บททั้งหมดของ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บทที่ 41 - บทที่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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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제 손과 향으로 선 사람입니다

아침이 오기 전, 궁은 늘 고요하다.허나 그날은 달랐다. 간밤에 흘러나온 이야기 하나가,궁의 담벼락을 넘어 거리까지 번져 나가고 있었다.정채향, 천인의 피.그리고 그것은 세자빈 자리를 감당할 수 없는 출신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모든 입에 담기고 있었다.수라간의 항아리 뚜껑을 여는 손이 멈췄다.기름 냄비 위로 붓던 손이 떨렸다.그러나 채향은 움직였다.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끝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낭자, 왕께서 찾으신다 하옵니다.”“…….”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대전의 기둥 너머, 왕은 묵직한 눈빛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이현도, 중전도, 대신들도 자리에 있었다.서화령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그 표정엔 연민도, 조롱도 없이 단지 ‘승자의 여유’만이 번져 있었다.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정채향. 그대는 궁녀였고 수라간의 손이었다.허나 지금은… 세자의 혼례를 앞두고 있는 자요. 허니 대의 뿌리를, 이 자리에서 말하라.”궁궐은 조용했다. 바람 한 줄기조차 머물기를 멈춘 듯,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다.그 안에는 눈물도 분노도 없었다.그저 진실이 있었다.“예, 전하. 소첩의 어미는…장을 돌며 삶을 이어온 여인이었사옵니다.”웅성임. 중전의 부채가 천천히 내려졌다.“아비는 어미께서 끝내 말씀하시지 않으셨사옵니다.헌데 들리는 말에… 조정의 피를 이은 자라 하옵디다.”이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멈췄다.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허나, 전하. 소첩은 제 피로 수라를 지은 적 없사옵니다.제 손끝은 언제나 깨끗했고, 칼은 재료만을 베었으며,불은 욕심이 아닌 온기를 끌어내기 위해 피웠사옵니다.”“저는 누구의 딸이 아니라 제 입으로, 손으로, 향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선 사람입니다.”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중전은 미간을 찌푸렸다.서화령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그 순간, 이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전하. 소첩의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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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그대의 입맛을 묻지 않겠사옵니다.

한 도사가 작고 검은 약재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그건, 채향이 밤마다 별궁에서 몰래 말려두던 중국산 약초 가루였다.강호에서 온 사신의 소화를 돕기 위해 그녀가 고심 끝에 섞은 것이었다.“그건… 장해를 풀고 기를 도우는 약재이옵니다. 독이 아니옵니다.”“허면 어찌 이를 숨겨 말리지 않았느냐.”“저하의 위장이 약하셔서… 사람들 몰래 더 나은 배합을 연구하고 있었사옵니다.”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궁 안에서는 진심보다 의도가 먼저 칼끝에 올랐다.의금부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중전은 그걸 왕의 자리 위에 올려두었다.“진실이 아니더라도, 의심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자격은 박탈되나이다.”그 소식을 들은 이현은 한밤중, 직접 수라간으로 달려왔다.채향은 여전히 솥 앞에 앉아, 말려둔 약재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다.“도사들이 이곳을 뒤졌다는 것이 사실이오?”“예, 저하.”“무슨 말도 없이, 내 명도 없이!”“……그들도 명을 받았겠지요. 제 자격을 의심하는 명이었을 뿐.”그녀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헌데, 저하.”“…….”“저는 지금까지 저의 수라가 저하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바랐사옵니다.허나 이제는… 이 나라의 숨을 지켜야 할 때가 된 것 같사옵니다.”이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등이, 눈빛이 더 이상 궁녀도, 여인도 아닌 하나의 ‘주인’처럼 보였다.“그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그녀는 칼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내일 새벽, 수라간의 큰 솥을 열겠습니다. 조정 대신들을 위한 국 하나를 지을 것입니다.”“입맛으로 가르치겠습니다. 이 나라의 향이 천인의 것이 아닌, 백성의 것임을.”그녀의 말에, 이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대는… 날 지키는 맛이 아니라, 이 나라를 숨 쉬게 하는 맛으로 거듭났소.”그날 밤, 화령은 몰래 누군가를 불러 말했다.“내일 그 아이의 솥에 진짜 독을 풀어넣어라.”“……소녀, 그리 되면”“그 솥은 이제, 세자빈의 자격을 결정하는 재판장이 될 것이다.”그 말은, 조용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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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람은 향으로 진심을 삼킨다

