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녀에게 죽어납니다: 하늘 위의 낙화(落花): Chapter 21 - Chapter 30

32 Chapters

제 21화 잿더미 위의 자장가 

제 21화 벽류진의 요새가 붕괴하는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처럼 낮고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렌과 비사의 전투는 복도 끝에서 정점을 찍고 있었다. 렌의 쌍단검은 비사의 살점을 파고들 때마다 차가운 금속음을 냈고, 비사의 검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짐승의 휘두름처럼 벽과 천장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었다.비사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야츠키의 체취가 밴 자신의 손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하... 그 계집의 눈동자... 신지로 그놈은 평생 모를 거다. 그 차가운 눈동자가 내 아래서 얼마나 뜨겁게 풀려버렸는지..."비사가 마지막 모독을 뱉는 순간, 렌의 단검이 비사의 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비사는 거대한 벽류진의 늑대답지 않게,비참하고도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렌은 단검을 뽑아내지 못한 채 비사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전투가 끝나자 비로소 요새의 소음이 렌의 귓가에 다시 들려왔다. 비사의 피가 렌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렌은 비사의 시신 위에 손을 얹은 채, 격렬했던 전투의 잔상을 지우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야츠키를 연모했던 자신의 마음, 그녀를 능욕한 비사를 죽인 것에 대한 추호의 후회도 없었으나, 동료의 숨통을 끊었다는 무사로서의 참담한 현실은 렌의 가슴을 짓눌렀다.비사가 완전히 숨을 거두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렌은 비로소 단검을 회수했다. 그의 손바닥은 비사의 검에 깊게 베여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그는 자신의 피와 전우였던 자의 피가 섞이는 것을 보며, 총대장의 질서가 지배하는 이 벽류진에서 자신이 행한 행위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들였다.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미츠키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는 야츠키가 비사에게 당했던 수치를 잊길 바랐다. 미츠키는 아수라장이 된 요새를 빠져나와, 달빛이 차갑게 내려앉는 계곡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낮에 신지로가 야츠키를 정성스레 씻기던 장소였다.미츠키는 야츠키를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야츠키의 몸은 지쳐 있었고, 정신은 외부의 소음을 거부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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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화 달 아래의 참회 그리고 그림자

제 22화 요새는 밤새도록 이어진 무사들의 필사적인 복구 작업으로 외형을 되찾아가고 있었으나, 그 내부에 고인 피 냄새와 살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8인의 정예 무사, 그들은 10살부터 도깨비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검을 쥔 자들이었다. 사람의 몸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전투력을 지닌 그들에게 감정이란 사치였다. 그들은 비사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고, 렌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오직 벽류진이라는 거대한 요새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계처럼 움직였을 뿐이다.요새의 복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신음하고 있었다. 시온은 뒤틀린 천장의 지지대를 보강했고, 가란은 무너진 외벽의 잔해를 맨손으로 옮기며 무사들을 독려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톱니바퀴처럼 정교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고, 누구 하나 비사의 시신이 치워진 자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벽류진이라는 거대한 요새의 질서가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신지로는 야츠키의 흔적을 쫓아 요새를 배회하다 결국 유우에게 제압당했다. 그는 야츠키를 잠시라도 혼자 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울부짖었으나, 유우의 차가운 제압 아래 주술의 힘이 걷히자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신지로는 자신의 몸을 떨며 낮게 읊조렸다.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 오만함이 그 사내놈에게 틈을 주었구나." 그는 비사의 죽음보다, 야츠키가 정결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차분하게 약재를 정리하며, 다음번에 야츠키를 다시 마주할 때 그녀의 몸을 어떻게 정화할지 계산하고 있었다.한 편, 계곡 정원의 밤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미츠키는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야츠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비사의 광기가 휩쓸고 간 흔적을 씻어내듯, 계곡의 찬 기운을 받으며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야츠키의 숨소리는 고요하게 들렸다. 미츠키는 그 숨소리를 감상하며, 그녀가 세상 그 누구 앞에서도 허락하지 않았던 무방비한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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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화 벽류진의 우리에서 유일한 꽃

