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하자 국가가 나를 보호하고, 전남편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Chapter 71 - Chapter 80

130 Chapters

71화. 내 아내 일정에서 빠지십시오

도심 컨벤션센터 소회의실 벽면에는 해외 협력기관의 연구 일정이 빼곡하게 떠 있었다. 서윤은 지도교수 옆에서 출국 전 검증 항목을 설명하고 있었다.“현지 실증은 한 박사가 총괄하고, 윤 박사는 국내 자료 연계를 맡는 방향으로 갑시다.”태하가 노트북 화면을 넘겼다.“출국 전까지 서윤이랑 장비 반출하고 보안자료 분류부터 맞춰야겠습니다.”“오늘 끝나고 목록부터 정리해요.”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죄송합니다. 강재헌 대표님께서 한서윤 박사님을 급히 만나셔야 한다고…….”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헌이 들어왔다.“여기까지 왜 왔어요?”“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재헌은 서윤의 의자 뒤에 선 채 태하의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봤다.출국 준비 미팅 / 한서윤·윤태하.저녁 자료 검토와 주말 장비 확인 일정까지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공식 회의 말고 둘이 밤늦게 따로 만나는 일정까지 뭡니까?”재헌이 서윤의 등 뒤로 몸을 숙였다. 화면을 짚으려 뻗은 팔이 어깨 옆을 지나며 익숙한 체온과 향이 목덜미 가까이 내려앉았다.서윤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며칠 전 밤 그의 품 안에서 흐트러졌던 감각이 원치 않게 되살아났다.재헌의 시선이 붉어진 귓불을 훑었다.“나한테는 그렇게 벽을 치면서 몸은 아직도 기억하잖아.”서윤이 곧바로 의자를 밀어냈다.“착각하지 마요. 싫어서 굳는 걸 수도 있으니까.”주변의 시선이 쏠렸지만 태하는 노트북을 돌려 다음 일정을 띄웠다.“회의 계속하시죠.”재헌의 시선이 태하에게 꽂혔다.“윤태하 씨. 앞으로 한서윤 개인 일정에서 빠지십시오. 저녁에 단둘이 자료를 보고, 개인 차로 데려다주는 건 연구와 별개죠.”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걸 강 대표님이 정하십니까?”“남편이니까.”“신경은 쓰십시오. 결정은 서윤이가 합니다.”재헌은 물러서지 않았다.“결정은 한서윤이 하겠죠. 그렇다고 내가 얌전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계속 막겠다는 겁니까?”“필요하면.”서윤이 두 사람 사이로 휴대전화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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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허락은 필요 없어요

밤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서윤은 드레스룸 바닥에 캐리어를 펼쳤다.사흘 치 옷가지와 연구 서류, 여권을 챙겨 파우치에 넣으려던 순간 문가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재헌이었다.그가 쥔 휴대전화에는 서윤의 출국 일정이 떠 있었다.“일요일 밤 귀국.”“확인했으면 나가요.”재헌은 오히려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펼쳐진 캐리어 안쪽의 호텔 예약 확인서에 꽂혔다.기다란 손이 먼저 종이를 집어 들었다.“윤태하도 여기 묵나?”서윤이 낚아채려 하자 팔을 들어 손이 닿지 않게 했다.“같은 층이고?”“이제 방 번호까지 알아내시게요?”“필요하면.”“정말 질리네요.”서윤이 캐리어를 닫으려 하자 재헌은 확인서를 내려놓고 덮개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쿵.“밤늦게까지 둘이 자료 검토. 그 뒤는?”“공식 일정 끝이에요.”“그놈도?”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지퍼를 잡았다. 재헌의 손이 그 위를 막았고, 넓은 어깨까지 앞으로 들어오며 빠져나갈 틈이 사라졌다.“선을 넘네요.”“아직 대답 안 했어.”“대답할 의무 없어요.”재헌이 캐리어 손잡이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서윤 역시 놓지 않았다.바퀴가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서윤의 어깨가 단단한 가슴에 부딪혔고, 재헌의 손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 옆을 잡아 세웠다.고개를 들자 바로 위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뜨거운 숨결이 입술 가까이 번지고, 재헌의 시선이 서윤의 눈에서 입술로 천천히 떨어졌다.며칠 전 밤 서로에게 깊이 얽혔던 감각이 불쑥 되살아났다.서윤의 손이 그의 셔츠 앞자락을 움켜쥐었다.“당신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재헌이 그 손을 내려다보다 서윤의 눈을 마주했다.“내 아내가 다른 남자랑 사흘을 붙어 다니는데, 그걸 질투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그가 고개를 낮췄다.입술이 닿기 직전, 재헌은 멈췄다.“대신 착각하지 마. 내가 허락했다는 뜻은 아니니까.”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당신이 차유리한테 갈 때는 내 허락받고 갔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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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문 앞을 막은 남편

