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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무너진 감각

칼릭스의 눈동자가 흐려졌다.엘리제는 그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봤다. 맛을 되찾아가던 사람이 다시 무미의 문턱으로 밀려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표정이 아니었다.반응이었다.그는 엘리제의 손을 놓았다.그 손끝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마치 붙잡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엘리제의 심장이 내려앉았다.“공작님.”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푸른 촛불에서 완성 원액 향이 더 진하게 흘러나왔다. 이번엔 연회장 전체가 아니라, 칼릭스 주변으로만 흐르도록 계산된 장치였다. 황태후는 그의 감각을 다시 닫으려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그를 다시 조용한 칼로 만들기 위해.엘리제가 움직였다.“첫 숨! 칼릭스 쪽으로!”마리와 베른이 동시에 움직였다. 베른은 은그릇에 남은 첫 숨 향을 가져왔고, 마리는 젖은 천을 들고 칼릭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칼릭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의 손이 검 손잡이에 닿았다.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셰프님…….”“다가가지 마.”엘리제는 낮게 말했다.칼릭스의 감각이 닫히고 있다. 그 상태에서 그는 자신을 보호하려 할 수도, 공격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완성 원액은 감정과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그에게 가장 깊이 새겨진 반응은 전투였다.황태후가 조용히 말했다.“보아라. 결국 그는 내 식탁으로 돌아온다.”엘리제는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공작님.”칼릭스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그 눈에는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내 목소리 들려요?”칼릭스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소리.”“네. 제 목소리요.”“멀다.”엘리제의 목이 조였다.그는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맛도, 향도, 감정도.칼릭스가 낮게 중얼거렸다.“불쾌함이…… 사라진다.”그 말이 엘리제를 더 무섭게 했다.불쾌함마저 사라지는 것.그건 편안함이 아니었다.죽은 물처럼 가라앉는 감각이었다.엘리제는 자신의 손목에 묶인 맑은 숨 천을 풀었다. 칼릭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베른이 낮게 말했다.“셰프,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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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미식 재판

완성 원액 촛대가 봉인되자, 연회는 더 이상 연회가 아니었다.그것은 재판이 되었다.식탁 위에는 접시 대신 증거가 놓였다. 푸른 심지가 남은 촛대, 향 전달용 은혜의 빵, 붉은 소스, 백설분이 섞인 디저트 샘플, 구휼 창고 장부 사본, 북부 보급로 포대 조각, 그리고 마리의 기록판.헬리온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오래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된 것은 단순한 연회 사고가 아니다.”황태후는 여전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식탁은 무너지고 있었다.대공은 신전 사제와 귀족 의회 기록관을 불러 증거 목록을 확인하게 했다. 아델라인은 황녀의 이름으로 증언 절차를 열었다. 평민 대표와 귀족 대표, 황실 주방 관계자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왔다.마리가 기록판을 들고 서 있었다.손은 떨렸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검수의 물 후 단맛 잔향을 호소한 시식자 다수. 첫 숨 이후 증상 완화. 은혜의 빵 향 전달체 확인. 붉은 소스 완성 원액 반응. 숨쉬는 빵 섭취 후 입안 답답함 완화 증언 다수.”헬리온 대공이 물었다.“그 기록은 누가 작성했나.”마리는 고개를 들었다.“마리. 블레이크 공작가 주방 견습 요리사이자, 합동 식탁 검수 기록 담당입니다.”한때 하녀라 불리던 아이가, 이제 의회와 황실 앞에서 자신의 직함을 말했다.엘리제는 조용히 웃었다.칼릭스도 마리를 바라보았다.“정확한 기록이다.”그 한마디에 마리의 눈이 붉어졌다.그러나 울지는 않았다.다음은 유나였다.그녀는 은혜의 빵 원형을 만들도록 강요받았다고 증언했다. 자신이 만든 것은 구휼용 부드러운 빵이었지만, 황태후 측에서 감각 둔화 조제액을 넣어 향 전달체로 바꾸었다고 말했다.그 다음은 테른.황실 주방 보조였던 그는 먹으면 조용해지는 빵을 만들기 싫어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입막음당할 뻔했다고 증언했다.세나와 니아, 루와 미나의 보호자, 북부 마부까지.증언은 이어졌다.황태후는 그 모든 말을 들으며 조용했다.그 고요함은 더 이상 품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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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무미의 벌

