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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북부 보급로

북부 보급로가 습격당했다는 보고는 새벽보다 먼저 공작가에 도착했다.전령은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왔다. 망토 끝은 그을렸고, 한쪽 소매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대문을 지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공작 전하. 검은솔 고개 쪽 제3수레대가 당했습니다. 식량 수레 셋이 소실됐고, 호위 기사 둘은 부상 상태입니다."엘리제는 조리대 위에 올려두었던 재활식 그릇을 내려놓았다.차갑게 식어가던 보리 수프의 향이 순간 멀어졌다.칼릭스의 얼굴은 굳었다."위치는.""수도 북서쪽 검은솔 고개입니다."베른이 지도를 펼쳤다. 북부로 이어지는 주요 보급로 중 하나였다. 공작가 창고에서 나간 곡물과 숨쉬는 빵 반죽용 밀가루가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마리는 기록판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수레들…… 신전 보호소와 북부 병영으로 가던 식량입니까?"전령은 고개를 숙였다."그렇습니다."엘리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황태후가 결국 북부를 건드렸다.은혜의 빵이 봉인되고, 숨쉬는 빵이 임시 구휼식으로 인정된 뒤였다. 백설 케이크로 귀족 사교계를 눌러보려던 수마저 흔들렸다. 그러자 황태후는 가장 단순하고 잔인한 방법을 택했다.먹을 것을 태운다.칼릭스가 낮게 말했다."출발한다."엘리제도 바로 앞치마 끈을 풀었다."저도 갑니다."그의 시선이 날아왔다."위험하다.""위험하니까 가야죠. 식량 수레가 불탔어요. 불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곡물이 어떤 상태였는지 봐야 합니다.""기사들이 확인할 수 있다.""기사들은 피 냄새와 발자국은 잘 보겠죠. 하지만 탄 곡물 냄새는 제가 더 잘 봅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칼릭스는 그녀를 막고 싶어 했다. 엘리제는 그걸 알았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불쾌함은 이제 그녀도 구분할 수 있었다. 분노와 걱정, 그리고 그녀가 또 자신을 위험한 식탁 위에 올릴까 봐 생긴 두려움.엘리제는 이번엔 먼저 말했다."혼자 가지 않을게요."칼릭스의 손끝이 멈췄다."약속합니다. 냄새를 봐야 할 땐 말하고 움직일게요. 증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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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폐목장

북서쪽 폐목장은 오래전에 버려진 곳이었다.한때는 군마를 기르던 장소라 했다. 그러나 북부 전쟁 이후 군마 수가 줄고, 보급로가 바뀌면서 목장은 버려졌다. 지금은 무너진 울타리와 빈 마구간, 잡초가 자란 마당만 남아 있었다.엘리제는 목장 입구에서 말없이 숨을 들이마셨다.찬 흙냄새.오래된 건초.젖은 나무.그리고 분명한 곡물 냄새."여기 있어요."칼릭스가 손을 들었다.기사들이 흩어졌다. 마리는 엘리제 뒤에서 기록판을 꺼냈고, 베른은 작은 등불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공기에는 불탄 냄새가 거의 없었다. 대신 새 포대와 젖은 포장지의 냄새가 있었다."오래 두려는 장소는 아니에요."엘리제가 말했다.베른이 물었다."왜 그렇게 보십니까?""곡물 냄새가 겉에만 있어요. 안쪽까지 배지 않았어요. 잠깐 옮겨놓고 다시 나르려던 거죠."마리가 적었다."임시 보관 장소. 재포장 가능성."칼릭스는 마구간 쪽을 바라보았다."안쪽 확인."기사 하나가 곧장 달려갔다.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포대 발견했습니다!"그들은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바닥에는 포대들이 쌓여 있었다. 일부는 블레이크 공작가 문장이 찍힌 정상 포대였다. 일부는 문장이 지워져 있었고, 다른 일부에는 검은 독수리 문장이 새로 찍혀 있었다.엘리제는 검은 독수리 문장의 잉크를 손끝으로 문질러 냄새를 맡았다."새 잉크예요. 오래된 조직 물건이 아닙니다."칼릭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위장.""네. 반황실 세력이 공작가 식량을 훔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거죠."베른이 포대 하나를 열었다."이건 정상 곡물입니다."다른 포대."이건 오염 곡물입니다."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상과 오염을 섞어서 다시 포장하면, 나중에 발견됐을 때 누가 봐도 공작가 식량이 오염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리고 문장은 반황실 세력. 황실은 빠져나가고요."마리는 빠르게 적었다."정상 포대, 오염 포대, 위조 문장. 반황실 세력 위장."그녀의 손은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엘리제는 그걸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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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절차의 칼