오전 8시 17분, 서윤이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내려오자 현관에서 외투를 정리하던 김 집사의 손이 멈췄다.그보다 먼저 재헌이 나와 있었다. 넥타이도 없이 짙은 셔츠 소매만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콘솔에 기대 있던 그가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8시 20분.”어젯밤 서윤이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던 차량 도착 시간이었다.“오세진 씨를 들볶아서 결국 알아냈나 보네요.”재헌은 변명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성큼 다가오더니 김 집사가 받으려던 캐리어를 먼저 낚아채 자신의 뒤로 밀었다. 바퀴가 대리석을 거칠게 긁자 청소 중이던 사용인까지 놀라 돌아봤다.“내놔요.”재헌은 구두로 바퀴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호텔 몇 시에 들어가.”서윤은 대답 대신 손잡이를 놓고 현관으로 향했다.찰칵.도어록에 손이 닿기도 전에 재헌이 뒤따라와 문을 잠갔다. 열쇠까지 주머니에 넣자 지켜보던 김 집사의 얼굴이 굳었다.“대표님.”재헌은 듣지 않았다.때마침 차량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왔다. 정확히 8시 20분이었다.재헌은 잠금장치를 풀었지만 비켜서지는 않았다. 열린 현관 한가운데를 큰 몸으로 막아선 채 다가오는 기사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다시 서윤을 내려다봤다.서윤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어깨로 막았고 반대쪽으로 틀면 긴 팔로 문틀을 짚었다. 캐리어는 여전히 그의 구두 뒤에 붙잡혀 있었다.“집안 사람들 다 보고 있어요.”“보라고 해.”재헌은 도착하면 연락하고 일정이 끝나는 시간과 호텔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알려달라고 요구했다.서윤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내가 밤새 기다릴 때 당신은 차유리 옆에 있었어요. 전화도 문자도 무시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내 하루를 전부 보고받겠다고요?”재헌이 문틀을 짚은 손을 말아쥐었다.“그거랑 이건—”“다르다고 하지 마요. 당신이 싫으면 내가 윤태하 선배랑 일하는 것도, 같은 호텔에 묵는 것도 허락받아야 해요?”윤태하라는 이름에 재헌의 시선이 확 달라졌다. 열린 대문과 차량을 오가던 눈이 서윤에게 박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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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말하고 싶을 때 하십시오

뮌헨에 도착해 곧장 연구시설로 향했을 때는 오후가 훌쩍 지나 있었다.차창 밖으로 독일어 간판과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스쳐 갔다. 교차로에서는 붉은 트램이 젖은 선로를 지나갔고, 낮게 깔린 회색 하늘 아래 가로수는 조금씩 가을빛을 띠고 있었다.연구시설 정문에서 여권과 방문증을 확인받은 서윤은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 가방 깊숙이 넣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까지 여기로 끌고 오고 싶지 않았다.회의실에는 독일 연구진과 한국 실무진이 모여 있었다. 대형 모니터에 실증 장비 데이터가 떠오르자 서윤은 곧 연구에 빠져들었다.윤태하는 출입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의 중 서윤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생수병을 말없이 밀어주었을 뿐, 아침 일은 묻지 않았다.서윤이 병을 집어 들며 쳐다보자 태하가 옅게 웃었다.“마셔. 아까부터 물도 안 마셨잖아.”검토가 끝났을 때는 밤 열 시가 가까웠다.건물 밖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젖은 도로 위로 트램 불빛이 길게 번졌고, 늦게까지 문을 연 카페에서는 독일어가 빗소리에 섞여 흘러나왔다.서윤이 처마 아래에서 가방을 뒤지던 순간, 머리 위로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가자. 호텔까지 데려다줄게.”태하였다.두 사람이 나란히 걷자 우산 아래가 생각보다 좁았다. 서윤이 거리를 벌릴 때마다 태하의 오른쪽 어깨가 빗속으로 밀려났다.“선배, 어깨 다 젖어요.”“난 괜찮아.”“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태하가 서윤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였다.“그럼 조금만 가까이 와. 네가 젖는 것보다는 낫잖아.”서윤의 걸음이 잠깐 멈칫했다.반걸음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코트 소매가 살짝 스쳤다. 큰 키 때문에 우산을 낮춰 든 태하의 검은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서윤은 무심코 그를 올려다봤다.곧은 콧날과 단단한 턱선, 젖은 셔츠 아래로 드러난 넓은 어깨. 늘 반듯한 정장 차림으로만 보던 선배가 순간 낯선 남자처럼 보였다.시선이 마주치자 서윤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태하는 못 본 척 보폭만 맞췄다.호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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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전화를 받지 않는 아내