황태후가 완성 원액을 삼킨 순간, 연회장은 얼어붙었다.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황태후 세레니아는 늘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접시에 약을 섞고, 향을 깔고, 수프를 검수하게 하고, 빵에 고요를 넣었다. 그녀 자신은 언제나 식탁 밖에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는 스스로 잔을 들었다.엘리제가 달려갔지만, 황태후는 이미 삼킨 뒤였다.“전하!”신전 사제가 외쳤다.황태후는 잔을 내려놓았다.처음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다.그녀는 여전히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손도 떨리지 않았고, 눈빛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품격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러나 엘리제는 냄새를 맡았다.진한 월영초.달그늘꽃.흑회향.그리고 사람의 감각이 안쪽에서 무너지는 냄새.“왜 그걸…….”엘리제가 낮게 물었다.황태후는 그녀를 보았다.“너희가 나를 심판하느니, 내가 나를 완성하는 편이 낫다.”“완성이 아니라 붕괴예요.”황태후는 웃었다.“내게 감정은 오래전부터 필요 없었다.”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다.하지만 그 고요함이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었다. 단어 사이의 온도가 사라졌다. 분노도, 조롱도, 자존심도 얇아졌다. 마치 누군가 목소리에서 맛을 빼내는 것 같았다.칼릭스가 낮게 말했다.“그만둬라.”황태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너는 돌아왔구나.”“그래.”“아쉽구나.”칼릭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나는 아쉽지 않다.”그 말에 황태후는 미소 지으려 했다.하지만 입가가 움직이다 멈췄다.엘리제는 그 변화를 보았다.감정 반응이 끊기고 있다.완성 원액은 다른 사람을 침묵시키는 데 쓰이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고농도로 직접 삼키면 어떻게 될까. 감각이 닫히고, 감정이 흐려지고, 마지막에는 맛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황태후는 자신이 만든 무미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물 주세요. 아니, 맑은 숨은 너무 강해. 먼저 희석한 산미.”엘리제가 본능적으로 말했다.베른이 움직이려 했지만, 황태후가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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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새 주방

황태후의 권한 정지는 다음 날 새벽 공식 공문으로 내려왔다.황실 주방, 의관단, 향료고, 구휼 창고, 북부 보급로 관련 모든 기록이 봉인되었다. 황태후 직속 관리인들은 조사 대상이 되었고, 신전과 귀족 의회, 블레이크 공작가가 임시 감시권을 나눠 맡았다.제국은 흔들렸다.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다.오히려 너무 오래 조용했던 곳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공작가 주방은 새벽부터 바빴다.엘리제는 긴 식탁 위에 문서와 재료를 함께 펼쳐놓았다. 한쪽에는 구휼식 표준안, 다른 한쪽에는 숨쉬는 빵 반죽, 또 다른 쪽에는 황실 주방 보조 명단이 놓였다.베른이 말했다.“셰프, 이건 주방 회의입니까, 행정 회의입니까?”“둘 다요.”“좋은 주방은 점점 일이 많아지는군요.”“나쁜 주방은 일을 숨기고요.”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마리는 정식 기록 담당 견습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붉혔지만, 기록 속도는 누구보다 빨랐다. 테른과 유나는 황실 주방 개혁 명단을 작성했다. 데릭은 신전 치료를 받으며 폐기 약재 유통로를 설명했다.르시앙은 황실 주방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그는 이제 다시 그곳에 들어가야 했다.황태후의 주방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야 할 주방으로.엘리제가 그에게 말했다.“도망칠 생각이면 지금 해요.”르시앙은 희미하게 웃었다.“도망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늦은 건 맞아요.”“늘 아프게 찌르시는군요.”“상한 부위라서요.”르시앙은 고개를 숙였다.“황실 주방을 다시 열겠습니다. 단, 이번에는 모든 재료 출처를 기록하겠습니다. 하급 보조의 손 상태도 매일 확인하겠습니다. 조제액과 향료는 신전 검수 없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엘리제는 그를 한참 보았다.“좋아요. 그리고 하나 더.”“무엇입니까?”“주방 사람 밥부터 제대로 먹여요.”르시앙은 잠시 굳었다.그건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황실 주방은 황실의 접시를 위해 움직였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손 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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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대심문의 날

