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Chapter 71 - Chapter 80

97 Chapters

71. 부서진 틈 사이로 스며드는 진심

내명부의 정자, 소원헌(小願軒). 소찬례는 그곳에서 조용히 열렸다.소원헌은 궁의 가장 안쪽, 빛이 닿지 않는 중정에 자리한 정자였다.햇빛은 하루 중 겨우 두 시각 정도만 머물다 사라졌고, 그곳에선 항상 나무 그늘의 색이 더 짙었다.그날, 그 자리에 초대된 이들은 중전 서화령의 측근부터 고운령의 외사촌인 명휘당 부인까지.겉으론 조용했지만, 소찬례는 이미 ‘세자빈 정채향을 향한 경계심’으로 가득한 자리였다.“빈마마께선 요즘, 국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고들 하더이다.”“허면 오늘은… 그 마음을 어떻게 푸실 생각이신지요?”명휘당 부인이 은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말의 안에는 ‘누군가를 감싸지 말고, 차라리 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채향은 말없이 앞에 놓인 찬합을 열었다.그 안엔 한눈에도 투박해 보이는 두부탕이 담겨 있었다.맑은 국물 위에 들기름에 살짝 지진 두부,그 위로 파채와 실고추를 곱게 얹었고 청간장으로 간을 가볍게 맞춘 국.하지만, 그 안엔 그녀의 ‘마음’이 아니라 ‘각오’가 담겨 있었다.“오늘 올리는 국은 ‘결백탕(潔白湯)’이라 하옵니다.”“…재료는 하얗고 부드러우나, 기름에 지지는 순간 모양이 깨지옵니다.”“…그 깨어진 틈에 국물이 스며들고, 비로소 입속에 감칠맛이 피어나옵니다.”명휘당 부인의 손이 잠시 멈췄다.채향은 그 시선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이 국은 누구의 결백을 증명하려 끓인 것이 아니옵니다.”“…다만, 누구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끓인 것도 아니옵니다.”“…모두가 모양을 유지하고 살 수는 없기에 우린 언젠가 부서지게 마련이옵니다.”그녀의 말은 순하되 단단했고, 부드럽되 날카로웠다.“허나 부서진 틈 사이로 진심이 스며들 수 있다면, 그 또한 한 그릇의 국이 될 수 있으리라 믿사옵니다.”그 말에 정자의 바람이 조용히 지나갔다.명휘당 부인은 조용히 국을 들이켰다.두부는 깨어졌고, 국물은 무심하게 맑았으나 그 맛은 깊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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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그대가 차린 상은 한 나라의 안온이었소

“채향. 그대는 궁에서 국으로 사람을 살렸소.”“…이제는 국으로 궁을 살릴 차례요.”그는 안에서 품고 있던 작은 봉투를 꺼냈다.그 안엔, 지금까지 채향이 궁 안팎으로 차린 모든 상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누가 먹었고, 언제 먹었고, 무엇을 남겼고, 무엇을 감쌌는지.그 국들엔 ‘맛’이 아니라 궁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내일 아침. 경연 뒤, 내가 이 국들의 기록을 전하께 올릴 것이오.”“…그대가 차린 상이 궁중의 정치보다 더 정직했다는 것을 그 입맛이 이 궁을 숨 쉬게 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소.”채향은 그 순간, 비로소 국을 끓이지 않아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조용히 일어섰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솥에 물을 붓고, 그 안에 초피잎을 띄웠다.“이 국은 아무도 먹지 않을 국이옵니다.”“…그저, 내일을 견디기 위해 제 마음을 달래는 국일 뿐.”“…헌데, 이 국마저 없었다면 전 아무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다시는 부서지지 않겠다는 한 사람의 결의였다. 그날 밤, 采香堂의 작은 솥에서는 쓸쓸하지만 깊은 향이 피어올랐다.초피의 잎은 조용히 퍼졌고, 그 국은 그녀의 마음을 데우는 단 하나의 불빛이 되었다.경복궁 근정전. 새벽 안개가 서릿발처럼 돌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가운데, 조정의 대신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들어섰다.정좌한 이현은 말없이 손 안에 쥔 봉투 하나를 내려다보았다.그 속엔 정채향이 차린 41개의 국, 26개의 정찬,8개의 궁중 회식 상차림,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약선상 한 그릇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전하께선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고,그날 경연의 첫 의제로 오른 것은 바로 ‘세자빈 교체에 관한 건’이었다.고운령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전하. 빈마마께선 명문가 출신이 아니옵니다.”“…세자의 가문을 잇기엔 핏줄도, 가풍도, 외척의 후광도 부족하옵니다.”“…왕실은 피로 이어지나, 빈궁은 격으로 유지되어야 하옵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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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어머니의 반찬첩과 하얀 된장국

