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Chapter 61 - Chapter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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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궁 안의 국은 정치요, 국 밖의 마음은 사랑이옵니다

采香堂(채향당)조용한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단청 처마 밑으로 한 여인이 걸어 들어온다.그녀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문지방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절을 올렸다.“정채향, 采香堂(채향당)의 첫 아침을 맞이하옵니다.”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바람은 문틈을 스치고, 솥 안의 물은 조용히 온기를 품기 시작했다.그날부터 채향은 매일, 채향당의 작은 부엌에서 국을 끓였다.처소로 따로 하사된 조리 공간은 궁의 중심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그 국은 여전히 궁의 여러 구석으로 퍼져 나갔다.궁녀 하나가 목을 움츠린 채 속삭였다.“어제 상궁님께서… 저녁상을 전부 내려놓으시고는 채향당에서 다시 받아오라 하셨답니다.”“그 국을… 먹지 않으면, 입맛이 돌아오질 않는다고…”국 하나가 궁을 뒤흔든다.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누적된 입맛의 기억이었다.운령은 침착하게 웃었다.“입은 정직하되, 궁의 중심은 입만으로 움직이지 않지요.”그녀는 곧바로 왕을 알현하겠다는 요청서를 올렸다.[청혼 계책서 乙차]왕세자빈 책봉에 있어 정식 혼례 절차 생략은 불가하오며,采香堂의 주인에 대한 예법상 검증이 요구되옵니다.그녀가 올린 글은 명확했다."국이 아무리 그립다 하여도, 예가 없으면 그릇조차 차릴 수 없사옵니다."왕은 서찰을 읽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채향이 사랑을 얻었다면, 이번엔 궁의 격에 답해야 할 차례이니라.”곧바로 왕은 새로운 명을 내렸다.“채향당의 주인 정채향은 내달 칠일, 궁중 식치 예경(禮經)을 받들 것.”‘궁중 식치 예경’ 궁중에서 음식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법도를 시험하는 궁중 고위 여인들에 대한 최종 시험.수라간 내시부터 상궁, 왕실 의녀까지지켜보는 공식 자리에서 정신과 음식을 함께 다루는 매우 어려운 절차였다.채향은 명을 받드는 문서를 받은 날,그것을 한동안 펴보지도 못한 채 조용히 두 손 안에 고이 쥐고만 있었다.그 밤, 채향당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그녀는 국이 아닌 약재를 씻고, 꽃잎을 고르고, 조용히 바람을 맞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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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상처 난 마음을 다스리는 국

상궁전(尙宮殿) 대청.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자리에,오늘은 신선한 찬 바람조차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세 필의 발이 삼문 안으로 들자, 궁의 궁녀와 내관, 상궁과 의녀,그리고 국왕의 명을 받은 대신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그날의 주제는 ‘상처 난 이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국.’식(食)은 마음을 치유하고, 예(禮)는 국으로 진심을 전한다.채향은 采香堂에서 올린 국솥 하나와 작은 찻상 하나만을 앞에 두고 서 있었다.그녀의 앞엔 책봉을 지켜보는 중전,차가운 시선을 머금은 운령,그리고 세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는 이현이 있었다.“정채향, 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다스릴 사람은 상심한 마음이라 하였다.”궁의 의녀가 말끝을 맺자, 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예, 이 국은 마음에 물든 독을 풀기 위해 끓였사옵니다.”그녀가 손을 뻗자, 앞에 놓인 작은 그릇에서 서서히 연한 김이 올라왔다.맑은 고추씨와 매실청으로 부드럽게 잡내를 없앤 연육, 그리고 곱게 채 썬 뿌리채소.그러나, 이 국의 진짜 중심은 자소엽(紫蘇葉) 한 장이었다.자소엽은 위장의 한기를 풀고, 불안한 숨결을 다독이는 약초였다.