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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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계약의 진위와 진짜 주도권

[당신을 관찰한 기록이 진짜라면.][박민재는 회사 지시 없이 움직인 겁니다.]도현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는 순간 손이 멈췄다.박민재는 도현의 열두 번째 명령 초안을 만들었다.나를 일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런데 세림과의 업무 계약은 9개월 전에 끝났다.그 이후에도 내 관찰 기록은 계속됐다.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럼 하나만 물을게요.][네.][민재 오빠가 회사 지시 없이 저를 관찰했다면, 도현 씨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잠시 뒤.[네.][제가 계약하러 들어온 날까지도?][몰랐습니다.]나는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다.이상했다.도현은 일 년 이개월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민재 역시 나를 알고 있었다.민재는 도현의 계약 구조까지 만드는 데 관여했다.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서로가 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확인하고 싶어요.][무엇을 말입니까?][민재 오빠 계약이 정말 9개월 전에 끝났는지.]잠시 뒤 답장이 왔다.[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손가락이 멈췄다.예전의 도현이었다면 자신이 확인한 자료를 먼저 내밀었을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내가 어떻게 확인할지를 먼저 물었다.[네.][도현 씨가 확인해서 보내주는 것 말고.][제가 직접 볼게요.][알겠습니다.]짧은 대답.설득도 없었다.방법을 정해주지도 않았다.내가 선택한 그대로 받아들였다.*다음 날 오후.나는 세림홀딩스 본사 회의실에서 도현과 마주 앉았다.정확히는 마주 앉지 않았다.도현은 내 옆에서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테이블 위에는 노트북 한 대뿐이었다.“감사팀에서 보존된 기록만 열어뒀습니다.”“도현 씨가 먼저 본 건 아니죠?”“네.”“정말로?”도현이 나를 바라봤다.“서윤 씨가 같이 볼 때까지 열지 말라고 했으니까요.”나는 노트북 화면을 확인했다.열람 기록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먼저 박민재의 업무 계약 기록을 열었다.계약 종료일.9개월 전.종료 사유.**외부 조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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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덮어쓰는 규칙

**세림홀딩스 본사 대표이사실.**화면에 찍힌 접속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분명했다.박민재와 세림의 계약이 끝난 지 17일 뒤.이미 접근 권한이 없어야 할 그의 계정이.도현의 대표이사실에서 사용됐다.“설명해요.”도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기억에 없습니다.”“기억에 없다고요?”“네.”“도현 씨 방인데?”“맞습니다.”나는 노트북을 그의 쪽으로 돌렸다.“그럼 민재 오빠가 도현 씨 몰래 대표이사실에 들어왔다는 거예요?”“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그럼요?”도현이 잠시 생각했다.“접속 위치가 대표이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에서 직접 접속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왜요?”“당시 사내망 접속 위치가 어떤 기준으로 기록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이번에는 나도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추측하지 않기로 했으니까.“확인할 수 있어요?”“네.”도현이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나를 봤다.“확인해도 됩니까?”그 질문에 손끝이 멈췄다.또 묻는다.예전이라면 이미 전화했을 사람이.“네.”도현이 감사팀에 연락했다.길게 설명하지 않았다.9개월 전 접속 기록의 위치 산정 방식과 당시 출입 기록을 보존해달라는 요청뿐이었다.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는 노트북을 건드리지 않았다.“답변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얼마나요?”“빠르면 오늘.”나는 시계를 확인했다.이걸 기다리겠다고 몇 시간을 여기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확인해요.”“알겠습니다.”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도현 씨.”“네.”“아까 말한 계약.”그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무효로 돌리고 싶다고 했죠?”“네.”“저는 아직 결정 안 했어요.”“알고 있습니다.”“근데 하나는 바꾸고 싶어요.”“무엇을 말입니까?”나는 닫힌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렸다.“규칙.”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지금 계약을 유지하든.”“없애든.”“다시 만들든.”“이건 먼저 정해야 할 것 같아요.”“말씀하십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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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선을 넘어서는 아침

