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하자 국가가 나를 보호하고, 전남편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Chapter 61 - Chapter 70

130 Chapters

61화. 아침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서윤은 커피라도 마실 생각으로 1층에 내려왔다.주방에서는 토스트 굽는 냄새가 번졌고, 사용인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서윤은 식탁 끝에 기대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서윤의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강재헌이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셔츠는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느슨하게 풀어진 옷깃 아래에는 여자가 일부러 남긴 듯 선명한 붉은 립스틱 자국이 번져 있었다.그 흔적을 보는 순간 서윤의 가슴이 세게 조여왔다. 유리의 전화를 받고 나간 남자가 어디에서 밤을 보냈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제 눈으로 확인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문득 결혼 첫해의 어느 아침이 떠올랐다.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로 한 날, 서윤은 새벽부터 된장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웠다. 하지만 재헌은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전화를 여러 번 걸고도 받지 않자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안 들어와요?]한참 뒤 돌아온 것은 짧은 답장이 전부였다.[일 있어. 먼저 자.]다음 날 아침에야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서윤은 밤새 삼켰던 걱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연락도 없어서 걱정했어요.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재헌은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네며 회사 사람들과 늦게까지 있었다고 했다. 믿어야 부부라고 생각했던 서윤은 더 묻지 못한 채 그의 셔츠를 받아 세탁실로 가져갔다.그때도 정말 회사 사람들이었을까.“사모님, 커피 준비됐습니다.”사용인의 목소리에 서윤은 가까스로 정신을 돌려 잔을 받아 들었다. 그사이 식당으로 들어온 재헌도 그녀를 발견했다.“밤새 못 잔 얼굴인데, 아침부터 여기서 뭐 해?”평범하게 귀가한 남편처럼 묻는 목소리에 서윤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잠이 깨서 내려왔어요. 조금 있다가 나갈 준비도 해야 하고요.”재헌이 가까이 다가오자 셔츠에 밴 낯선 향수 냄새가 커피 향 사이로 스며들었다. 서윤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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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전화 한 통이면 가는 남자

서윤이 외출 준비를 마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도 재헌은 식당에 있었다.평소라면 진작 출근했을 시간이었지만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앞에 둔 채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든 재헌의 시선이 짙은 회색 원피스와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천천히 훑었다.“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 아침부터 그렇게 서둘러?”“오전에는 연구단에 들르고 오후에는 외부 미팅이 있어요. 어제부터 잡혀 있던 일정이라 조금 일찍 나가려고요.”예전의 서윤이라면 몇 시쯤 돌아올지까지 덧붙였을 것이다. 재헌은 자연스럽게 뒷말을 기다렸지만 서윤은 현관 옆 콘솔에서 자동차 키를 챙겼다.그 순간 식탁 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차유리였다.재헌의 손이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 역시 그 이름을 봤지만 아무 말 없이 구두를 꺼내 신었고, 전화는 한 번 끊겼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울렸다.두 번째 진동이 길게 이어지고서야 재헌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어제 그렇게 해놓고 아침부터 또 무슨 일이야.”짜증이 섞인 낮은 목소리였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유리의 다급한 말이 이어지자 재헌은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지금 어디 있는데? 혼자 움직이지 말고 거기 있어. 내가 갈 테니까.”통화를 끊은 그는 소파에 벗어둔 재킷과 자동차 키를 집었다.마침 서류를 들고 들어오던 김 집사가 시계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홉 시 반 이사회가 예정돼 있습니다. 지금 출발하시면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오세진한테 연락해서 미뤄. 조정이 안 되면 부사장이 먼저 시작하라고 하고, 필요한 보고는 이동하면서 받을 테니까.”재헌은 망설이지 않았다.서윤은 구두를 신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젯밤에도 자신과 마주하고 있던 남자는 유리의 전화 한 통에 일어났고, 결국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다.오늘은 이사회까지 뒤로 미루고 있었다.현관으로 걸어오던 재헌은 서윤과 시선이 마주치자 걸음을 조금 늦췄다.“유리가 갑자기 일이 생겼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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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사랑받는 여자는 나야