그녀는 국을 한 숟가락 떠 눈앞에 앉은 ‘환자’에게 건넸다.그 인물은 뜻밖에도, 중전의 측근으로 이름을 떨치던 상궁, 윤 상궁이었다.그녀는 작년, 자신의 아들을 병으로 잃고 그 후로 국을 들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다.모든 궁인들이 숨을 죽인 채 그 숟가락이 입으로 향하는 걸 바라봤다.윤 상궁은 처음엔 아무 말 없이 국을 입 안에 머금었다.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숟가락을 뜨자 그녀의 눈에 천천히 물기가 고였다.“…이 국엔… 슬픔을 말하지 않는데…내 눈물이 먼저 반응하옵니다…”그 말 한 마디에 대청 안의 공기는 조용히 바뀌었다.상처를 말로 덮는 것이 아닌, 입속에서 퍼지는 국의 온도로 덮는다는 것.그녀는 ‘음식으로 치유하는 자격’을, 그 한 그릇으로 증명하고 있었다.그 순간, 운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허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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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밥상의 끝, 전쟁이 시작되옵니다

采香堂, 세자의 손으로 하사된 국화등이 늦은 밤에도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채향은 여전히 조용히 솥 앞에 앉아 있었다.궁중 식치 예경이 끝난 다음 날이었지만, 그녀의 하루는 변한 것이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고명을 다듬고, 오늘도 국을 끓였다.그러나 수라간 나인들은 달랐다.채향이 다시 궁 안으로 들어온 뒤로 그녀의 존재는 나날이 커졌다.“采香당에서 온 된장국, 오늘은 왕비마마께서도 한 그릇 들으셨답니다.”“찬방 상궁마마가 직접 찾아오셨다더군요. 이젠 수라간 윗사람들도 고개를 숙이신다 하오.”그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진한 국물 속 간장의 향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스며들었다.그때였다. 采香堂의 문 밖에서 조용히 발걸음 하나가 멈췄다.“정채향 낭자, 계시오?”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낯익은 울림이었다.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는 고운령이었다.그녀는 전날의 패배를 안고도 여전히 단정하게 곧은 허리를 지니고 있었다.“낭자의 솥에서 피어난 향이 이제 궁을 넘어, 조정의 입까지 닿았다고 들었사옵니다.”채향은 잠시 손을 멈추고,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고운령 낭자, 무엇을 찾으러 오셨사옵니까.”운령은 조용히 미소지었다.“정채향. 당신이 국을 끓이는 사이, 나는 사람을 움직였사옵니다.”그녀가 손에 들고 온 것은 작은 봉함문서 하나였다.『어윤부 김 대감, 백상 이후 식치의 간섭 가능성 제안문.』『의금부 도승지, 세자빈 내정자의 과거 병력 기록 열람 요청.』“이 궁은 정을 잊지 않사옵니다. 허나 이 궁은, 과거 또한 쉽게 묻지 않사옵니다.”그 말은, ‘당신의 자리’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경고였다.채향은 문서를 받지 않은 채 말했다.“그대는… 여전히 상보다 사람을 먼저 가르려 하시는군요.”고운령의 눈빛에 짧은 쉼이 스쳤다.“…나는 그대가 부럽소.”“…사람이 국을 내면, 궁이 흔들리는 이 현실이.”그러고는, 뒷걸음질치며 한 마디를 더 남겼다.“정채향, 그대는 전쟁을 국으로 시작하였으니 그 끝 또한 상 위에서 마주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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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맛만은 내가 정하겠사옵니다

采香堂의 국솥 위로, 쌀겨를 넣은 맑은 육수가 천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정채향은 평소와 다름없는 손길로 채소를 씻고, 고명을 준비했지만그녀의 손끝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방 안의 공기는 조용했지만, 문 밖의 궁은 술렁이고 있었다.세자빈 책봉 이후, 조정 대신들이 하나둘 의견서를 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采香堂 정채향, 본디 환관의 딸로 알려져 있으나 본적과 호적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왕세자빈의 자격이 미달하다는 이견이 있사옵니다.」