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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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기다리는 사람

차도현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은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라면 내가 조금만 머뭇거려도 먼저 상태를 확인했을 사람이다. 괜찮습니까. 불편합니까. 계속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묻지 않았다.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도현.” “네.” “손 펴요.” 무릎 위에서 맞물려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풀렸다. 나는 그의 앞으로 돌아가 오른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쳤다. “이 손으로 그동안 뭘 했어요?” 도현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요?” “당신을 만졌고.” 잠시 침묵. “붙잡았습니다.” 나는 그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가볍게 올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먼저 잡지 마요.”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이다 멈췄다. “제가 잡을 때만 잡아요.” “알겠습니다.” 나는 손을 떼었다. 도현은 따라오지 않았다. “눈 떠요.”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이 가장 먼저 내 얼굴을 찾았다. “지금 무슨 색이에요?” “노랑.” “아직도요?” “네.” “왜요?” 도현이 잠시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게 더 어렵습니다.” 뜻밖에도 솔직한 대답이었다. “도현 씨는 늘 상대가 맡기길 바라면서 본인은 아무것도 맡기지 않잖아요.” 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인정합니다.” “제가 뭘 할지 몰라도 기다려봐요.” “노력하겠습니다.” “지금은 노력 말고.” 나는 테이블 위의 넥타이를 집었다. “그냥 기다려요.” 도현의 시선이 넥타이를 따라왔다. “일어나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서자 내가 고개를 들어야 할 만큼 체격 차이가 났다. 주도권은 내게 있는데도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구도는 그대로였다. “넥타이 매어도 돼요?” “네.” “원해요?” 그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원합니다.” 나는 넥타이를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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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오백만 원의 이유

입술이 닿았다.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내가 먼저 떨어지자 도현은 따라오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가 다음 선택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허리를 감싼 도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를 억지로 끌어당기지는 않았다. 입술이 떨어진 뒤 내가 물었다. “지금도 초록이에요?” “네.” “더 하고 싶어요?” 그의 대답은 빨랐다. “네.” “그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도현의 눈빛에 아주 잠깐 아쉬움이 스쳤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실망했어요?” “조금.” “멈출 수 있어요?” “네.” 나는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잘했어요.” 도현의 표정이 또 멈췄다.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낯설어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 말이 좋아요?” “생각보다.” “그럼 앞으로 가끔 해줄게요.” “계약 밖에서도?” “잘하면요.” 도현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나는 테이블로 가 합의서 아래에 종료 시간을 적었다. 오후 9시 12분. 기존 계약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5/12. 오늘은 여섯 번째 명령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전 다섯 번보다 더 많은 것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도현은 처음으로 명령을 받았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통제권을 맡았다. 주도권을 쥔다는 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상대가 맡긴 선택을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었다. 계약이 끝난 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도현은 넥타이를 다시 매지 않았다. 목 가까이의 단추도 하나 풀려 있었다. 평소보다 흐트러진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어땠어요?” 내가 묻자 도현은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뭐가 제일요?” “기다리는 것.” “제가 뭘 할지 몰라서?” “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덧붙였다.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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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알고 있었다는 것

“당신을 조사했습니다.” 도현의 말이 객실 안에 그대로 떨어졌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사했다. 그 단어가 너무 직접적이라 오히려 뜻이 잘 와닿지 않았다. “어디까지요?”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얼마가 필요한지 알아낼 정도면, 그냥 이름만 본 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뭘 봤는데요?” 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채무 상황.” “또요?” “현재 직장.” “또.” “가족관계와 이전 연애 관계.”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제 연애까지요?” “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왜요?” “당신이 궁금했으니까.” “그게 이유예요?” “처음에는.” 도현의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그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윤 씨를 처음 본 뒤 계속 생각났습니다.” “언제 처음 봤는데요?” 조금 전 질문권으로 물었던 두 번째 질문. 도현은 그 답을 아직 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세 달 전입니다.” “어디서요?” “세림문화재단 건물 뒤편.” 기억을 더듬었다. 세 달 전. 행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이었다. 일이 끝난 뒤 건물 뒤 계단에 앉아 울었던 기억이 났다. 카드사에서 독촉 전화가 왔고. 월세 납부일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뒤편으로 나가 혼자 울었다. “그때 저를 봤어요?” “네.” “말도 안 걸었잖아요.” “못 걸었습니다.” “왜요?” 도현이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차도현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항상 모든 말을 준비해두는 사람. 상대의 반응까지 예상하고 움직이는 사람. 그가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갔어요?” “손수건을 두고 갔습니다.” 기억이 났다. 계단 옆 난간에 놓여 있던 검은 손수건. 누가 두고 갔는지 몰라 건물 직원에게 맡겼었다. “그게 도현 씨 거였어요?” “네.” “그다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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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관찰자의 이름

