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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본선의 문

황실 미식회 본선장의 문은 아침부터 열려 있었다.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숨을 고르게 되었다. 황궁 서쪽 별관을 통째로 비운 대회장은 화려한 연회장과 전쟁터의 중간쯤에 있었다. 벽에는 황실 문장이 박힌 붉은 휘장이 늘어졌고, 중앙에는 열두 개의 조리대가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조리대마다 서로 다른 마법 화구와 냉각석, 향신료 상자가 놓였다.맛을 겨루는 자리라기엔 지나치게 엄숙했고, 정치 회의라기엔 지나치게 향기로웠다.엘리제는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화려한 향들 사이로 둔한 단내가 섞여 있었다. 연회장의 향을 가장했지만, 사람의 감각을 흐리게 만드는 냄새였다.'벌써 깔아놨네.'엘리제는 숨을 얕게 조절했다.옆에 선 마리가 작은 기록판을 꼭 잡았다."셰프님, 괜찮으십니까?""괜찮아. 아직은 장식용 수준이야.""장식용인데도 이렇게 머리가 무거운데요.""그러니까 장식용이라는 말이 제일 위험한 거야.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거든."마리는 입술을 꾹 눌렀다.칼릭스는 엘리제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오늘 그는 심사석이 아니라 참관석에 앉아야 했다. 황실 미식회 본선은 가문 대표 요리사의 승부였고, 공작이 직접 조리대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칼릭스의 시선은 계속 엘리제에게 머물렀다."냄새가 나쁜가.""네. 하지만 아직 공작님한테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에요.""너에게는.""저도 괜찮습니다."칼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그 말은 믿기 어렵다."엘리제는 괜히 웃었다."요즘 제가 괜찮다는 말 하면 다들 안 믿네요.""네가 가르쳤다.""제가요?""네 손이 먼저 거짓말을 했다."그 말에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손을 숨기려 했다. 밤새 본선 레시피를 정리하느라 손끝이 조금 붉었다. 큰 상처도 아니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그가 손을 뻗었다.대회장 입구였다.귀족들이 오가고, 황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경쟁 요리사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는 자리였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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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향의 라운드

향은 요리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고, 가장 늦게 떠난다.엘리제는 전생의 주방에서 그 사실을 배웠다. 접시가 손님 앞에 놓이기도 전에 향은 먼저 테이블을 건넌다. 먹기 전부터 기대를 만들고, 한입을 삼킨 뒤에도 기억으로 남는다.그래서 향은 가장 아름다운 재료이자 가장 위험한 무기다.잘 쓰면 사람을 초대하지만, 잘못 쓰면 사람을 속인다.황실이 잘하는 건 후자였다.엘리제는 조리대 위의 루메르 향 추출액을 내려다보았다.투명한 액체였다. 겉으로는 무해해 보였다. 은은한 꽃향과 약간의 꿀 향, 뒤쪽에 살짝 남는 포도주 향.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향이었다. 하지만 엘리제의 코에는 다른 것이 잡혔다.감각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는 냄새.아주 약하다.그러나 분명히 있다.마리는 조리대 뒤편 기록석에 앉아 있었다. 본선 규칙상 보조 한 명은 기록을 위해 동행할 수 있었다. 마리는 오늘 하녀복이 아니라 견습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직 어깨는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펜을 쥔 손은 안정적이었다."셰프님. 루메르 향 추출액, 사용하실 겁니까?""응."마리의 눈이 커졌다."위험하지 않습니까?""위험한 재료를 피하기만 하면, 심사위원들은 저게 위험한지도 몰라.""그럼……""쓸 거야. 대신 숨길 게 아니라 드러내는 방식으로."마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빠르게 적었다.루메르 향 추출액. 사용 예정. 목적, 은폐가 아닌 노출.엘리제는 그 글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좋아. 이제 제법이네."마리의 귀가 붉어졌다."아직 많이 부족합니다.""부족하면 배우면 돼. 주방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줄 모르는 사람이야."그 말에 반대편 조리대의 르시앙이 아주 미세하게 반응했다.들었군.엘리제는 모른 척했다.본선 1라운드의 제한 시간은 50분.주제는 향.심사 기준은 향의 조화, 식욕 유도, 재료의 해석, 황실 품격.마지막 기준이 제일 수상했다.황실 품격이라는 말은 대개 황실이 원하는 맛이라는 뜻이었다.엘리제는 재료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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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기억의 맛

