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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전쟁터의 손

르시앙의 미소는 얇았다.웃고 있지만 환영은 없었다. 황실 수석 요리사의 오만함, 그리고 상대를 이미 평가해버린 사람의 지루함이 섞여 있었다.엘리제는 그 얼굴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윤민재랑 똑같이 생겼네.'전생의 기억이 짧게 스쳤다. 스테인리스 조리대, 꺼지지 않던 화구, 자신보다 한 발 늦게 별을 좇던 남자.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윤민재가 아니었다. 르시앙. 황실 주방의 수석. 이 세계의 남자.엘리제는 그 사실을 일부러 머릿속에 새겼다. 전생의 그림자에 발목 잡힐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밀리면 독초 영애라는 이름이 다시 그녀의 목을 죌 것이다.르시앙이 말했다."전쟁터라 했나. 좋은 말이군. 그런데 전쟁터에는 칼을 쥔 자와 칼에 베이는 자가 있지."엘리제는 가볍게 웃었다."그건 칼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죠.""영애가 칼을 안다고?""모르면 여기까지 살아오지 못했겠죠."복도에 있던 요리사들이 술렁였다.귀족 영애가 황실 수석 요리사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볼거리였다.마리는 엘리제 옆에서 기록판을 꼭 쥐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엘리제는 그걸 보며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혼자가 아니다.적어도 이제 기록해줄 사람이 있다.그때 황궁 하인이 다가왔다."참가자 전원, 예비 검수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첫 번째 예비 심사가 곧 시작됩니다."르시앙은 엘리제를 지나치며 낮게 말했다."독초 영애. 미식회에서 가장 먼저 죽는 건, 입만 산 요리사다."엘리제는 그의 등을 보며 답했다."주방에서 가장 먼저 망하는 건, 손보다 입이 빠른 요리사고요."르시앙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예비 검수실은 작은 전쟁터였다.중앙에는 긴 조리대가 다섯 개 놓여 있었다. 각 조리대 위에는 같은 재료가 놓였다. 질긴 북부산 사슴고기, 시든 뿌리채소, 마른 허브, 이름 모를 향신료 세 종류, 그리고 작은 병 하나.병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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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단맛 재활

예비 심사가 끝난 뒤, 황궁은 오히려 더 조용해졌다.겉으로는 축하와 인사가 오갔다. 통과한 요리사들은 서로에게 예의를 차렸고, 탈락한 요리사들은 분한 얼굴로 조리도구를 챙겼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 조용함 아래 깔린 흐름을 느꼈다.황실이 준비한 재료에 문제가 있었다.그걸 독초 영애가 지적했다.그리고 블레이크 공작이 직접 그 접시를 먹었다.이 세 문장은 황궁 복도를 따라 아주 빠르게 퍼질 것이다.마리는 대기실 한쪽에서 기록을 정리했다."투명 액체. 끝향 차가움. 허브와 섞이면 구분 어려움. 심사관 반응 불쾌. 공작 전하 직접 시식."엘리제는 의자에 앉아 손목을 돌렸다.긴장이 풀리자 손끝이 조금 저렸다. 예비 심사 내내 괜찮은 척했지만, 황실 주방의 시선은 무거웠다. 전생의 라이벌과 닮은 르시앙까지 있었으니, 몸보다 머리가 더 피곤했다.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셰프님, 손 괜찮으십니까?""응. 별거 아니야.""그 대답은 공작 전하께서 싫어하십니다."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너 이제 누구 편이야?"마리는 아주 진지하게 답했다."셰프님 생존 편입니다."엘리제는 할 말을 잃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칼릭스가 들어왔다.대기실 안에 있던 하인들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마리는 본능적으로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칼릭스는 그녀를 보지 않고 곧장 엘리제에게 다가왔다."손."엘리제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숨겼다."괜찮습니다.""그 말은 검수 대상이다.""요즘 말이 너무 늘었습니다, 공작님.""네가 가르쳤다."그는 엘리제 앞에 섰다.도망칠 공간은 없었다.엘리제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칼릭스는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가운 손이 닿자 손끝의 저림이 조금 선명해졌다.그는 손바닥과 손가락을 살폈다."베인 곳은 없군.""없다고 했잖아요.""믿지 않았다.""당당하시네요.""네가 거짓말을 자주 해서다."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칼릭스의 손끝이 그녀의 검지 마디를 스쳤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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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조용한 향