제 23화 새벽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계곡 정원, 옅은 안개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야츠키는 길고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남자의 향 그리고 몸 위를 덮고 있는 짙은 색의 겉옷. 미츠키의 것이었다.야츠키가 몸을 일으키자, 미츠키가 조용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늘 그림자처럼 자신을 감시하고, 관전만 하던 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몸은 …... 괜찮으십니까?"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벽류진에 끌려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츠키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항상 차갑고 거리감 있는 태도만을 고수해왔기에 , 안색에 깃든 묘한 애정과 걱정은 그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미츠키님..?""곧 총대장님께서 오실 겁니다. 그전까지는 여기 계시는 게 좋겠군요. 당신이... 추위에 떠는 것을 원하지않으니."그 말 속에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야츠키는 요새의 붕괴가 머릿속을 스쳤다. 광기에 찬 비사의 손길,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렌과 비사가 싸웠습니다. 피를 싫어하는 당신을 위해 제가 잠시 피신시켰을 뿐입니다."미츠키의 대답은 간결했다. 야츠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지우산도, 자신을 지켜줄 수단도 없는 상황. 여기서 도망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렌을 향한 걱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를 잃으면 자신은 정말로 고립된다. 야츠키는 결심했다. "저는 벽류진으로 돌아가겠어요."미츠키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예상한 그녀의 반응은 공포에 질려 숨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츠키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츠키는 말없이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지친 몸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야츠키를 보며 주저 없이 그녀를 공주님 안기식으로 들어 올렸다.요새로 돌아가는 길, 야츠키는 미츠키의 품 안에서 차분하게 생각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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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화 야츠키의 체향(體香)

제 25화벽류진의 공기는 야츠키의 체취가 섞인 매화 향기로 서서히 매료되어 갔다. 무사들은 사냥을 나가서도 그녀의 살냄새를 쫓았고, 제어할 수 없는 본능에 시달리며 하나둘씩 이성을 잃어갔다.야츠키는 요새의 꽃이었고, 무사들은 그녀의 향기에 취해 스스로 목줄을 매는 짐승들이었다.신지로의 연구실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야츠키는 그가 건네려던 '체액이 섞인 영양 주사'를 조용히 밀어냈다.그녀의 거절은 단호했다. "신지로님, 그런 건 만들지 마세요. 내 몸에 당신의 것들이 섞이는 순간 당신들도 나도 감정을 제어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신지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아쉬운 듯 체념의 태도를 보였다. 야츠키가 방을 나선 뒤, 그는 실험대 위에 멍하니 기대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엔 아직도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너는 독약이 아니라, 이 삭막한 곳에서 나만을 살게 하는 유일한 생명의 꽃이다."그는 그녀를 손에 넣지 못하는 대신, 그녀가 자신의 영양분을 먹고 피어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체념조차도 야츠키를 향한 비틀린 소유욕의 또 다른 형태였다.그 시각, 시온의 처소는 야츠키에게 바칠 과일과 꽃으로 가득했다. 시온은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지적인 보호자를 연기했다. "야츠키 아가씨, 이 과일은 계곡 너머에서 가장 달콤한 것입니다." 시온이 다정하게 건네면, 야츠키는 웃으며 꽃을 받았다. 하지만 시온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에도 속으로는 기괴한 망상에 젖었다. 그가 처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웠을 때, 이성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야츠키가 비사에게 당했던 순간을 상상했다. 야츠키의 하얀 살결이 비사의 거친 손길에 짓눌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수치심과 쾌락으로 젖어 들어가는 장면을. "하아..... 야츠키, 그놈이 너를 어떻게 탐했는지 내 몸으로 다 기억해내겠다." 시온은 자신의 몸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환상 속에서 야츠키는 시온의 밑에서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녀의 가는 허리가 그의 자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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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화 체온(體溫)의 역설