서늘한 바람이 비단 발을 스치고 궁 안으로 가을이 스며들기 시작한 어느 아침.采香堂의 마루 끝에 정채향은 조용히 앉아 손 안의 작은 반찬첩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반찬첩은 낡고 오래된 것이었고, 한지엔 번진 먹물 자국이 여러 해를 말해주고 있었다.그것은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연회 상차림의 원고’였다.그녀는 그것을 한 장씩 넘기며 익숙하고도 낯선 재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능이버섯… 홍합 말림… 밤송이 절임…”어느 것 하나, 그저 보기에 아름답거나 귀한 것이라 쓰인 것이 없었다.모두가 계절을 기다려야 하며, 손이 많이 가고, 조용히 사람의 속을 달래는 음식들이었다.그날의 조정은 ‘명문 사대부와 외국 사신’을 함께 초청하는 왕실의 대연회, 추향연(秋香宴)을 공표했다.그리고 그 상차림을 주관할 이는 이제 정식으로 책봉된 왕세자빈 정채향이었다.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내명부는 소란스러워졌다.“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국빈 접대 상차림이라니…!”“빈마마께서야 솜씨야 뛰어나시다 하나, 왕실의 체통이란 게 있지 않소이까!”그러나 그 비난에 답하지 않은 이는 정작 채향 본인이었다.그녀는 그날부터 采香堂에 은밀히 시식 연회를 열기 시작했다.궁중의 작은 요리 상궁들, 각 처소의 궁녀들,조용히 그녀의 국을 먹어온 병약한 군관들까지.그녀는 그들에게 먼저 상을 차렸다.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가장 오래 머물던 재료,가장 오래 기억되는 향을 적어두었다.그녀의 방식은 ‘왕실’이 아니라 사람의 국물에서 출발한 상차림이었다.이현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채향. 이 상은 그대의 이름을 넘어 조선의 얼굴이 될 수도 있소.”“…두렵진 않소?”채향은 살짝 웃었다.“두려워서, 더 정직한 맛으로 채우려 하옵니다.”“…사람은 향을 속일 수 없사오니 입안의 기억은, 그 어떤 격식보다 오래 남사옵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루에 하나씩 상을 지었다.첫째 날엔 강황 쌀을 누룩에 절인 황향주,둘째 날엔 가을 전어 살만 발라 찐 쌈찜,셋째 날엔 버섯과 매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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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이 손끝이 빈궁을 짓는 날이 옵니다

“이 국 안에는 다듬은 무, 겨울 들깨, 밤새 불에 올려 맑게 우려낸 육수가 들어 있사옵니다.”“…아무리 추운 날에도 이 국 하나면 속이 녹고, 사람의 얼굴에 온기가 돌았사옵니다.”“우리는 이 국으로 이웃을 대접하고, 장독 속에서 자란 인내를 나누었사옵니다.”“…그 속엔 격식보다 깊은 삶이 담겨 있사옵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나, 뜻밖에도 숟가락을 든 이는 또 다른 사신이었다.그는 국을 한 술 뜬 후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입에 들어가자 집의 향이 났소.”“…향신료도, 사치도 없는데 이상하게…그리움이 밀려들었소이다.”그 말에 사람들의 손이 하나 둘 움직였다.그리고 연회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그 하얀 국은 가장 먼저 그릇이 비워진 상이 되었다.고운령은 조용히 이현을 바라보다 비단 부채를 펴며 중얼거렸다.“입 하나로 세상을 살리는 여인이라…”“…허나 그 국이 늘 사람을 살릴 수만은 없을 터.”그 말은, 이 연회가 끝나도 그녀를 향한 견제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순간, 이현은 조용히 채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 손에는 국그릇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엔 국물이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채향. 이 국은, 조선의 품이었다.”“…그대는 오늘, 말 대신 입으로 나라의 격을 증명했소.”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연회가 끝난 그날 밤, 采香堂에 돌아온 그녀는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그 안엔 오로지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집의 맛’그녀는 그 글귀를 조용히 벽에 붙였다.그 순간, 비로소 그녀는 알았다.자신이 지켜야 할 국은 궁의 국이 아니라, 집의 온기에서 피어난 한 그릇이라는 것을.采香堂엔 아침 해가 들기도 전에 무거운 기척이 흘렀다.그날, 내명부 소속 모든 상궁들의 명단이 정식으로 채향에게 전달된 날이었다.그 명단에는 이름, 나이, 출신, 봉직 년수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고, 어떤 이는 십 년 넘게 궁에 있으면서 그저 찬모의 그릇이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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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변명보다 나은 해명의 국

