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하자 국가가 나를 보호하고, 전남편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Chapter 81 - Chapter 90

130 Chapters

81화. 하나도 남기지 마세요

새집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이었다.서윤은 거실 바닥의 작은 여행 가방을 열었다. 연구자료와 노트북, 며칠 입을 옷이 전부였다. 저택을 나올 때 캐리어를 포기했으니 나머지는 대부분 그 집에 남아 있었다.서윤은 휴대전화를 들었다.“사모님.”“김 집사님, 제 방에 남아 있는 물건들 보내주세요.”“필요하신 물품을 말씀해주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필요한 것만 말고 전부요.”전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서윤은 새 가구 냄새가 남은 거실을 둘러봤다. 강재헌의 셔츠도, 차유리의 웃음소리도 없는 곳이었다.“옷이랑 책, 개인 서류, 화장품까지 전부 보내주세요. 제 건 하나도 남기지 말아 주세요.”“……알겠습니다.”서윤은 노트북을 챙겼다. 오전에는 연구팀 회의가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쪽이 더 중요했다.***오전 열 시가 조금 넘어 저택 2층으로 포장 상자들이 올라왔다.“사모님 개인 물품부터 정리하세요. 귀중품은 따로 포장하고요.”원피스와 코트가 옷장에서 빠지고 전공서적과 논문 자료가 상자에 담겼다. 화장대까지 비워지자 방은 빠르게 낯설어졌다.복도를 지나던 유리가 멈춰 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사모님 물품을 정리하고 있습니다.”유리의 시선이 절반 이상 비어버린 옷장으로 향했다.“언니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언제 오는지는 모르고요?”“말씀 없으셨습니다.”유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정말 나갔다.한서윤이 이 집에서 제 흔적을 스스로 지우고 있었다.유리는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보를 쓸었다. 재헌과 서윤이 부부로 지내던 방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엄마.”― 어떻게 됐어?“진짜 나간 것 같아. 짐까지 전부 빼고 있어.”차미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서윤이 비운 자리가 저절로 네 자리가 되는 건 아니야. 네가 차지해야 네 자리가 되는 거지.통화가 끝났다.사용인이 서윤의 흰색 실크 잠옷을 상자에 넣으려는 순간 유리가 낚아챘다.“이것도 보내요?”“사모님 물건이라서요.”유리는 잠옷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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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남편보다 먼저 준비한 남자

다음 날 아침, 재헌이 식당으로 내려왔을 때 유리는 이미 그의 커피잔을 들고 사용인을 몰아세우고 있었다.한 모금 맛을 본 유리가 얼굴을 구기며 잔을 거칠게 내밀었다.“이거 탄내 나고 너무 진하잖아. 오빠 아침에는 이렇게 안 마시는 거 몰라? 원두 줄이고 우유 조금 넣어서 당장 다시 가져와. 매일 하는 일을 왜 똑바로 못 해?”사용인이 황급히 잔을 받아 드는 순간 재헌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방금 전까지 날카롭게 치켜올라가 있던 유리의 눈매가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오빠, 왔어?”그녀는 금세 나긋한 목소리로 재헌에게 다가가 넥타이 매듭에 손을 댔다.“이거 조금 비뚤어졌어. 가만있어 봐. 내가 해줄게.”재헌은 피하지 않았다. 유리는 익숙한 여자처럼 넥타이를 바로잡고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손을 감았다.“커피도 다시 시켰어. 오빠 아침에 진한 거 싫어하잖아. 여기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 하나 제대로 기억을 못 하더라.”재헌은 대꾸하지 않은 채 자기 자리로 향했다.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옆 의자를 끌어당겼다.서윤이 앉던 자리였다.“나 오늘부터 여기 앉을래. 괜찮지?”재헌의 시선이 빈 의자에 잠시 머물렀다.어젯밤 김 집사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사모님께서 하나도 남기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침실도, 욕실도, 드레스룸도 비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한서윤이라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워진 뒤에야 그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유리가 그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 싫으면 싫다고 해.”재헌은 의자에서 시선을 거뒀다.“앉고 싶으면 앉아.”“역시 오빠밖에 없어.”유리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그녀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식사를 준비하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짧게 오갔다. 그때 김 집사가 다가와 유리 앞에 놓인 식기를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손님 식기는 원래 지정된 자리로 옮겨드리겠습니다.”유리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손님이라니.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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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두 남자의 경고