강재헌의 휴대전화 화면에 통화 종료 표시가 떴다.또 받지 않았다.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표실은 늦은 시간까지 환했다. 통유리 너머로 빌딩 불빛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고, 검은 대리석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재헌은 그 한가운데서 휴대전화만 내려놓지 못했다.한서윤.발신 기록만 벌써 쉰일곱 개를 넘어섰다.맞은편에 서 있던 오세진이 결국 보고를 멈췄다.“대표님, 독일은 지금 깊은 밤입니다. 사모님도 일정이 끝났으면 쉬셔야 할 시간인데요.”“남편 전화 받는 데 몇 초 걸린다고.”재헌은 서윤의 이름을 다시 눌렀지만 긴 연결음 끝에 통화는 또 끊겼다.“윤태하 일정은.”“사모님과 같은 실증 연구 일정입니다.”“그 뒤는?”오세진이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그건 제가 따로 확인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재헌의 턱이 굳어지는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차유리였다.전화를 받자 흐느끼는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오빠… 어떡해.”“무슨 일이야.”“오늘 엄마 집에 갔는데 그 사람들이 또 찾아왔어. 현관 앞에서 소리 지르고 문까지 두드렸어. 엄마는 괜찮다고만 하고… 나 너무 무서워서 그냥 집으로 왔어.”재헌은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고 있었다.“문 잠그고 있어. 지금 갈게.”조금 전까지 독일에 있는 아내 때문에 얼굴을 굳히던 남자가 첫사랑의 울음에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한서윤한테 연락 오면 바로 알려.”재헌은 그 말만 남기고 대표실을 빠져나갔다.차 안에서도 서윤에게 두 번 더 전화했다.받지 않았다.그 연결음을 들으면서도 차는 유리의 집으로 향했다.유리가 사는 곳은 재헌이 귀국 후 마련해준 고급 빌라였다. 보안 게이트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전용 엘리베이터가 곧바로 세대로 연결됐다.현관문이 열리자 유리가 맨발로 뛰어나와 재헌의 품에 안겼다.“오빠.”재헌은 밀어내지 않았다. 한 팔로 유리의 허리를 감싸 거실로 데려가자 유리 테이블 위에 구겨진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어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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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첫사랑과 다시 키스했다

유리는 재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넥타이를 움켜쥔 채 제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입술을 덮쳤다. 재헌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고, 유리는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 그의 목 뒤까지 팔을 감았다.재헌은 밀어내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향과 체온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오히려 유리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몇 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서로의 반응은 익숙했다. 재헌의 손이 가느다란 허리선을 따라 움직이다 멈췄고, 가까스로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의 숨은 뜨겁게 뒤엉켜 있었다.유리의 손끝이 그의 턱선을 느리게 훑었다.“거봐. 입술은 거짓말 못 하잖아. 몇 년이 지나도 몸은 기억하고 있잖아.”재헌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깊고 서늘한 눈빛에도 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그의 목을 감아 입술을 부딪쳤다.그 순간 재헌이 입술을 열었다.독한 위스키가 입술 사이로 천천히 넘어오자 유리가 짧게 숨을 삼키며 그의 셔츠를 세게 움켜쥐었다. 술을 받아 삼킨 유리가 붉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목덜미와 뺨 위로 열기가 빠르게 번졌다.“이것도 그대로네.”“뭐가.”“오빠가 나 취하게 만드는 방법.”유리가 웃으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우리 처음 술 마셨던 날 기억나? 오빠가 나 취했다고 집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사실 하나도 안 취했었어.”재헌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알고 있었어. 취한 애가 집 앞에서 삼십 분이나 안 들어가고 키스해 달라고 버티지는 않으니까.”“알면서 다 해줬잖아. 한 번으로 부족하다고 하면 다시 안아주고.”그때는 복잡할 게 없었다. 유리를 사랑했고, 원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며 멈춰야 할 이유도 없었다.유리가 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오빠 옆에 나밖에 없었던 때로.”느슨해진 넥타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가 다시 목을 감아오자 이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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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이번에는 내가 봤다