황태후 세레니아의 대심문은 공개로 열렸다.완전한 공개는 아니었다. 황실의 체면이라는 이유로 일부 귀족과 평민 대표, 신전, 의회 기록관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황태후의 방 안에서 조용히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사람들이 보고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엘리제는 심문장에 들어서며 냄새를 맡았다.낡은 돌.잉크.밀랍.사람들의 긴장.그리고 아주 희미한 무향.황태후에게서 더 이상 강한 향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신전 격리 이후 모든 향료와 약재를 제한받았다. 완성 원액을 삼킨 후유증 때문인지 얼굴은 전보다 창백했고,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녀는 엘리제를 보았다.“왔구나.”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전하.”“내게 무엇을 먹이러 왔느냐.”“오늘은 제가 먹이는 날이 아닙니다. 듣는 날이죠.”황태후는 희미하게 웃었다.“너는 듣는 법도 배웠나.”“네. 좋은 주방은 말만 하지 않더라고요.”심문은 길었다.구휼 창고 기록.은혜의 빵 조제액.백설 케이크.완성 원액.칼릭스의 어린 시절 식단.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수프.오르딘, 데릭, 유나, 테른, 르시앙의 증언.증거들은 차례로 제시되었다.황태후는 대부분 부정하지 않았다.대신 해석을 바꾸려 했다.“나는 제국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전쟁 직후의 제국은 너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귀족들은 탐욕스러웠고, 평민들은 굶주렸고, 병사들은 밤마다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들을 잠재웠다.”헬리온 대공이 물었다.“그 대가로 감각을 빼앗았나.”황태후는 답했다.“감각은 때로 사치다.”그 말에 평민 대표들이 술렁였다.엘리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배고픈 사람에게 맛이 사치라는 말은, 배부른 사람이 제일 쉽게 하죠.”심문장이 조용해졌다.황태후는 엘리제를 보았다.“너는 맛을 너무 믿는구나.”“전하께서는 침묵을 너무 믿으셨고요.”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이번에는 황태후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그녀의 혀는 이제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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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무너진 백합

황태후의 백합 문장은 황궁 곳곳에서 내려졌다.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역사와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둘 곳은 남겨졌다. 그러나 구휼 창고, 황실 주방, 의관단, 향료고 문에서 그 문장이 떼어지는 것은 상징적인 일이었다.사람들은 그걸 보려고 모였다.말없이 보기도 했고, 속삭이기도 했다.“정말 내려가는군.”“저 문장만 보면 배가 아팠는데.”“조용히 해야 할 것 같았지.”엘리제는 그 말을 들으며 구휼 창고 앞에 섰다.칼릭스는 그녀 곁에 있었다.오늘은 공식적인 창고 재개방일이었다. 황태후 직속 관리인이 사라지고, 신전과 귀족 의회, 블레이크 공작가, 평민 대표가 함께 관리하는 첫날.창고 문에는 새로운 문장이 붙었다.백합도, 초승달도 아니었다.작은 그릇과 열린 손.마리가 그린 도안이었다.엘리제가 처음 봤을 때 너무 투박해서 웃음을 터뜨렸지만, 곧 가장 알맞은 문장이라는 걸 인정했다.그릇은 먹는 것.열린 손은 확인할 권리.베른이 말했다.“셰프, 오늘 첫 배급식은 내일의 수프와 숨쉬는 빵입니다.”“좋아요. 간은?”“약하게. 하지만 물처럼 흐리진 않게.”“완벽해요.”마리는 기록대를 맡았다.이제 그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예전 같으면 하녀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을 이들이, 이제는 곡물 상태를 물었다.“이 포대는 어디서 온 겁니까?”“북부 블레이크 창고에서 온 정상 곡물입니다. 신전 검수와 가열 반응을 마쳤습니다.”“물에 씻어볼 수 있소?”“네. 여기 그릇이 있습니다.”마리는 능숙하게 답했다.엘리제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이게 혁명이라면, 너무 조용하고 소박했다.사람들이 곡물을 씻어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이상하면 기록하는 것.하지만 황태후의 식탁은 바로 이런 작은 행위들을 막아왔던 것이다.그러니 이것도 혁명이 맞다.르시앙은 황실 주방 보조들을 데리고 왔다.그들은 숨쉬는 빵 배급을 도왔다. 예전에는 황실 연회용 접시만 만지던 손들이, 이제 구휼빵을 나르고 있었다. 몇몇은 아직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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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돌아온 주방