재헌의 차가 호텔 앞에 멈춘 건 유리가 마지막 전화를 건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유리는 유리문 너머 검은 세단을 발견하자 입가를 슬쩍 끌어올렸다. 아침부터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사실 혼자 해결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재헌이 회전문을 밀고 들어오자 유리는 금세 불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오빠, 진짜 와줬네. 회사에 중요한 일정 있다고 했잖아.”“그걸 알면서 아침부터 계속 전화한 거야? 급한 일 아니면 나 바로 가야 해.”차갑게 쏘아붙이면서도 재헌은 곧장 유리 앞으로 다가와 얼굴과 손목부터 살폈다.유리는 테이블 위 휴대전화를 내밀었다.“아침부터 모르는 번호로 계속 전화가 오는데 집 앞에도 이상한 차가 서 있었다고 관리실에서 연락했어. 나 혼자 들어가려니까 무서워서 오빠한테 전화한 거야.”재헌은 통화기록을 확인한 뒤 호텔 직원에게 CCTV와 발신 번호 기록을 확인해달라고 지시했다.“미안해. 괜히 오빠 일까지 망치는 것 같아서.”유리가 셔츠 소매를 살며시 잡자 재헌은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알면 다음부터 상황부터 제대로 설명해. 다짜고짜 울면서 와달라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잖아.”“그래도 오빠는 와주잖아. 어젯밤에도 그랬고 오늘도 내가 무섭다고 하니까 결국 또 와줬으면서.”재헌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깐 멈췄다. 유리는 그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고 그의 팔에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그러니까 자꾸 오빠부터 찾게 되나 봐.”재헌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도 않았다.그때 유리의 시선이 그의 셔츠 깃에 닿았다. 어젯밤 일부러 입술을 스쳤던 자리에 붉은 흔적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속으로 웃음이 번졌지만 유리는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머, 오빠. 여기 뭐 묻었어.”손끝으로 셔츠 깃을 문지르던 유리가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이거 혹시 내 립스틱인가 봐. 어제 묻었나? 나는 있는 줄도 몰랐어.”재헌이 무심코 내려다보던 순간 표정이 굳었다.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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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남편이 다른 여자 집에서 나온 밤

차유리의 집에 도착한 뒤에도 재헌은 바로 돌아가지 못했다.보안업체 직원들이 현관 CCTV와 주차장 영상을 확인하는 동안 유리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낯선 차량이 단지 앞을 몇 차례 지나간 기록은 있었지만 유리를 따라다녔다고 단정할 만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현관 카메라 하나 더 달고 며칠 동안 사람 붙여. 같은 차량이 다시 나타나면 번호부터 확인하고.”재헌이 지시를 끝내자 유리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늘만 여기 있어주면 안 돼? 오빠까지 가버렸는데 그 차가 다시 나타나면 나 혼자 어떻게 해.”“사람까지 붙여놨는데 무슨 걱정이야. 이사회까지 미뤘으니까 이제는 정말 가봐야 해.”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헌은 불안한 얼굴로 매달리는 유리를 두고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까지 두 번이나 넘긴 뒤에야 재킷을 챙겨 집을 나섰고, 유리는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나왔다.같은 시각 1층 로비에서는 서윤의 외부 협력 미팅이 막 끝나고 있었다.서윤은 태하와 연구단 관계자 두 명, 협력사 실무진과 함께 카페에서 나왔다. 태하와 다음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로비를 가로지르던 순간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문이 열리고 재헌이 먼저 나왔다.서윤의 걸음이 느려졌고 태하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뒤따르던 사람들의 대화 역시 하나둘 잦아들었다.아침에 다른 여자의 립스틱을 셔츠에 묻힌 채 돌아왔던 남자가 불과 몇 시간 만에 다시 그 여자의 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재헌은 휴대전화로 회사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아직 서윤을 발견하지 못했다.그 뒤에서 나온 유리가 먼저 알아봤다.서윤뿐만 아니라 그녀의 곁에 선 태하와 주변 사람들까지 확인한 유리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오빠, 잠깐만.”재헌이 돌아서자 유리는 그의 재킷 깃을 잡아 직접 정리해주었다.“아침부터 정신없었잖아. 이것도 제대로 못 입고 가려고?”“됐으니까 들어가. 보안업체에서 연락 오면 바로 전화하고.”유리는 물러나는 대신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재헌이 미처 떼어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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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질투해주길 바라는 남편

