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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윤민재

르시앙은 오래 침묵했다.공작가 응접실의 창밖에는 늦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젖은 흙냄새와 식은 차 향 사이로, 희미한 흑회향 잔향이 남아 있었다. 르시앙이 조금 전까지 만지고 있던 기록 봉투에서 묻은 냄새였다.엘리제는 그 냄새보다, 방금 그가 부른 이름이 더 선명했다.강서진.이 세계에서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이름.칼릭스는 엘리제 옆에 서 있었다. 검은 뽑지 않았지만 손끝은 이미 검집에 닿아 있었다. 그는 르시앙을 보고 있었고, 엘리제의 숨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때마다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다시 말해라.”칼릭스의 목소리는 낮았다.“방금 누구의 이름을 불렀지.”르시앙은 엘리제를 보았다.그 눈빛은 도망치고 싶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도망쳤다가,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진 사람의 눈이었다.“강서진.”엘리제의 손끝이 차가워졌다.마리는 기록판을 들고 있다가 숨을 삼켰고, 베른은 막 가져온 따뜻한 꿀물을 조용히 내려놓았다.엘리제는 웃으려 했다.그게 습관이었다. 무서울 때 웃고, 당황할 때 농담하고, 아플 때 먼저 칼을 잡는 버릇. 하지만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르시앙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나도 그 이름을 아는 세계에서 왔으니까.”방 안의 공기가 멈췄다.엘리제의 머릿속에서 전생의 주방이 되살아났다. 하얀 타일, 밤새 꺼지지 않던 화구, 미슐랭 심사 발표 전날의 긴장, 그리고 늘 자신보다 반 발짝 뒤에서 웃던 남자.윤민재.그는 서진을 라이벌이라 불렀다. 친구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서진도 그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판에서 싸웠고, 같은 불 앞에서 버텼고, 같은 별을 바라봤다.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르시앙이라는 얼굴로.엘리제는 낮게 말했다.“윤민재.”르시앙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반응만으로 충분했다.“맞네요.”그녀는 웃지 않았다.“당신이 윤민재야.”칼릭스의 시선이 엘리제에게 닿았다.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옆으로 다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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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닫힌 문

르시앙은 신전 치료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황실 수석 요리사답게 늘 단정하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입술은 말라 있었고, 목 근처에는 검은 반점처럼 얇은 혈관이 도드라져 있었다. 손끝은 주기적으로 떨렸고, 숨은 얕았다.엘리제는 문턱을 넘자마자 냄새를 맡았다.흑회향.백설분.그리고 목 안쪽을 마비시키는 조제액.“입막음용이에요.”마리는 기록판을 꺼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말하지 못하게 하는 약입니까?”“응. 혀와 목부터 마비돼. 심하면 숨도 막혀.”칼릭스의 얼굴이 굳었다.“그럼 시간이 많지 않군.”“많지는 않아요.”엘리제는 바로 손을 씻었다.신전 사제가 준비한 물에 산미 열매 껍질을 조금 넣고, 깨어나는 잎을 아주 약하게 풀었다. 너무 강하면 르시앙의 몸이 버티지 못할 수 있다. 해독은 밀어붙이는 게 아니다. 막힌 문을 부수는 게 아니라, 먼저 문틈을 찾아야 한다.베른이 옆에서 물었다.“산미를 더 올릴까요?”“아니요. 지금은 혀가 아니라 목부터 열어야 해요. 향은 낮게. 온도는 미지근하게.”“알겠습니다.”엘리제는 작은 천에 해독 증류수를 묻혔다.