-형조판서 상주문 中채향은 그 문서를 직접 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자신이 평민의 이름으로 태어났다는 것,본래 궁 안에 들어올 수조차 없는 신분이었음을.이현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그는 아버지인 왕을 찾아가 문서를 탁자에 내던졌다.“아비 없는 자라서 세자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그대가 보고 드신 국에는 그 어떤 귀한 이름도 필요치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왕은 말없이 문서를 뒤집었다.“이현, 그대가 그녀를 지키고자 한다면, 정치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느니라.”“정치란 입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이현은 말없이 물러났지만, 그날 밤, 그는 몰래 채향의 처소를 찾았다.采香堂은 여전히 불빛을 품고 있었고, 그녀는 조용히 찬장을 정리하다 그를 맞이했다.“채향… 세상이 그대를 함부로 불러도, 나는 그대가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걸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소.”그녀는 조용히 웃었다.“세상은 국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사옵니다. 다만, 그 맛을 기억하옵지.”“그것이면 족하옵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아니오, 이제는 다르오. 그대는 이제, 내 이름을 함께 써야 하는 사람이오.”“그대가 짊어질 무게는 단지 국솥이 아니라 이 나라의 시선이오.”그 말 위에 채향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그 무게, 제가 견딜 수 있도록 맛을 내보겠사옵니다.”다음 날, 조정은 더 시끄러워졌다.의금부에서 ‘정채향의 출신’을 조사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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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핏줄이 아니라 국이오, 제가 전할 것은

그날 궁 안은 한낮임에도 햇살보다 무거운 말들로 가득 찼다.「采香堂의 정채향, 본래 정필우의 외손녀이며, 정필우는 15년 전 반역죄로 멸문당한 자이니 그 후손이 왕세자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국법의 모욕이옵니다.」그 상소는 조정의 열다섯 명 대신이 연명으로 올린 것이었다.그리고 그 서두엔, 운령이 조용히 이름을 더했다.그 소문은 궁을 넘어 사대문 안 장안에까지 번져갔고,采香堂의 문 앞엔 국을 찾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멈추었다.그날, 채향은 수라간 어느 구석에서 하얀 쌀겨를 씻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에선 물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采香堂의 상궁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낭자… 이 일, 알고 계셨사옵니까.”채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머니께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너는 절대 누구의 이름으로도 살지 말거라’였사옵니다.”“그래서 전, 제 손으로 국을 끓이고 제 입으로 이름을 말했을 뿐이옵니다.”상궁은 눈을 떨구며 속삭였다.“허나, 그리 되면… 세자빈 자리는 물거품이오…”채향은 조용히 미소지었다.“세자빈이 아니어도, 그 분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족하옵니다.”그리고는 다시 솥을 향해 걸어갔다.그날 그녀가 끓인 국엔, 다시마도 없고, 고기도 없었다.다만, 물 한 그릇과 볶은 보리만이 담겼다.그 국은 오래 끓일수록 진한 색을 머금었다.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국은 ‘피를 말하지 않는 국’이었다.그날 밤, 采香堂으로 들어선 이현은 그릇을 앞에 두고 묻지 않았다.그는 다만 숟가락을 들어 국을 마셨고, 천천히 말했다.“…이 국은, 입에선 맑으나, 목에서 울컥이오.”채향은 고개를 떨궜다.“…그것은, 저하께서 제 피를 걱정하시기 때문이옵니다.”“…허나, 제가 드리고픈 것은 피가 아닌 국이옵니다.”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후, 그녀의 손등을 잡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채향, 그대가 반역자의 손녀라 한들, 내 국을 끓여준 이는 오직 그대 하나뿐이오.”“핏줄이란, 그대가 선택한 것이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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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가장 먼저 식는 건 사람의 마음이다

