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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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폐쇄된 공간, 밀폐된 지배

지하 주차장 가장 안쪽.도현의 차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낮은 엔진 소리와 에어컨 바람.그리고 우리 둘의 숨소리만 남았다.나는 조수석에 앉은 채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봤다.며칠 전 우리가 새로 정한 신호.두 번 두드리는 것은 명령이 아니었다.**지금 나한테 가까워지고 싶어요?**그 질문에 도현은 분명히 대답했었다.그때는 회사였고.우리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현과 나뿐이었다.“서윤 씨.”운전석에 앉아 있던 도현이 나를 불렀다.“네.”“아까 신호.”나는 그를 바라봤다.“왜요?”“아직 유효합니까?”심장이 조금 빨라졌다.역시 이 남자는 기억하고 있었다.나는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도현 씨는요?”“유효합니다.”“얼마나요?”그가 안전벨트를 풀었다.찰칵.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회사에서는 대답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도현의 시선이 내게 고정됐다.“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22화에서 만든 두 번째 규칙.원하는 것도 솔직하게 말한다.도현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았다.“당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그리고?”“오늘은 내가 주도하고 싶습니다.”공기가 순간 달라졌다.계약이 있을 때라면 그 말 자체가 명령의 시작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도현은 기다렸다.내가 선택할 때까지.“조건 있어요.”“말씀하십시오.”“여기 차 안이에요.”“알고 있습니다.”“회사 주차장이고요.”“네.”“그러니까 밖에서 누가 볼 수 있거나, 업무에 문제 생길 만한 건 싫어요.”도현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동의합니다.”“그리고 초록, 노랑, 빨강 그대로.”“당연합니다.”“제가 멈추라고 하면?”“즉시 멈춥니다.”“제가 중간에 마음 바꿔도?”“그것도 당신 선택입니다.”나는 그를 한동안 바라봤다.그제야 웃음이 나왔다.“초록.”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하지만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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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명령보다 솔직한 대답

차 안을 채웠던 긴장감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어느새 도심의 불빛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손목을 내려다봤다. 도현이 붙잡았던 자리에 희미한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차 안에서 그에게 주도권을 넘겼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신호에 걸린 차가 멈췄다. 도현의 시선이 내 손목으로 향했다. “서윤 씨.” “네.” “손목 보여주십시오.” “괜찮은데요?” “괜찮은지 내가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내 손목을 받아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붉어진 부분을 천천히 눌러본 뒤 물었다. “아픕니까?” “조금?” 도현의 눈썹이 바로 좁혀졌다. “또 조금입니까?” “이번에는 진짜 조금이에요.” “정확하게.” 역시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손목을 몇 번 움직여봤다. “눌리면 조금 욱신거리는데 움직이는 건 괜찮아요. 저리거나 그런 것도 없고.” “불편했습니까?”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 “서윤 씨.” “왜요?” “나를 안심시키려고 괜찮다고 하지 마십시오.”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조금 전 당신이 나한테 주도권을 넘긴 것과 지금 불편한 걸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31화에서 잠깐 멈췄을 때도 그랬다. 내가 그의 어깨를 잡자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다시 초록이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괜찮았어요.” “정말입니까?” “네.” 나는 이번에는 웃지 않고 말했다. “붙잡혀 있는 느낌은 좋았어요.” 도현의 시선이 조금 깊어졌다. “그런데 다음에는 조금 약하게 잡아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변명도 없었다. “그렇게 바로 받아들여요?” “당신이 말해줬으니까.” 도현이 내 손목을 놓았다.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조용해졌다.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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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닫힌 문 안의 규칙