공작가 주방은 예전보다 훨씬 시끄러워졌다.마리가 기록지를 들고 뛰어다녔고, 베른은 견습들을 세 줄로 나누어 검수 훈련을 시켰다. 유나는 제빵대에서 누룩 상태를 확인했고, 테른은 황실 주방에서 온 보조들과 함께 숨쉬는 빵 반죽을 치댔다.르시앙은 한쪽에서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그 칼끝은 남을 압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재료를 정직하게 자르기 위한 칼이었다.엘리제는 주방 중앙에 서서 전체를 보았다.“너무 시끄럽네.”베른이 말했다.“좋은 주방은 시끄럽다고 하셨습니다.”“제가요?”“예.”“또 제가 좋은 말 했네요.”마리가 웃음을 참았다.아델라인은 새 미식 기관 설립안을 들고 찾아왔다.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황실 쪽에서는 제국 식탁관리청 같은 맛없는 이름을 밀고 있었고, 신전은 회복 식탁소를 제안했다. 엘리제는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너무 딱딱해요.”아델라인이 웃었다.“그럼 당신은 뭐라고 부르고 싶나요?”엘리제는 잠시 생각했다.“열린 식탁.”모두가 조용해졌다.마리가 작게 반복했다.“열린 식탁.”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직관적입니다.”르시앙도 말했다.“무겁지 않아서 좋군요.”칼릭스는 문가에서 들어오며 말했다.“네 이름답다.”엘리제는 그를 보았다.“제 이름이요?”“닫힌 것을 열고, 조용한 것을 말하게 하니까.”그 말에 엘리제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이 사람은 이제 칭찬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공작님.”“말해라.”“요즘 좀 위험하세요.”“나는 전보다 안전해졌다.”“그런 뜻이 아닌데요.”칼릭스는 진지하게 생각했다.아델라인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두 분은 언제쯤 상황을 구분하실 건가요?”엘리제가 바로 말했다.“황녀님, 지금 지금은 판을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음 식탁에서 확인하지.”“뭘요?”“위험하다는 말의 뜻을 묻는 것.”엘리제는 결국 얼굴을 돌렸다.주방 사람들이 못 들은 척했다.못 들은 척하는 실력이 모두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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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고백의 만찬

고백은 거창한 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황궁의 대연회장도, 귀족들이 가득한 무도회장도 아니었다. 공작가 주방 뒤편의 작은 식탁. 밤 근무를 마친 주방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뒤, 남은 것은 엘리제와 칼릭스, 그리고 갓 구운 작은 빵 두 개였다.엘리제는 빵을 식힘망에서 내려놓았다.“오늘은 무슨 빵이지?”칼릭스가 물었다.“돌아온 사람을 위한 빵이요.”“나는 매일 돌아오는데.”“그래서 매일 구울 수도 있어요.”엘리제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칼릭스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그럼 나는 매일 먹겠다.”그 말에 엘리제는 웃었다.“공작님, 예전엔 음식은 허기를 채우는 수단이라면서요.”“틀렸다.”“빠른 인정이네요.”“네가 여러 번 증명했다.”칼릭스는 빵을 들었다.그는 이제 음식을 급히 삼키지 않았다. 향을 맡고, 손의 온도를 확인하고, 천천히 찢었다. 빵껍질이 바삭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고소하다.”“다행이네요.”“그리고 기다린 맛이 난다.”엘리제는 멈칫했다.“그런 맛도 있어요?”“있다. 네가 없던 시간 뒤에 먹으면 알 수 있다.”그는 정말로 진지했다.엘리제는 시선을 피했다.“그렇게 말하면 제가 뭘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그대로.”“그대로가 제일 어렵다니까요.”칼릭스는 빵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엘리제.”“네.”“나는 네가 좋다.”그 말은 이미 들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전쟁 중의 고백도, 감각을 잃었다가 돌아온 뒤의 고백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해서 급하게 붙잡는 말도 아니었다. 조용한 주방에서,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 밤에, 그는 다시 말했다.“네가 만든 음식이 좋다. 네가 화내는 방식이 좋다. 네가 사람을 먹이고, 기록을 지키고, 맛없으면 맛없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엘리제의 손끝이 굳었다.칼릭스는 천천히 이어 말했다.“그리고 네가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좋다.”“그건 좋은 건가요?”“처음엔 싫었다. 지금은…… 살아 있는 맛이다.”엘리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슴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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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마지막 증언