카르텐 백작은 이미 의회장을 장악하고 있었다.엘리제 일행이 도착했을 때, 의회장 안에는 귀족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소식은 수도보다 빨랐다. 북부 보급로 습격, 블레이크 공작가의 개입, 반황실 세력의 문장, 그리고 카르텐 백작의 고발.의회 분위기는 엘리제에게 좋지 않았다.몇몇 귀족은 불안한 얼굴로 칼릭스를 보았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블레이크 공작가가 반황실 세력과 내통했다는 말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북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완전히 흘려버리기 어려운 독이었다.카르텐은 중앙 발언대에 서 있었다.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는 자신이 절차의 편에 서 있다고 믿게 만드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말투에는 흠이 없고, 시선에는 확신이 있었다."블레이크 공작가는 지난 며칠간 황실 구휼 체계에 독단적으로 개입했습니다. 그 직후 북부 보급로에서 습격이 발생했고, 현장에는 반황실 세력의 문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입니까?"귀족들이 웅성거렸다.카르텐은 말을 이어갔다."엘리제 폰 라벤느 영애는 숨쉬는 빵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의 마음을 흔들었고, 이제 블레이크 공작가는 식량 문제를 명분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황실의 구휼권을 흔들고, 북부의 불안을 이용하는 행위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엘리제는 의회장 입구에서 그 말을 들으며 중얼거렸다."와. 요리 솜씨는 몰라도 말 섞는 솜씨는 있네."칼릭스의 얼굴은 차가웠다."끝까지 듣는다.""공작님이요?""네가 보관하라 했지."엘리제는 잠시 그를 보았다.정말 많이 변했다.예전의 칼릭스라면 이미 의회장의 공기를 갈라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분노를 알고, 그 분노를 쥔 채 기다렸다. 그녀가 증거를 꺼낼 순간을.헬리온 대공이 의장석에서 말했다."블레이크 공작. 반박할 증거가 있나."칼릭스가 앞으로 나섰다."있다."그 한마디에 의회장이 조용해졌다.엘리제와 베른, 마리가 증거 상자를 들고 중앙으로 들어섰다. 마리의 손은 하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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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병환의 방

황태후의 병환 소식은 수도 전체에 빠르게 퍼졌다.카르텐 백작이 구금된 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의회에서 황태후의 이름이 흘러나왔고, 절차의 방패였던 카르텐이 무너졌으며, 블레이크 공작가와 엘리제를 반역자로 몰던 판이 뒤집혔다.그 직후 황태후가 쓰러졌다.너무 빠르다.너무 절묘하다.그래서 의심스러웠다.엘리제는 공작가 주방에서 병환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황태후 세레니아. 갑작스러운 기력 저하. 식사 거부. 의관단 출입 제한. 외부 면회 금지. 황실은 병환을 이유로 조사 연기를 요청했다.엘리제의 시선이 한 문장에 멈췄다.식사 거부."식사 거부라."베른이 물었다."가짜 병환이라고 보십니까?""가짜일 수도 있고, 진짜일 수도 있어요.""진짜라면?""오래 월영초 계열을 다뤘으니 부작용이 왔을 수도 있죠. 아니면 일부러 단식 중이거나."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일부러 굶습니까?""동정심을 만들려고."엘리제는 보고서를 내려놓았다."황태후가 병들었다. 그런데 블레이크 공작가와 엘리제는 계속 몰아붙인다. 이런 흐름을 만들 수 있거든."칼릭스는 차갑게 말했다."그녀가 병들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맞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병든 노인을 몰아붙이는 그림을 싫어해요. 특히 황태후는 제국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잖아요."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치적으로는 아주 유효한 수입니다. 귀족 부인들 일부는 벌써 황태후를 동정하기 시작했어요. 카르텐 백작의 일은 백작 개인의 과잉 충성으로 돌리려는 움직임도 있고요."엘리제는 팔짱을 꼈다."그러니까 병문안을 가야 해요."칼릭스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위험하다.""네.""이번엔 황태후의 침실이다.""알아요.""그녀의 가장 깊은 식탁이다."엘리제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맞아요. 그래서 더 봐야죠."아델라인이 말했다."면회 금지라 들어가기 어렵습니다.""환자식 명목으로는요?""가능성을 만들 수는 있어요. 황태후께서 식사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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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세 번째 식탁

