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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단두대 위의 미슐랭: Chapter 1 - Chapter 10

108 Chapters

1화. 사형 전 한입

강서진은 냄새로 시간을 잴 수 있었다.새벽 네 시의 주방에는 식은 금속 냄새가 났다. 오븐이 예열되기 전의 차가운 철판, 전날 밤 마지막으로 닦아낸 조리대, 아직 칼집에 잠든 셰프 나이프. 다섯 시가 되면 버터가 녹고, 여섯 시가 되면 커피와 빵 껍질 냄새가 섞였다.그녀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시간을 시계보다 냄새로 먼저 읽었다.그러나 지금 코끝을 친 건 곰팡이와 피비린내였다.'……내 주방 냄새가 아닌데.'서진은 눈을 떴다.차가운 돌바닥이 뺨에 닿아 있었다. 손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발목은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돌 위에 부딪혔다.똑.똑.감옥이었다.그것도 누군가를 살려두기 위한 감옥이 아니라, 죽이기 전까지 보관하는 감옥.서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시야가 흔들렸다. 손끝을 보자 낯선 손이 보였다. 길고 흰 손가락, 귀족 영애처럼 관리된 손톱, 하지만 손바닥에는 희미한 상처가 있었다.'내 손이 아니야.'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곰팡이와 피 냄새 아래로, 낯선 향수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서진은 천천히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은빛 금발이 흘러내렸다."말도 안 돼."목소리도 낯설었다.가늘고, 조금 쉬었고, 어딘가 귀족적인 억양이 남아 있었다.그때 감옥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철컥.간수가 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양피지 두루마리가 있었다. 그는 엘리제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깨어났군, 엘리제 폰 라벤느."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듯 떠올랐다.엘리제 폰 라벤느.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악녀.주인공을 질투하고, 남주인공 칼릭스 블레이크 공작의 만찬에 독을 탔다가 1화도 넘기지 못하고 처형당하는 조연 악녀.서진은 입술을 굳혔다.'나,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거야?'간수는 두루마리를 펼쳤다."엘리제 폰 라벤느. 그대는 블레이크 공작 전하의 만찬에 독을 섞어 제국 중신을 살해하려 한 죄로, 한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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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네가 먹여라

임시 주방은 주방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사형장 옆 관청 건물 뒤편에 딸린 조리실이었다. 벽에는 그을음이 두껍게 끼어 있었고, 화구는 반쯤 식은 재로 막혀 있었다. 물통에서는 쇠 냄새가 났고, 조리대는 칼자국보다 곰팡이 얼룩이 더 많았다. 엘리제는 문턱을 넘자마자 숨을 들이마셨다. 썩은 기름과 시든 채소 냄새. 오래 방치된 도마 위에는 질긴 고기가 놓여 있었다. '좋아. 최악이네.' 그래도 완전한 최악은 아니었다. 불이 있었다. 물이 있었다. 칼이 있었다. 그리고 고기가 있었다. 그 정도면 셰프는 살길을 만든다. 병사 하나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양쪽 발목은 여전히 묶여 있었고, 손목도 한쪽 사슬은 남아 있었다. 다만 오른손만은 자유로웠다. 칼을 쥘 수 있을 만큼. 칼릭스는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이 더러운 공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듯, 문가에서 엘리제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엘리제는 그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재료를 확인했다. 고기는 질겼다. 부위는 어깨살에 가까웠고, 핏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다. 지방은 적고 근섬유는 거칠었다. 보통 귀족 연회라면 버려졌을 고기다. 시든 뿌리채소 몇 개, 말라비틀어진 허브, 굵은 소금, 산미가 빠진 열매 껍질. "정말 이런 걸로 만들 생각인가?" 문가에서 칼릭스가 물었다. 엘리제는 고기를 손끝으로 눌렀다. "재료가 나쁜 게 아니라, 다룰 줄 모르면 나빠지는 겁니다." "이 고기는 질기다." "알아요." "냄새도 좋지 않다."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자신 있나." 엘리제는 고기를 들고 칼릭스를 돌아보았다. "공작님, 이 고기가 왜 질긴지 아십니까?" 칼릭스의 눈썹이 움직였다. "왜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손질도 엉망이고, 버려지기 직전까지 몰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릴 겁니다. 고기도, 제 목숨도요." 칼릭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고기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눈이 왜 저렇게 진지한지 이해하지 못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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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미각 계약