그리고 르시앙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댔다.“르시앙 경. 들리면 손가락 움직여요.”반응이 없었다.“윤민재.”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엘리제의 눈이 차가워졌다.“듣고 있네요.”칼릭스는 그 이름을 듣고도 묻지 않았다.그는 엘리제의 옆에 섰을 뿐이었다. 검을 빼지 않았고, 르시앙을 노려보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엘리제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었다.분노가 아니라 손.질문이 아니라 시간.그게 칼릭스답지 않아서, 오히려 칼릭스답게 느껴졌다.엘리제는 르시앙의 목 아래를 살폈다.“삼키게 하면 안 돼요. 입안에 조금씩 적시고, 코로 향을 열게 할게요.”마리는 빠르게 기록했다.“목 마비. 삼킴 금지. 코로 향 반응 확인.”엘리제는 천을 다시 적셨다.“르시앙 경. 당신 아직 말해야 할 것 많아요. 죽을 생각 하지 마요.”르시앙의 눈꺼풀이 떨렸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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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레스토랑의 불

황실 지하 기록실은 죽은 종이 냄새가 났다.오래된 양피지, 굳은 잉크, 먼지, 말라붙은 밀랍. 그 아래에 아주 희미한 향초 냄새가 깔려 있었다. 누군가 기록실 안에서도 냄새를 덮으려 한 흔적이었다.엘리제는 문턱에서 멈췄다.“이상해요.”칼릭스가 바로 물었다.“무엇이.”“종이 냄새가 너무 깨끗해요. 오래된 기록실이면 곰팡이나 잉크 산화 냄새가 더 나야 하는데, 여긴 정리된 냄새가 나요.”“누군가 최근에 건드렸다는 뜻인가.”“네. 그것도 자주.”칼릭스는 기사 둘을 문 앞에 세웠다.마리는 작은 등불을 들고 엘리제 뒤에 섰고, 베른은 기록 보관용 천과 봉인을 챙겼다. 르시앙은 치료실에 남겨졌다. 아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엘리제는 기록실 안으로 들어갔다.벽 전체가 서가였다. 황실의 오래된 식단 기록, 의관단 검수 문서, 왕족 연회 메뉴, 약재 반입 장부. 이름만 보면 모두 평범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이제 알았다.황태후는 가장 위험한 것을 가장 평범한 이름 아래 숨기는 사람이다.“빙의자 명단이면 어떤 이름으로 숨겼을까요.”마리가 낮게 물었다.“그 단어 그대로는 안 썼을 거야.”엘리제는 서가를 살폈다.“이방 지식, 외래 조리법, 이상 기억자, 혹은…… 표본.”칼릭스의 시선이 서늘해졌다.“사람을 표본이라 부른다면, 그 기록은 태워도 아깝지 않다.”“아직 태우면 안 돼요. 먼저 찾아야죠.”엘리제는 르시앙이 그린 표식을 떠올렸다.둥근 문.세 갈래의 선.현대 투자사의 로고와 닮았지만, 이 세계식 문장으로 변형된 표식.그녀는 서가의 등 라벨을 하나씩 확인했다.황실 약재 연구.감각 안정 식단.외래 향신료 기록.그리고.“여기.”그녀의 손이 멈췄다.[문 너머의 식탁]마리는 숨을 눌렀다.“제목이……”“너무 노골적이죠.”엘리제는 책을 꺼냈다.표지는 낡았지만 손때가 적었다. 자주 꺼내 봤는데도 관리가 잘 된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책을 펼쳤다.첫 장에는 황태후의 문장이 있었다.백합과 초승달.그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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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정보원

기록실 봉쇄는 빠르게 진행됐다.황실 경비들이 지하 복도를 막았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황태후 직속 시녀장과 의관단 사람들이 서 있었다. 겉으로는 기록 보호를 위한 조치라 했지만, 엘리제는 냄새로 알았다.두려움.그리고 조급함.황태후가 두려워하는 기록이 손에 들어왔다.그것만으로도 길은 보였다.칼릭스는 엘리제와 마리를 뒤에 세웠다. 그의 검은 이미 뽑혀 있었다. 좁은 복도에 선 그의 뒷모습은 단단했다. 그는 더 이상 감정 없는 칼이 아니었다. 분노를 알고, 두려움을 알고, 지켜야 할 사람을 아는 칼이었다.“비켜라.”칼릭스가 말했다.시녀장이 시선을 내렸다.“공작 전하. 황태후 전하의 명입니다. 기록실에서 반출된 물품을 확인해야 합니다.”엘리제는 품 안의 기록 봉인을 눌렀다.