서윤이 태하와 함께 건물을 벗어난 뒤에도 재헌은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유리가 다시 그의 팔을 감싸려 하자 재헌은 손을 거칠게 떼어내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고, 두 번째 전화는 채 몇 번 울리지도 않아 끊겼다.“오빠, 지금 꼭 언니한테 해명해야 해? 내가 갑자기 그런 거라고 나중에 말하면 되잖아.”재헌의 시선이 차갑게 떨어졌다.“사람들 보는 앞에서 일부러 그랬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유리의 입술이 굳었다가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그냥 오빠가 반가워서 그런 건데 왜 나한테만 화를 내? 언니가 봐서 그래, 아니면 옆에 있던 그 남자가 봐서 그래?”“둘 다 아니니까 그만해. 오늘은 집에서 나오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재헌은 유리가 다시 붙잡기도 전에 돌아섰다.차에 올라탄 뒤에도 조금 전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리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걸 본 서윤의 얼굴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태하와 함께 돌아선 뒷모습이 더 거슬렸다.아침에도 그랬다. 셔츠에 남은 립스틱을 보고도 서윤은 따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밤새 어디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한 번쯤은 물었을 여자였다.그런 질문을 귀찮아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막상 서윤이 남의 일처럼 돌아서자 속이 뒤틀렸다.더 거슬리는 건 그 옆에 태하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선배, 가요.그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재헌은 운전대를 움켜쥔 채 오세진에게 전화했다.“오후 일정 한 시간씩 밀어. 한서윤 다음 일정도 확인하고.”키보드 소리가 이어지더니 세진이 능글맞게 말했다.“오전에는 차유리 씨 때문에 이사회 미루시고, 오후에는 사모님 찾아가시게요? 오늘은 회사보다 두 분 일정이 더 중요하신 모양입니다.”“오세진.”“알겠습니다. 공식 일정만 확인해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실 거면 한 시간으로 충분하시겠습니까?”“주소나 보내.”얼마 지나지 않아 협력기관 주소가 도착했다. 재헌은 회사로 향하던 내비게이션 목적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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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그 질문을 왜 나한테 해

밤늦게 저택으로 돌아온 서윤이 침실 문을 열자 어둠 속 소파에 재헌이 앉아 있었다.넥타이조차 풀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낮부터 쌓인 감정이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얼굴이었다.“윤태하가 데려다줬어?”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재헌의 묵직한 발소리가 곧바로 따라붙었다.“내가 묻잖아. 오늘도 그 자식 차 타고 왔냐고.”귀걸이를 빼던 서윤이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그 질문을 왜 나한테 해요? 당신이 밤새 찾아가던 여자는 따로 있었잖아.”재헌의 턱이 굳었다.“누가 내가 유리를 원한대?”“그럼 아니에요?”서윤이 돌아섰다.“사랑하지도 않는 여자한테 전화 한 통이면 달려가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또 찾아가요? 내가 보는 앞에서 안기고 입 맞추는 것까지 가만히 받아주면서?”“그건 유리가 갑자기 한 거라고 했잖아.”“그럼 차유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금 내 앞에서 말해봐요.”재헌의 입이 다물렸다.서윤은 그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그 말은 못 하잖아.”그녀가 옆으로 지나치려는 순간 재헌이 앞을 가로막았다.“사랑이니 뭐니, 지금 그딴 게 중요해?”“나한테는 중요했어요. 당신 아내였으니까.”“지금도 내 아내야.”재헌의 목소리가 거칠게 낮아졌다.“그리고 그 자리를 윤태하 그놈한테 넘겨줄 생각도 없어.”“내가 물건이에요? 당신이 쥐고 있다가 누구한테 줄지 결정하게?”서윤이 그를 밀어내고 지나치려 하자 재헌의 팔이 허리를 거칠게 감았다. 삼 년 동안 너무 익숙해진 힘에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붙었다.“그럼 왜 그 자식 앞에서는 그렇게 웃는데.”“놔요.”“나한테는 눈도 제대로 안 맞추면서 그놈 옆에서는 웃고, 선배라고 부르고, 따라가잖아. 내가 그 꼴을 보고도 가만있어야 해?”“당신은 차유리한테 달려갔잖아.”재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그래서 너도 다른 남자한테 갈 거냐고.”말끝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서윤이 고개를 돌리려다 멈칫했다. 삼 년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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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끝까지 놓지 못하는 남자

