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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이공의 연인들: Chapter 11 - Chapter 20

61 Chapters

11

"내 생명은... 한이 지켜주고 있잖아요. 당신이 내 옆에 있는 한, 나는 어디에 있어도 무섭지 않아요." 서툰 한국어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낸 그 순수한 고백은, 이준의 단단한 가슴을 무참히 뒤흔들었다. 이준은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감정에 휩싸였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절절한 마음을 자신이 받아도 되는 것일까?  이준은 린의 손을 잡고 그 손바닥에 자신의 이마를 묻었다.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 따위는 몇 번이라도 던질 수 있다.'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을 향한 맹목적이고도 치명적인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애틋한 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련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나무 그늘 저편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은 반사적으로 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소총을 쥐었다. 그곳에는 마을 주민 중 한 명인 '남'이라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낮에는 마을의 농기구를 수리하며 선량한 미소를 짓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낫이 쥐여 있었고, 그의 눈빛은 핏빛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린 선생." 남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입가에 소름 끼치는 미소가 걸렸다. "외세의 앞잡이 군인과 무슨 밀어를 나누고 있는 건가?"  린의 몸이 얼어붙었다. 이준은 남의 눈빛에서 그가 밤이 되면 완장을 차는 베트공의 프락치임을 직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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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 무사했군요. 정말 무사한 거죠?" 린은 다가오는 이준에게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이준은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그녀를 단단히 품어 안았다. 거칠고 단단한 군복 표면에 린의 부드러운 아오자이가 닿았다. 린은 이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거세게 고동치는 그 소리만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그가 곁에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을 두고 죽지 않는다고." 이준의 낮고 쓸쓸한 목소리가 린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이준은 거친 손으로 린의 긴 생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잔인한 전장터에서 오직 이 여인의 온기만이 그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였다. 린은 이준의 팔에서 다시금 번져 나오는 핏자국을 발견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준의 단단한 몸 곳곳에는 전쟁이 남긴 상처와 훈장 같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린은 그를 낡은 의자에 앉히고, 차가운 물을 적신 천을 가져와 그의 상처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요. 닦아낼게요." 린의 떨리는 손길이 이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이준은 턱관절에 힘을 주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안타까운 눈빛과, 살결을 스치는 온기가 가슴 밑바닥을 미치도록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린은 굳은 피를 신중하게 닦아낸 뒤, 깨끗한 붕대를 감아주었다. 매듭을 짓는 그녀의 손바닥 위로 이준의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린." 이준이 그녀의 이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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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준은 그녀의 아오자이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뒤로한 채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정글길을 달리며, 이준은 자신의 소총을 더욱 꽉 쥐었다. 이 싸움은 단순히 군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연인의 순수를 지키기 위한, 사상이라는 거대한 악마와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대지를 적시는 새벽 이슬 속에서 이방인 병사의 가슴은 오직 한 여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전장의 비극도, 붉은 위협도 결코 앗아갈 수 없는 숭고한 빛이었다.   * 당신의 나라, 나의 고향  새벽안개가 정글의 능선을 타고 낮게 깔리며 붉은 대지를 감쌌다. 밤새 치열하게 오가던 총성이 비로소 멎었지만, 공기 중에는 여전히 매캐한 화약 냄새와 짓밟힌 풀잎의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한이준은 피로에 지친 눈을 비비며 소총의 경계 태세를 풀지 않은 채 마을 외곽 대피소 주변을 서성였다. 어둠이 걷히며 드러난 마을의 모습은 참혹했다.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이 지르고 간 불길은 겨우 진화되었으나, 검게 그을린 기둥과 흩어진 흙먼지만이 이곳이 한때 소박한 사람들의 삶터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준은 땀과 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군복 소매를 걷어올리며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아득한 무력감을 씹어 삼켰다.  '이 지옥 같은 땅에 내일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이준은 단단한 턱관절에 힘을 주었다. 사상이라는 이름의 광기가 덮친 고을에는 더 이상 이웃 간의 다정한 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낮에는 순박한 미소를 짓던 이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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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눈이 내리면 세상이 정말 하얗게 변하나요? 붉은 흙도, 피도 전부 숨겨지나요?" "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과 아픈 상처들이 하얀 눈 아래 고요히 숨을 죽입니다. 린에게 그 깨끗한 풍경을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붉은 광기가 닿지 않는 그곳에서, 당신이 다시 아이들에게 다정한 시를 읽어줄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이준의 맹세는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촛불처럼 단단했다. 린은 이준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이방인 병사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심장 박동은, 잔인한 이 땅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한의 나라는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네요. 당신처럼..."  린은 가슴속에서 이준이 건넸던 회중시계를 꺼냈다. 손때가 묻은 금속 시계는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째깍거리는 일정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 시계 소리를 들으면, 한의 나라에서 내리는 하얀 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한 약속...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내 목숨을 걸고 약속합니다."  이준은 린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그녀의 입술에 깊고 애틋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것은 욕망을 넘어선, 생과 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서로의 영혼을 묶어두려는 절박한 구원의 의식이었다. 린은 이준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진심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의 평화로운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부대 쪽에서 긴급 비상 소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이준은 입술을 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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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이공의 연인들