전각의 문이 처음으로 활짝 열렸다.사방이 비단으로 덮인 장막 너머, 빛이 하나둘 채향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그날은 왕세자빈으로서의 첫 행차.비록 국빈급의 외빈이 머무는 큰 자리는 아니었지만, 궁 안의 모든 시선은 한 방향으로 쏠리고 있었다.정채향, 그녀는 더 이상 수라간의 국을 끓이는 궁녀가 아니었다.비단치마를 걸치고, 자수를 두른 옥색 단령의 곡선을 따라정제된 호흡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누구보다도 ‘왕세자빈’에 가까웠다.그러나, 그녀의 발 아래에 깔린 자리는 아직도 매끄럽지 못했다.“저 아이가 진정 반역자의 손녀라더군.”“핏줄은 씻긴 어려운 것인데, 궁이 어찌 저토록 쉽게 이름을 허하였는지 원…”“그러게, 궁의 법도가 어쩌다 저리 흐려졌을꼬.”속삭이는 소리들은 한낱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옷자락을 찔러왔다.그러나 채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항상 ‘국을 내던 부엌’이 아닌, 이제는 그 국을 받아줄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식 행차 후, 채향은 중궁전에 들었다.중전 서화령은 그녀를 정좌에 앉히고 조용히 바라보았다.“채향. 이제는 이름이 하나 늘었으니,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하겠지요.”“…국을 끓일 땐 손끝이 중요하다 하였는데, 사람을 다스릴 땐 눈빛이 먼저예요.”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서화령은 부드럽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저 국솥은 아직도 식지 않았겠지요?”“하지만 명심하세요. 궁중에서 가장 먼저 식는 건 국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랍니다.”그 말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왕비로서 전하는 조용한 시험과도 같았다.그날 밤, 采香堂으로 돌아온 채향은 오랜만에 국을 끓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작은 돌솥 안에 밥을 지어, 직접 곱게 쪄낸 고사리를 올리고 된장국 한 그릇을 준비했다.그것은 잔치를 위한 밥상이 아닌 ‘하루를 위로하는 밥상’이었다.그녀는 그 밥상을 들고 이현의 처소로 향했다.달빛 아래를 걸어온 그 길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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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온기가 꺼지기 전, 제 이름으로 끓여야 할 국이 있어옵니다

采香堂의 나무문이 오랜만에 조용히 닫혔다.그날, 그녀는 외부인의 발길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궁중엔 다시 기묘한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정채향, 민가 시절 어느 지체 높은 외척에게 후원받은 바 있다 하더이다.''그 정성이 음식 솜씨를 높이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여인의 다른 재능 때문이었을까요.'처음엔 사소한 말이었다.그러나 궁은 사소함에 더 빠르게 물든다.그 말은 장독 속 염처럼 깊숙이 스며들어 궁인들의 눈빛을 비릿하게 만들고 있었다.채향은 말이 없었다.다만, 采香堂의 불빛을 더 뜨겁게 지폈다.그녀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국을 한 번에 두 솥 끓였다.하나는 전과 다름없는 방식으로,다른 하나는 오래된 방식으로가난했던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방식 그대로.그 국에는 국물이 맑지 않았다.불의 온도가 일정치 않았기에, 재료는 들쭉날쭉하고, 맛의 농도도 일정하지 않았다.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삶이었다.그 국이야말로 ‘정채향’이라는 이름을 말해주는 유일한 기록이었다.이현은 그날 밤, 采香堂을 찾았다.문을 열고 들어온 그에게 채향은 국솥 앞에서 흠뻑 젖은 소매를 걷은 채, 작은 웃음을 보였다.