서윤이 드레스룸을 빠져나간 뒤에도 재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반쯤 열린 드레스룸 문 너머로 침실의 희미한 간접등이 길게 번졌다. 바닥에는 서윤이 벗어놓은 귀걸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고, 흐트러진 러그와 비뚤어진 화장대 의자에는 조금 전 두 사람이 뒤엉켰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입술에는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었고, 손끝에는 조금 전 제 품 안에서 흔들리던 몸의 감각이 선명했다. 삼 년을 함께 살면서 서윤이 먼저 자신을 밀어내고 돌아선 적은 없었다.재헌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 뒤 침실로 따라 나왔다.서윤은 침대 옆에 작은 여행 가방을 펼쳐놓고 옷을 챙기고 있었다.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던 방이 이제는 옷걸이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까지 선명할 만큼 조용해져 있었다.“뭐 하는 거야.”“보면 몰라요?”서랍에서 잠옷과 옷가지를 꺼내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재헌의 눈빛이 사나워졌다.“어디 가려고.”“옆방에서 잘 거예요.”“누구 마음대로.”서윤이 옷을 접던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내가 어느 방에서 잘지도 당신 허락을 받아야 해요?”재헌은 대답 대신 성큼 다가가 열린 가방 뚜껑을 닫아버렸다.“오늘은 여기서 자.”“싫어요.”짧고 단호한 거절에 재헌의 턱이 굳었다.“방금까지 내 품에서 그렇게 흔들려놓고 이제 와서 남처럼 굴겠다는 거야?”서윤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그러니까 내가 나온 거예요. 내가 아직 당신한테 흔들린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당신은 그걸 권리처럼 생각했잖아.”“그럼 흔들리지 마.”재헌이 가방 위에 손을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나 때문에 아프지도 말고 질투도 하지 마. 대신 윤태하 그 자식한테도 가지 마.”서윤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당신은 정말 끝까지 자기 생각밖에 안 하네요.”“그래. 나 원래 이런 놈이야.”재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유리 때문에 내가 잘한 거 없다는 것도 알아. 그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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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가지 말라고 말할 자격

오후 세 시, 대학 연구동 회의실에는 연구자료와 새 협약서가 테이블을 가득 덮고 있었다.지도교수가 두툼한 협약 초안을 서윤 앞으로 밀었다.“공동책임자가 아니라 책임연구자야. 상대 기관에서도 한서윤 박사를 직접 지명했어. 최소 일 년, 길면 이 년까지 보고 있고.”서윤이 첫 장을 넘기자 옆에 앉은 태하가 구겨진 서류 모서리를 내려다봤다.“겁먹었어?”“아니거든요.”태하가 손을 내밀어 서윤의 손 위에 잠깐 겹쳤다. 손끝에서 힘이 빠지자 서류를 가져간 그가 찌그러진 모서리를 천천히 펴주었다.“이번에는 네 이름으로 가. 남이 허락해주길 기다리지 말고.”서윤이 그를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선배는 내가 떠나는 게 좋아요?”“내가 좋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네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그 순간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재헌이었다.그의 시선은 서윤의 얼굴보다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거리와 아직 서류 위에 남아 있는 태하의 손에 먼저 꽂혔다.“재밌어 보이네.”지도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강 대표? 여긴 무슨 일인가?”재헌은 대답하지 않고 성큼 다가와 협약서를 낚아챘다.해외 공동연구. 책임연구자 한서윤. 예상 체류 기간 1~2년.종이를 움켜쥔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일 년 넘게 한국을 떠나겠다고?”서윤은 협약서를 빼앗아 제 앞에 내려놓았다.“아직 검토 중이에요. 그리고 결정은 내가 해요.”“안 돼.”낮게 떨어진 한마디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서윤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막는데?”“네 남편 자격으로.”“남편 자격?”서윤의 입술이 비틀렸다.“차유리 전화 한 통에 달려가 밤을 보내고, 그 여자 립스틱까지 묻혀 돌아온 날 당신이 직접 버렸잖아.”지도교수마저 시선을 피했다.재헌은 턱을 조인 채 테이블 건너편의 태하를 바라봤다.“당신도 같이 갑니까?”“현재 제안대로라면 저도 참여합니다.”재헌의 시선이 다시 서윤에게 돌아왔다.“그래서 그렇게 웃었어? 이 사람하고 일 년 넘게 같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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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놓으시죠

