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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이공의 연인들: Chapter 21 - Chapter 30

61 Chapters

21

"나도 갈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탄 배를 따라갈 겁니다. 남쪽 끝, 사이공의 항구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이준은 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두 사람의 숨결이 가까운 거리에서 뜨겁게 얽혔다. 이준은 그녀의 이마와 콧날, 그리고 피로 물든 입술 위에 절박하고도 깊은 입맞춤을 내렸다. 그것은 사상과 이념의 광기가 지배하는 전장 한복판에서, 서로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가장 거룩하고 애절한 맹세였다.  린은 이준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진심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빵 한 조각을 나누어 먹은 짧은 휴식이었으나, 두 연인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평화의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쿠쿠쿵-! 사제관 잔해 바로 뒤편 해안 도로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북베트남 군의 포탄이 임시 주둔지 외곽에 적중한 것이었다. 붉은 화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고, 비상 나팔 소리가 정적을 찢발겼다.  "적의 대규모 포병 사격이다! 전 소대, 해안 포구로 신속히 이동하라!" 소대장의 악에 받친 고함이 무전기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적의 기갑 부대가 외곽 방어선을 뚫었다! 시간이 없다! 전원 철수하라!"  이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린을 자신의 등 뒤로 감쌌다. 천장이 무너지며 붉은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포격의 여파로 바다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고, 포구 쪽에는 철수선에 탑승하려는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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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준이 헌병대의 제지선을 뚫고 소대장 앞으로 뛰어들었다. 소대장은 린의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더니 혀를 차며 다급하게 말했다.  "한 병장, 지금 배가 떠나기 직전이다! 승선 인원이 초과해서 남베트남 민간인 탑승이 전면 통제됐다! 한국군 군인과 직계 가족이 아니면 탑승이 불가능해!" "이 여자는 제 약혼녀입니다! 저의 목숨입니다!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이준의 눈에서 핏발이 서서 눈물이 솟구쳤다. 헌병 장교가 이준의 가슴을 밀쳐내며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규정이다, 병장! 지금 북베트남군 탱크가 항구 1km 앞까지 도달했다! 민간인까지 다 태우다간 배 전체가 수중포화가 된다! 당장 배에 올라타!" "안 됩니다! 린을 두고는 갈 수 없습니다!" 이준은 소총을 내팽개치고 린의 두 손을 잡았다. 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승선교 입구에서는 밧줄을 풀기 위한 도끼질 소리가 들려왔고, 바다 위에서는 수송선의 거대한 경적이 쿠우우- 하고 울려 퍼졌다.  "한..." 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이준의 눈동자에 담긴 절망과 사랑을 보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던지려 하는 이 사나이의 진심을. "린, 내 말 들어요." 이준이 린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주변의 비명 소리와 총성도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어졌다.  "내가 당신을 승선교 위로 던져 올릴 겁니다. 소대장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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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포효는 사이공의 함락을 알리는 거대한 포성 속으로 묻혀갔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은 함락되었다. 베트남의 붉은 대지 위에서 피어났던 두 연인의 숭고한 사랑은 이렇게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이별을 맞이했다. 여인은 공산화된 지옥의 땅에 홀로 남겨졌고, 사나이는 연인을 두고 떠나야 하는 잔인한 귀국선 위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붉은 장벽을 뚫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다시 만날 그날을 향한, 두 연인의 처절하고도 위대한 생존의 몸부림이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 찢겨나간 손등의 온기   검은 메콩강의 물줄기를 가르며 수송선이 부두에서 사정없이 멀어져 갔다. 함락된 사이공의 하늘은 거대한 핏빛 연기 기둥에 휩싸여 끝없이 타올랐다. 멀어지는 부두 위, 점점이 붉게 타오르는 화염과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전 가요 소리가 거친 바닷바람에 섞여 갑판 위로 흩어졌다. "이거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한이준은 수송선 난간을 틀어쥐고 거칠게 몸부림쳤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박 일병과 소대원의 손을 털어내려 했으나, 며칠 밤낮을 피와 먼지 속에서 구른 그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찢어진 군복 소매 너머로 붉은 피가 거세게 번져 나왔고, 철골 난간을 마구 두드렸던 손은 가죽이 파이고 뼈마디가 드러나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한 병장님! 제발 차리십시오! 이미 배가 떠났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박 일병이 이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눈물 섞인 목소리로 부르짖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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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녀의 하얀 아오자이는 피와 먼지로 더럽혀져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고, 가늘고 깨끗했던 손등은 바닥에 긁혀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가슴속 깊숙이 품은 금속의 감촉만이 그녀의 의식을 온전히 붙잡고 있었다. 아오자이 안쪽, 가슴골 사이에 소중하게 숨겨둔 이준의 회중시계. 그리고 그 곁에 놓인 한국군 계급장.  째깍, 째깍, 째깍. 거친 총성과 사상 선전 방송이 사방을 뒤흔드는 속에서도, 린의 귀에는 오직 그 회중시계가 내는 작은 소리만이 똑똑히 들려왔다. 그것은 이방인 병사의 심장 소리였고, 그가 자신에게 약속했던 하얀 눈의 소리였다.  "이봐, 거기 너! 일어나!" 거친 손길이 린의 어깨를 잡아채며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붉은 별 뱃지를 단 북베트남군 장교 하나가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린을 훑어보았다. 찢겨나간 아오자이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목선과, 먼지로 얼룩졌으나 감출 수 없는 맑고 고결한 용모가 사내의 시선을 끌었다.  "이 여자는 누구냐? 착의를 보니 단순한 농민이 아닌데." 장교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베트공 대원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여자는 북부 중부 전선 전략촌에서 아이들에게 반동 사상을 가르치던 교사입니다! 남조선 괴뢰군 병사와 정을 통하며 당의 정보를 밀통한 중범죄자입니다!" 장교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남조선 괴뢰군의 첩자라...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한 놈들은 사상을 뿌리째 뽑아야 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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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이공의 연인들