두 번째 심사장의 문은 닫혀 있었다.그 앞에 선 순간, 엘리제는 숨부터 줄였다. 문틈 아래로 아주 희미한 향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고, 부드럽고, 끝이 차가운 향. 전날 황궁 입구에서 느꼈던 것보다 조금 더 정교했다.마리는 기록판을 꺼내기도 전에 얼굴을 찡그렸다."셰프님. 벌써 목이 답답합니다.""깊게 들이마시지 마. 짧게.""네."엘리제는 마리에게 작은 천을 건넸다. 전날 준비해둔 맑은 숨 천이었다. 깨어나는 잎과 산미 열매 껍질을 아주 약하게 우린 물에 적셔 말린 천. 강한 해독제는 아니지만, 숨을 가다듬는 데는 도움이 된다."입가에 대고 있어. 기록은 천천히 해도 돼."마리는 천을 받아 들었다."셰프님은요?""나는 괜찮아.""그 대사 금지입니다."엘리제는 입을 닫았다.마리가 너무 많은 걸 배웠다.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정확한 지적이다."칼릭스였다.그는 오늘도 검은 예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어제와 달리 손목에 엘리제가 준 맑은 숨 천을 묶고 있었다. 검은 소매 위의 연한 천 조각은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그거 하고 오셨어요?""네가 준비했다.""그래도 공작님 의상에는 좀……""도움이 된다."그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마리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엘리제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불쾌해요?"칼릭스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렇다. 향이 혀가 아니라 눈 뒤쪽을 누른다."엘리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좋아요. 오늘은 향이 주제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반응 검수예요.""황실이 나를 시험하는 건가.""공작님만이 아니라 모두를요."문이 열렸다.향이 쏟아졌다.***두 번째 심사장은 화려한 온실처럼 꾸며져 있었다.천장에는 유리창이 있었고, 벽마다 꽃과 허브가 걸려 있었다. 조리대 위에는 각기 다른 향신료와 허브, 꽃잎, 과일 껍질, 향초가 놓였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엘리제에게는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좋은 향이 너무 많으면 나쁜 향이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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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기억의 수프

본선 1라운드의 주제는 황실의 기억을 담은 수프였다.아름다운 문장이었다.그래서 더 불쾌했다.황실은 늘 그랬다. 가장 위험한 것에 가장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감각을 누르는 향을 평온이라 불렀고,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빵을 은혜라 불렀다. 이번에는 기억이었다.엘리제는 주제가 적힌 종이를 조리대 위에 놓았다."황실의 기억이라……"마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셰프님, 이 주제가 공작 전하와 관련 있을까요?""거의 확실해.""리아나 황후님의 마지막 수프 때문입니까?"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리아나 황후.칼릭스의 어머니.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었다는 수프. 그리고 칼릭스가 어린 시절 함께 먹었다는 수프. 그 뒤로 칼릭스는 맛을 잃었다.아직 모든 증거가 모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냄새는 이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월영초.달그늘꽃.황실 의관단.그리고 수프.베른이 낮게 말했다."황실이 본선 주제로 공작 전하의 상처를 꺼낸 셈입니다.""맞아요."엘리제는 종이를 접었다."요리 대회인 척하지만, 칼릭스 공작님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요."마리의 얼굴이 굳었다."그럼 공작 전하께 말씀드려야……""말해야지."엘리제는 잠시 멈췄다.전생의 자신이라면 혼자 분석했을 것이다. 위험을 먼저 확인하고, 증거를 잡은 뒤에야 말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이제는 달랐다.혼자 삼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엘리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공작님께 갑시다."***칼릭스는 황궁 북쪽 회랑에 있었다.검은 기둥이 늘어선 긴 복도. 창밖에는 황궁 정원이 보였지만, 밤이라 색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칼릭스는 창가에 서서 어둠을 보고 있었다.그는 엘리제가 다가오는 것을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주제가 나왔나.""네.""좋지 않은가 보군."엘리제는 잠시 숨을 골랐다."황실의 기억을 담은 수프입니다."칼릭스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천천히 돌아섰다."수프.""네.""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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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검은 병