뮌헨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마지막 실증 검토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다음 날 오전까지 예정돼 있던 후속 일정까지 취소되면서 서윤은 귀국 항공편을 앞당겼다. 인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일주일 동안 이어진 실증 회의와 장거리 비행 탓에 몸은 무거웠지만 호텔로 바로 갈 수는 없었다. 다음 주 회의에 필요한 원본 자료가 저택 서재에 있었고, 옷과 개인 물건도 몇 가지 챙겨야 했다.차가 빗길을 가르고 저택 앞에 멈춘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대부분의 창은 어두웠지만 2층 한쪽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서윤은 차에서 내리다 무심코 그 창을 올려다봤다.자신과 재헌이 쓰던 침실이었다.현관문이 열리자 김 집사의 얼굴에 반가움보다 당황이 먼저 스쳤다.“사모님, 오늘 돌아오신다는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일정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요. 서재에서 필요한 것만 챙겨서 바로 나갈 거예요.”구두를 벗던 서윤의 시선이 현관 한쪽에서 멈췄다.가느다란 굽의 여자 구두와 작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누구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서윤이 계단으로 향하자 김 집사가 급히 한발 따라붙었다.“사모님, 필요하신 물건은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하실 텐데 아래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떠십니까.”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었다.서윤이 계단 중간에서 돌아봤다.“유리 씨가 다시 들어왔나요?”김 집사의 입술이 굳었다.그 침묵이면 충분했다.서윤은 더 묻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복도 끝으로 갈수록 나른한 클래식 음악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자신과 재헌이 사용하던 침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서윤이 문을 밀었다.침대 위에 차유리가 있었다.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고, 얇은 실크 로브 아래로 맨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흐트러진 침구 한가운데 비스듬히 기대어 휴대전화를 보던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침대 옆 협탁에는 반쯤 비운 와인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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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뺨을 때린 손

유리의 낮은 목소리가 침실에 가라앉았다.서윤은 흐트러진 침대와 와인잔, 바닥에 허물처럼 떨어진 유리의 원피스를 차례로 바라봤다.마지막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서 있는 재헌에게 시선이 닿았지만, 두 사람이 저 침대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서윤이 자료 가방을 고쳐 들었다.“오해할 것도 없네요.”유리의 입가에 남아 있던 미소가 굳었고, 재헌의 눈썹이 거칠게 좁혀졌다.“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혼자 뭘 결론 내리고 있는 건데?”“결론 내리러 온 게 아니라 자료 가지러 왔어요. 두 분 하던 거 계속하세요.”서윤이 돌아서자 재헌은 셔츠를 집어 들고 뒤따라 나왔다.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은 채 서재 문을 막아선 얼굴에는 당황보다 짜증이 번지고 있었다.“한서윤, 사람 말 무시하고 그냥 가지 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잖아.”서윤은 그를 비켜 서재로 들어가 원본 연구 자료를 챙겼다.“유리가 몸이 안 좋아서 쉬게 한 것뿐이야. 네가 멋대로 상상해서 일을 키울 이유는 없어.”서윤이 파일 지퍼를 닫으며 그를 바라봤다.“당신이 누구를 데려와 어느 방에서 재우든 이제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요.”자신의 침대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보고도 이유조차 묻지 않는 서윤의 태도가 재헌의 신경을 더 거칠게 긁었다.서윤이 드레스룸에서 작은 캐리어를 꺼내 옷과 노트북을 담자 재헌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지금 화나서 이러는 거면 나한테 화를 내. 독일에서부터 남편 전화는 전부 무시해 놓고 돌아오자마자 짐 싸서 나가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서윤의 손이 멈췄다.“내가 따지면 뭐라고 대답할 건데요? 유리 씨랑 키스했는지, 같이 잤는지, 왜 내 침대에 있었는지 하나씩 물어봐야 해요?”재헌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키스 좀 한 게 그렇게 중요해? 유리랑 나는 원래 그런 사이였어. 네가 날 만나기 훨씬 전부터.”찰싹!마른 소리가 드레스룸을 갈랐다.재헌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복도에 서 있던 유리가 숨을 삼켰고, 문밖의 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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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남편 없는 집을 구했다