**차도현.**임시 출입 권한 생성자에 적힌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도현도 움직이지 않았다.박민재의 계약이 끝난 뒤.그의 계정이 대표이사실에서 사용됐고.그날 임시 출입 권한을 만든 사람은 차도현.“기억 안 난다고 했죠?”내가 먼저 물었다.“네.”“그런데 도현 씨 계정으로 출입 권한까지 만들어졌어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맞습니다.”“그럼 둘 중 하나네요.”나는 노트북을 그에게 돌렸다.“도현 씨가 기억을 못 하는 거거나.”잠시 숨을 골랐다.“또 거짓말하는 거거나.”도현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증명할 수 있어요?”“확인하겠습니다.”“어떻게?”도현은 바로 전화부터 들지 않았다.대신 화면을 조금 더 내려봤다.임시 출입 권한 생성 시각.오전 7시 42분.박민재 계정 접속 시각.오전 8시 11분.29분 차이였다.“당시 출근 기록부터 확인해야 합니다.”“도현 씨 출근 기록?”“네.”“그것도 보존돼 있어요?”“출입 기록은 남아 있을 겁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것부터 봐요.”도현이 감사팀에 추가 자료를 요청했다.이번에도 내가 보는 앞에서였다.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서로에게 가까이 붙어 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불과 몇 분 전.우리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선택에 영향을 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그리고 바로.도현의 이름이 적힌 새로운 기록이 나타났다.나는 그를 바라봤다.“도현 씨.”“네.”“만약 정말 도현 씨가 만든 거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 말입니까?”“민재 오빠 출입 권한.”“…….”“기억을 못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도현 씨가 허락한 거면?”도현은 잠시 생각했다.“그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그게 저한테 불리한 내용이어도?”“네.”“우리 관계가 끝날 수도 있어도?”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하지만 피하지 않았다.“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어요.”“됐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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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완벽한 폐기

[차도현 몰래.][그의 계약서 원본을 가져오기 위해서였어요.]윤서진의 답장을 읽는 순간 손끝이 굳었다.계약서 원본.지금까지 수없이 계약 이야기가 나왔지만, 서진이 직접 그 원본을 가져가려 했다는 말은 처음이었다.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신호가 두 번 가기도 전에 서진이 받았다.“무슨 계약서예요?”—서윤 씨.“돌려 말하지 말고요. 도현 씨 몰래 가져오려고 했다는 계약서가 뭐냐고요.”잠깐의 침묵.—차도현이 두 번째 계약을 준비하면서 만든 초안이에요.“두 번째?”—내 계약 다음에 사용할 계약.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열두 번의 명령?”—맞아요.나는 눈을 감았다.20화에서 들었던 음성이 떠올랐다.박민재와 도현이 열두 번이라는 횟수를 정하던 대화.열두 번째에는 자신이 결정하지 않겠다는 도현.그 파일은 계약 시작 8개월 전에 만들어졌다.“그걸 왜 가져가려고 했어요?”—없애려고 했어요.“왜요?”이번에는 서진의 대답이 늦었다.—다시는 같은 계약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도현 씨 허락도 없이?”—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헛웃음이 나왔다.또 똑같은 말이었다.보호하려고.막으려고.상대를 위해서.그러면서 정작 당사자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그래서 민재 오빠한테 출입 권한을 만들어준 거예요?”—네.“도현 씨 계정으로?”—그건 아니에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신청서 승인자가 차도현으로 되어 있는데요.”—내가 신청한 건 맞아요. 하지만 최종 승인까지 도현 씨 이름으로 처리한 건 내가 아니에요.“그럼 누가 했는데요?”—모르겠어요.“또 모른다고요?”—그래서 나도 그 기록을 다시 찾았던 거예요.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내가 민재에게 부탁한 건 대표이사실에 들어가 계약서 원본을 확인하고 가져오는 것까지였어요. 시스템에 접속하라고 한 적은 없어요.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럼 민재 오빠는 실제로 들어갔어요?”—네.“계약서를 가져왔고요?”—아니요.예상 밖의 대답이었다.“왜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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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주도권의 완성