검은 병은 작았다.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 황실 주방에서 흔히 쓰는 향신료 병과 모양이 비슷했고, 라벨도 평범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 병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자마자 속이 불편해졌다.병 안의 액체는 거의 투명했다.다만 빛에 비추면 아주 희미하게 푸른 기가 돌았다.그리고 달고 차가운 냄새.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식단 기록에서 맡았다는 르시앙의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칼릭스는 병을 바라보고 있었다.표정은 차가웠지만, 손끝은 굳어 있었다.엘리제는 그를 보며 말했다."오늘은 제가 먼저 건드리지 않습니다."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좋다.""진짜로요. 약속 지킵니다.""믿겠다."그 짧은 대답이 이상하게도 무거웠다.엘리제는 병 옆에 유리그릇 세 개를 놓았다. 하나는 물, 하나는 닭 육수, 하나는 구운 보리 물. 같은 양, 같은 온도. 반응을 보려면 조건을 맞춰야 한다.마리는 기록판을 들고 준비했다.베른은 조용히 옆에서 도구를 정리했다. 이번에는 공작가 주방장이 황궁 임시 검수실에 직접 들어왔다. 본선 참가자에게 보조를 허용하는 규정이 있던 덕분이었다.르시앙은 문가에 서 있었다.그는 황실 수석 요리사였다. 이 검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엘리제는 그에게 물었다."마지막 식단 기록에서 이 냄새를 맡았다고 했죠. 정확히 어디서요?""기록 원본은 황실 주방 보관실에 있었습니다. 리아나 황후가 마지막으로 드신 수프의 재료 목록이었지요.""거기에 검은 병이 적혀 있었어요?""아니요. 이름은 달랐습니다.""뭐였죠?"르시앙은 잠시 침묵했다."밤이슬 추출액."엘리제는 낮게 웃었다."이름은 참 예쁘게 붙이네요.""당시에는 보양 향료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지금은요?"르시앙의 얼굴이 굳었다."지금은…… 그 이름을 믿지 않습니다."칼릭스가 낮게 말했다."검수해라."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합니다."***첫 번째는 물이었다.엘리제는 검은 병의 액체를 아주 작은 유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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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월영초

월영초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방 안에 남았다.그 이름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독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저주처럼 거칠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달빛 아래에서만 피는 약초 같고, 병든 사람을 재우는 향초 같았다.그래서 더 역겨웠다.엘리제는 황실 주방 기록을 펼쳐놓았다.리아나 황후 마지막 수프.밤이슬 추출액.월영초 분말.달그늘꽃 꿀 절임.흰 뿌리채소.닭 육수.기록은 아름답게 정리되어 있었다. 보양식처럼 보이도록. 병약한 황후의 몸을 달래기 위한 마지막 따뜻한 수프처럼.하지만 엘리제는 알았다.이건 수프가 아니라 조용한 처형이었다.칼릭스는 기록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이 굳어 있었다. 검을 잡을 때도 저렇게까지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공작님."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숨."그제야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엘리제는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지금 느끼는 거 말해요."칼릭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분노.""네.""그리고……"그는 아주 잠깐 멈췄다."늦었다는 감각."엘리제는 마음이 내려앉았다.늦었다.그 말은 맛이 아니라 후회에 가까웠다.칼릭스는 기록지를 보며 낮게 말했다."내가 더 일찍 알았다면.""공작님 잘못이 아니에요.""그 말은 위로인가.""사실입니다."엘리제는 단호하게 말했다."그때 공작님은 아이였어요. 먹으라면 먹어야 했고, 믿으라면 믿어야 했겠죠. 잘못은 먹인 쪽에 있어요."칼릭스는 그녀를 오래 보았다."네가 그렇게 말하면…… 믿고 싶어진다."그 말이 조용히 박혔다.엘리제는 대답 대신 기록지를 접었다.믿고 싶어진다.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그녀가 만드는 건 요리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요리로 믿고 싶은 것까지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월영초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물이 필요했다.황실 주방 기록만으로는 부족했다. 황태후가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나 많았다. 보양 약재였다, 용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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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독초의 이름