황태후의 마지막 기회라는 말은 하루 종일 공작가 주방 위에 매달려 있었다.엘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릭스가 안 된다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초대는 이전과 달랐다. 황태후가 가장 깊은 곳으로 부르는 자리였다. 장미 살롱도, 탄신 연회도, 의회도 아니었다.그녀의 침실.그녀의 약향.그녀의 맑지 않은 수프.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그리고 이번에는 엘리제도 그걸 인정했다.무섭다.그녀는 조리대 앞에 앉아 차갑게 식은 보리 수프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인이 가져온 황태후 침실의 수프. 맑게 만들었던 향은 죽어 있었고, 그 위에는 달고 차가운 잔향이 얹혀 있었다."자기 자신도 눌러놓는 사람."엘리제가 중얼거렸다.베른이 조용히 말했다."그렇다면 더 위험합니다.""네.""자신의 감각까지 눌러가며 버틴 사람은, 남의 고통을 더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베른의 분석은 점점 예리해졌다. 이제 그는 단순히 조리법만 따르는 주방장이 아니었다. 엘리제가 가르친 방식으로 식탁의 의미를 읽고 있었다.마리는 한쪽에서 황태후의 초대 문구를 베껴 적고 있었다.내 식탁에 앉을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그녀는 그 문장을 적다가 손을 멈췄다."셰프님.""응?""이건…… 정말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엘리제는 마리를 보았다.마리의 얼굴은 진지했다. 겁에 질린 게 아니라, 정말로 판단해서 말하는 얼굴이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전하께서 늘 사람을 혼자 있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병을 받았을 때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였어요. 데릭 씨도, 테른 씨도, 다 혼자일 때 무너졌습니다."엘리제는 조용해졌다.마리는 이어 말했다."셰프님은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그 말은 칼릭스의 말과 같았다.혼자 삼키지 마라.혼자 들어가지 마라.혼자 증명하지 마라.엘리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맞아."마리의 눈이 커졌다."그럼 안 가시는 겁니까?""아니."마리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셰프님!""혼자는 안 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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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낯선 기호

엘리제는 종이를 펼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황태후의 침실에서 가져온 그 종이는 얇았다. 오래된 양피지도 아니고, 황실 문서에 쓰는 고급지와도 달랐다. 어딘가에서 급히 베껴 적은 기록처럼 보였다.그러나 그 안의 기호는 분명했다.S.J.76도.저온.resting.이 세계의 누구도 쓸 리 없는 표기.엘리제는 조리대 앞에 서서 종이를 바라보았다. 주방의 불은 낮게 타고 있었고, 베른과 마리, 아델라인, 르시앙, 칼릭스가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칼릭스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저 기호를 아나."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아는 정도가 아니었다.익숙했다.너무 익숙해서 속이 차가워질 정도였다.숫자와 온도, 영어로 적힌 조리 과정. 전생의 레시피 노트에서 수도 없이 보던 방식이었다. 그녀가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기록의 언어.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셰프님…… 괜찮으십니까?"엘리제는 뒤늦게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칼릭스의 시선이 바로 닿았다.그녀는 말을 멈췄다."아니. 괜찮지 않아요."주방 안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엘리제는 종이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이건 제 전생의 표기예요. 아니, 정확히는 제가 살던 세계의 조리 기록 방식."마리의 눈이 커졌다.베른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섣불리 묻지 않았다.아델라인은 눈빛을 낮췄다."황태후가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뜻이군요.""그럴 가능성이 커요. 적어도 저와 같은 세계에서 온 누군가의 지식을 갖고 있어요."르시앙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엘리제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르시앙 경."그가 고개를 들었다."왜요?""읽을 수 있죠?"주방 안이 조용해졌다.르시앙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칼릭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읽을 수 있나."르시앙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일부는."엘리제의 가슴이 가라앉았다."일부?""온도와 조리 순서 정도는 읽을 수 있습니다.""이 세계에 없는 표기인데요.""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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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Y.M.J.