마리는 옆에서 기록판을 꼭 쥐고 있었다.칼릭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합동 조사단 증거물이다.”“황실 기록은 황실 소유입니다.”“범죄 증거는 황실 소유가 아니다.”시녀장의 얼굴이 굳었다.그때 뒤쪽에서 아델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정확한 말이네요.”모두가 돌아봤다.아델라인 황녀가 신전 사제와 함께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황실 기록이라 해도 합동 조사 대상이면 봉인 절차가 먼저입니다. 시녀장, 물러나세요.”“황녀 전하. 황태후 전하의 명이……”“그 명이 황실 범죄 증거 은폐를 뜻한다면, 나도 절차대로 문제 삼겠습니다.”시녀장은 입을 다물었다.엘리제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아델라인이 다가와 엘리제를 살폈다.“얼굴이 안 좋네요.”“기록을 좀 봤어요.”“그런 얼굴을 할 만한 기록이었나 보군요.”“네. 아주 맛없는 기록이요.”아델라인은 더 묻지 않았다.대신 신전 사제에게 손짓했다.“증거 봉인.”엘리제는 품 안의 영상 조각과 외래 기억 보유자 기록, 현대 정보원 H의 쪽지를 꺼냈다. 신전 사제는 그것들을 봉인했다. 밀랍이 굳는 동안, 엘리제는 그 표식을 다시 보았다.둥근 문.세 갈래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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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하이든

하이든은 향료고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는 이 세계 귀족처럼 차려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달랐다. 옷은 완벽하게 맞았고, 자세도 단정했지만, 눈빛만은 현대의 연구실에 있던 사람처럼 차갑고 계산적이었다.엘리제는 그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이 사람은 요리사가 아니다.먹는 사람을 본 적 없는 사람.재료를 숫자로 보고, 맛을 반응값으로 보고, 사람의 감정을 조절 가능한 변수로 보는 사람.하이든은 웃었다.“드디어 만나네요. 강서진 셰프.”칼릭스의 손이 검집에 닿았다.엘리제는 낮게 말했다.“그 이름, 여기서 부르지 마요.”“왜요? 당신의 진짜 이름 아닙니까?”“지금의 나는 엘리제 폰 라벤느예요.”“흥미롭군요. 자아 정착이 상당히 안정적입니다.”엘리제의 시선이 서늘해졌다.“사람을 실험체처럼 말하네요.”“실험체라기보다는 사례죠.”하이든은 향료고를 둘러보았다.벽에는 수많은 병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병, 검은 병, 은색 병. 각 병에는 정교한 라벨이 붙어 있었다. 월영초 농축액, 루메르 향초 추출액, 달그늘꽃 줄기액, 흑회향 정유, 백설분 안정제.그리고 중앙의 유리함 안에 작은 은색 병이 있었다.완성 원액.엘리제는 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게 최종 연회에 쓸 물건이군요.”하이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완성형입니다. 음식, 향, 피부 접촉. 세 경로 모두 작용합니다. 이 세계 기준으로는 혁명적인 안정제죠.”“안정제가 아니라 감각 마비제죠.”“감각이 너무 예민하면 사회는 불안정해집니다.”그는 너무 평온하게 말했다.“배고픔을 크게 느끼면 폭동이 일어나고, 분노를 크게 느끼면 반역이 생깁니다. 슬픔을 제대로 느끼면 복수심이 생기고, 맛을 너무 정확히 알면 불만이 늘죠.”“그래서 눌렀다?”“조절한 겁니다.”엘리제는 웃었다.“그 말 진짜 맛없네요.”하이든의 눈이 살짝 빛났다.“당신은 늘 맛으로 판단하더군요. 그래서 황태후께서 당신을 흥미로워하셨습니다.”“회수 대상이라고 적어놨던데요.”“그 표현은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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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무너지는 감각