카르텐 백작은 북쪽 별궁 앞마당에 서 있었다.그는 황실 감찰관 여섯을 대동하고 있었다. 얼굴은 단정했고, 태도는 법과 절차를 등에 업은 사람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가 별궁 문을 바라보는 눈에서 아주 짧은 조급함을 보았다.그는 늦었다.그리고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칼릭스가 봉인 상자를 들고 별궁 문을 나섰다.카르텐의 시선이 상자에 꽂혔다."공작 전하. 이곳은 황실 감찰 봉인 구역입니다. 사전 허가 없는 수색은 절차 위반입니다."칼릭스는 그를 내려다보았다."합동 조사 명령서가 있다.""카르텐 백작실은 그런 명령을 승인한 적 없습니다."엘리제가 앞으로 나섰다."황녀 전하와 신전, 귀족 의회 공동 명령서입니다. 백작님 사무실보다 맛이 좀 더 강하네요."카르텐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라벤느 영애. 이건 농담할 일이 아닙니다.""저도 농담 아닙니다."엘리제는 봉인 상자를 가리켰다."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수프와 칼릭스 공작님의 감각 봉인 기록이 나왔습니다."공기가 굳었다.감찰관들조차 서로를 보았다.카르텐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게 말했다."확인되지 않은 기록으로 황실을 모욕하지 마십시오.""그러니까 확인하자고요."엘리제는 웃지 않았다."여기서 바로. 신전 사제 부르세요. 귀족 의회 기록관도.""그럴 권한은 없습니다."칼릭스가 말했다."내 어머니의 마지막 식단이다. 내게 권한이 없나?"카르텐은 말문이 막혔다.칼릭스의 목소리는 낮았다."그리고 내 몸에 투여된 기록이다."감찰관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카르텐은 이를 악물었다."그 기록의 진위는 황실 감찰이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상자를 넘기십시오."엘리제가 낮게 중얼거렸다."아, 너무 뻔해."카르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뭐라고 했습니까?""증거 가져가서 조용히 재워버리려고요?""무례합니다.""먹으면 조용해지는 빵 만들던 분들이 절차를 말하니까 좀 그렇네요."마리가 옆에서 숨을 삼켰다.베른은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칼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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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황실의 맛

황실의 맛.그 네 글자는 지나치게 넓었다.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권위도, 전통도, 충성도, 침묵도. 황실이 원한다면 달콤한 디저트에도 붙일 수 있고, 병사들의 보급죽에도 붙일 수 있고, 리아나 황후의 마지막 수프에도 붙일 수 있는 이름.엘리제는 르시앙의 급보를 조리대 위에 펼쳐놓았다.마리는 바로 기록판을 열었다."본선 본선 내부명. 황실의 맛. 월영초 기록과 같은 표기 확인."베른은 팔짱을 끼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본선 예비 재료 목록에 월영초가 섞일 예정이라면, 대회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네."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본선 끝까지 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반응을 보려는 걸 수도 있고요. 특히 공작님."칼릭스는 조용히 서 있었다.그는 이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폭발하지도 않았다. 엘리제는 그 변화가 좋았다. 분노를 느끼되, 그것에 먹히지 않는 것. 그게 그에게 필요한 재활이었다.칼릭스가 말했다."본선에 오를 건가.""올라야죠.""위험하다.""알아요.""이번에는 막지 않는다."엘리제가 그를 보았다.칼릭스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대신 조건이 있다.""뭔데요?""혼자 검수하지 않는다.""네.""먼저 먹지 않는다.""네.""이상하면 바로 말한다.""네.""그리고."그가 잠시 멈췄다."돌아온다."엘리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 말은 이제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 되어 있었다."돌아올게요."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좋다."마리가 조용히 기록하려다 손을 멈췄다.엘리제는 그녀를 보았다."그건 기록하지 마."마리는 눈을 깜빡였다."이미 마음속에 기록했습니다."베른이 낮게 말했다."견습이 빠르게 배웁니다."엘리제는 이마를 짚었다.이 주방은 점점 자신을 놀리는 데 능숙해지고 있었다.***본선 2라운드는 본선 진출자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주제는 귀족의 밤식사.화려한 만찬 후, 잠들기 전 먹는 가벼운 요리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우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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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황실의 사랑