기억이라는 주제가 발표되자 대회장 공기가 달라졌다.향은 밖에서 사람을 흔든다.그러나 기억은 안쪽에서 사람을 흔든다.심사위원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요리사들을 바라보았다. 귀족들에게 기억이란 대개 아름답게 포장된 과거였다. 어린 시절의 정원, 첫 무도회, 잊지 못할 연회, 가문의 명예를 증명한 순간.하지만 엘리제에게 기억은 조금 달랐다.하얀 조리복.새벽까지 꺼지지 않던 주방 불.스테인리스 조리대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그리고 숨이 턱 막히던 마지막 순간.엘리제는 손끝을 쥐었다.'괜찮아. 지금은 여기야.'손목에 감긴 칼릭스의 보호 천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그녀를 현실로 붙잡았다.마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셰프님.""응.""얼굴이 창백합니다.""기억이 조금 맛없어서 그래.""그럼 다른 기억을 고르면 안 됩니까?"엘리제는 잠시 웃었다."그럴까 했는데, 이 라운드는 피하면 지는 라운드야.""왜요?""르시앙이 내 기억을 찔렀어. 그럼 내가 먼저 접시로 말해야지."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기록판을 펼쳤다."기억의 주제. 셰프 상태, 창백함. 손끝 긴장.""그것까지 적어?""먹는 사람의 몸이 보고서라면서요. 요리하는 사람도 몸이 먼저 말할 것 같아서요."엘리제는 잠시 마리를 보았다.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맞아. 잘했어."마리의 얼굴이 붉어졌다.2라운드 재료가 공개되었다.닭고기, 오래된 빵, 우유, 말린 사과, 고운 소금, 약한 향신료, 그리고 작은 병 하나.[회귀 향료]엘리제는 병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이름부터 수상했다.병을 열자 부드러운 우유 향과 말린 과일 향이 났다. 그러나 뒤쪽에 아주 희미한 나른함이 있었다. 기억을 부드럽게 떠올리게 하는 향이라 포장했겠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흐리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라운드에서 기억을 요리하라니.'황실다운 장난질이었다.엘리제는 오래된 빵을 들었다.딱딱하고, 건조하고, 가장자리가 거칠었다. 귀족들은 이런 빵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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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피의 식탁

피의 식탁.주제가 발표되자 대회장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향과 기억은 아직 우아하게 포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라는 단어는 달랐다. 노골적이었다. 식재료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죄일 수도 있었다. 황실 미식회에서 이런 주제가 나온다는 건 단순한 요리 실험이 아니었다.누군가를 겨냥한 주제다.엘리제는 본능적으로 칼릭스를 보았다.그는 조용했다.하지만 그의 손끝이 굳어 있었다.북부 전쟁.리아나 황후의 죽음.미각을 잃은 어린 공작.피라는 단어가 그에게 어떤 기억을 건드리는지, 엘리제는 아직 전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불편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낮게 말했다."공작님."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불쾌해요?""그렇다.""좋아요. 말했네요."그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말하면 나아지나.""조금은요. 속에만 두면 맛이 썩어요.""감정도 그런가.""대체로요."칼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불쾌하다."엘리제는 작게 웃었다."잘했어요."그 말에 칼릭스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칭찬받는 것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었다.종이 울렸다.재료 상자가 열렸다.이번 재료는 더 노골적이었다.사슴고기, 붉은 뿌리채소, 석류, 진한 포도주, 철분 향이 강한 약초, 그리고 작은 병에 담긴 붉은 소스.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전장의 소스]엘리제는 병을 열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렸다.냄새가 무거웠다.고기 핏물과 포도주의 산미, 약초의 쓴맛, 그리고 아주 희미한 달큰함.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식욕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만든 소스일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엘리제는 느꼈다.이 소스는 식욕을 살리는 게 아니라, 피 냄새에 익숙해지게 하는 쪽에 가깝다.마리가 작게 말했다."목이 답답합니다.""나도.""쓰실 겁니까?""아니. 오늘은 정면으로 거부할 거야.""심사 기준에 불리하지 않을까요?""불리하겠지."엘리제는 사슴고기를 손질했다."그래도 피를 피 냄새로 덮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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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독초 영애

