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20

40 فصول

11화. 관찰자의 이름

담당자: 박민재.파일 맨 아래에 적힌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박민재.며칠 전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대학 선배.내 번호가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다음에 커피를 마시자고 했던 사람.도현이 처음으로 질투를 숨기지 못하게 만든 사람.그 이름이 왜 내 관찰 기록에 적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화면을 확대했다.혹시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름 옆에는 직원 번호와 소속이 함께 적혀 있었다.세림리서치 전략조사팀.박민재가 이런 회사에 다닌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대학 시절 그는 광고회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졸업 후에는 작은 마케팅 회사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었다.세림홀딩스 계열사에서 일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파일의 두 번째 페이지에는 날짜별 기록이 정리되어 있었다.나는 맨 위부터 천천히 읽었다.---대상자: 한서윤관찰 개시일: 20XX년 4월 11일최초 접촉 금지일상 개입 금지채무 및 생활 변화만 기록계약 제안 가능 조건 충족 시 대표이사에게 보고---숨이 막혔다.‘계약 제안 가능 조건.’그 문장이 마치 내가 어떤 상품이나 실험 대상인 것처럼 느껴졌다.조건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손가락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1단계: 기존 연애 관계 종료2단계: 주거비 또는 채무 부담 증가3단계: 비상금 100만 원 미만4단계: 외부 금전 지원 가능성 없음5단계: 심리적 고립 상태 확인손끝이 차갑게 식었다.내가 힘들어지는 과정이 단계별로 적혀 있었다.누군가는 내 연애가 끝나는 시점을 기다렸고.내 통장 잔액이 줄어드는 걸 확인했으며.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조사했다.그리고 내가 가장 외롭고 절박해졌을 때를 ‘계약 제안 가능 조건 충족’이라고 판단했다.그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표시된 문장이 있었다.모든 조건 충족. 접촉 승인 요청.결재자는 차도현이었다.승인.나는 파일을 닫았다.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택시 안은 따뜻했지만 몸이 계속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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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살아 있는 증거

[윤서진입니다.]메시지 끝에 적힌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차도현의 이전 계약 상대.박민재의 여동생.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사건의 시작에 있는 사람.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프로필 사진도 없었고, 가입자 정보도 확인할 수 없었다.조금 전 카페를 나오는 내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누군가 지금도 나를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중앙역 대합실은 사람들로 붐볐다.전광판 아래에서 기차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카페 앞에 줄을 선 사람.휴대전화를 들고 통화하는 사람.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자.누가 사진을 찍었는지 알 수 없었다.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른쪽을 보세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휴대전화 화면을 보는 척하며 유리벽에 비친 모습을 살폈다.오른쪽에는 작은 서점이 있었다.출입구 근처에 짙은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긴 머리를 낮게 묶고 검은 마스크를 쓴 여자.그녀는 책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책이 없었다.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혼자 오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아직 근처에 있습니다.]도현과 민재.두 사람이 나를 따라온 걸까.나는 대합실 뒤쪽을 천천히 살폈다.도현은 보이지 않았다.민재도 없었다.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그들은 이미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왔던 사람들이다.[어디로 가면 되죠?]메시지를 보내자 바로 답장이 왔다.[지금 있는 곳에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서점 안으로 들어오세요.]나는 화면을 바라봤다.휴대전화까지 끄라는 요구가 마음에 걸렸다.민재도 어제 같은 말을 했다.휴대전화를 끄고 집 밖으로 나오라고.모두가 내 안전을 이유로 내 연결을 끊으려 했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전원은 끄지 않을게요.]몇 초 뒤.[그럼 만날 수 없습니다.][그건 서진 씨 선택이네요.]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베이지색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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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다시 선택하는 계약

[도현 말 믿지 마.][그 명령을 내리는 순간, 계약은 끝나는 게 아니야.][진짜 계약이 시작돼.]박민재의 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진짜 계약.’그 말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열두 번째 명령을 내리는 순간 또 다른 계약서가 나타난다는 뜻일까.아니면 도현이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조건이 남아 있다는 걸까.휴대전화 화면 위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도현은 처음부터 네가 마지막 명령을 내리게 만들려고 했어.][그게 그 사람 방식이야.]나는 천천히 화면을 껐다.불이 꺼진 지하 북카페.테이블 위에는 서진이 가져온 녹음기와 계약서 사본이 놓여 있었다.강현우는 한쪽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윤서진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그리고 차도현은 내 앞에 서 있었다.숨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셔츠 소매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다.늘 완벽하게 통제된 모습으로 나타나던 사람답지 않았다.그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습만 보고 마음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다시 말해봐요.”내가 말했다.도현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다.“무엇을 말합니까?”“열두 번째 명령.”나는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제가 도현 씨한테 내릴 명령이라고 했잖아요.”도현은 잠시 침묵했다.강현우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 명령이 뭔데요?”“서윤 씨.”“지금도 숨길 거예요?”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왔다.도현의 턱선이 굳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계약을 끝내라고 명령해주십시오.”순간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뭐라고요?”“열두 번째 명령은.”도현이 낮고 분명하게 말했다.“당신이 내게 이 계약을 끝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윤서진이 짧게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는 숨이 새어나온 것에 가까웠다.“여전히 똑같네.”도현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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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가장 숨기고 싶은 방