“저하, 오늘은… 속을 보호하는 국을 끓이고 있사옵니다.”이현은 곁에 앉아 그 국 냄새를 맡았다.“무언가, 익숙한 냄새로군요.”“예. 어릴 적,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국이옵니다.”“…속은 부대끼고, 마음은 시리던 날에 그저 조용히 끓여주시던 국.”“…비록 맑지 않으나, 저는 그 국을 먹고 살았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그녀의 눈동자는 탁한 국물보다도 맑았다.“그대가 지금 끓이고 있는 것은, 그대의 과거인가요?”채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이 궁이 제게 물어옵니다. 무엇으로 살았느냐고.”“…그렇다면, 제 손으로 답을 끓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이현은 아무 말 없이 국 한 그릇을 받아 마셨다.국은 짰고, 조금은 들큰했으며, 중간중간 풀리지 않은 된장이 씹혔다.그러나 그 국은 진심이었다.그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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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밭이 아닌 마음을 가는 시절에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중궁 후원은 은은한 향내로 가득 찼다.오동나무로 짠 높은 상과, 궁중 자수를 두른 천 위에 왕실 예법에 따라 배치된 반찬들.그러나 그 어느 상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쏠린 곳은 단 하나의 국이었다.그 국은 맑지 않았다.들깨로 고운 막을 덮은 듯 흐릿했고,그 위에 조용히 얹힌 묵은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수한 기색이었다.상궁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빈마마, 이 국의 이름은 무엇이옵니까?”채향은 고요한 눈빛으로 답했다.“속풀이 국이옵니다.”“…사람이 오랜 풍파를 지나 새로운 입을 가지려 할 때, 비로소 그 속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국이옵지요.”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잔잔한 물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조용히 번져갔다.좌우의 여인들 후궁과 대전 상궁, 그리고 외명부의 부인들까지 하나둘 시선을 모았다.‘속풀이 국’이라.궁중 정찬상 위에 오를 법한 이름은 아니었다.게다가, 그 맛은 짜지 않았다.맵지도, 기름지지도 않았다.그러나 첫 숟갈을 입에 머금는 순간, 그 국은 혀끝에서 퍼지지 않고, 목으로 곧장 흘러내렸다.그리고 한참 뒤 속에서, 조용히 퍼지는 열기.“…….”“이 국… 참, 별것 없는데…”“…그런데 어찌 이리… 따뜻할꼬.”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짧은 속삭임은 그날 오찬례의 모든 분위기를 바꾸었다.화령 왕비는 끝까지 표정을 잃지 않은 채 국 한 숟갈을 들고 천천히 삼켰다.그리고는 곁에 앉은 채향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대가 만든 국은 누구의 입보다, 누구의 마음을 먼저 움직이는구나.”“…한 입이면 족하다. 그대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는.”그 순간, 궁은 달라졌다.그 어떤 대신의 상소도, 그 어떤 가계도도 그 국의 맛 하나에 자신의 입을 닫았다.그날 해질 무렵, 이현은 뒷편 정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서 있다가, 그녀가 다가오자 고요히 물었다.“오늘 그대가 낸 국, 사람들이 기억하겠소.”“…그러나 나는 그대가 국을 올린 그 마음을 더 오래 기억하겠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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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가문이 없어도 국은 끓사옵니다