* 생사의 갈림길에서   남중국해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가르는 수송선의 기관음은 밤새도록 낮게 신음했다. 잔물결이 갑판 하단을 때릴 때마다 차가운 물보라가 흩날렸다. 한이준은 피투성이가 된 손등에 붕대를 대충 감은 채, 여전히 수송선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동료 병사들이 들어가서 쉬라고 몇 번이고 권했지만,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득히 멀어진 베트남 대지 쪽 하늘은 여전히 핏빛 검은 연기로 얼룩져 있었다. 붉은 화염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릴 때마다, 이준의 가슴속에서는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베어내는 듯한 통증이 솟구쳤다.  '린...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이준은 붕대가 감긴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 통증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마지막 승선교 입구에서 사정없이 찢겨 나갔던 그녀의 손가락, 그리고 먼지바람 속에서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며 회중시계를 들어 올리던 린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아지랑이쳤다.  "한 병장님, 물이라도 좀 마시십시오." 박 일병이 찌그러진 수통을 내밀었다. 이준은 말없이 수통을 받아 입술만 살짝 적신 뒤 다시 건넸다. 박 일병은 이준의 곁에 서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다 끝난 걸까요? 우리가 목숨을 바쳐 싸운 그 세월이, 전부 이렇게 붉은 바다에 수장되는 건가요?"  박 일병의 목소리에는 허무함과 절망이 가득 서려 있었다. 숱한 전우들의 피와 청춘을 바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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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수송선은 어느덧 베트남 해역을 벗어나 자유의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에게는 이 자유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이준은 품 안에서 린이 떨어뜨리고 갔던 작은 비단 조각을 꺼냈다. 그녀가 입었던 하얀 아오자이의 찢어진 자락이었다. 흙과 피로 더럽혀진 그 작은 천 조각에 얼굴을 묻자, 미세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향기가 이준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린..." 이준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다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맹세했다. "조금만 견뎌다오. 귀국하는 즉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찾을 방법을 알아낼 거야. 정부에 호소하고, 적십자사를 뒤지고, 필요하다면 다시 그 붉은 대지로 뛰어들 거다."  두 연인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사상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바다라는 아득한 거리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서로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단 하나의 약속만큼은 결코 갈라놓을 수 없었다. 차디찬 바닷바람을 뚫고, 이방인 병사와 베트남 여인의 절박한 집념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지나 서로를 향해 아득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귀국선에 몸을 싣고   남중국해의 거친 파도가 군용 수송선의 거대한 수철 외벽을 때리며 쿵쿵 소리를 냈다.수평선 너머로 검게 그을린 사이공의 하늘은 이미 아득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갑판 위를 채운 공기는 죽음보다 무겁고 비참했다. 철수선에 몸을 실은 패잔병들과 피난민들은 저마다 무릎을 꿇은 채 소리 없이 눈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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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파병 생활 동안 수많은 전우들의 죽음을 보아왔고, 전쟁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똑똑히 목격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준과 린의 사랑은 달랐다. 사상과 이념의 광기가 모든 가치를 말살하던 전장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사랑은 유일하게 인간다운 빛을 발하던 구원의 불꽃이었다. 그 불꽃이 사이공의 함락과 함께 꺼진 것처럼 보였으나, 이준의 가슴속에는 이미 결코 꺼지지 않는 화염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박 일병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가는 군인들을 세상이 어떻게 바라볼까요?" "세상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소대장이 담배꽁초를 바닥에 문질러 끄며 말했다.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것들, 그곳에 두고 온 이름 모를 영혼들과 한 병장의 그 여인을 기억하는 것. 그게 살아남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다." --- 밤이 더욱 깊어지자 남중국해의 파도는 더욱 거세졌다. 귀국선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북쪽, 한반도를 향해 무겁게 항해를 이어갔다.  이준은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손등의 붕대를 고쳐 감았다. 린과의 이별 직후 찢겨 나갔던 그 상처는, 이제 붉은 딱지가 앉아가며 거친 흉터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전장의 훈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린의 손을 놓쳐버린 통한의 흔적이자, 그녀를 찾아가겠노라는 사나이의 서글픈 결의가 새겨진 낙인이었다.  이준은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자신의 가슴속에서는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붉게 물든 베트남의 사상 재개조 수용소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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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자를 보게. 남조선 괴뢰군과 정을 통한 매국노라더군." 대열을 감시하던 적의 보초가 린을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었다. "아이들에게 거짓 자유를 가르치더니, 끝내 외세의 개 노릇을 한 년이야. 수용소에 도착하면 저 잘난 얼굴에 똥물부터 끼얹어야 해."  사내들의 저급한 야유가 퍼져나갔지만, 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늘게 떨리는 턱을 곧게 세우며 앞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린의 눈빛에 담긴 깊은 고결함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한 강인함이 그녀의 온몸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한... 당신이 보여주겠다던 그 하얀 눈이 그립습니다.' 린은 마음속으로 이준의 이름을 불렀다. 붉은 흙먼지가 날리는 이 비정한 땅이 아닌, 온 세상의 모든 아픔과 죄를 순백으로 덮어준다던 먼 동방의 나라.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나이의 단단한 얼굴을 떠올리며, 린은 가슴속 시계 소리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었다.  "내가... 버텨낼게요. 아무리 깊은 지옥이라 해도, 당신에게 돌아갈 날을 위해 절대로 죽지 않을게요." ---  같은 시각, 남중국해의 거친 검은 파도를 가르며 북쪽으로 향하는 귀국선 수송선.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한이준은 피투성이가 된 손등을 난간에 얹은 채 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배가 진행할수록 베트남의 대지는 멀어져 갔지만, 이준의 가슴속에 새겨진 피눈물의 흔적은 더욱 선명하게 죄어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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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개인의 이름도, 사사로운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당을 향한 참회와 노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상을 개조하지 못하는 반동은 땅속에 묻혀 인민의 거름이 될 것이다!" 린은 통나무 감옥 안으로 거칠게 내던져졌다. 눅눅한 짚가리와 오물이 섞인 흙바닥에 굴렀으나,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감옥 구석으로 몸을 슬며시 감춘 린은, 손목의 밧줄이 풀리자마자 가장 먼저 가슴을 확인했다. 아오자이 안쪽 깊은 곳, 이준의 회중시계는 여전히 무사했다. 차가운 금속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아득히 멀어진 자유의 땅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을 이준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한... 저 여기에 도착했어요.' 린은 좁은 통나무 창살 사이로 보이는 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상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고, 지옥 같은 수용소의 나날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회중시계의 소리는 그 어떤 사상의 폭정도 꺾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증거였다. 두 연인은 그렇게 붉게 물든 대지와 차가운 바다 위에서, 서로를 향한 단 하나의 집념을 품은 채 각자의 지옥을 견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집념은 훗날 세상을 뒤흔들 기적의 씨앗이 되어 깊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 붉은 장벽 너머의 맹세  칠흑 같은 산악 지대의 밤이 지나고, 제7사상 재개조 수용소 위로 잿빛 새벽이 차갑게 깔렸다. 이슬을 머금은 가시철조망 끝에서 피비린내 섞인 산바람이 불어와 린의 뺨을 자극했다. 통나무 감옥의 바닥은 축축한 오물과 짚가리가 엉켜 있어 차가운 한기가 뼈마디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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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이공의 연인들