[윤서진과의 계약 종료 당시 작성된.][박민재 본인의 조사 보고서입니다.]도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온기가 조금 식었다.“민재 오빠가 자기 조사 보고서를 가져갔다고요?”“네.”“왜 자기 보고서가 서진 씨 계약 자료에 들어 있었어요?”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감사팀에서 보내온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윤서진과의 계약이 끝난 뒤 내가 박민재에게 사후 조사를 맡겼습니다.”“서진 씨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했다는 그거요?”“맞습니다.”이미 들었던 이야기였다.계약이 끝난 뒤.도현은 서진의 안전과 위치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민재에게 조사를 맡겼다.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단순한 확인을 넘어 감시에 가까워졌다.“그 조사에 문제가 있었어요?”“있었습니다.”도현의 대답은 짧았다.“어떤 문제요?”“박민재가 요청한 범위를 넘었습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 요청한 건 안전 여부 확인이었습니다.”도현이 말을 이었다.“직접 접촉하지 않고, 위험한 상황이 있는지만 확인하는 것.”“그런데요?”“서진 씨의 이동 경로.”“만난 사람.”“통화 상대.”“개인 일정까지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익숙했다.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내 관찰 기록에서 봤던 방식과 비슷했다.“저한테 했던 것처럼요?”도현의 표정이 굳었다.“비슷합니다.”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래서 계약을 끝낸 거예요?”“네.”“9개월 전에?”“맞습니다.”이제 시간도 연결됐다.민재와 세림의 계약이 끝난 이유.그 직후 대표이사실에 들어온 이유.그리고 그가 복사해 간 자신의 조사 보고서.“자기한테 불리한 기록을 가져간 거네요.”“가능성이 높습니다.”“가능성?”“아직 그 사람이 왜 가져갔는지는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니까.”나는 도현을 바라봤다.예전이었다면 확신에 가까운 말부터 했을 사람이다.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확인한 사실과 추측을 나누고 있었다.22화에서 함께 만든 규칙.그걸 지키고 있었다.“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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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경계의 재설정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도현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당신이 여기 있는 것도 선택이어야 하니까.]계약은 끝났다.남은 명령도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더 많은 생각이 들었다.계약이 있을 때는 규칙이 분명했다.명령하는 사람.따르는 사람.거부할 수 있는 범위.질문할 수 있는 횟수.모든 것이 글자로 정해져 있었다.이제는 아니었다.우리가 만든 네 가지 약속만 남았다.그렇다면 그 안에서 어디까지 가까워질지.어디서 멈출지.그것도 다시 정해야 했다.휴대전화가 울렸다.도현이었다.[도착했습니까?]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답했다.[네.]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한마디쯤 더 했을 것이다.오늘 있었던 일을 묻거나.내일 시간을 확인하거나.적어도 잘 쉬라는 말이라도.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결국 먼저 보냈다.[끝이에요?]몇 초 뒤.[무엇이 말입니까?][도착했냐고 물어보고 끝이냐고요.]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했으니까.]피식 웃음이 나왔다.정말 말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연락까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는데.][그건 몰랐습니다.][그럼 물어보면 되잖아요.]한동안 답장이 없었다.그리고.[연락해도 됩니까?]나는 소파에 기대며 웃었다.[네.]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서윤 씨.“네.”—이런 것도 매번 물어야 합니까?조금 억울한 목소리였다.“처음에는요.”—언제까지?“서로 어디까지 괜찮은지 알 때까지.”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그럼 하나씩 정해야겠군요.“뭘요?”—새로운 경계.손끝이 멈췄다.맞는 말이었다.계약을 없앴다고 해서 경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오히려 지금부터 더 필요했다.“좋아요.”—지금 정합니까?“아니요.”나는 잠시 생각했다.“내일 얼굴 보고 해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현 씨.”—네.“내일 보고 싶은지부터 말해요.”잠깐의 침묵.—보고 싶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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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온전한 소유

[이제 한서윤 씨에게 전부 보여줘도 됩니다.]박민재가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봤다.마치 허락이라도 해주는 것 같은 문장이었다.이제.전부.보여줘도 된다.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민재 오빠가 결정하죠?”도현이 나를 바라봤다.“무엇을 말입니까?”“제가 언제 뭘 봐도 되는지를요.”나는 도현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자기가 가져간 자료잖아요. 자기가 숨겼고. 이제 와서 보여줘도 된다고 하면 끝이에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물었다.“보고 싶습니까?”예전 같았다면 이미 파일을 열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나는 잠시 생각했다.“네.”이번에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볼래요.”“알겠습니다.”“대신 같이 봐요.”“그렇게 하죠.”*세림홀딩스에서 다시 확보한 파일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제목은 단순했다.**윤서진 계약 종료 후 사후 조사 보고서.**작성자 박민재.의뢰자 차도현.나는 첫 페이지부터 천천히 읽었다.처음 며칠의 기록은 도현이 설명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계약 종료 후 서진의 상태.외부 접촉 여부.위험 상황 유무.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기록은 달라졌다.**확인 범위 확대 필요.****대상자의 정서 상태만으로는 재접촉 가능성을 판단하기 어려움.****주요 이동 경로 및 반복 접촉 인물 확인.**나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도현 씨가 시킨 거예요?”“아닙니다.”“확실해요?”“네.”도현이 화면을 가리켰다.“내 요청 범위는 앞부분까지입니다.”실제로 첫 페이지 아래에는 의뢰 범위가 적혀 있었다.**대상자의 안전 상태 및 직접적 위험 여부 확인.**그 뒤부터는 별도의 추가 승인 기록이 없었다.그런데 민재의 기록은 계속됐다.서진의 이동.만난 사람.통화 시간.심지어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시각까지.나는 천천히 화면을 내렸다.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조사 지속 사유**> 의뢰인의 판단만으로 조사를 종료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남아 있음.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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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새로운 일상, 그리고 새로운 규칙

