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궁 안은 한낮임에도 햇살보다 무거운 말들로 가득 찼다.「采香堂의 정채향, 본래 정필우의 외손녀이며, 정필우는 15년 전 반역죄로 멸문당한 자이니 그 후손이 왕세자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국법의 모욕이옵니다.」그 상소는 조정의 열다섯 명 대신이 연명으로 올린 것이었다.그리고 그 서두엔, 운령이 조용히 이름을 더했다.그 소문은 궁을 넘어 사대문 안 장안에까지 번져갔고,采香堂의 문 앞엔 국을 찾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멈추었다.그날, 채향은 수라간 어느 구석에서 하얀 쌀겨를 씻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에선 물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采香堂의 상궁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낭자… 이 일, 알고 계셨사옵니까.”채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머니께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이 ‘너는 절대 누구의 이름으로도 살지 말거라’였사옵니다.”“그래서 전, 제 손으로 국을 끓이고 제 입으로 이름을 말했을 뿐이옵니다.”상궁은 눈을 떨구며 속삭였다.“허나, 그리 되면… 세자빈 자리는 물거품이오…”채향은 조용히 미소지었다.“세자빈이 아니어도, 그 분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족하옵니다.”그리고는 다시 솥을 향해 걸어갔다.그날 그녀가 끓인 국엔, 다시마도 없고, 고기도 없었다.다만, 물 한 그릇과 볶은 보리만이 담겼다.그 국은 오래 끓일수록 진한 색을 머금었다.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국은 ‘피를 말하지 않는 국’이었다.그날 밤, 采香堂으로 들어선 이현은 그릇을 앞에 두고 묻지 않았다.그는 다만 숟가락을 들어 국을 마셨고, 천천히 말했다.“…이 국은, 입에선 맑으나, 목에서 울컥이오.”채향은 고개를 떨궜다.“…그것은, 저하께서 제 피를 걱정하시기 때문이옵니다.”“…허나, 제가 드리고픈 것은 피가 아닌 국이옵니다.”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후, 그녀의 손등을 잡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채향, 그대가 반역자의 손녀라 한들, 내 국을 끓여준 이는 오직 그대 하나뿐이오.”“핏줄이란, 그대가 선택한 것이 아
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