엘리제는 살아남았다.문제는 그 사실이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사형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녀는 블레이크 공작가의 검은 마차에 실렸다. 손목의 쇠사슬은 풀렸지만, 문밖에는 공작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창문은 작고 두꺼웠으며, 마차 안의 공기는 가죽과 차가운 금속 냄새로 가득했다.맞은편에는 칼릭스 블레이크가 앉아 있었다.그는 방금 사람의 처형을 멈춘 사람답지 않게 고요했다. 접시 위에서 처음 맛을 느낀 사람답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제를 보고 있었다.엘리제는 그 시선이 불편했다.먹는 사람의 시선은 익숙했다.평가하는 시선, 기대하는 시선, 실망하는 시선. 전생의 강서진은 그런 시선들 위에서 살아왔다.하지만 칼릭스의 시선은 달랐다.그는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만든 사람의 구조를 읽으려는 것처럼 보았다."공작님.""말해라.""제 얼굴에 소스라도 묻었습니까?""아니.""그런데 왜 계속 보십니까?"칼릭스는 대답하기 전 잠시 침묵했다."확인 중이다.""무엇을요?""네가 방금 한 일이 우연인지."엘리제는 헛웃음을 삼켰다."우연히 고기를 익히고, 우연히 공작님의 미각을 깨웠다고 생각하십니까?""가능성은 있다.""그 가능성, 아주 맛없네요."칼릭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넌 모든 것을 맛으로 말하는군.""셰프니까요.""그럼 내 상태도 맛으로 설명할 수 있나."엘리제는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방금 주방에서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이 남아 있었다."공작님은 오래 식은 접시 같습니다."마차 안이 조용해졌다.기사들이 밖에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칼릭스는 낮게 물었다."식은 접시?""한때 뜨거운 것이 담겼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접시요. 문제는 본인이 비어 있다는 것도 오래 잊고 사신 것 같다는 점이고요.""무례하군.""정확한 맛평입니다."칼릭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계속해라."엘리제는 조금 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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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공작가 주방

블레이크 공작가의 성은 검은 돌로 지어져 있었다.멀리서 보면 산맥의 그림자가 그대로 굳은 것 같았다. 높은 성벽, 좁은 창, 차가운 탑. 화려한 귀족 저택이라기보다 오래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에 가까웠다.엘리제는 마차에서 내리며 숨을 들이마셨다.찬 바람과 젖은 돌 냄새 사이로, 아주 희미한 고기 육수 향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육수 냄새가 너무 얕아.'오래 끓였지만 깊지 않은 냄새였다. 뼈에서 맛을 뽑기보다, 그냥 물에 오래 담가 둔 느낌. 소금으로 덮어 버린 듯한 끝향.엘리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이 성, 주방부터 갈아엎어야겠네.'칼릭스는 그녀보다 먼저 성문 안으로 걸어갔다. 기사들과 하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시선은 곧 엘리제에게로 옮겨왔다.독살 누명을 쓴 악녀, 처형장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 공작의 미각을 깨웠다는 소문의 영애.그 모든 이름이 그녀를 따라붙는 듯했다.엘리제는 턱을 들었다.두려운 척하면 잡아먹힌다.주방에서도, 귀족 사회에서도,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칼릭스가 말했다."먼저 주방으로 간다."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방부터 주는 게 아니라요?""첫 식사는 오늘 밤이라고 했다.""저 진짜 방금 사형장에서 왔습니다.""그래서 가벼운 식사로 한다.""공작님이 생각하는 가벼움과 제가 생각하는 가벼움이 다른 것 같은데요."칼릭스는 그녀를 보았다."배고프지 않나."그 질문에 엘리제는 또 말문이 막혔다.배고팠다.정말로.마지막으로 제대로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전생의 마지막 날에도 그녀는 커피와 차가운 빵 한 조각으로 버텼다. 이 몸으로 깨어난 뒤엔 감옥의 물뿐이었다.칼릭스는 그녀의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였다."그럼 먹어라.""먹는 김에 요리도 하라는 뜻이죠?""그렇다.""참 효율적이네요.""북부에서는 효율이 미덕이다."엘리제는 작게 웃었다.위험한 남자다.그런데 대화가 된다.그게 더 위험했다.***공작가 주방은 컸다.문을 열자 열기와 기름 냄새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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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손을 보지 마라