두 번째 명령.차도현은 한서윤에게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은 방을 공개한다.택시 안에서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분명 내가 만든 문서가 아니었다.나는 도현에게 첫 번째 명령만 내렸다.휴대전화를 보여달라고 했고, 내 사진과 조사 자료를 정리하게 했다.두 번째 명령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런데 파일에는 내가 아직 정하지 않은 명령이 정확히 적혀 있었다.‘가장 숨기고 싶은 방.’단순한 예측이라고 보기에는 구체적이었다.누군가 도현의 집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리고 내가 그곳을 확인하게 될 것까지 예상했다.휴대전화 화면을 끄려던 순간,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파일이 수정되었습니다.]작성 시간은 방금 전.택시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나는 파일을 열어보기만 했을 뿐 수정하지 않았다.다시 문서를 열었다.마지막 줄이 달라져 있었다.> 두 번째 명령은 내일 밤 열 시에 실행된다.등골이 서늘해졌다.나는 곧바로 파일을 삭제했다.휴지통에서도 지웠다.하지만 몇 초 뒤 같은 파일이 다시 나타났다.새 계약_최종본.pdf이번에는 파일명 뒤에 숫자가 붙어 있었다.새 계약_최종본(2).pdf나는 열지 않았다.곧바로 휴대전화의 인터넷 연결을 끄고 전원을 껐다.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집 근처 편의점으로 바꿔달라고 했다.집 주소까지 누군가 알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자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편의점 앞에 내린 뒤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따라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카페 창가에 앉아 공용 충전기를 빌렸다.휴대전화는 켜지 않았다.대신 노트북을 꺼내 새 문서를 열었다.방금 본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적었다.파일명.작성자.생성 시간.두 번째 명령.수정된 문장.내가 모르는 문서가 내 휴대전화에 나타났다는 사실.누구의 설명도 듣기 전에 기록부터 남겨야 했다.지금까지 나는 늘 누군가의 자료를 뒤늦게 받았다.도현이 보여주는 계약서.민재가 보내는 관찰 기록.서진이 내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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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평범한 하루의 규칙

“그리고 한서윤 씨가 ‘빨간불’을 말하게 만든 사람도.”카메라의 작은 스피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차도현이 아니라 저예요.”도현의 얼굴이 굳었다.“이정연.”그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스피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기억하고 있군요.”“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도현이 물었다.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카메라 옆의 붉은 불빛만 일정하게 깜빡였다.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장치를 바라봤다.누군가 우리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그런데 이상했다.조금 전까지 목소리는 기계로 변조되어 있었다.이정연이라고 자신을 밝힌 뒤에는 자연스러운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었다.마치 정체를 공개하는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정연 씨.”내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제가 빨간불을 말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잡음만 들렸다.“듣고 있잖아요.”대답은 없었다.도현이 장치 옆면을 확인했다.“연결이 끊겼습니다.”“방금 말한 사람, 진짜 이정연 맞아요?”“목소리는 비슷합니다.”“비슷하다는 건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네요.”“네.”도현은 장치를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연락처에서 이름 하나를 찾았다.이정연 상담센터“지금 전화하게요?”“본인인지 확인해야 합니다.”“스피커로 해요.”그가 나를 바라봤다.“괜찮습니까?”“같이 듣고 싶어요.”도현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한 번.두 번.세 번.연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방금 카메라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비슷했다.하지만 완전히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더 낮고 피곤하게 들렸다.도현이 먼저 말했다.“이정연 선생님.”잠시 침묵이 흘렀다.“차도현 씨?”여자는 그의 이름을 바로 알아들었다.“오랜만이네요.”“지금 어디에 있습니까?”“갑자기 전화해서 할 말이 그거예요?”“내 집에 설치된 장치에서 선생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무슨 장치요?”“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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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허락을 구하는 법

