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새벽은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새로 세워진 세자빈이 첫 대수라를 책임지는 날.그 책임은 ‘반가운 자리’라기보단 시험의 무게에 가까웠다.정사각으로 빼곡히 깔린 뜰을 지나 채향은 수라간의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섰다.그곳엔 내명부의 수십 명 상궁과 궁녀들,수라간 도감과 수라상궁들까지 일제히 그녀의 발소리에 눈길을 주었다.그 눈빛엔 복종도 있었고, 의심도 있었고, 질투도 있었다.그러나 채향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맨 앞에 선 수라상궁에게 인사했다.“오늘의 수라를 맡게 된, 세자빈 정채향이옵니다.”“…저는 이름도, 혈통도 많지 않사오나—”“…국 하나로 여기까지 왔사옵니다.”그 말에 수라상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빈궁께선… 아니, 세자빈마마께선 그간 개인 국만 올려오셨사온데, 궁 전체의 수라를 직접 구성하신 경험은…”그 말은, ‘무리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경계였다.채향은 작게 웃었다.“허나 국이란, 사람 수에 따라 달라지지 않사옵니다.”“…진심이 늘 같다면, 솥이 크고 작음은 차이가 되지 않사오니.”그녀는 소매를 걷었다.비단은 불길 가까이에서 살짝 눅눅해졌고,손끝은 다시, 한때 궁녀로 있을 때처럼 익숙하게 움직였다.그날의 주제는 ‘가을 초입의 입맛을 살리는 수라’.궁의 모든 이들이 여름의 습기를 걷어내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몸을 위한 상차림이었다.채향은 제일 먼저 말린 황태와 무를 고아 국을 짓기 시작했다.무는 얇게 썰되 결을 따라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칼을 대었고,황태는 찬물에 담가 소금기만 살짝 빼 향은 유지하도록 했다.“국은… 가을의 냄새를 머금어야 하옵니다.”그녀의 중얼거림은 어느새 수라간의 궁녀들에게로 번졌다.“무가 단맛을 올릴 즈음, 청주를 세 방울만.”“…더 넣으면 국이 흐려지옵니다.”시간이 흐르고, 궁궐 곳곳으로 가을국의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채향은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고사리볶음의 간을 점검하고, 마른 새우와 들기름으로 향을 살린 나물 반찬을 다듬었다.그녀는
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