이른 새벽, 경복궁의 내전에는 상소문이 들이닥쳤다.그 봉투들은 하나같이 진한 붉은 인장을 찍은 채 내명부의 명예를 지킨다는 제목 아래 놓여 있었다.“세자빈의 독단이 도를 넘었사옵니다.”“빈궁의 살림을 자신의 사사로움으로 바꾸고, 궁중 질서를 흔들며 상궁을 좌지우지하였사옵니다.”서명된 이름 사이엔 익숙한 이름도, 낯선 얼굴도 섞여 있었지만 그 중심엔 고운령이 있었다.그는 궁의 전통을 이유로 삼았지만,그 전통은 결국 빈궁의 손을 다시 묶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했다.소식을 전해 들은 채향은 采香堂의 마루 끝에 앉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앞엔, 막 지어낸 콩비지국이 놓여 있었고, 솥뚜껑을 열자 하얗고 고소한 향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그 국은 부드럽고 따스했으나, 그날의 바람은 유난히 싸늘했다.“빈마마… 이대로 계시겠사옵니까?”“…해명이라도 하셔야…”소윤 상궁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하지만 채향은 국을 그릇에 뜬 뒤 작은 찬합에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사람은 밥상을 보고 마음을 돌리기도 하옵니다.”“…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는 그 밥을 짓는 손이 무엇을 품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옵니다.”“전 제 손으로 지은 이 국이 변명보다 나은 해명이 되기를 바랄 뿐이옵니다.”그녀는 그 국을 담은 찬합을 내전과 외전, 그리고 중궁전까지 궁중의 높고 낮은 처소마다 돌렸다.같은 국, 같은 온도, 같은 마음.그 국이 놓인 자리마다 조용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빈궁에서 보낸 국이라 하더이다.”“그저 된장에 콩비지를 풀었을 뿐인데, 왜 이리 속이 따뜻하냐더이다.”이현은 그 국이 놓인 그릇을 내려다보며 화령에게 조용히 말했다.“이제 국이 궁의 논쟁을 막는 날이 오다니.”화령은 웃었다.“맛은 위로를 주고, 그 위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요.”“…채향이 정한 질서는 말보다 오래가겠지요.”그날 저녁, 조정엔 새로운 어명이 내려졌다.‘세자빈 정채향이 구성한 내명부의 살림과 인사 구성이 왕실 내전의 질서를 다스리는 기준이 되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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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국은 죄를 덮지 않사오나, 마음은 덮을 수 있사옵니다