트럭이 굽이치는 정글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는 동안, 이준은 소총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다려요, 린. 사상이 이 땅을 갈라놓고 전쟁이 우리를 찢어놓는다 해도,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돌아갈 거야.' 어둠이 내리는 베트남의 하늘 아래, 붉은 위협은 더욱 거세게 몰아쳐 오고 있었다. 당신의 나라와 나의 고향이라는 아득한 경계선 위에서, 두 연인의 애틋한 사랑은 이별이라는 참혹한 시련을 맞아 더욱 처절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길과 철수선 위에서 펼쳐질 그들의 두 번째 운명은, 이미 붉은 피와 눈물로 물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짧았던 평화, 길어지는 그림자   남쪽으로 향하는 군용 트럭의 바퀴가 붉은 진흙탕을 세차게 차오르며 기쾌한 비명을 질렀다. 덜컹거리는 짐칸에 빽빽하게 들어앉은 병사들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늘져 있었다. 한이준은 군용 트럭의 뒷덜미 너머로 멀어져 가는 정글의 능선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붉은 흙먼지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지던 하얀 아오자이의 환영이 그의 잔상에 문신처럼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이준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군복 카라 위, 있어야 할 계급장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린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던 그 작은 금속 조각. 그것은 단순한 계급 표식이 아니었다.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겠다는, 목숨을 건 사나이의 정표이자 약속이었다.  "한 병장님, 괜찮으십니까? 상처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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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린은 주머니 속에서 이준의 계급장을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 계급장을 가진 따뜻한 한국 군인 아저씨가 남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그 아저씨가 있는 곳에 가면... 배고프지도 않고, 무서운 총소리도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이에요, 선생님?" "응, 정말이야. 선생님이 약속할게."  린은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강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도로변 수풀 너머에서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피난민 대열 속에도 침투해 있었다. 그들은 밤이 되면 피난민들을 선동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이들을 은밀히 끌고 가서 처형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 길마저도 붉은 그림자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인민의 배신자'라며 피난민들을 압박했고, 남쪽으로 가면 외세의 노예가 될 뿐이라고 거짓 선전을 퍼뜨렸다. 인간의 순수한 삶의 의지마저 사상의 족쇄로 묶으려는 그들의 집요함에 린은 소름이 돋았다.  '한... 보고 싶어요. 너무나 보고 싶어요.' 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이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나라로 데려가겠다고 했던 그의 단단한 목소리.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도 오직 자신만을 향해 다정하게 빛나던 그 깊은 눈동자. 그 기억만이 린을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그때, 피난민 대열 뒤편에서 요란한 총성이 터졌다. "북베트남군이다! 적들이 해안 도로까지 치고 올라왔다!" 누군가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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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차가운 이성으로 적을 베어 넘어뜨리면서도 이준의 가슴속은 지옥처럼 타올랐다. 길바닥에 떨어진 자그마한 아이의 신발 한 짝을 발견했을 때, 이준의 심장은 밑바닥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린이 가르치던 아이의 것일지도 모르는 그 작은 신발은 붉은 피에 적셔져 있었다. 그 시각, 도로 아래 웅덩이로 이어진 깊은 바위 틈새.  린은 아이 셋을 자신의 몸 아래로 누른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머리 위로 파편과 흙더미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비명과 통곡이 사방에서 난무했지만, 린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죽였다.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린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선생님, 무서워요... 아저씨들은 어디 있어요?" "앳된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에 린은 가슴을 감싸 안았다. 아오자이 안쪽 깊숙한 곳, 이준의 계급장과 아버지의 회중시계가 차가운 감촉을 내며 닿아 있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는 폭음으로 가득 찬 전장 속에서 린의 정신을 붙잡아주는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한... 당신도 이 총성 속에 있나요? 저를 찾고 있나요?'  린은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준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내게 보여주겠다고 했던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나라. 붉은 사상도, 피비린내도 없는 그 평화로운 땅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운명의 그림자는 너무나 잔인하게 그들을 찾아왔다. 수풀을 헤치며 다가오는 거친 군화 소리가 바위 틈새를 압박해 왔다. 붉은 완장을 찬 사내들과 별 모양의 뱃지를 단 북베트남 정규군 무리가 피난민들이 숨어있는 구덩이를 둘러쌌다.&nbs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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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준은 소총을 다시 고쳐 쥐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여인, 붉은 사상의 사슬에 묶여 지옥으로 끌려간 연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기꺼이 홀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숲속 깊은 곳에서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공산주의의 잔혹한 위협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으나, 이방인 병사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연모의 불꽃은 더욱 세차게 피어나고 있었다.사랑과 사상, 구원과 학살이 뒤얽힌 비극의 전장 한복판에서, 이준은 마침내 연인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약속된 이별은 없다   수풀을 헤치는 군화 소리가 정글의 정적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축축하게 젖은 나뭇잎들이 얼굴과 어깨를 스칠 때마다 뺨이 날카롭게 베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한이준은 단 한 순간도 발걸음을 줄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적을 사냥하는 야수의 것처럼 푸른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와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이준의 감각은 날이 서 있었다. 진흙탕 위에 질질 끌린 자국, 나무껍질에 묻은 붉은 핏자국, 그리고 번갈아 꺾여나간 작은 나뭇가지들. 적들이 린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강제로 끌고 간 궤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조금만 버텨다오, 린. 제발 조금만...' 이준은 이를 문 채 소총의 방아쇠 울을 거칠게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가시나무의 가시도, 찢어진 소매 사이로 쏟아지는 핏방울도 더 이상 통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의 더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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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저 년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시계를 빼앗아라! 그리고 본보기로 목을 베어 광장에 걸어라!" 장교의 악에 받친 고함과 함께 베트공 둘이 대검을 뽑아 들고 린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쇠붙이가 린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공포 대신 이준의 다정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얀 눈을 보여주겠다던 약속... 다음 생에서라도 꼭 지켜주세요, 한...' 그 순간이었다.  슉-! 어둠 속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단검이 린에게 다가서던 베트공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사내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적이다! 기습이다!" 캠프 전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어서 정글의 정적을 찢어발기는 맹렬한 소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소환된 사신처럼 어둠을 뚫고 나타난 형체, 한이준이었다. 그의 전신은 피와 진흙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이준은 소총 방아쇠를 당기며 린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적들의 총탄이 이준의 어깨와 군복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적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한!" 린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꿈인 줄만 알았다. 이미 지옥으로 끌려와 죽음을 기다리던 그 절망의 순간에,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나이가 붉은 화염을 뚫고 나타난 것이었다. "린! 엎드려요!" 이준의 고함과 함께 그가 린의 몸을 자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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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이공의 연인들