새벽의 공작가 주방은 전쟁터에 가까웠다.그러나 엘리제가 아는 좋은 전쟁터는 고함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동선이 정리된 곳. 손이 낭비되지 않는 곳.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멈춰 서지 않는 곳.그녀는 조리대 중앙에 서서 시간을 쪼갰다."달걀은 물 온도 유지. 끓이지 마세요.""빵은 양면만 살짝. 태우면 버립니다.""고기는 지금 굽지 마요. 손님 들어오기 10분 전.""소스는 제가 봅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세요."견습들은 처음엔 우왕좌왕했지만, 곧 엘리제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할 만큼 명확한 지시였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한 접시를 위해 움직였다.베른은 주방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눈에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그 의심 위로 다른 감정도 생기고 있었다.인정하기 싫은 흥미.엘리제는 그 시선을 알고도 신경 쓰지 않았다.중요한 건 조식이었다.귀족과 기사, 공작가 중신까지 총 50명.그들에게 낼 메뉴는 세 가지였다.부드럽게 익힌 달걀과 구운 빵, 산미를 살린 노른자 소스.짧게 구운 고기와 뿌리채소.그리고 맑은 보리 수프.화려하진 않지만, 아침 식사로는 충분했다. 중요한 건 이 세계 사람들이 익숙하게 먹던 퍽퍽한 빵과 소금물 같은 수프를 뒤집는 것이었다.엘리제는 소스를 잡았다.버터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다만 향이 무거웠다. 그녀는 산미 열매 껍질을 아주 조금 넣어 기름진 향을 들어 올렸다. 노른자는 따뜻한 물 위에서 천천히 풀었다. 불이 조금만 강하면 갈라진다.'홀랜다즈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엘리제는 손목을 낮게 움직였다.'그래도 이 세계 기준으로는 혁명이지.'소스가 점점 윤기를 얻었다. 너무 되직하지 않게, 흐르지만 물 같지 않게. 숟가락을 들어 올리자 노란 소스가 얇은 리본처럼 떨어졌다.마침내 향이 완성됐다.버터의 고소함과 노른자의 부드러움, 산미의 선명한 끝이 한 번에 잡혔다.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주방은 역시 좋았다.죽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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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단맛 수업

공작가 주방 한쪽에 작은 시식대가 마련되었다.원래는 향신료를 분류하던 낮은 탁자였다. 엘리제는 그 위를 깨끗이 닦고, 흰 천을 깔고, 작은 그릇들을 일렬로 놓았다. 꿀물, 구운 빵 조각, 말린 과일, 소금 한 알을 넣은 따뜻한 물, 산미 열매를 아주 약하게 우린 차.첫 번째 미각 재활 수업. 주제는 단맛이었다.칼릭스는 시식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전쟁 회의에 참석하듯 자세가 단정했다. 문제는 눈빛도 전쟁 회의 같다는 점이었다.엘리제는 기록지를 펼치며 말했다."공작님. 이건 전투가 아닙니다.""알고 있다.""그런데 왜 적진 들어가기 전 기사처럼 앉아 계십니까?""처음 하는 일이라서."그 대답이 너무 솔직해 엘리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처음 하는 일.칼릭스에게 맛을 배우는 일은 정말 처음일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도 아는 단맛을, 이 남자는 이제야 다시 배운다.엘리제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습니다. 오늘은 어려운 거 안 해요.""단맛이 쉬운가.""대부분 사람에게는요.""나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그럼 더 천천히 하면 됩니다."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너는 이상하군.""갑자기요?""모두 내게 빠른 결과를 원했다. 의관도, 황실도, 전장의 지휘관도.""저는 셰프니까요."엘리제는 꿀물 그릇을 들어 올렸다."맛은 밀어붙인다고 빨리 열리는 게 아닙니다. 센 불이 항상 답은 아니니까요.""약한 불로도 고기를 익힌다고 했지.""네. 사람도 비슷합니다."칼릭스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사람도 약한 불로 익힌다.이상한 표현인데,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계약 조항대로 엘리제가 먼저 먹었다.그녀는 꿀물을 한 모금 마시고, 혀끝으로 맛을 확인했다. 꿀은 품질이 좋았다. 다만 향이 조금 거칠었다. 북부 산꿀 특유의 묵직한 꽃향이 있었다."독 없습니다.""그건 이제 안다.""그럼 왜 계속 보십니까?""네가 먹을 때, 맛이 시작되는 것 같아서."엘리제의 손이 멈췄다.이 남자는 이런 말을 왜 늘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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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밤의 레시피

