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침실 문이 열렸다.가장 먼저 침대 위에 벗어놓은 붉은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대에는 서윤이 쓰지 않던 짙은 색조 화장품과 향수병이 늘어서 있었고, 욕실 문에는 유리의 가운이 걸려 있었다.박정희의 발걸음이 느려졌다.재헌의 베개 옆에는 유리의 베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는 흰 베개 하나가 밀려나 있었다.서윤의 물건을 정리하던 김 집사가 반출하려고 따로 빼두었던 것을 유리가 방을 차지하면서 바닥으로 밀어낸 것이었다.박정희가 허리를 숙여 베개를 집어 들었다.베갯잇 모서리에 작은 이니셜이 수놓여 있었다.H.S.Y.뒤따라온 김 집사가 문가에서 멈췄다.유리는 순간 목 안이 바짝 말랐다. 별것 아닌 베개 하나였다. 어차피 떠난 여자의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있는 박정희의 표정을 보는 순간, 괜히 먼저 변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머니, 그건 오해예요. 언니가 어차피 나갔고, 오빠도 제가 여기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아서 그냥 제가 방을 조금 정리한 것뿐이에요.”박정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조금?”그녀의 시선이 침대 위 붉은 원피스에서 화장대의 향수병, 재헌 옆에 놓인 유리의 베개를 차례로 지나갔다.그러고는 손에 든 서윤의 베개를 침대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차유리, 내가 네 아버지 사업이 잘나가던 시절부터 널 봐왔지. 그래서 네가 눈치가 없는 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유리의 미소가 완전히 굳었다.박정희가 그제야 그녀를 돌아봤다.“남의 남자 침대에 먼저 들어가 누웠다고 그 집 안주인이 된 줄 알았다면, 내가 널 너무 높이 봤구나.”유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누가 감히 이 방을 네 방이라고 했니?”유리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억눌렀다.재헌이 분명 허락했다. 어젯밤에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는 서윤이 앉던 자리까지 내주었다. 그 사실을 박정희의 얼굴에 내던지듯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상대는 이 집안의 기강을 쥔 박정희였다.유리는 굳어진 입꼬리를 억지로
Last Updated : 2026-09-19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