신전 격리실은 조용했다.향이 없었다.그것이 가장 낯설었다. 황태후 세레니아가 있는 공간은 언제나 향으로 가득했다. 장미, 향초, 와인, 약초, 달콤한 빵, 차가운 고요. 그런데 지금 격리실에는 씻은 천과 맑은 물, 약한 약초 냄새만 있었다.황태후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엘리제는 그 모습을 보고도 동정하지 않았다. 동정은 너무 쉬운 감정이고, 이 사람에게는 너무 늦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이 여자는 많은 사람을 망가뜨렸다.그리고 이제 자신이 만든 무미 속에 앉아 있었다.칼릭스가 엘리제 곁에 섰다.황태후는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오늘도 함께구나.”칼릭스는 말했다.“그렇다.”“좋은 맛이더냐.”“좋다.”황태후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그녀는 아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좋다는 맛이 무엇인지, 함께라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이제 그녀에게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으니까.황태후는 엘리제를 보았다.“마지막 증언을 남기겠다.”신전 사제와 기록관이 준비했다.마리도 함께 있었다. 이제 그녀는 열린 식탁의 기록 담당으로, 황태후의 마지막 증언 사본을 맡게 되었다.황태후는 천천히 말했다.“나는 제국을 조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죄라면, 죄겠지.”엘리제는 바로 말했다.“죄입니다.”황태후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너는 여전히 빠르구나.”“맛없는 말은 오래 씹고 싶지 않아서요.”마리의 손이 움찔했지만, 기록은 멈추지 않았다.황태후는 창밖을 보았다.“나는 어린 황족들이 울지 않기를 바랐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밤마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를 바랐다. 귀족들이 욕망 때문에 서로를 물어뜯지 않기를 바랐다. 평민들이 굶주림 때문에 폭동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랐다.”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그래서 조용하게 만들었다.”칼릭스가 낮게 말했다.“울지 않는 것과 울 수 없는 것은 다르다.”황태후는 그를 보았다.“네가 그걸 말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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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마지막 숟가락

열린 식탁의 첫날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아침이었다.광장에는 긴 식탁들이 놓였다.황실의 대연회장처럼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식탁은 아니었다. 나무결이 그대로 보이는 긴 상, 서로 다른 의자들, 큰 냄비와 빵 바구니, 물그릇, 검수용 작은 팬. 귀족과 평민, 요리사와 견습, 기사와 아이들이 같은 줄에 섰다.처음엔 모두 어색했다.귀족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서성였고, 평민들은 너무 앞자리에 앉으면 혼날까 봐 주저했다. 황실 주방 보조들은 공작가 주방 사람들과 나란히 서는 걸 낯설어했다.엘리제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아주 좋아요.”베른이 물었다.“어색한데요.”“처음 열린 식탁이니까요. 익숙하면 그게 더 이상하죠.”마리는 첫 번째 식탁 기록판을 들고 있었다.제목은 그녀가 직접 썼다.[열린 식탁 1일차]그 아래에는 오늘의 메뉴가 적혀 있었다.첫 숨의 차.내일의 수프.선택의 고기.숨쉬는 빵.작은 단맛.그리고 마지막 줄.맛없으면 말할 것.엘리제는 그 마지막 줄을 보고 크게 웃었다.“마리, 이거 최고야.”마리는 얼굴이 붉어졌다.“중요한 사항이라서요.”“아주 중요하지.”칼릭스가 다가왔다.오늘 그는 공작의 예복이 아니라 단정한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위압감은 있었지만, 예전처럼 얼음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이제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았다.그는 엘리제 옆에 섰다.“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지.”“드시면 됩니다.”“그게 전부인가.”“맛을 말해주시면 더 좋고요.”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첫 숨의 차가 나갔다.사람들은 향을 맡고, 천천히 마셨다. 누군가는 맑다고 했고, 누군가는 조금 시다고 했다. 엘리제는 모두 맞는 말이라고 했다.내일의 수프가 나갔다.아이들은 뿌리채소를 골라냈다가 베른에게 들켰고, 베른은 아주 엄격하게 말했다.“한 숟가락은 먹어야 합니다.”아이들이 투덜거리자 마리가 기록판에 적었다.[어린이 반응. 뿌리채소 불만 다수.]엘리제는 웃다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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