독.그 단어가 내려온 순간, 대회장은 말을 잃었다.누구나 엘리제를 보았다.독초 영애.공작의 만찬에 독을 탔다고 알려진 악녀.처형장에서 살아남은 여자.그녀가 황실 미식회 본선에서 독이라는 주제를 받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이었다.마리는 바로 기록판을 펼쳤다."셰프님, 이번 주제 의도가 노골적입니다.""괜찮아."엘리제는 조용히 말했다.이번만큼은 그 괜찮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오히려 분명했다.독이라는 말은 그녀를 겁주지 않았다.화나게 했다.'내 요리에 독을 붙인 놈들이, 이제 독을 주제로 내놓는다?'엘리제는 입꼬리를 올렸다.좋아.그럼 제대로 보여주면 된다.독과 약의 차이.먹이면 침묵시키는 음식과, 살리기 위해 쓴맛을 쓰는 음식의 차이.재료 상자가 열렸다.이번에는 더 노골적이었다.쓴 뿌리, 푸른 잎, 검은 열매, 흰 버섯, 향이 강한 꽃잎. 모두 약재이면서 독성이 있을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사용량과 처리법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되는 것들.엘리제는 재료를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좋네."마리가 놀랐다."좋습니까?""응. 드디어 제대로 된 주제야.""독인데요.""독은 나쁜 게 아니야. 용량과 목적이 문제지."마리는 바로 적었다.독. 용량과 목적.르시앙은 반대편에서 엘리제를 보고 있었다."독초 영애에게 어울리는 주제군요.""황실 수석에게도 어울리겠네요.""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아름다운 독을 잘 만들 것 같아서요."르시앙은 잠시 침묵했다.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엘리제는 재료를 골랐다.쓴 뿌리, 검은 열매, 맑은 잎, 닭 육수, 소금, 아주 적은 꿀. 그리고 독성이 강한 흰 버섯은 제외했다.마리가 물었다."버섯은 안 쓰십니까? 가장 강한 재료 같습니다.""강하다고 좋은 재료는 아니야. 오늘은 독을 쓰는 게 아니라, 독이 되지 않게 하는 법을 보여줄 거야.""해독식입니까?""응."엘리제는 쓴 뿌리를 아주 얇게 썰었다.물에 세 번 씻고, 첫물은 버렸다. 두 번째 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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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황태후의 쪽지

황태후의 쪽지는 작았다.그러나 그 안에 담긴 냄새는 작지 않았다.월영초.희미했지만 분명했다. 라벨도, 병도, 가루도 없었다. 단지 종이 끝에 배어 있는 잔향뿐이었다. 누가 맡아도 고급 향지라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옅었다.하지만 엘리제는 알았다.이건 경고다.그리고 미끼다.[독을 그리 잘 안다면, 네 누명도 스스로 벗겨보거라.]엘리제는 쪽지를 다시 펼쳤다.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처형장, 감옥, 독살범이라는 낙인, 단두대 위의 바람.그 모든 것이 짧게 스쳤다.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셰프님, 무슨 내용입니까?"엘리제는 쪽지를 접었다."황태후가 내 첫 번째 누명을 다시 꺼냈어."마리의 얼굴이 굳었다."독살 누명 말씀이십니까?""응."칼릭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그 쪽지."엘리제는 순순히 건넸다.칼릭스는 쪽지를 읽고, 냄새를 맡았다. 그는 아직 월영초 냄새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지만, 불쾌함은 느낄 수 있었다."나쁜 냄새다.""월영초 계열이에요. 아주 약하게.""황태후가 보냈나.""문장은 황태후 거예요. 다만 직접 보냈다는 증거는 아니죠."칼릭스가 말했다."그래도 그녀의 식탁이다."그 말이 정확했다.황태후는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늘 누군가의 향, 누군가의 서류, 누군가의 입을 빌린다. 그러나 냄새의 방향은 결국 그녀에게 향한다.르시앙이 다가왔다."보여주십시오."칼릭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왜."르시앙은 고개를 숙였다."황실에서 쓰는 향지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엘리제는 칼릭스를 보았다."줘도 돼요.""믿나.""아뇨. 필요하니까요."르시앙은 희미하게 웃지도 못한 채 쪽지를 받았다. 그는 냄새를 맡고, 종이 섬유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얼굴을 굳혔다."황태후 직속 서신실의 향지입니다. 일반 황실 문서에는 쓰지 않습니다.""그럼 거의 확정이네요.""거의. 하지만 역시 직접 명령 증거는 아닙니다."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증거를 찾으라는 거겠죠. 아니, 찾다가 당하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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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황태후의 식탁