그녀는 이름도 자리를 묻지 않았고, 그저 손을 덜덜 떨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채향은 웃지 않았다.다만 깊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때, 그 상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궁녀, 단이는 미묘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그녀는 고운령 측에서 密命을 받은 자였다.“빈궁에서 무슨 음식이 오르며, 누구를 곁에 들이는지 그 모든 걸 말하라.”단이는 처음엔 두려웠고, 그 후엔 혼란스러웠고, 지금은… 마음이 흔들렸다.그녀가 이곳에서 본 것은 권력이 아니라, 손으로 국을 짓는 여인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그날 밤, 연회가 끝나고 모두 물러간 뒤,단이는 조심스레 채향의 방 앞에 섰다. 그 손엔 운령이 건넨 봉투가 쥐어져 있었고, 심장은 뚝뚝 떨리고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채향은 등불 하나만 켜둔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녀는 단이를 보자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오늘, 다들 입을 통해 마음을 나누었으니…”“…그대도 그 잔으로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보시옵소서.”단이는 봉투를 내려두었다.“…마마. 저… 폐하께서 아시면 안 되는…”그녀는 더 말하지 못했다.그저 울었고, 채향은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사람은 죄를 짓기도, 마음을 돌리기도 하옵니다.”“…헌데 국이란, 죄의 입에도 따뜻할 수 있어야 하옵니다.”그 말에, 단이는 봉투를 찢었다.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이 국의 곁에서 살고 싶사옵니다.”채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부터 단이의 손엔 국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그녀는 이제, 채향의 곁에서 하루에 한 그릇씩 국을 배워가기 시작했다.背叛이 아니라, 국으로 맺은 충심의 시작이었다.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采香堂의 마루 끝엔 낯선 기척이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고, 그 문 앞에는 뜻밖에도 이현이 서 있었다.그는 군복도 아니고, 의관도 아니며, 그저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였다.“…오늘은, 궁의 주인이 아닌 사내로 왔소.”채향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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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낯선 입에 머문 국, 조선을 살리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采香堂의 마루 끝엔 낯선 기척이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고, 그 문 앞에는 뜻밖에도 이현이 서 있었다.그는 군복도 아니고, 의관도 아니며, 그저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였다.“…오늘은 궁의 주인이 아닌 사내로 왔소.”채향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나는… 그 연회를 봤소이다.”“…그 상에 올라온 국, 그 국을 앞에 두고 울던 궁녀…”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그 국 하나로, 사람이 제 이름을 찾고, 제 손을 쓸 수 있다는 걸…”“…내 생애 처음 본 일이었소.”그 말에, 채향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허나… 죄송하옵니다.”“…그 상은 높은 이께 올리기엔 너무 작고 초라한 국이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대가 빈궁에서 지은 국은 조선 어느 국보다 크고 깊었소이다.”“…내 비록 국정을 논하고, 전장을 살피는 사내라 하나”“…입 하나에 담긴 그리움의 무게를 감히 넘보진 못하겠소.”그 말은 처음이었다.이현이 스스로 빈궁의 국 앞에 자신을 낮춘 순간이었다.그날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그 속엔 이전과는 다른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그러나, 그 저녁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정무각에 고운령이 직접 올린 비밀 상소가 도착한 것이다.‘세자빈 정채향은 내명부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그 아비 정윤백이 지난날 외척의 죄로 유배되었음을 숨기고 왕실의 혈통에 흠을 남기려 하였사옵니다.’그 상소는 명확했다.채향의 아비는 조선 선왕 시절, 금군의 식량을 착복했다는 죄로 유배된 자였고, 그 죄는 한 번도 공적으로 용서받은 적 없는 죄목이었다.조정은 흔들렸고, 내명부는 술렁였으며, 민심도 조용히 돌아서기 시작했다.采香堂에 도착한 이 소식을 들은 순간, 채향은 더는 피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찬방으로 걸어 들어갔다.그곳에서 쌀과 된장, 무, 그리고 묵은지를 꺼냈다.“오늘은 ‘속풀이국’을 지을 것이옵니다.”“…속을 앓는 자들이 많사오니, 이 국이 그들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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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기름지지 않은데 고소하고, 향이 없는 듯 깊은 이 국이 어디선가 본인도 모르게 입 안 가득 퍼져 있었다.그는 찬합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입이 거절하지 않았소.”“…그것은 이국의 음식이 아니라, 몸이 기억한 맛이었소.”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이 국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누구의 몸에든 스미기를 바란 국이옵니다.”그 순간, 연회의 공기는 달라졌다.사신은 찬합을 비우고 난 후, 정중히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이 빈궁은 조선의 입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이해하는 솥을 가졌소이다.”그 말은 연회장을 채운 모든 대신에게 하나의 외교적 선언과도 같았다.이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사람의 국은 국경을 넘을 수 있소.”그날 오후, 운령은 자신이 준비한 상소를 찢었다.그 속엔 ‘빈궁의 무능’이라는 글귀가 사라지지 않는 붓으로 씌어 있었지만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采香堂엔 저녁 볕이 들었다.채향은 다시 찬방 앞에 앉아 천천히 들깨를 볶았다.그 고소한 향은 오늘만큼은, 조선을 넘어 사람의 마음 속까지 퍼지고 있었다.采香堂엔 깊은 밤이 깃들고 있었다.궁 전체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북만국의 사신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찬방 앞, 채향은 망설이다가 남은 들깻국을 다시 데우고 있었다.그 국은 더 이상 조정을 움직일 일도 없고, 누군가의 검증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다만, 오늘 하루 자신이 살아 있음에 작은 위안을 삼기 위한 국일 뿐.그때,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하지만 오늘의 이현은 세자의 품계도, 왕세자전의 위엄도 없었다.그는 연회 때 입었던 흰 옷 그대로,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오늘은… 무엇을 데우고 계시오?”채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대답했다.“식은 국이옵니다.”“…하지만 식었어도, 속을 데울 수 있는 밤이 있사오니”“…그 밤을 위하여, 다시 데우고 있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곁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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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采香堂의 창문 사이로 해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 빛은 불처럼 타오르지 않고, 솥 안의 온기처럼 천천히 고였으며,창호지를 타고 두 사람의 어깨에 나란히 내려앉았다.채향은 눈을 떴다. 곁엔 이현이 있었다.그는 의자에 기대어 잠든 채였고, 그 손엔 아직도 채향이 밤새 덮어준 홑이불 끝자락이 쥐어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한밤중 내내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조용한 맹세 같았다.채향은 그의 손끝을 조심스레 쓸었다.“…이현.”그 이름은 처음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이현은 눈을 떴다.“벌써 새벽이오?”“아니옵니다. 이제 아침이 옵니다.”“…하지만 이 아침은 처음으로 그대 곁에서 맞이한 아침이옵니다.”이현은 조용히 웃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이제는 내 아침이 그대의 국으로 시작되기를 바라오.”그 짧은 대화는 어떤 서약보다 고요하고 강했다.그러나 그 순간, 采香堂 문 앞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닿았다.소윤 상궁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세자저하… 아닙니다, 폐하. 궁 밖 외궁에서 사가의 정계와 일부 대신들이‘책봉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준비 중이라 하옵니다.”이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외궁… 고운령이 드디어 마지막 칼을 빼들었군.”채향은 문득 멈칫했다.“…폐하의 자리를, 다시 뒤흔들려는 것이옵니까?”“그렇소.”“…이번엔 그대가 아닌, 나를 무너뜨려 궁의 기반 자체를 흔들 생각이겠지.”이현은 조용히 일어섰다.“하지만, 이번엔 국도 정무도, 그대와 함께 감당하겠소.”그날 오후, 운령의 사가와 관련된 외궁 대신들의 모임이 비밀리에 열린다는 소식이 입수됐다.이현은 채향에게 조용히 말했다.“采香堂에서 국을 차리시오.”“…허나 이번엔, 궁 안이 아닌 밖에서 먹일 국이오.”채향은 눈을 크게 떴다.“밖이라니… 사가의 문을 열고 나간다는 말씀이시옵니까?”“조선의 국이, 조선 궁 안에만 머물 수는 없소.”“…그대의 국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번엔—조선을 살릴 수 있지 않겠소?”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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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말보다 먼저 입을 적시는 국