"한 병장님! 무사히 살아 돌아오셨군요!" 진지 입구를 지키던 박 일병이 피투성이가 된 이준과 그 품에 안긴 린을 발견하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달려왔다. 박 일병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이 절망적인 전선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소대장님은 어디 계시나?" 이준의 묵직한 물음에 박 일병은 남쪽 해안 포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본부 대대가 해안가 임시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이공으로 향하는 마지막 수송선과 후방 병력 수송차가 모이는 곳입니다. 지휘소도 이미 철거 작업을 마치고 이동 중입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고, 붉은 사상의 물결은 파죽지세로 전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린의 머릿결을 쓸어내리는 이준의 손길이 더욱 단단해졌다. 이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지켜내야 할 세계는 오직 품 안의 여인 하나뿐이었다. 이준은 피난민들과 군사 자재들이 뒤엉킨 소란스러운 광장을 피해, 해안가 언덕 모퉁이에 홀로 서 있는 낡은 벽돌 건물 잔해로 린을 이끌었다. 한때 교회의 사제관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곳은 지붕이 반쯤 날아가 있었으나, 몰아치는 칼바람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었다.  이준은 흙먼지가 쌓인 바닥에 자신의 군용 우의를 깔고 린을 가만히 앉혔다. 린의 아오자이는 피와 흙으로 얼룩져 찢겨 있었고, 그녀의 가녀린 손목에는 굵은 밧줄에 묶였던 붉은 피멍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이준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수통을 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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