Y.M.J. 엘리제는 그 세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황태후의 최종 연회 초청 명단 한쪽에 적힌 암호.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낙서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엘리제에게는 아니었다. 윤민재. 전생의 라이벌. 강서진의 레스토랑과 같은 해 미슐랭을 노렸던 셰프. 늘 웃으며 경쟁했고, 늘 한 끗 차이로 밀려났고, 마지막에는 이상할 만큼 조용해졌던 남자. 그리고 지금, 르시앙의 얼굴이 그 이름 앞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르시앙 경."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불러야 하나." 엘리제의 목소리는 낮았다. "윤민재." 마리의 손에서 펜이 멈췄다. 베른은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공기의 변화를 읽었다. 칼릭스는 엘리제 곁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르시앙은 눈을 감았다. 오래 참아온 사람처럼. "결국 그 이름을 듣는군요." 엘리제는 웃었다. "듣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거죠." "예." 그는 눈을 떴다. "저는 윤민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르시앙입니다." 마리는 숨을 삼켰다. 엘리제는 의외로 소리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오면, 사람은 오히려 조용해진다. 분노, 혼란, 배신감, 오래된 경쟁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 그 모든 것이 혀끝에 쓴맛처럼 고였다. "언제부터 기억했어요?" "처음부터는 아닙니다. 어릴 때는 조각만 있었습니다. 낯선 불, 낯선 칼, 하얀 접시. 그러다 황실 주방에 들어온 뒤부터 선명해졌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죠?" "당신이 엘리제 폰 라벤느로 나타났을 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거짓말." 르시앙의 눈이 흔들렸다. 엘리제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제 칼질을 알아봤어요. 수비드 온도도, 플레이팅 방식도, 심지어 제가 재료 냄새 맡는 버릇까지. 확신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인정하기 싫었던 거겠죠." 르시앙은 대답하지 못했다. 칼릭스가 낮게 물었다. "윤민재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지." 엘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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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향료고

황실 지하 향료고는 지도에 없는 장소였다.르시앙은 황실 주방 아래 저장실 벽면을 손으로 더듬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벽이었다. 오래된 습기와 말린 허브 냄새가 배어 있었고, 구석에는 쓰지 않는 항아리들이 쌓여 있었다.그러나 엘리제는 그 벽 앞에 서자마자 알았다.공기가 다르다.벽 너머에서 아주 희미하게 달고 차가운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여기네요."르시앙은 고개를 끄덕였다."황태후 전하의 최상급 향료와 특수 조제액이 보관되는 곳입니다. 황실 주방 수석도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엘리제가 그를 보았다."그런데 통로는 아네요.""언젠가 도망칠 길을 알아둬야 했습니다.""역시 믿음직한 이유는 아니네요."르시앙은 쓴웃음을 지었다."부정하지 않겠습니다."칼릭스가 벽을 보았다."열 수 있나."르시앙은 작은 금속 인장을 꺼냈다."완벽한 열쇠는 아닙니다. 다만 잠금 장치를 속일 수는 있을 겁니다."엘리제는 품에서 맑은 숨을 적신 천을 꺼냈다."들어가기 전에 모두 손목에 묶어요. 향료고는 음식만이 아니라 공기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요."마리는 천을 받아들고 자신의 손목에 단단히 묶었다.베른도, 르시앙도, 기사들도 같은 방식으로 천을 묶었다.마지막으로 엘리제가 칼릭스의 손목에 천을 묶었다.그의 손목은 단단하고 차가웠다.엘리제는 매듭을 묶다가 잠시 멈췄다.칼릭스가 물었다."왜 멈추지.""공작님 손목을 묶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요.""풀 수 없게 묶어도 된다."엘리제는 순간 그를 보았다."지금 그런 말 하실 상황인가요?"칼릭스는 주변을 살폈다."상황이다.""아주 많이요.""그럼 나중에 다시 하겠다."엘리제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져 고개를 돌렸다."그 말도 이제 금지해야겠어요."칼릭스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어렵군."그 짧은 농담 같은 대화는 엘리제의 긴장을 조금 덜어주었다.그녀는 마지막 매듭을 묶고 말했다."향이 강해지면 이 천을 코끝에 대세요. 그리고 불쾌함이 줄어들면 바로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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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이름의 맛