내부 표어는 예상보다 더 노골적이었다.황실의 맛.모든 백성이 조용히 사랑할 맛.엘리제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읽을수록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쓴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사랑은 조용히 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입을 막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늦추는 것도 아니다.그런데 황태후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만들려 한다.엘리제는 종이를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진짜 맛없다."마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셰프님, 주제가 너무…… 이상합니다.""이상한 정도가 아니야."엘리제는 팔짱을 꼈다."이건 황태후의 요리 철학 선언이야. 백성은 조용해야 하고, 조용해야 사랑한다는 뜻."그녀는 조리대 위에 놓인 재료들을 하나씩 다시 만졌다.북부 말린 고기는 칼릭스의 겨울을 닮았다. 흰 뿌리채소는 병상에 올릴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웠다. 산미 열매 껍질은 입안을 깨우고, 작은 빵은 씹는 시간을 남긴다. 아주 약한 단맛은 마지막에만 남길 생각이었다.사랑을 한맛으로 만들 수는 없다.단맛만 있으면 금방 물린다. 쓴맛이 없으면 오래 남지 않는다. 산미가 없으면 가슴이 뛰지 않고, 짠맛이 없으면 몸이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엘리제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내가 지금 사랑을 요리로 해석하고 있는 건가.'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코웃음 쳤을 것이다.사랑? 그런 건 예약이 비는 날이나 생각해보라고. 소스 농도 맞추기도 바쁜데.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칼릭스가 있었다.그는 사랑을 모른다면서도 기다림을 배웠고, 걱정을 맛으로 말했고, 그녀가 돌아오겠다고 할 때마다 그 말을 정말로 믿으려 했다.엘리제는 작은 빵 조각을 손끝으로 눌렀다.'조용히 사랑할 맛이라니.'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사랑은 조용하지 않다.때로는 칼릭스처럼 직선적이고, 때로는 자신의 심장처럼 쓸데없이 소란스럽다.그래서 이번 접시는 조용할 수 없었다.그녀는 재료 옆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사랑은 침묵이 아니라 선택.그리고 그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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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공개 보호

황실 미식회 본선 등록소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귀족 가문들이 보낸 요리사와 보조들이 줄을 서 있었고, 황실 감찰관들은 이름표와 반입 재료를 하나씩 확인했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했지만, 엘리제는 문턱을 넘는 순간 알았다.오늘의 검수는 평범하지 않다.시선이 너무 많았다.엘리제 폰 라벤느라는 이름이 등록서 위에 적히자, 주변의 펜이 잠시 멈췄다. 누군가는 대놓고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독초 영애. 처형장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 블레이크 공작의 미각을 깨웠다는 이상한 셰프.그 모든 이름이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엘리제는 고개를 들었다."저는 여기 정식으로 등록하러 왔습니다. 표정 관리가 어려우신 분들은 물부터 드세요."마리가 뒤에서 숨을 삼켰다. 베른은 조용히 입꼬리를 누르고 있었고, 칼릭스는 아무 말 없이 엘리제의 왼쪽에 섰다. 그 한 걸음이 오늘의 첫 보호막이었다.등록관이 헛기침을 했다."라벤느 영애의 본선 등록에는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무엇을 확인하실 겁니까?""독살 혐의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황실 미식회는 제국의 품격을 다루는 자리입니다. 참가자에게 의혹이 남아 있다면……""그 의혹 때문에 오늘 제가 여기에 서 있는 겁니다."엘리제는 등록서 위에 손을 올렸다."독살범이라 불린 사람이 진짜 독을 구분할 줄 안다는 걸, 황실 식탁 위에서 증명해야 하니까요."주변이 조용해졌다.그때 카르텐 백작이 안쪽 문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법무 대신실의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정중한 피로가 얹혀 있었다. 늘 그랬듯 절차라는 칼집을 들고 나타난 사람의 얼굴이었다."엘리제 폰 라벤느 영애. 말은 흥미롭지만 황실 미식회는 개인 명예 회복장이 아닙니다.""그럼 무엇입니까?""제국의 식탁입니다.""좋네요. 그럼 더더욱 제가 필요하겠군요. 제국의 식탁에 이상한 향이 섞이는 걸 막아야 하니까."카르텐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칼릭스가 낮게 말했다."등록을 막을 근거가 있나."카르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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