-박민재-파일 맨 아래 적힌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한 사람이었다.며칠 전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대학 선배.오랜만이라며 웃었고, 내 번호가 그대로인지 확인했던 사람.다음에는 둘이 커피라도 마시자고 했던 사람.그리고 그날.도현이 유난히 신경 쓰던 사람.나는 화면을 확대했다.담당자 이름 옆에는 직원 번호와 소속이 적혀 있었다.**세림리서치 전략조사팀.**처음 듣는 회사였다.하지만 ‘세림’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세림홀딩스.세림파이낸셜.그리고 차도현.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웠다.택시 안인데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나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손님, 괜찮으세요?”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확인했다.“네. 괜찮아요.”대답은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다시 파일을 내려다봤다.첫 페이지의 사진.일 년 전의 나.그리고 그 아래 문장.> 접촉 금지. 관찰만 유지할 것.> 대상자가 스스로 계약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도현은 나를 세 달 전에 처음 봤다고 했다.그런데 관찰 기록은 일 년 전부터 존재했다.둘 중 하나는 거짓이었다.도현의 말이거나.이 파일이거나.나는 다음 페이지를 열었다.날짜와 짧은 기록들이 이어졌다.> 주거지 변동 없음.> 근무 형태 확인.> 기존 연애 관계 유지.> 직접 접촉 없음.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췄다.**기존 연애 관계 유지.**도현은 조금 전 내 이전 연애 관계까지 확인했다고 인정했다.그런데 이 기록이 정말 일 년 전부터 작성된 것이라면.그가 말한 ‘세 달’보다 훨씬 전부터 누군가는 내 사생활을 보고 있었다.다음 기록을 읽었다.> 대상자와 직접 접촉하지 말 것.> 변동 사항만 보고.> 지시 전까지 추가 조사 금지.누가 지시한 건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도현일까.아니면 다른 사람일까.파일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그때 박민재의 이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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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다음 계약 상대

—그리고 네가 그 사람의 다음 계약 상대가 될까 봐 지켜본 거야.민재의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다음 계약 상대.나는 손에 쥔 휴대전화를 더 세게 붙잡았다.“무슨 뜻이야?”—내일 만나서 말할게.“지금 말해.”—서윤아.“저한테 중요한 일이잖아요.”민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도현 씨가 예전에도 이런 계약을 했다는 건 알아.”—알아?“네.”—어디까지 들었어?“이전 계약 상대가 있었다는 것. 그 사람이 떠난 뒤 열두 번이라는 제한을 만들었다는 것.”전화 너머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그렇게 설명했구나.“뭐가 다른데?”—많이 달라.“그럼 말해.”민재가 숨을 내쉬었다.—이전 계약 상대 이름은 윤서진이야.처음 듣는 이름이었다.“오빠가 아는 사람이야?”—내 동생이야.나는 그대로 굳었다.“동생?”—응.“도현 씨랑 계약했던 사람이 오빠 동생이라고?”—맞아.머릿속이 복잡해졌다.식당에서 도현과 민재가 처음 만난 것처럼 보였던 장면이 떠올랐다.도현은 분명 민재를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민재 역시 그랬다.“근데 식당에서는 둘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행동했잖아.”민재가 잠시 침묵했다.—그건 내일 설명할게.“또 내일.”—전화로 길게 말할 일이 아니야.“그럼 하나만.”나는 목소리를 낮췄다.“오빠 동생은 지금 어디 있어?”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민재 오빠.”—살아 있어.그가 먼저 대답했다.나는 왜인지 몰라도 숨을 조금 내쉬었다.“그럼 직접 만나면 되잖아.”—그건 안 돼.“왜?”—서진이가 원하지 않아.“나랑 관련된 기록을 만들게 해놓고 나를 만나는 건 싫대?”—그 기록을 서진이가 만든 건 아니야.“그럼 누가 만들었는데?”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또 일부만 말하고 있었다.도현과 똑같았다.“내일 원본 가져온다며.”—응.“그럼 그때 전부 말해.”—알겠어.“하나라도 숨기면 저 그냥 갈 거에요.”민재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그래.나는 통화를 끊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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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원본을 가진 사람