아침 햇살이 거실 바닥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건 휴대전화 화면이었다. [잘 잤습니까?] 보낸 사람은 차도현. 시간은 오전 8시 12분. 어젯밤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 떠올랐다. [내일 연락할게요.] 분명 내가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제가 연락한다고 했잖아요.] 읽음 표시가 거의 바로 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연락하고 싶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원하면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새로 정한 규칙을 도현은 생각보다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럼 인정.]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아침 먹었습니까?] [아직.] [나도 아직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잠시 바라봤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래서요?] 답장이 한참 오지 않았다. 그리고. [같이 먹고 싶습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세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도현이 서 있었다. 평소처럼 정장을 입었지만 한 손에는 장을 본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뭐예요?” “아침.” “먹으러 오는 줄 알았는데요?” “만들어 먹는 것도 같이 먹는 겁니다.” 도현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요.” 그가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도현이 내 집에 오는 것 자체가 긴장됐을 것이다. 그가 왜 왔는지. 무엇을 시킬지. 오늘은 몇 번째 명령이 될지. 먼저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침을 만들러 왔다. 그 사실 하나뿐이었다. 잠시 후 주방에는 버터 향이 가득 퍼졌다. 도현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아일랜드 식탁에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잘하네요.” “뭘 말입니까?”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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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위험한 시그널

[이제 한서윤 씨에게 전부 보여줘도 됩니다.]박민재가 돌려보낸 보고서를 확인한 뒤에도 그 문장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하지만 전과는 달랐다.누군가가 보여줘도 된다고 허락해서 본 게 아니었다.내가 보기로 선택했다.그리고 도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계약은 끝났다.명령권도 사라졌다.그런데 서로에게 느끼는 긴장감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오히려 더 선명해졌다.*오후 세 시.세림홀딩스 대회의실.나는 협력사 담당자들과 함께 긴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었다.도현은 정면에서 회의를 이끌고 있었다.“다음 달 일정은 기존 계획보다 일주일 앞당기는 방향으로 검토하겠습니다.”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회사에서 보는 차도현은 여전히 빈틈이 없었다.자료를 넘기는 손길도.질문을 받아치는 속도도.사람들의 시선을 통제하는 방식도.그런데 이제 나는 알고 있었다.저 남자가 언제 흔들리는지.무엇을 좋아하는지.그리고 어디에서 멈출 줄 알게 되었는지도.그 사실을 떠올리자 묘하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그 순간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아주 잠깐.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다시 자료로 돌아갔다.그것뿐이었다.그런데도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문득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신호.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것.하지만 곧 손을 멈췄다.여긴 회사였다.도현과 나는 며칠 전 분명히 정했다.**경계는 상황에 따라 다시 확인한다.**둘 사이에서 합의한 것이 모든 장소에서 자동으로 허용되는 건 아니다.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비밀 신호 하나 만들까요?**그리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 저장만 해두었다.보내지는 않았다.*“이상입니다.”도현이 자료를 덮었다.“추가 사항은 담당 부서와 정리해 주십시오.”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역시 서류를 챙겼다.도현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나도 남지 않았다.회의실을 나온 뒤에야 휴대전화로 아까 적어둔 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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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아찔한 경계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오후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복도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내가 시계를 두 번 두드렸고. 도현은 한 번 만졌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짧은 신호가 계속 생각났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집에 도착했습니까?] 도현이었다. [아직이요.] [어디입니까?] 메시지를 읽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위치부터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달랐다. [그거 지금 위치 확인하는 거예요?]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이 오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렇게 들렸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아직 밖이라면 통화하고 싶습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달라졌다. [그건 좋아요.] 곧 전화가 걸려왔다. “네.” —아까는 미안합니다. “뭐가요?” —습관처럼 물었습니다. “알면 됐어요.” —화났습니까? “아뇨.” 나는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댔다. “근데 오늘 만든 신호 있잖아요.” —네. “생각보다 위험하던데요?”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요?” —회의 중에 당신이 그걸 했다면. 그가 말을 멈췄다. “했다면?” —대답하지 않았을 겁니다. 뜻밖이었다. “왜요?” —그 순간 내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신호를 만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럼 복도에서는 왜 대답했어요?” —대답하고 싶었으니까.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솔직했다. “도현 씨.” —네. “우리 신호 하나 더 정해야겠어요.” —어떤 겁니까? “취소 신호.” 이번에는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필요하겠군요. “그렇죠?” —네. 시작하는 방법만 정하고 끝내는 방법을 정하지 않는 건 이상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정해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웃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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