황태후가 칼릭스를 불렀다는 소식은 조용히 퍼졌다.대회장 안의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알았다. 황태후 세레니아가 직접 누군가를 따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다.특히 그 상대가 블레이크 공작이라면.칼릭스는 엘리제를 돌아보았다."기다려라."엘리제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같이 갑니다.""초대받은 것은 나다.""황태후가 공작님만 부른 게 더 수상하잖아요."칼릭스의 시선이 잠시 깊어졌다."위험하다.""알아요.""그런데도 오겠다고.""공작님이 저한테 늘 하던 말 있잖아요.""무엇.""혼자 삼키지 말라고."칼릭스는 대답하지 못했다.엘리제는 손목의 보호 천을 가볍게 눌렀다."이번엔 제가 말할 차례예요. 공작님도 혼자 가지 마세요."칼릭스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낮게 말했다."그 말은 반박하기 어렵군.""제가 배운 게 많아서요.""나쁜 학생은 아니었군.""좋은 셰프는 배우기도 잘합니다."그는 아주 짧게 웃었다.시종은 난처한 얼굴이었지만, 엘리제가 함께 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블레이크 공작이 허락했고, 엘리제는 그의 전속 셰프라는 명분이 있었다.황태후가 기다리는 곳은 대연회장 옆 작은 응접실이었다.문을 열자마자 엘리제는 냄새를 맡았다.찻잎.진한 꿀.말린 장미.그리고 아주 희미한 월영초.역시.응접실 중앙에는 작은 원형 식탁이 놓여 있었다. 황태후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은빛 드레스와 고요한 미소. 병환 중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오늘의 그녀는 조금도 약해 보이지 않았다."왔구나, 칼릭스."칼릭스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황태후의 시선이 엘리제에게 닿았다."라벤느 영애도 함께 왔구나."엘리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공작 전하의 식사와 향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제 임무라서요.""참으로 성실하구나.""목숨 걸고 받은 직책이라서요."황태후의 미소가 아주 조금 얇아졌다.칼릭스는 엘리제의 말에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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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북쪽 별궁

북쪽 별궁은 황궁 안에서도 오래 버려진 곳처럼 보였다.정확히는 버려진 척하는 곳이었다.정원은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었고, 창문 먼지는 닦여 있었다. 그러나 불빛은 거의 없었다. 사람의 기척을 숨기고 싶은 장소. 황실이 잊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계속 관리하는 장소.엘리제는 별궁 입구에서 숨을 들이마셨다.낡은 약초 향 아래로 오래된 핏내가 섞여 있었다.엘리제의 표정이 굳었다.칼릭스가 물었다."피인가.""오래됐어요. 하지만 있어요."마리는 두 사람 뒤에서 기록판을 품에 안고 있었다. 베른은 이번에도 함께 왔다. 르시앙은 오지 못했다. 본선 참가자 숙소에 머물러야 한다는 황실 명령 때문이었다.그래서 오늘은 칼릭스, 엘리제, 마리, 베른, 그리고 블레이크 기사 둘.작지만 단단한 일행이었다.칼릭스는 손수건으로 감싼 검은 열쇠를 꺼냈다."만지지 마라.""알아요.""정말인가.""공작님, 저도 학습합니다."그는 아주 조금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열쇠는 기록실 문에 정확히 맞았다.딸깍.문이 열렸다.안쪽 공기가 밀려나왔다.엘리제는 곧장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향 있어요."칼릭스가 손을 들어 기사들을 멈췄다."종류는.""월영초는 아니에요. 흑회향 쪽. 목 안쪽을 둔하게 만드는 향. 문을 여는 순간 확 퍼지게 해놨어요."베른이 준비해온 젖은 천을 꺼냈다.엘리제는 마리의 손목에 천을 묶어주었다."무리하면 바로 말해.""네."마리는 긴장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칼릭스는 엘리제에게도 천을 내밀었다."너도.""알아요."그녀가 스스로 천을 묶으려 하자,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엘리제는 잠시 멈췄다.그는 천을 그녀의 손목에 감았다.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손끝은 조심스러웠다."공작님.""말해라.""이런 건 제가 해도 되는데요.""내가 하고 싶다."엘리제는 대답을 잃었다.그 말은 너무 직접적이었다.연회장도 아니고, 주방도 아니고, 위험한 기록실 앞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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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잠긴 기록실