어느새 봄이 궁의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다.매화가 피기 전의 한기,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온도처럼궁 안의 공기는 불안한 정적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왕의 명으로 감찰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고,그날 밤 수라간을 몰래 드나든 하인은 서화령의 내관 출신으로 밝혀졌다.그의 손에서 발견된 작은 유리병에는 맹독이 아닌 중추신경을 잠시 마비시키는 약제가 들어 있었다.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세자빈 후보를 독으로 몰아넣으려 한 시도”는 궁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화령은 죄를 부인했다. 중전 또한 딸의 행동이 아니라며 거리를 두었다.허나 왕은 아무 말 없이 서화령의 출입을 당분간 금지한다는 어명을 내렸다.그날, 중궁전. 화령은 무릎 꿇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중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바람이 문창을 흔들고, 향이 짙게 피어오르다 이내 꺼졌다.“왜… 왜 항상 저 계집의 입에는 칼이 서리지 않사옵니까.”“저는 한 번도… 사람을 해치려 한 적 없사옵니다. 그저, 세자의 곁이… 제 것이라 믿었을 뿐이온데…”중전은 조용히 웃었다.“사람을 베는 칼은 손에 쥐는 것이 아니란다.입으로 드는 숟가락일 수도 있고, 제대로 깎인 말 한마디일 수도 있지.”화령은 떨리는 손끝으로 무릎을 쓸어내렸다.“저 아이의 수라는 사람을 살리옵니다.헌데 저는… 그 수라를 먹을수록, 저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사옵니다.”중전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그 아이의 뿌리를 잘라야겠지.”“…….”“그대가 먹어치우지 못한 진심이라면, 진심이 자라지 못하도록 흙을 바꾸면 된다.”그날 밤, 중전은 극비리에 정채향의 생모가 머물렀던 마을로 사람을 보냈다.그 목적은 단 하나. 채향의 ‘출생 기록’ 자체를 없애거나, 조작된 기록으로 덮는 것.다음날, 수라간은 평소보다 조용했다.어제의 국 솥은 닦였고, 채향은 다시 작은 국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그녀 앞에는 평소 함께 일하던 궁녀들이 아닌, 감찰의 감시 하에 파견된 궁녀들이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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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단지 저하의 세상에서 숨 쉬고 싶었던 사람일 뿐이옵니다

비가 내렸다. 며칠째 마르지 못한 궁의 담장,습기를 머금은 회랑의 나무결은 마치 오래된 눈물이 말라붙지 못한 채 쌓여가는 것 같았다.채향은 수라간을 오래 떠나지 않았다.이젠 궁녀들이 오가는 시간도 잊은 듯,매일 새벽 혼자 솥 앞에 앉아 무언가를 다듬고, 썰고, 말리고, 다시 볶았다.그녀가 그토록 긴 시간을 들여 만든 수라는,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아주 조용하고 수줍은’기억의 국'이었다.무는 많이 삶아 말캉했지만 흐물거리지 않았고,마른 미역은 기름 한 방울 없이 볶은 뒤 다시 삶아 넣었다.표고는 하루를 말린 뒤, 육수에 불리고, 마지막으로 흰 된장을 풀어 가장 깊고 담백한 맑은 국물 위에 얹었다.그녀는 그걸 ‘밥상’이 아닌 ‘위로’라 부르고 싶었다.그날, 왕은 오랜만에 아무 궁인도 들이지 않은 채 대전에서 혼자 식사를 하기로 했다.채향이 만든 국은 묵묵히 쟁반 위에 올려졌고, 그것을 들고 들어간 이는 이현이었다.“폐하, 수라 들려 하옵니다.”왕은 책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오늘은 누가 지은 것이냐.”“정채향이 지은, ‘기억의 국’이라 하옵니다.”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기억이라…”그 한마디를 되뇌고는 조용히 수라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숟가락이 국에 닿고, 국물이 혀에 닿는 순간.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숟가락, 그리고 또 한 숟가락.표정은 없었으나, 젓가락이 멈추지 않았다.이현은 그 곁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허나, 이내 왕의 손이 멈췄다.그리고 한참 후,숟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내려앉을 때쯤, 왕은 조용히 말했다.“이 국엔… 말이 없구나.”“…….”“허나, 말 없는 사람만이 제 어미를… 그리워하며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야.”왕은 수라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이 향은… 내 어미가 병석에 누웠을 때 궁녀들이 내게 끓여주던 국과 같구나.”“너무 짜지도, 너무 밍밍하지도 않았지. 다만… 이 국을 먹고 나면 그날은 울지 않았다.”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폐하… 채향 낭자는 이 국을 그저 진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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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말을 지우거든, 입맛을 지우시오. 