경계 회복 지원센터.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주소를 한참 바라봤다.도현이 매주 누군가를 만난다는 곳.통제적인 관계와 계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시설.박민재가 책 속에 쪽지를 넣었다면, 내가 이 주소를 확인할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그가 보내준 정보가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그대로 움직이는 순간 또 누군가가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셈이었다.나는 바로 찾아가지 않았다.먼저 지원센터 공식 번호로 전화했다.“문의드릴 게 있는데요.”상담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말씀하세요.”“차도현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다니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이용자 정보는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당연한 답이었다.“직원이나 후원자 명단도요?”“공개된 후원 내역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 상담이나 프로그램 참여 여부는 본인 동의 없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나는 통화를 끝내고 홈페이지를 살폈다.후원 기업 목록에 세림홀딩스 이름은 없었다.차도현 개인 이름도 없었다.공지사항과 활동 사진을 한참 넘기다 한 장의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참여자들과 함께 의자를 정리하는 검은 셔츠 차림의 남자.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목의 시계가 익숙했다.도현이 늘 착용하던 검은 시계.사진 아래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관계 회복 프로그램 보조 자원활동가와 함께 공간을 정리했습니다.후원자가 아니었다.상담을 받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다.자원활동가.도현이 직접 의자를 옮기고 공간을 정리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회사에서는 누군가에게 시키면 되는 일을.그는 왜 그곳에서 직접 하고 있을까.나는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저녁 시간 돼요?]답장은 바로 왔다.[됩니다.][어디에서 만날까요?]나는 잠시 고민하다 주소를 보냈다.[여기 앞에서 여섯 시.]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한참 뒤 도착한 답장은 짧았다.[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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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끝나지 않은 마지막 명령

[제가 요구한 마지막 명령은 하나예요.][한서윤을 만나지 마.]문장을 읽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차도현과 윤서진의 과거 계약.끝난 줄 알았던 관계.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마지막 조항.> 차도현이 새로운 계약 상대를 선택하는 순간,윤서진은 마지막 명령을 요구할 수 있다.나는 계약서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본문과 손글씨의 잉크 색이 달랐다.조항은 계약서를 출력한 뒤 추가된 것처럼 보였다.도현의 서명도 있었다.윤서진의 서명도 있었다.하지만 사진 한 장만으로는 언제 작성됐는지 알 수 없었다.계약이 끝나기 전에 합의한 것인지.끝난 뒤 누군가 덧붙인 것인지.아니면 애초에 조작된 문서인지.이번에는 바로 믿지 않았다.민재가 보낸 사진도.서진이 보낸 기록도.이미 여러 번 일부만 잘린 자료에 흔들렸다.나는 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원본 있어요?]읽음 표시가 바로 나타났다.[있어요.][전체 계약서 보내주세요.][직접 만나서 보여줄게요.][사진으로 먼저 보내요.]한참 뒤 답장이 왔다.[도현에게 보여줄 건가요?][그건 제가 정해요.]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생겼다 사라졌다.[전체를 보내면 차도현은 조작이라고 할 거예요.][그러니까 원본 확인이 필요하다는 거예요.][내일 만나죠.]나는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그 대신 도현과의 통화 기록을 열었다.오늘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고.그 명령을 내린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밤새 서진의 문장만 떠올릴 것 같았다.한서윤을 만나지 마.그게 정말 서진이 요구한 마지막 명령이라면 도현은 왜 거절했을까.거부할 수 있는 명령이었을까.아니면 과거 계약 안에서는 반드시 따라야 했던 것일까.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그런 조항이 존재했다면 도현은 내게 말했어야 했다.처음 계약할 때.서진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적어도 오늘 그녀가 찾아와 과거 계약을 다시 시작하자고 했을 때.그는 또 불리한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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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명령이 아닌 선택

감정 업체의 상담실은 생각보다 평범했다.하얀 벽.회색 테이블.문서 확대 장비와 여러 종류의 조명.윤서진은 내 맞은편에 앉아 검은 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어제 호텔에서 봤던 계약서 원본.그녀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계약서 주세요.”직원이 말하자 서진이 봉투를 열었다.문서를 꺼내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나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강현우가 보낸 영상을 아직 서진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도현에게도 보내지 않았다.오늘 감정 결과가 나오기 전에 영상을 먼저 꺼내면 서진이 계약서 제출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직원은 계약서를 투명한 보관 필름 안에 넣었다.“확인하실 항목은 추가된 문구의 작성 시기와 서명 진위가 맞습니까?”“네.”내가 대답했다.“손글씨 문구와 두 사람 서명이 같은 시기에 작성됐는지도 확인해주세요.”직원이 서진을 바라봤다.“문서 소유자분도 동의하십니까?”서진은 잠시 침묵했다.“동의해요.”“결과는 오늘 바로 나오지 않습니다.”“얼마나 걸려요?”“정밀 감정은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일주일.생각보다 길었다.그동안 도현과 서진은 이미 만나기로 했다.계약서가 조작됐다는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과거에 대한 대화를 먼저 나누기로 한 상태였다.“서명자의 비교 자료가 있으면 정확도가 올라갑니다.”직원이 말했다.나는 도현에게 미리 받아둔 서명 자료를 꺼냈다.회사 문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작성한 새 계약서 사본.도현이 직접 내 앞에서 서명한 것이었다.서진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뭐예요?”“비교 자료예요.”“새 계약서예요?”“도현 씨 서명만 있는 문서예요.”“왜 한서윤 씨가 가지고 있어요?”직원이 우리를 번갈아 봤다.나는 대답하지 않고 서류를 건넸다.“감정에 사용할 수 있나요?”“네. 작성 시점이 확인된 서명이면 좋습니다.”“제가 보는 앞에서 쓴 거예요.”직원은 자료를 함께 정리했다.모든 접수가 끝난 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서진은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새 계약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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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주도권을 돌려주는 밤