제 27화시온의 열병은 며칠째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낮이면 신지로가 처소를 찾아와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손가락으로 그의 맥을 짚었다. 신지로ㅏ 는ㄱ열을 내리는 지혈제와 쓴 탕약을 건네면 시온은 늘 그랬듯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였지만,그의 온 신경은 밤을 기다리는 데 쏠려 있었다.밤이 깊어지면 약속처럼 야츠키가 처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대야에 찬물을 받아 수건을 적셨다. 요새 밖의 밤공기는 칼날처럼 서늘했지만처소 안은 시온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로 숨이 막힐 듯했다."시온님, 또 열이 많이 오르네요. 왜 이렇게 잘 안 내려가는지 모르겠어요."야츠키는 수건을 짜서 그의 이마에 얹었다. 도깨비인 그녀의 체온은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낮았다. 서늘한 손끝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시온의 몸은 짜릿하게 반응했다. 그는 겉으로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절세 미인님이 직접 저를 돌보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이렇게 걱정해주시니 제가 빨리 낫지 않고는 못 배기겠군요."시온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야츠키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기괴한 갈망을 읽지 못했다. 그녀에게 시온은 오직 '자신을 지켜줄 가장 확실한 성벽'이자 '회복시켜야 할 자산'일 뿐이었다. 야츠키는 시온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열기를 식힐 려고 애썼다.'빨리 회복하셔야 해요, 시온. 당신이 강해야 내가 이 요새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그녀는 시온이 자신 때문에 아프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치료를 핑계로 그를 살려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녀의 그 손길을 받으며 속으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아아, 나의 야츠키. 당신은 내가 왜 아픈지 모르는군요. 당신의 그 서늘한 체온이 내 살갗을 파고들 때마다 내 이성은 완전히 타버리고 있습니다.’시온의 환상 속에서 야츠키의 손길은 이미 간호가 아니었다. 땀에 젖은 침대 위에서,그는 야츠키가 자신의 골반 위에 올라타 유연한 허리짓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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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화 벽류진을 가꾸는 가련한 포식자

제 28화 요새 상층부의 집무실, 벽류진의 주인인 테츠잔은 창밖으로 구름 아래를 굽어보며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영주에게 서신을 보낸 지 벌써 열흘이 넘었으나 그 어떤 회신도 돌아오지 않았다.곁을 지키던 미츠키가 소리 없이 다가와 한 쪽무릎을 꿇었다. "전령이 늦습니다."미츠키의 보고에 테츠잔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회색빛 하늘을 응시했다. 독수리를 띄웠음에도 소식이 없다는 것은 이미 요새 밖의 세상이 변하고 있거나 영주가 이 요새를 버렸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테츠잔은 창틀을 꽉 움켜쥐었다. 요새의 위기가 내부의 심장부에서부터 갉아먹히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사들의 기강은 눈에 띄게 흐려졌고 복도를 지날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는 평소와 다르게 끈적이고 비릿했다. 마치 누군가 요새 전체에 거대한 덫을 놓은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 테츠잔의 어깨를 짓눌렀다."직접 내려가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사흘 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아니다. 네가 자리를 비우면 이 안의 늑대들을 누가 통제하겠나.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동안 요새의 경계를 더 강화해라."테츠잔의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벽류진의 무사들은 이미 야츠키라는 이름의 독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야츠키라는 도깨비가 들어온 이후 이 요새는 더 이상 규율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숨을 쉬고, 꽃을 가꿀 뿐이었지만 그것이 무사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자극이 되고 있었다.그녀의 자유를 뺏은 대신 최소한의 존중을 베풀고자 했으나 그것이 결국 늑대들의 우리 안에서 그녀를 더 위험하게 노출시키는 꼴이 될 줄은 몰랐다.렌은 복도를 순찰하며 조금씩 무너져가는 질서를 뼈저리게 느꼈다. 전우들의 눈빛은 예전의 냉철함을 잃고 탁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시온의 처소를 지나다 멈춰 섰다.과거 전장에서 피를 나누던 강인한 동료 시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엔 야츠키의 체온을 갈구하며 망상에 빠진 병자만이 있을 뿐이었다.'시온,신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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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화 잿빛 하늘의 흉물스러운 침입자