“정채향이라… 그 아이, 어릴 적 우물가 옆에서 자주 놀았지.”“어미는 소문이 좀 있었소. 어느 양반댁 도령이 반해 가리킨 이름이라 하였고, 그러나 끝내 그 도령은 돌아오지 않았소이다.”“그리하여, 그 아이는 남의 집 짚신을 꿰매며 컸지요.”이현은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허면 그 어미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작은 묘 하나를 가리켰다.‘무명(無名). 단지, 향기 좋았던 여인으로 기억되기를.’묘비엔 이름도 없고, 오직 향이라는 글자만 남아 있었다.이현은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읊조렸다.“그대는, 그 어미의 향을 이어 이 궁 안에 숨을 퍼뜨렸던 사람이오.”“허니, 피가 없다고 하여 그 숨조차 없었다 말하지는 못할 것이오.”그는 작은 흙을 한 줌 뜨고, 그 안에 떨어진 봄꽃 한 조각을 조심스레 접었다.그 시각, 궁에서는 중전이 내관을 불러 은밀히 전하고 있었다.“왕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지 않다.”“헌데 사람들은 ‘진실’이 아닌 ‘기록’을 따라 믿는다.”“기록을 지우지 못한다면, 그 아이의 입을 막아라.”채향은 수라간 뒷마루에 앉아 있었다.어느새 해는 기울고, 저녁이 되도록 누구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감았다.그때, 작은 발소리 하나가 들려왔다.“낭자.”채향은 눈을 떴다.궁녀 하나가 그녀를 위해 따뜻한 물 한 사발을 들고 와 앉았다.“이 물에는… 아무 향도 없사옵니다. 헌데, 낭자께선 그 향 없음을 그리워하실 줄 알았사옵니다.”채향은 그 물을 받아 들었다.“고맙습니다. 그리운 것은… 늘 가장 단순한 것이지요.”그리고 그 밤, 이현이 돌아왔다.손에는 한 줌의 흙과 봄꽃이 있었다.그는 말없이 그것을 채향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대의 뿌리는… 내가 보고 왔소.”“그곳엔 이름이 없었으나, 분명 향이 있었소.”채향은 눈을 감았다.그 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그녀의 솥 안에는 분명 그 향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수라간 앞 정원에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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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궁의 기억이 되어가는 솥

“이 아이는 누구의 딸이 아닐지언정 조선의 궁 안에서 나의 하루를 바꾼 여인이니라.”“이름은 장부에 없을지언정 내 입에, 내 혀에, 그 숨결이 각인되었으니 이제 지워지지 않을 것이야.”중전은 그 말을 들었다.곁에 있던 내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리고 서화령은…그날 처음으로 입맛을 잃었다.그날 밤, 채향은 수라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별궁의 작은 정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그 곁에 이현이 다가왔다.“오늘의 국은 내가 평생에 가장 오래 기억할 맛이오.”채향은 미소 지었다.“그렇다면, 그 기억이 다하지 않을 때까지…제가 곁에 있어도 되겠사옵니까.”이현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그 손은 더는 떨리지 않았다.그 순간, 저 멀리 어느 회랑 끝에선 중전의 서찰이 다시금 손에 쥐어졌다.“진심은 약하나, 기록은 남는다.우리가 잃는 건 이름일지라도, 그녀가 잃을 것은 궁 그 자체일 것이다.”그러나 그 글이 채 다 퍼지기 전에 이미 ‘채향’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입맛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조정의 대신 하나가 말했다.“그 여인의 솥에서 피어난 국, 내 평생 다시 그 맛을 볼 수 있을까.”그리고 다른 이가 대답했다.“그 여인의 솥은 궁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어.”밤은 고요했으나, 어딘가 기이하게 낮았다.기운은 잠잠했지만, 공기엔 서늘한 숨결이 감돌았다.매화는 만개했지만, 그 향조차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었다.화령은 중궁전 안에서 홀로 거울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여전히 아름다웠다. 눈동자도 반짝였고, 입술은 곱게 칠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입꼬리는 이제 웃음이 아닌 갈증이 담긴 선으로만 휘어져 있었다.거울 속 자신에게 중얼였다.“내가 진 것이 아니야. 그 여자가 잠시 궁의 입맛이 되었을 뿐. 입맛은 언제든 변하는 것이니까.”“하물며, 그 입맛이 천한 피에서 비롯되었다면 더더욱 오래가지 않지.”그 순간, 내관 하나가 들이닥쳤다.“영의정 대감께서 밀서를 전하셨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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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진심 앞에서 입을 다문 자들…