재헌의 손이 캐리어 손잡이 위에서 하얗게 굳었다.서윤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한참 뒤에야 낮게 입을 열었다.“그래. 적어도 네가 내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동안은, 이렇게 네 마음대로 나갈 수 없어.”“차유리 씨는 사랑해서 지키고, 나는 아내라서 붙잡는 거네요.”재헌의 턱이 굳었지만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들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서윤이 캐리어를 당기자 재헌은 놓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이거 놔요. 오늘은 당신이랑 더 할 얘기 없어요.”“어디로 갈 건데? 호텔이야, 아니면…… 윤태하가 기다리는 데야?”끝까지 그 이름이었다.서윤은 재헌을 바라보다 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캐리어 갖고 싶으면 가지세요.”연구자료가 든 가방만 어깨에 멘 서윤이 현관으로 내려갔다. 뒤따라온 재헌이 계단 끝에서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서윤이 먼저 돌아서며 그의 손을 쳐냈다.“이번에도 내 몸에 손대거나 길을 막으면 경찰 부를 거예요. 국가과학전략청에도 지금 상황 그대로 알리고요.”현관에 서 있던 김 집사의 얼굴이 굳었다.재헌의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 이를 악물고 서윤을 내려다보던 그는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았다.서윤이 구두를 신는 동안 2층 복도의 유리는 얇은 로브 자락을 움켜쥔 채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현관문이 열리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밀려들었다.“한서윤. 지금 이 문 나가면 내가 그냥 둘 것 같아?”서윤의 발이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그럼 이번에는 뭘 할 건데요? 또 남편이니까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할 건가요?”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문이 닫히고, 재헌은 텅 빈 현관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다음 날 오후, 서윤은 전략청 연구시설에서 멀지 않은 신축 주거단지에 와 있었다.보안 출입문을 지나자 중개인이 고층 세대의 문을 열어주었다. 재헌의 저택보다 작았지만 침실과 거실이 분리돼 있었고, 창가에는 책상과 연구자료를 둘 공간도 충분했다.“박사님처럼 혼자 지내시는 분들이 많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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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데리러 온 남편

초인종이 울렸을 때 중개인은 아직 거실에 있었다.서윤이 모니터를 확인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재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팽팽하게 선 턱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문을 열자 재헌의 시선이 서윤을 지나 중개인에게 꽂혔다.“혹시 배우자분이십니까?”“아니요. 여기 살 사람은 저 혼자예요.”서윤이 먼저 잘라 말하자 재헌의 손이 멈췄다.“한서윤.”“계약은 끝났으니까 돌아가요.”재헌은 그대로 들어와 테이블 위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임차인 한서윤. 오늘부터 시작되는 계약기간을 확인한 그의 손끝에서 종이가 구겨졌다.“오늘부터 여기서 살겠다고?”“네.”“계약 취소해.”중개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계약자 본인이 원하지 않으시면 배우자분이라도 임의로 취소할 수 없습니다.”“위약금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돈 문제가 아니라 계약자분 의사가 우선입니다.”서윤이 계약서를 가져와 가방에 넣었다.“들었죠?”그때 재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대표님, 이사회 시작했습니다. 회장님도 오셨습니다.”오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재헌은 서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미뤄.”“오늘 안건은 못 미룹니다.”“알아서 해.”전화를 끊자 서윤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회사까지 내팽개치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내 여자가 집을 나가 딴살림을 차리는데 이사회가 눈에 들어오겠어?”곧 다시 전화가 울렸다.[차유리]“오빠, 어디야? 혹시 언니한테 간 거야?”재헌은 서윤을 바라보다 대답 없이 끊었다.“받아주지 그래요. 사랑해서 지켜야 하는 여자잖아요.”“지금 그 얘기 꺼내지 마.”이번에는 서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략청 연구지원팀]“박사님, 내일부터 출퇴근 차량을 새 주소로 보내드릴까요?”서윤은 재헌을 바라봤다.“네. 앞으로는 이쪽으로 보내주세요.”“윤태하 실장님께도 보안 검토 요청하겠습니다.”재헌의 눈매가 좁혀졌다.“전화 이리 줘.”서윤은 몸을 돌렸다.“이전 주소는 출입 동선에서 제외해주세요.”통화가 끝나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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