수님. 다녀오겠습니다.""몸 성히 다녀오세요."명주라면 고개만 끄덕였을 자리였지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하고 말았다.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육준은 형수가 제게 말을 건 것이 열 해 만에 처음이라는 사실에 잠깐 놀랐다.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아무 기색도 내지 않고 다시 읍하고 묵묵히 물러갔다.그 뒤에 서 있던 동서 주씨가 남편의 등을 보며 소매를 들어 눈을 눌렀고, 쪽빛 단삼 아래 가는 어깨가 흐느끼듯 한 번 흔들렸다.명주의 기억 속에서도 이 여자는 오늘 울었고, 명주는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하지만 한경은 묻지 않는 대신 보았다.그런데 소매가 눈에서 떨어졌을 때 소매 안쪽은 바싹 말라 있었다.쪽빛 비단은 물 한 방울만 닿아도 그 자리가 검게 앉는 옷감인데, 검은 데가 한 점도 없었고 눈가도 전혀 붉지 않았다.주씨는 소매를 내리더니 한경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손님들 사이로 걸어갔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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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씨

등 뒤로 손이 왔다.옷끈 매듭 자리, 등 아래쪽이었다.비단 두 겹을 지나 온기가 살갗에 닿기까지 잠깐이 걸렸으며, 그 잠깐 동안 이 몸의 숨이 저절로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육정이었다.이 몸은 이 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열 해를 기다린 손이었고, 하루에 한 번 손목에 닿고 가던 손이었다.한경은 숨을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어금니를 꽉 물었다.이 몸이 이 사내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사랑이 열 해 동안 밤마다 손목에 묶인 것과 함께 자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몸이 저 혼자 반가워하는 것을 안에 든 사람이 가만히 지켜보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그는 양붕 밖으로 나가는 두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그가 오기 전에 일이 이미 끝나 있었던 것이다.늦게 온 사람의 얼굴로 그가 고개를 내렸고, 눈썹 사이가 좁아져 있었다."…덥소? 안으로 들어가 쉬는 게 낫지 않겠소.""아니오. 여기 있겠습니다."그는 아내의 대답에 잠깐 말을 잃었다.이 여자는 열 해 동안 들어가라면 들어갔고 앉으라면 앉았으니, 「아니오」라는 말을 이 입에서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그는 다시 물었다.열 해 동안 그가 아내에게 한 물음은 늘 이 둘뿐이었다."목이 마르오? 사람을 불러—""아까 마셨습니다."그녀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낮게 덧붙였다."제 손으로."등에 얹힌 손이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가 가벼워졌다.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았다.열 해 동안 늘 같은 대답만 하던 여자였으니, 그는 이 여자에게 할 말을 골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육정은 아내의 얼굴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끝내 찾지 못했다.다만 어딘가 분명히 달라졌다는 느낌만을 손바닥 아래에 붙들고 있었으며, 그 느낌이 그를 묘하게 불안하게 했다."그럼 뭐가 하고 싶소."그가 한참 만에 물었다.명주는 늘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그래서 서하당 창가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았으며, 그동안 중문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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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칼

칼을 뽑은 것은 호송 무관이었다.서른 남짓에 갑옷 위로 붉은 띠를 질끈 맨 사내로, 발치에는 뚜껑 열린 궤짝 하나가 있었고 궤짝 위에는 찢긴 종이 봉지가 흰 가루를 토해 놓고 있었다.가루를 찍어 맛을 본 왼손 손가락 끝이 희었다."이게 금창약이냐!칼 맞은 자리에 뿌리면 피가 멎는다는 약이, 혀에 대니 밀가루 맛이 나는구나.육가가 북으로 보내는 게 이거냐.내 군졸들더러 이걸 상처에 바르고 죽으란 말이냐!"무관의 목소리가 마당을 한 번에 건넜고, 양붕 아래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칼끝은 육정의 목 앞 한 뼘에 멎어 있었다.그러나 육정은 물러서지 않았다.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칼끝이 아니라 무관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집 안에서 아내 앞에 서면 말끝을 못 맺던 사람이었다.그런데 대문 밖의 일 앞에서는 한 마디도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한경은 병풍 틈으로 처음 보았다."봉함을 뜯은 것은 누구요.""내가 뜯었다!""어공서가 봉한 궤짝은 병부가 받는 자리에서 연다.받기 전에 뜯었으면 허물은 뜯은 쪽에 있소.봉함이 성할 때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게 되었소."그는 서늘하게, 그러나 조금도 높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놈이—"칼이 들렸다.그 순간 육정 앞으로 길 떠나는 차림 그대로의 사람 하나가 들어섰으며, 육준이 오른손을 들어 내려오는 칼날을 맨손으로 쥐었다.쇠가 살을 무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육준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것이 배어 나와 칼날을 타고 천천히 흘렀다.무관이 칼을 당겼지만 육준은 결코 놓지 않았으며, 칼날이 손바닥 안에서 한 치쯤 미끄러졌다.피가 궤짝의 붉은 칠 위로 떨어졌는데, 칠과 피가 같은 빛이라 떨어진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그 사이 육정이 조용히 한 걸음 들어섰다.그는 무관의 칼 쥔 손목을 아래에서 받쳐 쥐고, 엄지를 손목 안쪽 두 힘줄 사이에 깊이 박았다.무관의 손가락이 제 뜻과 상관없이 펴졌고, 칼이 떨어졌다.그러나 육준이 아직 날을 쥐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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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젖은신