대전의 아침은 유난히 적막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 대신들은 이미 자리에 들어앉아 있었고, 왕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치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으려는 무거운 공기가 회랑을 타고 흘렀다.중전 화령은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궁중 예법에 맞춰 고운 보랏빛 비단 치마를 차려 입었다.입꼬리엔 미소를 걸었으되, 그 미소 아래에는 매화꽃잎처럼 얇은 칼날이 감추어져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폐하. 중전으로서 감히 한 말씀 아뢰옵고자 하옵니다.”“하교하시옵소서.”왕이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지금 이 궁 안은 향기와 감정에 잠식되어 있사옵니다.허나 나라의 중심, 왕실의 위엄은 그 어떤 감정보다 무거운 것이라 사료되옵니다.”“세자빈 책봉은 감정이 아닌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옵니다. 그 기준은 피, 가문, 그리고 명분이외다.”그 말에 회의장은 잠시 조용해졌다.이현의 시선이 서서히 그녀를 향해 날카로워졌다.“중전의 말씀은 곧, 세자빈 후보의 자격을 부정하는 것이겠소?”“아니옵니다. 단지, 그 기준을 다시 되새기고자 함이외다.”화령은 조용히 웃었다.“폐하, 세자저하. 궁의 입맛은 늘 바뀌나이다. 허나 세자빈은 평생 나라의 어미가 되어야 하옵니다.”이현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허면 중전의 뜻은 정채향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보는 것이오?”“그 아이는 진심을 지녔사오나, 진심은 늘 권위 앞에서 약하오.”그 순간, 문이 열렸다. 채향이 조용히 입장했다.청연빛 치마 저고리, 머리는 단정히 틀었으되 장식 하나 없는 수수한 모습.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불초한 몸이, 부름 받지 않았으나 스스로 그 자리에 나아오고자 하옵니다.”왕이 시선을 들었다. 그 눈엔 흔들림도, 흥미도 없었다.다만, 듣고자 하는 고요한 기다림만이 있었다.“중전 마마의 말씀, 모두 옳사옵니다. 소인은 가문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나라의 어미라 불릴 그릇 또한 되지 못하옵니다.”“허나, 이 궁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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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대 없는 나라를 지킬 마음은 없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궁 안의 공기는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바람은 매화 가지를 흔들었고, 공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청명했으나,사람들의 눈빛은 어딘가 일렁이고 있었다.그날 아침, 왕은 일찍이 상단에서 들여온 중국산 비단을 펼치고 있었다.천의 색을 고르는 일이었으나, 그의 손길은 뜨뜻미지근했고, 시선은 먼 곳에 가 있었다.그 순간, 내관이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세자저하께서… 독대 요청을 하셨사옵니다.”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무릎 꿇은 채 왕의 앞에 앉아 있었다.“폐하.”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단했다.“신첩 정채향. 그녀를… 제 빈으로 삼고자 하나이다."그 말에 왕의 손이 천 위에서 멈췄다.그는 천천히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망설임은 없었고, 주저도, 계산도 없었다.“네가 감정으로 하는 말인지, 책임으로 하는 말인지 아비로서, 왕으로서 분간이 어렵구나.”이현은 그대로 대답했다.“둘 다이옵니다.”“감정이 먼저였고, 책임은 그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 뒤따른 것이옵니다.”왕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멀고, 또 묵직했다.“내가 아비가 아니었다면, 나라의 사직만을 생각했다면 그 아이를 벌써 궁 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허나, 그대의 그릇이 크다면, 그 아이 또한 그 그릇에 담길 그늘이 되어야 할 것이다.”그 말은 승낙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절도 아니었다.그 말은… ‘이제 너희가 증명하라’는 무거운 명령이었다.같은 시각. 화령은 조용히 중궁의 연회장을 준비시키고 있었다.잔치가 아니었다. 소문을 불러들이는 연회였고, 궁 안의 눈과 귀를 한곳으로 모으기 위한 장치였다.그녀는 나직하게 시녀에게 지시했다.“오늘 연회에는 간택 당시 탈락했던 사대부의 딸들을 초대하거라.”“그리고 저 여인의 침전에서 세자저하의 겉옷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우연히 흘러나가게 하거라.”그 말은 살처럼 얇고, 칼처럼 깊었다.그날 오후. 수라간에 쏟아진 시선은 이질적이었다.궁녀들의 눈은 노골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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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내가 사라지면 그분의 이름은 지켜질까요