칼릭스의 감각은 빠르게 흐려졌다.신전 회복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온도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물수건을 손등에 얹어도 반응이 늦었고, 산미 열매 향을 가까이 대도 눈꺼풀만 겨우 움직였다.엘리제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한 손은 칼릭스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해독 기록을 썼다. 손가락은 떨렸지만 글씨는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지면 안 됐다. 지금 자신이 무너지면, 칼릭스가 붙잡을 것이 사라진다.마리가 곁에서 울음을 참으며 보조했다.“셰프님, 산미 반응 기록합니다. 첫 번째 반응 지연. 두 번째 반응 미약.”“좋아. 온도 반응은?”베른이 칼릭스의 손끝을 확인했다.“차가움 인지는 늦지만 있습니다.”“소금.”엘리제는 작은 접시에 담긴 기억의 소금을 집었다.소금은 너무 많으면 위험했다. 지금 칼릭스의 몸은 완성 원액의 기화향에 노출되어 감각이 흐려지는 중이다. 강한 자극은 오히려 신경을 더 밀어낼 수 있다.아주 작은 결정 하나.그걸 혀끝에 닿게 해야 했다.엘리제는 칼릭스의 입가에 손을 가져가다 멈칫했다.그가 늘 했던 말이 떠올랐다.혼자 삼키지 마라.이번엔 자신이 먹는 게 아니다.하지만 자신의 손끝에 누군가의 감각이 달려 있었다.그 무게가 너무 컸다.“엘리제.”칼릭스가 아주 낮게 불렀다.그녀는 숨을 멈췄다.“들려요?”“멀다.”“그래도 들리는 거죠?”“네 목소리는.”엘리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럼 목소리 따라와요.”그녀는 소금을 그의 혀끝에 닿게 했다.칼릭스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느껴져요?”침묵.아주 긴 침묵.엘리제는 손을 꼭 쥐었다.칼릭스의 입술이 움직였다.“……먼 바다.”“뭐라고요?”“짠맛이…… 먼 곳에서 온다.”마리는 눈물을 참으며 기록했다.짠맛 반응 있음. 거리감 표현. 인지 가능.엘리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좋아요. 살아 있어요.”칼릭스는 눈을 뜨려 했다.하지만 초점은 흐렸다.“네 얼굴이…… 흐리다.”그 말에 엘리제의 심장이 철렁했다.미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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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이름의 맛

칼릭스가 깨어난 것은 새벽이었다.창밖이 완전히 밝아지기 전, 회복실 안에는 푸른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제는 의자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손은 여전히 칼릭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손가락이 움직였다.엘리제는 바로 눈을 떴다.“공작님?”칼릭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초점은 흐렸지만, 전날보다는 훨씬 선명했다. 그는 잠시 천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엘리제를 보았다.“엘리제.”첫 마디였다.맛있다도, 괜찮다도, 물도 아니었다.그녀의 이름.엘리제는 숨을 멈췄다.“네.”“보인다.”그 말이 이렇게 기쁠 줄 몰랐다.엘리제는 급히 그의 눈앞에 손가락을 세웠다.“몇 개요?”“둘.”“좋아요. 냄새는요?”그녀는 손목의 맑은 숨 천을 가까이 댔다.칼릭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너.”“네?”“네 냄새가 먼저 난다.”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그건 답안지가 아닙니다.”“그럼 오답인가.”“아니…… 오답은 아닌데요.”칼릭스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그럼 됐다.”엘리제는 말문이 막혔다.회복하자마자 사람을 이렇게 흔든다고?“공작님. 상태 확인 중입니다. 협조하세요.”“협조하고 있다.”“맑은 숨 향 말고 다른 건요?”그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산미. 허브. 그리고 네가 밤새 마신 차.”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그것도 알아요?”“너에게서 난다.”“…….”“잠을 안 잤군.”이번엔 엘리제가 걸렸다.“조금 잤어요.”“거짓말.”그 말투가 너무 익숙해서, 엘리제는 웃고 말았다.