“강 대표님. 놓으시죠.”태하의 목소리가 좁은 비상계단에 묵직하게 울렸다.재헌의 시선이 서윤의 팔을 움켜쥔 제 손에서 태하에게 향했다.“지금 뭐라고 했습니까?”“서윤이가 놓으라고 했습니다.”태하는 다가와 재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단단히 맞물린 두 남자의 팔 위로 힘줄이 솟았다.“본인이 싫다고 하는데 계속 붙잡고 계실 겁니까?”재헌의 입꼬리가 비틀렸다.“내 아내입니다.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태하의 시선이 서윤의 팔에 남은 붉은 손자국으로 내려갔다.“부부 일이라서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윤이가 몇 번이나 놓으라고 했는데도 계속 붙잡으면 얘기가 달라지죠.”재헌이 태하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두 남자의 어깨가 부딪칠 만큼 거리가 좁아졌다.“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내 여자 옆에서 선 넘지 마. 아까부터 손 대고 웃게 만들더니 이제 내 앞까지 막아서?”“서윤이는 대표님 물건이 아닙니다.”재헌이 태하의 멱살을 움켜쥐자 서윤이 곧장 다가왔다.“강재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재헌은 태하의 옷깃을 놓지 않은 채 서윤을 돌아봤다.“왜, 내가 이 자식 잡으니까 걱정돼? 다치는 꼴이라도 볼까 봐?”“그만하라고요. 여기서 선배가 무슨 상관인데!”그제야 재헌이 태하를 밀어냈다. 태하의 등이 난간에 부딪쳤지만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서윤 앞을 막아섰다.“서윤아, 네가 정해. 갈 건지, 남을 건지.”재헌이 헛웃음을 흘렸다.“뭘 정해. 얘는 나랑 가.”그가 손을 뻗자 서윤이 먼저 물러났다.“나 당신하고 안 가요. 오늘도, 해외 프로젝트도 내가 결정할 거예요.”서윤은 그대로 방화문을 지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재헌도 뒤따랐다.“한서윤, 내가 아직 얘기 안 끝났어.”태하의 차량에서 비상등이 깜빡였다. 태하가 조수석 문을 열자 재헌이 성큼 끼어들어 먼저 닫아버렸다.쾅.“강재헌.”“택시를 타든 기사를 부르든 내가 데려다주든 상관없어. 그런데 윤태하 차는 타지 마.”재헌은 차 문에 손을 짚은 채 서윤과 차량 사이를 막았다.“아직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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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래도 사랑받는 건 나야

회원제 살롱의 오후 티타임에는 얇은 금테 찻잔과 계절 한정 디저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밖 정원으로 고급 세단이 들어설 때마다 발레파킹 직원들이 움직였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자들은 서로의 가방과 보석을 훑으면서도 입가의 미소만큼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유리 씨는 갈수록 얼굴이 좋아지네. 강 대표가 그렇게 잘해준다면서?”맞은편에 앉은 정재계 사모가 은근한 부러움을 담아 묻자 유리는 찻잔 손잡이를 가볍게 만졌다.“오빠는 원래 그래요. 제가 조금이라도 불안하다고 하면 그냥 못 지나쳐요.”옆자리의 박정희가 기다렸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재헌이가 사람한테 그렇게 마음 쓰는 애가 아니야. 어릴 때부터 유리한테만 유별났지.”“최근에 옮긴 집도 강 대표가 직접 알아봐줬다는 게 사실이에요?”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유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집만이겠어요.”보안업체를 다시 불러 CCTV를 증설하고 사람을 붙여준 일부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준 것까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몰락한 친정 때문에 생긴 골치 아픈 문제에도 재헌은 별말 없이 손을 써주었다.그런데 유리의 시선은 자꾸 테이블 아래 엎어둔 휴대전화로 향했다.오늘은 연락이 없었다.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이 겁먹은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면 중요한 회의를 미루고 달려오던 남자였다. 한밤중에 찾아와 곁을 지켰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전화했을 때도 회사 일정을 바꿔가며 제 집으로 왔다.하지만 그날 로비에서 한서윤과 마주친 뒤부터 재헌은 이상해졌다.자신이 보는 앞에서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붙잡는 팔을 떼어내면서까지 그녀를 따라갔다. 자신이 입을 맞춘 순간에도 재헌의 시선은 품 안의 유리가 아니라 맞은편에 서 있던 한서윤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어제는 자신의 전화까지 받지 않았다.“유리야.”박정희가 부르자 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그냥…… 재헌 오빠가 요즘 언니 일에 너무 예민한 것 같아서요.”박정희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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