주씨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다가왔다.그것은 놀란 사람의 손이었지만, 그 눈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는 것을 한경은 분명히 보았다."제가 할게요. 형님 손에 피 묻으시는데.""다 됐어요, 동서."주씨의 손이 입에서 천천히 내려왔다.그녀는 남편의 감긴 손을 보고, 매듭을 보고, 마지막으로 한경을 보았다.아까 소매로 눈을 누르던 때와 똑같이,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젖어 있지 않았다.손목이 잡힌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뒤에서 온 크고 마른 손이 한경의 오른쪽 손목을 쥐었으며, 엄지가 손목 안쪽 맥 뛰는 자리에 정확히 얹혔다.열 해 동안 밤마다 그 자리에 얹히던 엄지였다.이 몸이 먼저 알아서 맥이 그 엄지 밑에서 저절로 빨라졌으며, 그것을 숨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한경은 이를 물었다.남의 몸이 남의 남자에게 뛰는 것을 안에서 지켜보는 기분은 실험 기록에 한 줄도 적어 본 적 없는 종류의 수치였고, 그녀는 그 수치를 끝까지 얼굴에 내지 않았다."손에."육정의 목소리였고, 늘 그렇듯 낮았다.그의 눈은 아내의 피 묻은 손가락에 있었다."공자 피예요."그녀는 담담하게 답했으며, 육정은 아내의 맥이 엄지 밑에서 빨라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열 해 동안 늘 그랬던 것이라는 사실에 이상하게 안도했다.육정의 눈이 아우의 손으로 갔다.손목 안쪽에 앉힌 매듭, 칼자루에 걸리지 않을 자리였다.그의 눈썹 사이가 다시 좁아졌고, 그는 그 매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어디서 배웠소.""배운 적 없어요. 그냥 묶었어요."육정은 아내의 손목을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열 해 동안 아내에게 무엇도 묻지 않았으며, 명주가 독 안에 있던 넷째 날에도 끝내 묻지 않고 돌아섰던 사람이었다.묻지 않는 것이 이 사내의 사랑이었는지 겁이었는지, 한경은 아직 알 수 없었다.그녀는 그 엄지를 내려다보았고, 쥔 손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 사람은 뭐가 무서운 거지.그 떨림이 노여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노여운 사람의 손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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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연고

"상공. 젖은 사람부터 들이시지요. 밤이 찹니다."한경은 회랑에서 내려서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정이 아내를 보았다.무슨 말을 들을 줄 알았던 얼굴이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얼굴로 바뀌었으며, 거기에는 울음도 없고 물음도 없었다.그는 이 밤을 위해 열 해 동안 준비해 둔 말이 있었을 것이었다.그러나 아내가 그 말을 쓸 자리를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이고 종을 불렀다."먼 데서 온 사람이오.사정은 묻지 마오."그가 겨우 그렇게 덧붙였을 때, 그녀는 이 사내가 열 해 동안 아내에게 묻지 않은 대신 아내에게도 묻지 말라고 해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한경은 계단을 내려가 서란 앞에 섰다.키가 비슷했고, 이 몸이 조금 더 컸다."이름이 무엇이냐."명주는 그날 밤 이 물음을 세 번 물었다.처음에는 못 알아들어서, 다음에는 기억하고 싶어서, 마지막에는 그저 그 이름을 입에 올려 보고 싶어서였다.그녀는 한 번만 물었다."서란이옵니다.""몇이냐.""스물이옵니다. 먼 길이었습니다.신이 젖은 것은 용서하세요."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또박또박 대답했고, 그 목소리에는 겁먹은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비도 오지 않았는데 어디서 젖었느냐.""…물길로 왔습니다."그 대답이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손을 이리 다오."말이 저절로 나갔다.명주가 이 여자에게 처음 한 말을 이 몸의 입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서란이 숨을 한 번 멈추었다가 두 손을 내밀었다.한경은 소매에서 작은 합을 꺼냈다.궁에서 내렸다는 연고였으며, 명주가 이 여자에게 쥐여 준 것과 같은 합이었으며, 뚜껑의 칠이 등불에 붉었다."찬물에 튼 손이구나. 바르거라.여인은 손이 고와야 해."합이 건너갔고, 서란의 손끝이 그것을 단단히 받았다.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명주의 기억 속에서 서란은 이 합을 한 번 떨어뜨렸다.바닥에 떨어진 것을 집으면서 귀를 붉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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