제 29화 ​벽류진은 이제 더 이상 삭막한 요새가 아니었다. 며칠 사이, 요새의 돌담과 틈새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했다. 야츠키가 정원을 거닐 때마다 그녀의 숨결과 손길이 닿은 자리에 은빛 가루가 흩날렸고, 잿빛이었던 돌바닥은 어느새 향기로운 정원으로 둔갑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이한 변화를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테츠잔은 침묵했고, 무사들은 홀린 듯 그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이것이 요새를 침식하는 요기임을 눈치채고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향기에 깊이 잠식되어 있었다.​렌과 가란은 오늘도 보초를 서며 야츠키를 관찰했다. 그녀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허공을 매만질 때마다 꽃봉오리가 톡톡 터지며 피어났다. 그 아름다운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사들의 핏속에 흐르는 흉포함이 조금씩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시온은 야츠키의 곁에 머물며 열병을 앓던 중이었으나 마치 신이 그녀의 곁에 있는 그를 질투라도 하듯 급격히 호전되었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묵묵히 밀린 업무를 처리하며 야츠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야츠키가 손끝으로 허공에 은빛 선을 그을 때마다 발생하는 미세한 요기의 파동이, 시온의 심장박동을 불규칙하게 흔들어놓고 있었다. '저토록 무해해 보이는 존재가,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가.' 시온은 참월도 자루를 꽉 쥐며 속으로 삼켰다.​그때였다.​"까악, 까아악-!"​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하늘을 찢었다. 맑던 하늘이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나타난 것은 까마귀 다섯 마리였다. 놈들은 일반적인 새의 형상을 비웃듯 날개 폭만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깃털 사이로 썩은 살점과 쇠붙이가 뒤틀려 융합된 마치 누군가 저주받은 욕망으로 재창조한 흉물들이었다. 놈들이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요새 상공에는 불쾌한 악취와 함께 검은 깃털 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전원 전투 준비! 저건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유우가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그는 최전방에서 직접 검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적의 움직임을 읽고 무사들의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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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화 붉고 선명하게 피어날 정원

제 30화피비린내가 잦아든 벽류진의 마당은 다시 기묘한 정적에 잠겼다. 괴물 까마귀들이 남긴 검은 깃털과 파괴된 잔해들 사이로, 야츠키가 정성껏 키워온 꽃들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붉고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야츠키는 손에 든 지우산을 털며,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화단 앞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살육의 전율 대신에 짓밟힌 꽃잎을 향한 안타까움만이 서려 있었다."이 꽃들은... 다 제가 직접 피워낸 것들인데."그녀의 시선은 놈들의 흉측한 사체보다 꺾여버린 줄기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야츠키에게 이곳은 자신을 가둔 요새였지만, 동시에 매일 아침 함께 꽃향기를 나누고 정원을 가꿔온 무사들과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웠고 그것은 그녀에게 지배가 아닌 '생존'과 '정(情)'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이었다.야츠키는 전투 중에 렌의 팔에 깊게 패인 상처와 놈들의 공격을 받아내느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시온을 번갈아 보았다. 시온은 방금 전까지 참월도를 휘두르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그 모습 그대로, 피비린내가 밴 칼날을 쥔 채 야츠키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 곳곳에는 놈들의 끈적한 체액과 잿빛 먼지가 가득했지만, 그들의 눈은 오직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시온님, 괜찮아요? 렌도요. 다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야츠키의 말투에는 어떠한 권위도 전략적인 계산도 없었다. 그저 함께 정원을 돌보던 이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묻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순수한 걱정만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렌의 상처 입은 팔을 조심스럽게 살피려 하자 렌이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레말했다."야츠키님,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피가 묻습니다. 당신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두렵습니다."가란은 도끼를 땅에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평소 야츠키를 '가둬야 할 위험한 도깨비'라고만 정의해 왔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전장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위험을 감수했던 그녀의 등을 보았던 기억이 뇌리에 박혀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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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화 누군가의 ‘도구’가 된다는 것