“작은 솥 하나, 쌀뜨물과 말린 무말랭이, 그리고 들기름을 준비해 주세요.”잠시 후, 밭 가장자리에 작은 화로가 놓이고 솥이 얹혔다.그녀는 자신의 옷소매를 걷고 직접 들기름을 둘러 무말랭이를 볶아내기 시작했다.채향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기름에 닿은 무에서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고, 그 냄새는 은근하게 사람들을 끌어당겼다.그리고 볶은 무에 쌀뜨물을 부어 끓이자 작고 은은한 탁함을 머금은 국이 하나 태어났다.“빈마마, 이 국의 이름은 무엇이옵니까?”그녀는 그제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손을 씻는 국’이옵니다.”“…흙 묻은 손으로 먹어도, 흙의 향을 탓하지 않고 그 맛을 감싸는 국이옵니다.”“…사람의 마음에도, 이런 국 하나쯤은 있어야 하옵니다.”그 국을 받아든 이들은 처음엔 머뭇거리다 한입 두입, 국을 들이켰고곧 누군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반 위, 한 그릇의 국이 지금껏 얼마나 많은 편견을 식혀냈는지를 사람들은 말없이 느껴야만 했다.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고운령의 사촌, 한운택은 작게 속삭였다.“…대체 어디서 이런 여자가 났단 말이냐.”그는 곧 서신 하나를 꺼내 궁으로 보내는 준비를 했다.“국 하나에 사람을 얻는 여자. 그러나 그녀가 외척을 얻지 못한다면 그 맛은 곧 쓴맛으로 변할 것이오.”채향은 몰랐다. 그 국 하나가 궁의 외척 회합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그러나 그녀는 또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밭의 흙과 사람의 마음은 모두 손으로 고르는 것이다.’그날 밤, 采香堂으로 돌아온 그녀는 작은 무말랭이 한 줌을 덜어 곱게 말려 장독 위에 걸었다.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였다.“내일은, 또 어떤 흙을 안고 살아야 할까…”“…허나, 흙을 씻는 것도, 국을 끓이는 것도 모두 내 손이면 족하옵니다.”초여름의 궁은 햇살보다 시선이 더 따가운 계절이었다.오찬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궁중엔 또 다른 초대장이 돌기 시작했다.‘외척 연회’-명문가 사대부의 여식들과 외명부 부인들,그리고 왕실과 혈연으로 엮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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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 국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采香堂의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이른 아침 햇살이 덜 익은 감잎처럼 기울어지는 각도로 스며들었다.채향은 그 빛 아래서 종이에 적힌 작은 이름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이름은 평소 조용히 곁을 지키던 소윤 상궁의 것이었다.“빈마마… 드디어 잡혔사옵니다.”그날 새벽, 중전 측 궁녀 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소윤 상궁, 고운령 측과 왕실 기록을 따로 열람하며 빈마마의 ‘문서’를 열람했더이다.”“…그 기록이 어떤 용도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오나, 내명부엔 이미 소문이 퍼졌사옵니다.”채향은 말이 없었다. 입술 끝을 꼭 다문 채, 오히려 조용히 솥을 꺼내 들었다.궁중에서 ‘문서를 뒤졌다는 것’은 사람을 치기 위함이다. 아니면, 그 사람을 넘겨주기 위함이다.소윤 상궁은, 채향이 처음 궁에 들어와 상 하나를 들였을 때부터 곁에 있었던 이다.부드러운 눈매, 조용한 손,그리고 한 번도 다그치지 않던 입.그녀의 배신이 진실인지 혹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하지만 채향은, 그날 자신을 위한 국이 아닌 ‘소윤을 위한 국’을 끓이기로 했다.그녀는 오래된 찬장 속에서 조선 팔도의 말린 나물을 꺼냈다.강원도의 묵은 고사리, 남도의 가지채, 서해의 말린 톳과 북쪽 들기름에 절인 시래기까지.그 모든 나물은 한데 어우러지면 색도, 질감도 제각각이었고 쉽게 융합되지 않았다.그러나 채향은 그것이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다 같지 않은 사람들, 다 다르게 숨 쉬는 궁중의 숨결,그 모든 것을 섞어내어 하나의 국으로 끓이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국은 오래 끓였다. 어느 국보다도 오래.물이 졸고, 향이 고이고, 마침내 국물이 어둑하게 빛날 무렵 采香堂의 문을 두드린 이는 다름 아닌 소윤 상궁이었다.그녀의 얼굴은 무언가에 시달린 사람처럼 희고 긴장에 질려 있었다.“빈… 마마…”채향은 말없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전… 전, 그런 의도가 아니었사옵니다…”“…고운령 대감 쪽에서, 그저 확인만 해달라 하였고, 저는 마마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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