칼릭스는 신전 회복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 모습이 엘리제에게는 이상하게 낯설었다. 칼릭스는 늘 서 있는 사람이었다. 검을 쥐고, 문 앞에 서고, 그녀의 뒤에 서고, 어떤 식탁이든 무너지지 않는 기둥처럼 버티던 사람.그런 그가 누워 있었다.창백한 얼굴로.손목에는 맑은 숨을 적신 천이 감겨 있었고, 신전 사제들은 그의 호흡과 맥을 확인하고 있었다. 완성 원액의 직접 접촉은 짧았지만, 칼릭스는 어린 시절부터 월영초 계열에 노출된 몸이었다. 누구보다 강하게 버텼지만,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엘리제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놓을 수 없었다."셰프님."마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기억의 소금 준비됐습니다."엘리제는 고개를 들었다.작은 접시 위에는 소금 결정이 놓여 있었다. 산미 열매 껍질을 아주 약하게 문지른 소금. 혀끝에 닿으면 짠맛과 산미가 동시에 올라와 감각을 붙잡는 응급 처방이었다.베른이 말했다."단맛보다 산미와 짠맛을 먼저 쓰는 게 맞습니까?""네. 지금은 기분 좋은 맛보다 놓치지 않는 맛이 필요해요. 감각이 멀어질 때 가장 먼저 잡히는 건 선명한 자극이에요. 단, 너무 강하면 몸이 놀라니까 아주 조금만."르시앙은 한쪽에서 완성 원액 병을 봉인하고 있었다.그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제가 문을 더 빨리 열었어야 했습니다."엘리제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지금 자책할 시간 없어요. 장부 정리하고, 원액 성분 나눠요. 칼릭스가 깨어나면 바로 다음 대응 해야 하니까.""예."르시앙은 반박하지 않았다.예전 같으면 그는 자신의 죄책감도 아름다운 말로 포장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엘리제의 명령을 듣고 움직였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아는 듯했다.엘리제는 소금 결정을 아주 작게 부쉈다.칼릭스의 입술에 물을 살짝 적신 뒤, 혀끝에 거의 먼지 같은 양의 소금을 올렸다.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칼릭스."엘리제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공작님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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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하루 전야

최종 연회가 하루 앞당겨졌다는 소식은 공작가 주방을 다시 전쟁터로 만들었다.밤이 깊었지만 아무도 잠들지 않았다. 화구에는 약한 불이 켜져 있었고, 조리대 위에는 재료와 기록지, 봉인된 원액 병, 황태후의 장부 사본이 한꺼번에 펼쳐져 있었다.엘리제는 손목에 천을 묶은 채 서 있었다.완성 원액의 냄새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봉인되어 있었고, 신전 사제가 세 겹으로 막아두었다. 그러나 기억은 냄새처럼 오래 남았다.칼릭스가 감각을 잃어가던 순간.그가 맛 대신 자신의 이름을 붙잡던 순간.그 기억은 엘리제의 안쪽을 계속 건드렸다.베른이 말했다."시간이 부족합니다. 원래 준비하던 다섯 코스를 모두 완성하기 어렵습니다."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줄여야 해요."마리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코스를 줄입니까?""응. 황태후가 시간을 빼앗았으니까, 우리도 코스를 압축해야 해. 대신 의미는 남겨야 해."아델라인이 지도와 참석자 명단을 펼쳤다."참석자는 예정대로입니다. 귀족 대표, 평민 대표, 신전, 황실 주방, 의회. 다만 시식자 명단이 바뀌었습니다.""어떻게요?""황태후 측이 대표 시식자를 대부분 자기 쪽 인물로 교체하려 했습니다."마리의 얼굴이 굳었다."그럼 또 조작하려는 겁니까?""그렇겠지요."아델라인은 차갑게 말했다."다행히 에른스트 후작 부인이 막았습니다. 지금은 공개 추첨 방식으로 바꾸는 안을 의회에 밀어붙이는 중입니다."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시식자가 누구든 먹고 바로 말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요."베른이 물었다."압축 코스는 어떻게 구성합니까?"엘리제는 조리대 위 빈 종이에 제목을 적었다.사람의 식탁."첫 번째. 첫 숨. 아주 작은 맑은 차. 연회장 향에 눌리기 전에 코와 목을 열어요."마리가 적었다."첫 숨. 향 검수 및 호흡 회복.""두 번째. 내일의 수프. 배를 아주 조금 채우고, 몸이 긴장을 풀게 해요. 굶주림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걸 막아야 하니까.""세 번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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