현관문이 닫혔다. 찰칵. 낮은 잠금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에는 검은 초커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문은 열 수 있었다. 원하면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도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끌어당기지 않았다. 내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서윤 씨.” “네.” “들어오기 전에 했던 대답.” 도현의 시선이 내 목에 머물렀다. “아직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하게.”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오늘 밤은 제가 돌려달라고 할 때까지 도현 씨한테 주도권을 맡기고 싶어요.” 잠시 침묵. 나는 일부러 한마디를 덧붙였다. “주인님.” 그제야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좋습니다.” 그가 내 코트를 벗겨 옷걸이에 걸었다. 가려져 있던 초커가 다시 드러났다. 도현은 손가락을 뻗다가 멈췄다. “만져도 됩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이것도 물어봐요?” “초커를 착용한 것과 내가 언제든 손댈 수 있다는 건 다른 문제니까.” 맞는 말이었다. “네. 괜찮아요.” 그제야 그의 손끝이 초커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목과 가죽 사이의 여유를 다시 확인했다. “불편한 곳은?” “없어요.” “호흡은?” “괜찮고요.” “어지럽거나 답답하면 바로 말하십시오.” “네, 주인님.” 도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잘했습니다.” 그 짧은 칭찬에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도현은 거실로 걸어갔다. “따라오십시오.” 나는 몇 걸음 따라가다가 현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의 넥타이를 발견했다. “도현 씨.” 그가 돌아봤다. 나는 바닥을 가리켰다. “넥타이.” “주워주고 싶습니까?”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묻는다. “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나는 몸을 숙여 넥타이를 집었다. 손안에 익숙한 천의 감촉이 닿았다. 회사에서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그의 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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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다시 건넨 목줄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어젯밤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도현의 집. 닫힌 문. 거울 앞에서 했던 대답. 그리고 내가 직접 그의 손에 건넸던 주도권. 몸을 조금 움직이자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깼습니까?” 고개를 돌렸다. 도현은 이미 깨어 있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태블릿을 보고 있었지만, 내가 눈을 뜨자 바로 화면을 껐다. “몇 시예요?” “일곱 시 십이 분.” “벌써요?”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과 달리 방 안에는 밝은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탓인지 모든 것이 현실처럼 선명했다. 협탁 위에는 검은 초커가 놓여 있었다. 도현이 어젯밤 내게 직접 보관하라고 건넨 것. 나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봤다. 도현은 묻지 않았다. 착용할 거냐고. 어제와 같은 선택이냐고. 그저 기다렸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먼저 초커를 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은 가죽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도현 씨.” “네.” 나는 초커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도현의 시선이 내 손으로 내려갔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어렵지 않았다. “어제랑 같아요.” “주도권?” “네.” 나는 잠시 웃었다. “아침까지는.” 도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시간까지 정하는군요.” “싫어요?” “아닙니다.” 그는 초커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바로 채우지 않았다. “이리 오십시오.” 나는 침대 위에서 그에게 조금 가까이 갔다. 도현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뒤 초커를 내 목에 둘렀다. 찰칵. 익숙해진 작은 소리. 이상하게도 어젯밤보다 덜 긴장됐다. 대신 더 분명했다. 이번에는 분위기에 휩쓸린 것도 아니고. 처음이라 호기심에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아침에 다시 깨어난 뒤에도. 내가 한 번 더 고른 것이었다. 도현의 손이 목 뒤에서 떨어졌다. “아침까지.” “네.”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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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다시 열린 문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방 안쪽에 든 검은 케이스가 신경 쓰였다. 꺼내 보지 않아도 위치를 알고 있었다. 노트북 파우치 옆. 그 안에는 아침에 도현이 풀어 준 초커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은 그것부터 꺼내는 날이 아니었다. 아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분명히 말했다. 오늘은 주인님 말고. 그냥 차도현으로 와 달라고. 오후 5시 58분. 나는 마지막 메일을 전송하고 컴퓨터를 껐다. 화면이 어두워지자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1층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차도현. 짧은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가방을 닫았다. 로비에 내려가자 도현은 이미 와 있었다. 회사에서 보던 정장 차림 그대로였지만 넥타이는 풀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3분입니다.” “그걸 세고 있었어요?” “기다리면 보통 시간을 봅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데이트 처음 하는 사람 같네.” 도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정말요?” “계약 없는 데이트는 처음이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걸었다. 이번에는 명령도 없었다. 어디로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의 옆으로 붙었다. 도현이 예약한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개별 룸도 아니고, 지나치게 비싼 곳도 아니었다. 나는 메뉴판을 보다가 그를 힐끗 바라봤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차도현 대표님 데이트니까 호텔 레스토랑 같은 데 갈 줄 알았어요.” “싫습니까?” “아니요.” 나는 메뉴판을 내려다봤다. “오히려 좋아요.” 그는 그 말에 더 묻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유를 끝까지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받아들였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식사 중에는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회사. 좋아하는 음식. 도현이 생각보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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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대표실의 불청객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도현은 이미 침대에 없었다.옆자리에 손을 뻗자 희미한 온기만 남아 있었다.협탁 위에는 물 한 잔과 메모가 놓여 있었다.[먼저 출근합니다. 아침은 먹고 오십시오.]그 아래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어젯밤의 대답은 회사까지 가져오지 않아도 됩니다.]나는 한동안 마지막 문장을 바라봤다.어젯밤.데이트를 마친 뒤 내가 다시 그의 집으로 향했고, 현관 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같은 선택인지 묻는 도현에게 분명히 대답했다.그와 더 있고 싶다고.그리고 다시 초커를 건넸다.하지만 아침이 되자 도현은 그것을 내 손에 돌려주지 않았다.거실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었다.회사에서는 회사답게.그 뜻이었다.출근한 뒤의 차도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오전 회의에서도 내 쪽을 특별히 보지 않았다.“한서윤 대리.”갑자기 이름이 불려 나는 고개를 들었다.“네, 대표님.”“수정안 오후 세 시까지 대표실로 가져오십시오.”“알겠습니다.”끝.정말 그것뿐이었다.그런데 회의가 끝난 뒤 자리로 돌아오자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업무 때문에 부른 겁니다.]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답장은 없었다.그게 더 얄미웠다.오후 세 시.자료를 들고 대표실 앞에 섰다.노크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오십시오.”도현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나는 맞은편에 자료를 내려놓았다.“요청하신 수정안입니다.”“앉으세요.”완전히 업무적인 목소리.나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도현은 자료를 빠르게 넘겼다.“수치 근거는?”“마지막 페이지에 첨부했습니다.”“이 부분은?”“전월 대비 자료입니다.”몇 분 동안 정말 일 이야기만 이어졌다.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은 도현이 갑자기 말했다.“피곤합니까?”나는 눈을 깜빡였다.“지금 업무 질문이에요?”“아닙니다.”그제야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제대로 머물렀다.“아침에 자는 걸 보니 깨우기 싫었습니다.”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나는 괜히 웃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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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혼자 오라는 명령