새벽의 궁은 언제나 고요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서늘했다.차오르는 새벽달조차 연무 속에 묻힌 듯 흐릿했고,밤새 내린 이슬은 회랑 바닥에 얼룩진 발자국을 하나씩 새기고 있었다.그때, 대문 앞에 누군가의 낮은 외침이 들렸다.“이, 이게 뭐더냐!”호위군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경계하던 병사들은 눈을 부릅떴다.그리고 곧, 붉은빛 도는 곤색 겉옷 하나가 정문 현판 아래 정갈하게 접힌 채,세 겹의 끈으로 묶여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누군가 일부러,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겉옷 안쪽에는 이현의 이름을 상징하는 매화 문양이 놓여 있었고,소매 끝에는 분명히 궁녀용 비단 수가 엮인 하얀 실오라기가 박혀 있었다.그것은 단 한 장의 옷이었다.그러나 그 옷이 궁 안에 던진 파문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날카롭고도 빠르게 번져 나갔다.“세자저하의 옷이… 어찌…”“정채향 낭자라 하더이다, 그 침전 안에서 옷이 사라졌었다지요.”“설마… 잠자리까지…”“천한 궁녀가 세자저하를 유혹해…”궁은 입을 막지 않았다.오히려, 입을 벌리고 즐기고 있었다.향기롭던 이름은 순식간에 궁 안에 가장 불순한 상상으로 뒤덮였고, 진심은 곧 ‘간음’이란 말로 꺾여 버렸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수라간 뒤편 좁은 담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그녀의 손엔 작은 접시 하나가 들려 있었고,그 안에는 보리밥 한술과, 조선간장 몇 방울이 담긴 질박하고도 서늘한 한 끼가 놓여 있었다.아무도 먹지 않을 밥. 누구도 대령받지 않을 음식.그것은 오늘, 자신이 마지막으로 궁 안에 쏟는 ‘진심의 밥상’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이것은 내가 지은 죄이옵니다.”“저하를 사랑한 죄. 그 곁을 끝내 떠나지 못한 죄.그러니 이제, 그 죗값은 제가 사라짐으로써 갚겠사옵니다.”그 순간, 별궁의 뒤편 문이 열렸다.그리고 이현이, 거센 숨결을 몰아쉬며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의 눈은 타올랐고, 손엔 그 옷이 들려 있었다.정문에서 회수해 온,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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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내 하루를 지은 자에게

대전의 아침은 평소보다 이르게 밝았다.왕은 밤을 새웠다. 숨기지 않았다.잠들지 않은 눈으로 동이 터오는 창을 지켜보았고,자신이 등 돌려 묵인했던 세자의 사랑이 어떤 길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비로소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었다.그가 조용히 일으킨 손끝 아래, 내관이 조심스럽게 밀서를 올렸다.“서화령 마마의 외숙 가문. 남평윤씨의 집안에서 조달한‘봉제 내의’의 끈이 정문에 걸린 겉옷에 사용된 실과 유사하옵니다.”왕은 아무 말 없이 그 밀서를 불에 던졌다.다 타오르지 않은 잿더미가 붉은 숯을 남겼고, 그가 중얼거렸다.“눈을 감았기에 썩은 것이 아니다. 썩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은 것이었다.”같은 시각, 중궁의 연회장이 아닌 후원 깊은 정자에서 서화령은 또 다른 수를 놓고 있었다.고운 분을 바르며, 거울 앞에 선 그녀는 단정했다.예전과 다름없이, 조선 제일의 미모를 지닌 여인답게 우아했고,눈동자엔 미세한 초조조차 묻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궁 전체에 또 다른 독이 되어 퍼질 준비를 마쳤다.“정채향이… 태중에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이다.”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들은 이는 고개를 갸웃했고, 세 번 들은 이는 고개를 끄덕였으며,네 번째부턴 입이 아니라 눈빛이 먼저 수긍을 건넸다.“그래서였군. 그처럼 얼굴이 창백하더니.”“그리 피곤하더니, 입덧이라도 있었던 게지.”“세자저하의 옷을 품에 두었던 그 밤, 무언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니라.”이번엔 향이 아니었다. 소문은 눈보다 빠르게 번졌고,그 소문은 마치 독한 술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채향은 자신에게로 쏠리는 시선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수라간 안팎의 궁녀들마저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 그 작은 손끝조차 힐끗거렸다.이현은 그날 밤 채향의 침전으로 찾아왔다.문밖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조용히 서 있다가 마침내 들어섰다.채향은 아무 말 없이 국을 데우고 있었다.맵지 않고, 짜지 않은 단호박과 누룩간장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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