제 31화 누군가의 ‘도구’가 된다는 것벽류진의 하늘 위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테츠잔의 독수리가 긴 비행 끝에 지친 날개를 접으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곤두박질치듯 내려앉았다. 테츠잔이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오른팔을 뻗자 독수리는 익숙한 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목에 묶인 서신 매듭은 이질적일 정도로 매끄럽고 차가웠다.테츠잔은 매듭을 푸는 손끝에서 묘한 떨림을 느꼈다. 종이에서는 평소와 다른 기분 나쁜 향이 났고 서신을 펼친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영주들의 회의를 거쳐 정리된 글감은 빈틈없이 빽빽했다. 하지만 테츠잔은 영주들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자신들의 가문과 유복함만을 내세우며 무사들을 그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피 흘리는 방패로만 여기던 자들이었다. 도깨비가 마을을 짓밟고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하늘로 도망칠 궁리를 하던 비겁한 자들이 아니었던가. “이게… 영주들의 서신입니까?” 곁을 지키던 미츠키가 다가와 서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도 테츠잔과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너무도 완벽했다. 테츠잔은 과거, 영주들이 무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의 성벽을 높이 쌓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무사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위로 대신 '대체할 인력은 없는가'를 먼저 물었다. 그런 자들이 '공생'을 운운하다니 이 서신은 독이 든 사탕과 같았다. 그는 독수리의 깃털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이 서신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희생되었을지 짐작했다.벽류진과 떨어진 또 하나의 무사들의 거처 훈련장 한쪽에서는 일반 무사들이 땀범벅이 된 채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그들은 영주가 보낸 서신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렌은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무사들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한 무사가 힘겨운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훈련으로 인해 바닥에 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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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화 변질된 생명과 어둠의 예고

제 32화 변질된 생명과 어둠의 예고신지로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아래, 비릿한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는 죽은 까마귀 요괴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핀셋을 든 신지로의 손은 분주했고, 야츠키는 그 곁에서 조용히 관찰하며 보조를 맞췄다. 조명은 사체의 기괴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 소리가 정적을 깼다.“이 장기들의 위치를 봐. 분명 까마귀의 생태와는 전혀 달라.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이 있어. 게다가 이 끈적한 약물… 대체 무엇을 섞은 거지?”신지로가 메스를 깊숙이 찔러 넣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인간인 그에게는 맡기 힘든 짙은 비린내였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까마귀의 내부에서 기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사체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안개는 연구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고, 등불의 빛마저 왜곡시켰다. 그때, 야츠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순식간에 손을 뻗어 신지로의 코와 입을 단단히 막았다.“숨을 쉬지 마세요.”야츠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통해 전달되는 기운은 불쾌할 정도로 오래된, 썩은 늪과도 같은 고대의 요기였다.“이건 보통의 요기가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오래된 기운이죠. 도깨비의 혈통을 타고난 자들이라면 정신력이 흐려지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일반적인 생물이나 평범한 무기라면 이 까마귀의 장기들처럼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질 거예요. 인간인 당신에겐 더 치명적일 테니 조심하세요.”신지로는 야츠키의 손을 부드럽게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사체를 응시했다. 메스를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의학자로서 이토록 뒤틀린 생명체를 마주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과도 같았다. 사체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받은 기운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생명의 근간을 갉아먹는 침식에 가까웠다.“까마귀가 무언가 잘못 먹은 게 아니야.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 연구와 융합의 산물이지. 그쪽에도 나 같은 의학자가 있는 모양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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