황실 미식회 초청장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금박 문장이 찍힌 봉투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블레이크 공작가의 검은 나무 식탁 위에서 그것은 더욱 눈에 띄었다. 마치 스스로가 명령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향 하나 없으면서도 공간을 장악했다.엘리제는 그 봉투를 한참 바라보았다.초청장이라 쓰였지만 거절할 수 없는 부름이었다.황실은 그녀를 보고 있다.독살 누명을 쓴 악녀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그 악녀가 공작의 미각을 깨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그렇다면 황실은 그녀를 시험할 것이다.맛으로.권력으로.그리고 독으로.엘리제는 주방 한쪽에 앉아 빈 기록지를 펼쳤다.늦은 밤이었다.공작가 사람들은 대부분 잠들었고, 화구도 꺼졌다. 그러나 주방에는 낮의 열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식은 철판, 씻어둔 냄비, 마른 허브, 밀가루 먼지. 그 냄새들이 엘리제의 심장을 이상하게 안정시켰다.주방은 어쨌든 주방이었다.이 세계든, 전생이든.그녀가 숨 쉴 수 있는 곳.엘리제는 펜을 잡았다.황실 미식회 예상 위험.향 조작.독성 약재.르시앙.황태후.칼릭스의 미각 반응.그녀는 하나씩 적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글씨가 조금 비뚤어졌다.손이 피곤했다.아니, 피곤한 건 손만이 아니었다.엘리제는 펜을 내려놓고 손목을 주물렀다.전생의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텅 빈 레스토랑.마지막 손님이 떠난 뒤에도 꺼지지 않던 조명.냉장고 모터 소리.타이머 알림.이미 열여섯 시간 넘게 서 있었는데, 그녀는 새 메뉴의 소스 농도를 다시 잡고 있었다.조금 더 완벽하게.조금 더 선명하게.조금 더 오래 남게.그러다 코끝에 탄 냄새가 났다.몸이 먼저 이상하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무시했다.'조금만 더.'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다.'조금만 더 하면 돼.'그 조금이 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엘리제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또 혼자 하려고 하네.'그녀는 빈 기록지 가장자리에 작게 적었다.혼자 하지 말 것.그 문장을 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자기 자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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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밤의 시식

칼릭스는 잠들지 못했다.그는 원래 잠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작은 발소리, 문틈의 바람, 멀리서 부딪히는 금속음에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하지만 오늘의 불면은 전장 때문이 아니었다.맛 때문이었다.노란 맛.따뜻한 단맛.구운 고기의 뜨거움.그리고 엘리제가 포크를 들고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던 순간.칼릭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손목에 닿았던 감촉. 사형 직전이라 떨린다고 말하면서도 눈은 흔들리지 않던 얼굴. 먹여주던 손끝.맛이란 원래 이런 식으로 남는 것인가. 혀가 아니라 손끝에, 입안이 아니라 눈앞에.칼릭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불쾌하지 않다.'그는 그 감각을 그렇게 분류했다.불쾌하지 않은 것.조금 더 알고 싶은 것.사라지면 곤란할 것 같은 것.이름은 아직 없었다.***엘리제는 주방에서 남은 빵을 먹고 있었다.정확히는 먹다 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내일 황실 미식회 준비를 위해 공작가 식재료 목록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각종 곡물, 북부산 고기, 말린 허브, 꿀, 산미 열매, 포도주 식초. 이 세계의 식재료는 낯설었지만, 냄새와 구조를 알면 응용할 수 있었다.문제는 황실이었다.황실 미식회는 요리 대회가 아니라 권력의 식탁일 가능성이 크다. 독살 누명을 쓴 엘리제가 그 자리에 선다? 분명 누군가는 그녀를 다시 떨어뜨리려 할 것이다.엘리제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오늘 아침 조식용으로 남은 빵이었다. 바삭함은 사라졌지만, 곡물의 고소한 향은 남아 있었다.그때 주방 문이 열렸다.엘리제는 고개를 들었다.칼릭스였다.그는 밤의 주방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이상했다. 검은 옷, 창백한 얼굴, 조용한 발소리. 꺼진 화구들 사이를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밤 그 자체 같았다.엘리제는 빵을 든 채 물었다."공작님, 이 시간에 또 손님이십니까?""혼자 먹나.""이 빵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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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황실 초대장