퇴근 십 분 전.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차도현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오늘 저녁 장소는 내가 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 알려 주지 않았다. 오후 5시 53분. 나는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7시까지 여기로 오세요.] 곧이어 주소를 전송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알겠습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한 줄을 더 보냈다. [그리고 혼자 오세요.]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경호도 없이?] 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차도현다운 질문이었다. [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늘은 제가 정했으니까요.] 잠시 뒤. [명령입니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돼요.] 읽음 표시가 떴다. 그리고 한참 뒤 답장이 왔다. [알겠습니다.] 그 네 글자가 이상하게 만족스러웠다. 내가 고른 곳은 화려한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작은 쿠킹 스튜디오. 한쪽에는 주방이 있었고, 창가에는 둘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늘 저녁만큼은 직원도 없었다. 음식도 이미 간단하게 준비해 뒀다. 도현이 도착한 것은 정확히 6시 58분이었다. 문이 열렸다. 검은 코트. 단정한 셔츠. 익숙한 차도현이었다. 그런데 뒤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진짜 혼자 왔네요.” “혼자 오라고 했으니까.” “대표님이 남의 말을 이렇게 잘 들어요?” 도현이 문을 닫으며 나를 바라봤다.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심장이 괜히 한번 뛰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오늘 계속 명령할 생각입니까?” “싫어요?” “아니요.” 그는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나는 맞은편에 앉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제가 저녁 준비했어요.” “직접?” “왜요. 못 믿겠어요?” “조금.” 나는 바로 뒤돌아봤다. “그럼 안 먹어도 돼요.” “먹겠습니다.” 대답이 너무 빨라서 웃음이 터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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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뒤따르는 그림자

“오늘 마지막 명령.”내 말에 도현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우리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것.그게 오늘 내가 그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그런데 막상 차에서 내리자 조금 아쉬웠다.“여기까지 와도 돼요.”내가 말하자 도현도 안전벨트를 풀었다.“집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요.”“주차장도 집 앞이에요.”“그렇게 따지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셈이군요.”“대표님 되게 피곤한 스타일인 거 알아요?”“알고 있습니다.”그는 너무 태연하게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늦은 시간이라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다.나는 천천히 걸었다.도현은 한 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왔다.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그런데 몇 걸음 더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도 멈췄다.“왜 뒤에서 와요?”“앞서가면 길을 모르니까.”“옆으로 오면 되잖아요.”“그렇게 할까요?”나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도현의 시선이 내 손에 내려갔다.“이것도 명령입니까?”“아니요.”“그럼?”“그냥 잡고 싶어서.”잠깐의 침묵 뒤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가락을 맞물렸다.아까 레스토랑에서 잡았을 때와 또 달랐다.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회사도 아니고.플레이를 하는 공간도 아니었다.그냥 늦은 밤.좋아하는 남자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순간이 더 어색했다.“왜 조용합니까?”도현이 물었다.“생각 중이에요.”“무슨 생각?”“우리 되게 평범하다고.”그가 나를 바라봤다.“싫습니까?”“아뇨.”나는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생각보다 좋아요.”도현의 엄지가 내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나도 그렇습니다.”*현관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도현도 재촉하지 않았다.결국 공동현관 앞에서 멈췄다.“여기까지.”“네.”그가 손을 놓았다.손바닥이 갑자기 허전해졌다.나는 문을 열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도현 씨.”“말해요.”“오늘 제가 혼자 오라고 했을 때 어땠어요?”“궁금했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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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어둠 속의 거래