조정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낮의 바람보다 더 빠르게 방향을 틀고 있었다.사람들은 말을 아꼈다.하지만 눈빛은 이현을 향했고,빈궁 정채향의 손끝에서 나오는 국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사실은 더 이상 숨겨질 수 없는 진실이었다.고운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그녀는 방 안 깊숙한 찬장 속, 오래도록 봉인되어 있던 작은 서찰 상자를 꺼냈다.그 상자 안에는, 삼십여 년 전의 붉은 인장이 찍힌 한 장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그 봉투는 ‘열지 말 것’이라 적혀 있었고, 누군가의 피와 함께 묻혀 있었다.“…이제야, 그 마지막 맛을 꺼내야 할 때로구나.”그녀는 서찰을 천천히 꺼냈다.그 속에는, 한 명의 이름과, 왕실의 피줄을 의심케 하는 출생 기록이 붓글씨로 또렷이 남겨져 있었다.고운령은 손끝을 떨며 그 서찰을 덮었다.“이 글씨 하나면, 이현도, 채향도, 모두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사람의 국이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피로 쓰인 글씨 앞에선 차가울 수밖에 없지.”그녀는 사가의 안마당을 걷기 시작했다.그 걸음은 조용했고, 그 얼굴에는 오랜 세월 감추어온분노와 애증이 섞인 독기가 서려 있었다.한편, 궁 안의 采香堂. 채향은 다시 국을 끓이고 있었다.오늘의 국은 미역과 두부,그리고 소금 한 줌으로만 맛을 낸 속을 달래는 국이었다.“사람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 국을 찾는다 했사옵니다.”“…오늘은 왠지, 그 말이 떠오르옵니다.”그녀의 옆에서 이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은 생각이오.”그는 찬합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고운령이 움직였소.”“…이번엔, 피를 쥐고.”채향은 눈을 들었다.“피…라 하시면…”“왕실의 오래된 기록을 손에 넣었소.”“…그 기록이 열리면,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그 말에 채향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녀는 오래 생각하듯 말없이 솥을 저었다.그리고 국을 작은 그릇에 담아, 이현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속이 쓰릴 때는, 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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