웃음이 터진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살아 있다.돌아왔다.아직 완전하지 않아도, 칼릭스는 돌아왔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손등 위에 이마를 댔다.아주 잠깐.칼릭스의 손이 굳었다.“엘리제.”“잠깐만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딱 잠깐만.”칼릭스는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아직 몸을 완전히 움직일 힘이 없었지만, 손끝만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무서웠나.”“네.”이번에도 바로 대답했다.“엄청요.”“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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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하루 앞당긴 연회

최종 연회가 하루 앞당겨졌다.소식은 황궁의 붉은 봉투에 담겨 공작가로 날아왔다. 봉투는 장미 향을 품고 있었지만, 엘리제는 그 아래 깔린 더 차가운 냄새를 맡았다. 완성 원액의 잔향. 아주 약하지만 분명했다.황태후는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공작가 주방은 곧바로 움직였다. 베른은 숨쉬는 빵 반죽을 다시 확인했고, 마리는 시식자 명단과 기록 양식을 정리했다. 유나는 구석에서 손을 떨며 제과 도구를 닦았다. 르시앙은 황실 주방으로 들어갈 때 쓸 증언서 사본을 챙겼다.엘리제는 조리대 앞에 서서 코스 순서를 다시 적었다.첫 숨.내일의 수프.선택의 고기.숨쉬는 빵.마지막 단맛.각 접시는 맛이 아니라 감각을 되돌리는 순서였다. 숨을 쉬고, 내일을 떠올리고, 스스로 고르고, 씹고, 마지막으로 자기 말을 남기는 것. 황태후가 오래 빼앗아온 것을 하나씩 돌려주는 코스.마리가 물었다."셰프님, 하루 앞당겨졌는데 가능합니까?"엘리제는 종이를 접었다."완벽하게는 못 해. 하지만 황태후도 완벽해서 앞당긴 게 아니야. 우리가 준비를 끝내기 전에 흔들려는 거지.""그럼 흔들리면 안 됩니다.""맞아. 대신 무리해서 혼자 버티지도 않을 거야."그 말에 주방 사람들이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예전 같으면 엘리제는 이미 자신이 먼저 뛰어들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독이든 향이든 자기 혀로 확인하고, 위험한 방에는 혼자 들어가고, 다친 뒤에야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그녀는 손목에 묶인 맑은 숨 천을 보았다. 칼릭스가 다시 묶어준 매듭이었다. 돌아오라는 약속처럼, 너무 단단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았다.칼릭스는 문가에 서 있었다."떨리나.""네."엘리제는 바로 인정했다."좋다.""제가 떨리는 게요?""말한 것이."그 익숙한 대답에 엘리제는 조금 웃었다."공작님도요?"칼릭스는 잠시 침묵했다."두렵다."주방 안의 움직임이 아주 작게 멈췄다.그는 말을 이어갔다."황태후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네가 다칠 수 있다. 내가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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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네 번째 코스

네 번째 코스는 숨쉬는 빵이었다.엘리제는 그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순서가 중요했다. 첫 숨으로 공기를 열고, 내일의 수프로 생각을 붙잡고, 선택의 고기로 스스로 고르는 감각을 되돌린 뒤, 숨쉬는 빵으로 씹게 한다.그다음에야 마지막 단맛이 온다.빵은 중간이자 기준이었다."빵이 너무 빨리 나가면 안 돼요."엘리제는 베른에게 말했다."사람들이 첫 세 코스를 지나고 나서 입이 열려야 해. 그래야 빵의 차이를 느껴요."베른은 숨쉬는 빵 상자를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껍질은 안정적입니다. 칼집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회장 습도가 높으면 속이 조금 무를 수 있습니다.""