**윤서진.**화면 끝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조금 전까지 민재가 내 앞에서 이야기하던 사람.차도현의 이전 계약 상대.그리고 이 보고서를 검토한 사람.그녀가 지금 우리를 보고 있었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민재가 내 표정을 살폈다.“누구야?”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카페 유리창 너머를 확인했다.사람들이 오갔다.버스를 기다리는 사람.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사람.택시에서 내리는 사람.누가 사진을 찍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박민재에게 내가 연락했다는 말 하지 마세요.]나는 그 문장을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왜?윤서진은 민재의 동생이라고 했다.그런데 왜 자신의 존재를 숨기라고 하지?“서윤아.”민재가 다시 불렀다.“무슨 일인데?”나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아무것도 아니야.”“표정이 그런데?”“그냥 스팸.”민재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믿지 않는 얼굴이었다.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나는 서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봤다.**검토자: 윤서진.**“서진 씨가 이걸 직접 검토했다고 했지?”“응.”“지금도 연락해?”질문이 떨어지자 민재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가끔.”“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인데?”“왜?”“그냥 궁금해서.”민재가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만졌다.“한 달쯤 됐나.”나는 그를 바라봤다.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다.휴대전화에는 방금 윤서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그렇다고 두 사람이 연락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서진 씨는 제가 도현 씨랑 계약한 것도 알아?”“알아.”“언제부터?”“처음부터는 아니고.”민재의 대답이 모호했다.“정확히.”“계약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오빠가 말했어?”“응.”“왜?”“이 상황을 알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나는 낮게 웃었다.“저는 알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고?”민재의 표정이 굳었다.“그건 미안하다고 했잖아.”“미안하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니까.”“알아.”그가 시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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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처음 본 날

[박민재도 거짓말하고 있어요.]문장을 읽는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또 거짓말.이제는 그 단어조차 지겨웠다.도현도 숨겼고.민재도 일부만 말했다.그리고 이제 윤서진은 민재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했다.나는 북카페 문 앞에서 한동안 손잡이를 잡지 못했다.들어가야 할까.그냥 돌아가야 할까.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확인하지 않고 돌아가면 더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예약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한 시간 뒤 도현에게 전송되도록 설정된 메시지.나현에게도 위치를 남겨뒀다.그제야 손잡이를 눌렀다.*카페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입구 쪽에는 책장이 길게 놓여 있었고, 안쪽으로 갈수록 조명이 어두워졌다.손님은 세 명 정도.혼자 책을 읽는 여자.노트북을 보고 있는 남자.창가에 앉아 있는 노부부.나는 주변을 한 번 확인한 뒤 안쪽으로 걸었다.가장 구석 자리.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내가 가까이 가자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한서윤 씨?”목소리는 차분했다.“윤서진 씨?”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평범한 인상이었다.조금 피곤해 보였고.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얼굴.무엇보다 내가 상상했던 사람과 달랐다.차도현의 과거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딘가 강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서진은 오히려 지쳐 보였다.“앉아요.”나는 그녀의 맞은편이 아니라 대각선 자리를 골랐다.출입구가 보이는 위치였다.서진이 그 행동을 보고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경계하는군요.”“당연하지 않아요?”“맞아요.”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얇은 서류철 하나와 검은 USB가 놓여 있었다.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서진이 말했다.“원본은 여기 있어요.”“민재 오빠가 보여준 건 가짜예요?”“전부 가짜는 아니에요.”또 그 말이었다.전부는 아니다.일부만 다르다.“어디가 다른데요?”서진은 바로 서류를 건네지 않았다.“먼저 하나만 물어볼게요.”“제가 물으러 왔는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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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지나치지 못한 이유

“당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도현의 말이 떨어진 뒤.아무도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다.“그게 설명이라고 생각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아닙니다.”“그럼 제대로 말해요.”나는 다시 자리에 앉지 않았다.가방을 든 채 그를 바라봤다.“그날 저를 보고 관심이 생겼고.”“네.”“그래서 다시 보면 안 될 것 같았고.”“네.”“그런데 결국 일 년 뒤에는 제 금융 상황까지 확인해서 계약을 제안했어요.”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앞뒤가 안 맞잖아요.”“맞습니다.”“뭐가 맞아요?”“내 행동이 모순적이었다는 말입니다.”그의 대답이 이상하게 차분했다.평소처럼 완벽하게 정리된 답을 내놓으려는 모습도 아니었다.오히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도현이 천천히 말했다.“처음에는 정말 다시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왜요?”“당시에는 서진 씨와의 관계가 끝난 직후였습니다.”윤서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도현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내가 또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왜 잘못이에요?”“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알게 된 직후였으니까.”이번에는 서진이 낮게 웃었다.“알긴 했네.”도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늦게.”“많이 늦었지.”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나는 그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두 분 이야기하려면 저 없는 데서 해요.”도현의 시선이 바로 내게 돌아왔다.“지금은 서윤 씨에게 설명하는 중입니다.”“그럼 저만 보고 말해요.”“알겠습니다.”그가 정말로 서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그날 이후 당신을 찾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이름은 알았잖아요.”“몇 달 뒤 알게 됐습니다.”“민재 오빠 통해서?”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박민재가 알려준 것은 아닙니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럼요?”“내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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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없는 문서