집에 들어온 뒤에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자꾸 공동현관 앞에 서 있던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오늘은 분명 평범한 데이트였다.내가 장소를 정했고.내가 먼저 손을 잡았고.내가 키스를 원한다고 말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더 이상했다.계약이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신경 쓰였다.휴대전화를 들었다.오후 11시 42분.도현에게서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한 시간 전이었다.[집에 들어간 것 확인했습니다. 잘 자요.]나는 몇 번이나 답장창을 열었다 닫았다.내일 내가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는데.지금 연락하면 약속을 어기는 건가?아니.내일 연락하겠다는 말이지, 오늘 연락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었다.나는 결국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두 번도 울리지 않았다.“서윤 씨.”바로 받았다.“안 잤어요?”“아직.”“뭐 하고 있었어요?”잠시 침묵.“당신 전화 기다렸습니다.”나는 몸을 일으켰다.“제가 전화할 줄 알았어요?”“아니요.”“그런데 기다렸다고요?”“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도현다운 대답이었다.확신하지는 않지만 기대하고 있는 것.붙잡지는 않지만 기다리는 것.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도현 씨.”“네.”“우리 거래 하나 할래요?”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무슨 거래죠?”“하나씩 솔직한 말하기.”“이미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그거랑 달라요.”나는 이불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평소에는 말 안 할 것 같은 거 하나씩.”“싫은 내용도 들어야 합니까?”“네.”“거절권은?”“있어요.”도현이 낮게 웃었다.“거래치고는 많이 느슨하군요.”“싫으면 안 해요.”“합니다.”역시 빠른 대답이었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제가 먼저 할게요.”막상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오늘 헤어질 때.”“네.”“도현 씨가 저 따라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전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도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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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가장 가까운 배신

다음 날 아침.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사람들이 대놓고 쳐다보는 건 아니었다.내가 지나가면 대화가 아주 잠깐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정도.그게 더 신경 쓰였다.자리에 앉자 민지가 의자를 끌어당겼다.“서윤 대리님.”“응?”“혹시 어제 대표님이랑 같이 있었어요?”손이 멈췄다.“왜?”“아니, 그냥.”민지는 시선을 피했다.평소 같았으면 웃으며 넘겼을 질문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민지야.”“네.”“뭐 들었어?”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사실은…….”민지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직원 몇 명이 있는 사적인 대화방이었다.[한 대리 요즘 대표실 자주 가지 않아?][어제도 퇴근 전에 대표실 있었던 것 같은데.][둘이 사귀는 거 아님?]그 아래에는 더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었다.내가 어느 날 대표실에서 늦게 내려왔다는 것.도현이 회의 중 내 쪽을 자주 봤다는 것.심지어 내가 어제 퇴근 후 데이트를 했다는 추측까지.나는 화면을 내려다보다 민지를 봤다.“이거 누가 처음 말했어?”민지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으로 충분했다.“민지야.”“……저예요.”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왜?”“처음에는 그냥 농담이었어요.”“농담?”“대표님이 대리님한테 조금 다르게 하는 것 같다고…….”민지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진짜 사귀는 줄 알고 말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몇 명이랑 얘기하다가.”“어제 내가 어디 갔는지도 네가 말했어?”“그건 아니에요.”“그럼 대표실 자주 간다는 건?”민지가 고개를 숙였다.“제가 말했어요.”가장 가까운 자리.회사에서 내가 가장 편하게 대했던 사람.그래서 더 허탈했다.거창한 배신은 아니었다.나를 해치려고 한 것도 아니다.그런데 내가 아무렇지 않게 흘렸던 작은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었다.“미안해요.”민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나는 바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앞으로 내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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