기록실의 향은 빠르게 짙어졌다.처음에는 희미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에 섞여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도였다. 그러나 문이 잠긴 뒤 천장 틈에서 흘러나오는 향은 분명히 달랐다.월영초.달고, 차갑고, 목 안쪽을 느리게 만드는 향.마리가 기침했다."셰프님, 머리가……""천 대고 숨 쉬어. 짧게."엘리제는 마리의 손목을 잡아 가까이 끌었다. 마리는 젖은 천을 코와 입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은 이미 물병을 열어 천을 더 적시고 있었다.칼릭스는 문 쪽에 섰다.검을 뽑은 상태였다."부순다.""잠깐만요."엘리제가 바로 말했다.칼릭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왜.""문에 뭔가 발라져 있을 수 있어요. 손대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그럼 어떻게 나가지."엘리제는 주변을 훑었다.기록실.낡은 서가.좁은 창문 하나.천장 환기구.종이와 나무가 많다. 불은 안 된다. 향은 위에서 내려온다. 공기 흐름을 바꾸면 조금 버틸 수 있다."마리, 창문. 열 수 있는지 봐. 베른, 젖은 천 더. 공작님은 문 말고 벽 쪽 확인해 주세요. 기록실이면 비상 통로가 있을 수도 있어요."칼릭스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지휘하는군.""주방도 위급상황 많아요.""알겠다."그는 바로 움직였다.엘리제는 품 안의 장부와 레시피 사본을 확인했다. 젖으면 안 된다.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 증거는 그녀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 동시에 황태후의 개입을 향해 가는 첫 정확한 칼날이다.마리가 창문 쪽에서 말했다."열립니다. 하지만 너무 작습니다.""공기는 통하지?""네.""좋아. 열어."차가운 밤공기가 조금 밀려들었다. 월영초 향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농도는 조금 낮아졌다.베른은 서가 사이에 젖은 천을 걸었다. 향이 퍼지는 방향을 늦추기 위한 임시 장치였다. 주방에서 연기 잡을 때 쓰는 방식이었다.칼릭스는 벽을 두드리다가 멈췄다."여기."엘리제가 돌아봤다.서가 뒤쪽 벽 일부가 미세하게 울렸다.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비상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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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폐정원의 검

폐정원의 밤은 차가웠다.말라 죽은 장미 덩굴이 검은 그림자처럼 얽혀 있었고, 부서진 분수대에는 물 대신 낙엽과 먼지가 고여 있었다. 달빛은 흐렸고, 황궁 북쪽 담장 너머로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그 앞에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다섯.아니, 분수대 뒤에 둘이 더 있었다.일곱.칼릭스는 검을 들고 엘리제 앞을 막았다.그 등은 넓고 단단했다.엘리제는 그 등 뒤에서 증거 상자를 품에 안았다. 청월초와 월영초 조제 기록. 라온 의관의 사본. 독살 누명을 뒤집을 수 있는 핵심 증거.이걸 잃으면 안 된다.그리고 칼릭스도 다치면 안 된다.그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예전 같으면 증거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공작님.""말해라.""전부 베지 않아도 됩니다."칼릭스는 시선을 앞에 둔 채 물었다."살려둘 이유가 있나.""증언할 입은 많을수록 좋아요.""알겠다."그는 검끝을 조금 낮췄다.죽이기 위한 자세에서 제압하기 위한 자세로.검은 망토 중 하나가 낮게 웃었다."블레이크 공작이 계집 하나 뒤치다꺼리를 하다니."칼릭스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엘리제는 바로 말했다."공작님. 보관."그의 검끝이 멈췄다."보관 중이다.""잘하고 있어요."그 말에 검은 망토들이 비웃었다.그러나 칼릭스는 흔들리지 않았다.그가 먼저 움직였다.엘리제는 그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달빛이 검끝에 스쳤고, 다음 순간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칼릭스의 검등이 손목을 쳐 무기를 떨어뜨린 것이다.기사 둘도 동시에 움직였다.폐정원은 순식간에 전장이 되었다.마리는 베른 뒤에서 기록판을 품에 안고 떨고 있었다. 베른은 작은 단검을 들고 그녀 앞에 섰다. 주방장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세였지만, 이상하게 단단했다.엘리제는 주변을 살폈다.검은 망토들은 칼릭스를 정면으로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둘은 시선을 끌고, 셋은 옆으로 돌았다. 목표는 칼릭스가 아니라 엘리제와 증거 상자다."왼쪽!"엘리제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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