“저 만나기 전부터.”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가리켰다.“같이 제 얘기한 적 있어요?”차도현도.윤서진도.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가장 싫었다.“또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정리하는 중이에요?”내가 도현을 보며 물었다.“아닙니다.”“그럼 대답해요.”도현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한서윤 접촉 계획안.**그리고 그 아래 적힌 두 사람의 이름.차도현.윤서진.“저 문서는 처음 봅니다.”“진짜예요?”“네.”나는 곧바로 서진을 봤다.“서진 씨는요?”“나도 처음 봐요.”“둘 다 모른다고요?”“네.”이번에는 서진도 망설이지 않았다.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그러면 박민재가 없는 문서를 만들어서 보냈다는 거예요?”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가능성은 있습니다.”“또 가능성.”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다 가능성이고, 다 누군가의 말이고.”정작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도현은 내 질문권 앞에서 거짓말했다.민재는 서진을 자기 동생이라고 속였다.서진은 나를 일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그 정도뿐이었다.나머지는 전부.누군가 보여준 문서.누군가 들려준 녹음.누군가의 설명이었다.나는 민재가 보낸 사진을 확대했다.“잠깐.”이상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문서 오른쪽 위.결재 번호가 있었다.**SR-21-0412-17.**나는 조금 전 서진에게 받은 자료를 펼쳤다.“이쪽 문서도 번호 있어요?”서진이 서류를 넘겼다.“있어요.”**SR-21-0412-09.**날짜는 같았다.번호도 비슷했다.도현이 서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보여주십시오.”나는 그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지 않았다.대신 화면만 돌려 보여줬다.그는 잠시 들여다보다 말했다.“이 형식은 세림리서치 내부 문서가 맞습니다.”가슴이 다시 내려앉았다.“그럼 진짜잖아요.”“형식이 맞다는 뜻입니다.”“내용은 모른다?”“네.”도현이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뭔데요?”“내 결재 방식이 아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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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열두 번의 시작

[오빠.][왜 ‘열두 번째 명령’ 초안을 오빠가 만든 거야?]메시지를 보내고도 한동안 답은 없었다.읽음 표시만 떠 있었다.나는 길가에 멈춰 선 채 화면을 바라봤다.민재가 먼저 파일을 보냈다.그런데 정작 이유를 묻자 침묵했다.이제는 그 침묵이 답처럼 느껴졌다.곧 메시지가 왔다.[그건 내가 만든 계약서가 아니야.]나는 바로 답했다.[작성자가 오빠 이름인데.][초안을 정리한 건 맞아.][그게 만든 거잖아.]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도현이 부탁했어.]손끝이 굳었다.[언제?][네가 계약하기 전.]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민재가 보낸 파일의 생성 날짜는 계약 시작 8개월 전이었다.그 시점이면.도현이 나를 처음 봤다고 거짓말했던 세 달 전보다도 훨씬 앞이었다.그리고 실제로 나를 처음 봤다는 1년 2개월 전보다는 뒤였다.[왜 열두 번이었어?]민재의 답장은 짧았다.[직접 들어.]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음성 파일.**12번째_초안.m4a**재생하지 않으려고 했다.민재가 보여주고 싶은 정보만 계속 따라가는 것 같아서.하지만 파일의 작성자가 민재라면.적어도 그가 왜 이것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했다.나는 이어폰을 끼웠다.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잠깐의 잡음.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그 뒤.민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횟수를 정할 거면 애매하게 하지 말고 아예 끝을 만들어.잠시 침묵.그리고 차도현의 목소리.—몇 번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까?—그걸 왜 나한테 물어?—내가 정하면 다시 같은 실수를 할 것 같으니까.나는 걸음을 멈췄다.다시 같은 실수.서진과의 계약을 말하는 거겠지.녹음 속 민재가 말했다.—열 번.도현이 바로 대답했다.—너무 짧습니다.—스무 번.—깁니다.민재가 헛웃음을 흘렸다.—그럼 네가 정해.짧은 침묵.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열두 번.—왜 열두 번인데?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그리고.—열두 번째에는 내가 결정하지 않겠습니다.나는 숨을 멈췄다.녹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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