같은 시각, 대한민국의 부산항 포구. 차갑고 선명한 동해의 바닷바람이 항구 전체를 휘감아 돌았다. 멀리서 경적을 울리며 들어선 군용 수송선의 거대한 닻이 바다 표면을 때리며 쿵 소리를 냈다. 수개월간의 참혹한 파병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한국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갑판 위로 쏟아져 나왔다.  부두에는 환영 깃발을 든 시민들과 가족들이 모여 울부짖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전장의 피린내를 뚫고 생환한 아들을, 남편을 끌어안는 사람들의 눈물로 항구는 온통 상봉의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환희의 물결 한가운데서, 한이준은 홀로 죽은 자처럼 서 있었다.  피와 먼지가 찌든 군복 소매 너머로, 붕대가 감긴 손등을 난간에 얹은 채 이준은 멍하니 자유의 땅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평화롭고 깨끗했다. 붉은 화염도, 포격 소리도, 절망적인 피난민들의 비명도 없는 고향의 풍경. 그러나 그 정적과 평화야말로 이준의 가슴을 가장 무자비하게 짓밟는 무기가 되고 있었다.  '나 혼자 이 자유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 이준의 단단한 턱관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딛고 선 땅은 살아서 돌아온 환희의 땅이었으나, 그의 영혼은 여전히 피비린내 나는 사이공의 함락 현장,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홀로 남겨졌던 연인의 곁에 묶여 있었다.  "한 병장님..." 박 일병이 군장을 짊어진 채 이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박 일병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고국입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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