황실 초대장은 다음 날 아침 공작가 식탁 위에 공식적으로 놓였다.전날 밤 칼릭스가 먼저 읽은 그 봉투와 같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보니 더 노골적이었다. 황금 문장, 정중한 문체, 아름답게 말린 양피지. 겉으로는 초청이었지만 문장 사이사이에 명령이 숨어 있었다.황실 미식회.건국 기념을 앞두고 열리는 제국 최대의 요리 행사.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의 셰프를 내세워 가문의 품격을 과시하고, 황실은 그 식탁 위에서 권력의 서열을 확인한다. 우승자는 황실의 축복을 받지만, 실패한 가문은 웃음거리로 남는다.그런 자리에 독살 누명을 쓴 악녀가 초청받았다.블레이크 공작가 대표 셰프로.엘리제는 초대장을 읽고 웃었다."완전히 미끼네요. 심지어 예쁘게 포장한 미끼고요."베른은 팔짱을 꼈다."미끼라면 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안 물면요?""적어도 함정에는 걸리지 않습니다.""하지만 함정을 설치한 사람이 다음에는 우리 주방 문 앞에 덫을 놓겠죠."베른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말은 맞았다.황실은 엘리제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처형장에서 살아남은 것도, 칼릭스의 미각을 깨운 것도, 공작가 주방을 장악한 것도 모두 소문이 됐다. 황실은 소문을 싫어한다. 특히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한 소문을.칼릭스는 초대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가지 않아도 된다."엘리제는 그를 보았다."정말요?""내 이름으로 거절할 수 있다.""공작님이 황실 초청을 거절하면요?""불편해지겠지.""북부와 황실 관계가 더 험악해지고, 저에 대한 의심은 더 커지고, 공작님의 미각 회복 문제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겠죠."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알고 있군.""그래서 가야죠.""위험하다.""알아요.""그런데 왜 가나."엘리제는 초대장을 접었다."위험한 식탁일수록 누가 뭘 먹이는지 봐야 하니까요. 피하면 독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안 보이게 섞일 뿐입니다."칼릭스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그녀를 막고 싶었다.그 감정은 선명했다.그러나 이유가 복잡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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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돌아와라

새벽의 공작가 주방에는 작은 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엘리제는 그 앞에 서서 칼릭스의 아침 재활식을 준비했다. 황실 미식회로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였다. 거창한 음식은 아니었다. 맑은 보리죽, 약하게 구운 빵, 꿀을 아주 조금 탄 따뜻한 차.맛은 낮게.향은 선명하게.몸에 부담은 없게.엘리제는 보리죽을 저으며 생각했다.'이상하네.'황실 미식회가 기다리고 있었다.독초 영애라는 조롱, 황실의 감시, 르시앙이라는 이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살 누명. 걱정해야 할 것은 많았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칼릭스가 자신이 없는 동안 무엇을 먹을지였다."베른이 해주겠지."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베른이면 충분해. 공작가 주방장이고, 칼도 잘 갈고, 조식도 이제 꽤 이해했고."그런데도 마음이 찝찝했다.칼릭스의 단맛 반응은 아직 불안정했다. 산미는 조금씩 열리고 있었지만, 향이 강한 음식에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황실에 동행한다고 해도 미식회 중에는 떨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가 낯선 향에 노출되면 어떻게 할까. 식사를 거르면? 다시 무감각해지면?엘리제는 손을 멈췄다.'내가 왜 이렇게 신경 쓰지?'계약 때문.미각 재활 때문.공작이 무너지면 자신의 보호도 약해지기 때문.그렇게 이유를 붙이면 설명은 가능했다.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혼잣말이 많군."엘리제는 돌아보았다.칼릭스가 주방 문가에 서 있었다."일어나셨습니까?""네가 주방에 있으면 냄새가 다르다.""그건 좋은 뜻인가요?""그렇다."그는 조리대 쪽으로 걸어왔다. 오늘 그는 황궁에 갈 준비를 마친 차림이었다. 검은 예복은 장식이 거의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압적이었다. 은색 단추와 가문의 문장이 낮은 새벽빛을 받았다.엘리제는 보리죽을 그릇에 담았다."드세요. 떠나기 전에 속을 비워두면 안 됩니다."칼릭스는 자리에 앉았다."네가 없으면 내 식사는 누가 하지?""베른이 합니다. 제가 조리표도 남겨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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