황실 연회장은 향과 수분이 많겠죠. 그래서 포장 천을 한 겹 줄입시다."마리는 각 상자에 번호를 붙였다.[4코스 A. 평민 대표석][4코스 B. 귀족석][4코스 C. 신전 참관]"왜 나눕니까?"유나가 물었다."나중에 반응을 비교하려고요. 같은 빵이라도 누가 먹느냐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어요.""그럼 어느 쪽이 맞는 반응입니까?""전부요."엘리제는 빵의 칼집을 확인하며 말했다."좋은 음식은 하나의 정답만 남기지 않아요. 먹은 사람 수만큼 말이 나오는 게 정상이에요."유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하는 얼굴이었다.황태후의 식탁은 반대였다.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침묵으로 끝나는 식탁. 유나는 한때 그런 식탁을 위해 제과 기술을 쓰게 되었다. 그녀가 만든 부드러운 빵은 환자를 위한 배려에서 출발했지만, 황태후의 손에서 침묵의 도구가 되었다.유나가 낮게 말했다."이 빵은 제가 만든 빵과 반대네요."엘리제는 그녀를 보았다."처음 만든 원형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부드러운 빵은 필요해요. 문제는 목적이죠.""목적.""먹는 사람을 살리려는지, 조용하게 만들려는지."유나는 시선을 내렸다."내일, 제가 증언할 수 있을까요?""무서우면 안 해도 됩니다.""무서워요."유나는 손을 쥐었다."그래도 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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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이름 사탕

이름 사탕은 작았다.너무 작아서 연회장의 화려한 디저트 접시에 올리면 장식 부스러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거창한 접시가 아니라, 위급할 때 혀끝에 남는 작은 감각으로 돌아와야 했다.마리는 사탕을 작은 종이에 하나씩 감쌌다.종이 겉에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작은 점을 찍었다. 평민 대표용, 신전용, 공작가용, 황실 주방용. 필요할 때 조용히 나눠줄 수 있게."이거,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마리가 물었다.엘리제는 완성된 사탕 하나를 들었다."완성 원액을 완전히 막지는 못해. 하지만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말할 시간을 줄 수는 있어.""그 시간이 중요합니까?""응. 침묵은 아주 빨리 와. 그런데 이름을 말하는 건 그 침묵을 한 번 찢어."마리는 사탕 종이를 접는 손을 멈췄다."제 이름도요?""당연하지."엘리제는 마리를 보았다."내일 누가 겁을 주면, 먼저 네 이름을 생각해. 마리. 기록 담당. 숨구멍을 만든 사람."마리의 눈가가 붉어졌다."너무 깁니다.""그럼 줄여. 마리, 살아 있는 사람."마리는 웃으려다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베른은 못 들은 척 사탕 상자를 닫았다."셰프. 공작 전하 몫도 따로 뺄까요?""네. 공작님 건 조금 소금 더 넣어요.""왜입니까?"엘리제는 시선을 피했다."그분은 단맛보다 이름을 붙잡는 데 짠맛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베른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개인 맞춤형이군요.""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네요."그때 칼릭스가 주방으로 들어왔다."무엇이 이상하지."엘리제는 사탕 상자를 얼른 닫았다."아무것도 아닙니다.""거짓말."너무 익숙한 말이었다.엘리제는 결국 작은 사탕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공작님 몫입니다."칼릭스는 사탕을 받아 들었다."이름 사탕.""네. 감각이 흐려질 때 자기 이름을 붙잡는 용도예요.""내 이름은 알고 있다.""완성 원액 앞에서도요?"칼릭스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엘리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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