[차도현은 이미 그녀의 목소리로 명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문장을 읽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굳었다.도현은 침대 옆에 선 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나는 침대 위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천장.조명.환기구.장식장.14화에서 발견했던 카메라는 제거했다.도현은 집 전체의 보안장치도 교체했다고 했다.그런데 조금 전 우리가 찢은 메모와 침대 위 모습이 사진으로 전송됐다.누군가 여전히 이 방을 보고 있었다.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오래전 워크숍에서 녹음된 한서윤의 목소리.][그 목소리는 차도현의 상담 프로그램에 사용되었습니다.][명령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음성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도현이 화면을 누르려는 순간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잠깐.”그가 즉시 멈췄다.“왜요?”“바로 틀지 마요.”“확인해야 합니다.”“또 저보다 먼저 판단하려고 하잖아요.”도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맞습니다.”그는 휴대전화를 내게 건넸다.“서윤 씨가 결정하세요.”나는 파일 정보를 먼저 확인했다.녹음 날짜는 우리가 처음 계약을 맺기 훨씬 전이었다.워크숍이 진행됐던 날과 일치했다.파일명은 짧았다.명령훈련_여성음성03.wav“이정연 씨 프로그램 자료 같아요.”“그럴 가능성이 큽니다.”“도현 씨는 이 파일을 들어봤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네.”“언제요?”“상담 중에.”“무슨 목적으로?”“명령을 받는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역할 교환 훈련이었습니다.”예상하지 못한 설명이었다.“도현 씨가 명령을 받았어요?”“네.”“제 목소리로?”그의 시선이 흔들렸다.“당시에는 당신의 목소리라는 걸 몰랐습니다.”“언제 알았는데요?”“계약을 시작한 뒤.”또 계약 뒤였다.또 그는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정확히 언제요?”“두 번째 명령을 내린 뒤.”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그때부터 제 목소리인 걸 알았는데 계속 숨겼네요.”“네.”“왜요?”도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말해요.”“당신이 불쾌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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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잘린 문장의 대가

[그날 이미 세 사람의 계약이 시작됐어요.] 이정연의 말이 통화 건너편에서 뚝 꺼졌다. 방 안에 남은 건 도현과 나, 그리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침묵뿐이었다. 도현은 휴대전화를 쥐고 굳어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윤서진이라는 이름이 만든 거대한 거미줄. “도현 씨.” 내가 부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짙은 혼란과 함께 깊은 죄책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는 정말…… 그날 윤서진과 그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습니다.” “알아요.” 나는 그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거두어 협탁 위에 놓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기억이든, 약물이든, 세뇌든…… 중요한 건 그 여자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만드는 거예요.” “서윤 씨.” “윤서진은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서로를 의심하고 무너지길 바랐을 거예요. ‘너희의 시작은 전부 내 설계였다’면서.” 나는 도현의 셔츠 깃을 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주도권은 지금 우리한테 있어요. 방금 전에도 확인했잖아요.” 도현의 눈에 불꽃 같은 욕망과 통제력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럼 계속합니까?” “네. 윤서진이 던진 덫 따위에 밤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대신……”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명령했다. “이번엔 도현 씨가 나를 완전히 지배해 봐요. 예전의 냉정한 차도현이 아니라, 내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나를 어디까지 꺾을 수 있는지.” 도현의 호흡이 단번에 거칠어졌다. “확실합니까? 방금 들은 진실 때문에 저를 향한 적의나 충동이 섞일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그것까지 전부 부딪쳐요. 초록불이에요.” 그 순간, 도현의 눈빛에서 망설임이 완전히 사라졌다. “좋습니다.” 그가 내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당겨 침대 중앙으로 내던지듯 눕혔다.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강도였지만, 체중을 실어 내 위를 덮쳐오는 무게감은 압도적이었다. “손 머리 위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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