그제야 유리가 천천히 돌아섰다.얼굴에서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아까 내가 커피 다시 가져오라고 했지?”잔을 치우던 사용인의 어깨가 움찔했다.“죄송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바로?”유리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식탁 위의 커피잔을 손등으로 거칠게 밀어버렸다.쾅.잔이 넘어지며 검은 커피가 흰 테이블보를 타고 번졌다. 사용인들이 놀라 달려들자 유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데? 귀가 처먹었어? 아니면 강재헌 앞에서만 사람 취급하고 내가 하는 말은 개소리로 들려?”“죄송합니다. 제가 금방 치우겠습니다.”“뭘 잘했다고 죄송하다는 말만 해? 치우고 다시 가져와. 그리고 저 재수 없는 꽃도 당장 창가로 옮겨!”사용인이 꽃병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자기도 모르게 김 집사를 바라본 것이다.유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또 저 늙은이 쳐다보네.”그녀가 성큼 다가가 꽃병을 직접 움켜쥐었다.“내가 옮기라고 했으면 옮기면 되지, 왜 매번 저 인간 허락을 받아? 내가 그렇게 우스워?”“차유리 씨.”김 집사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섰다.“사용인들에게 언행을 삼가십시오. 대표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해서 이 저택의 사람들까지 함부로 대할 권리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유리가 꽃병을 탁 내려놓았다.“당신이 뭔데 자꾸 나한테 권리 타령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집 종놈 주제에.”“이 저택을 총괄 관리하는 집사입니다. 그러니 저택의 일에 관해서라면 제가 말씀드릴 자격은 충분합니다.”김 집사의 목소리는 끝까지 평평했다.그게 오히려 유리를 더 미치게 했다.“내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강재헌이 나 여기서 자게 했고, 자기 옆자리에도 앉게 했어. 어젯밤에도 같은 방에서 잤다고. 그런데 당신이 뭔데 계속 나를 손님 취급해?”“대표님 침실에 들어가시는 것과 이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식당 안이 얼어붙었다.김 집사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사모님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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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아내의 자리에 앉은 여자

유리가 구겨진 장보기 목록을 주방 테이블 위에 던졌다.사용인들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유리가 세탁물 정리표까지 낚아채려던 순간, 현관 쪽에서 묵직한 엔진음이 들렸다.인터폰을 확인하러 갔던 사용인이 얼굴이 굳은 채 돌아왔다.“사모님 오셨습니다. 대표님 어머님이십니다.”유리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조금 전까지 독기로 번들거리던 눈빛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구겨진 종이를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사이 현관문이 열렸고, 일정한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예정에 없던 박정희였다.김 집사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오셨습니까, 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출근하셨습니다.”“재헌이 보러 온 건 아니야. 연락 없이 왔다고 어미가 아들 집 문턱도 못 넘겠니.”박정희는 핸드백을 사용인에게 건네며 거실로 들어오다가 걸음을 멈췄다.흰 테이블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커피 얼룩이 번져 있었고, 의자 하나는 비뚤어져 있었다. 주방 테이블에는 구겨진 장보기 목록과 세탁물 정리표가 뒤섞여 있었다.박정희의 시선이 천천히 식당을 훑었다.“사람을 몇이나 두고 쓰는데 아침부터 집 꼴이 왜 이 모양이야? 내가 모르는 사이 살림 방식이라도 바뀌었니?”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사용인들의 등이 일제히 굳었다.그때 유리가 주방에서 나왔다.“어머니, 오셨어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차라도 준비해 놓는 건데.”조금 전 사용인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싹싹한 얼굴이었다.박정희는 다가오는 유리를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네가 왜 주방에서 나와?”“재헌 오빠 저녁 좀 챙겨주려고요. 여기 사람들이 아직 오빠 입맛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아서 제가 조금 봐주고 있었어요.”김 집사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박정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식탁으로 걸어가 재헌 옆에 유난히 빠져나와 있는 의자를 바라봤다.“아침에 누가 여기 앉았어?”“제가요. 오빠랑 같이 먹었어요.”유리가 일부러 밝게 웃었다.박정희의 손끝이 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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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차씨 집안의 딸

주침실 문이 열렸다.가장 먼저 침대 위에 벗어놓은 붉은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대에는 서윤이 쓰지 않던 짙은 색조 화장품과 향수병이 늘어서 있었고, 욕실 문에는 유리의 가운이 걸려 있었다.박정희의 발걸음이 느려졌다.재헌의 베개 옆에는 유리의 베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는 흰 베개 하나가 밀려나 있었다.서윤의 물건을 정리하던 김 집사가 반출하려고 따로 빼두었던 것을 유리가 방을 차지하면서 바닥으로 밀어낸 것이었다.박정희가 허리를 숙여 베개를 집어 들었다.베갯잇 모서리에 작은 이니셜이 수놓여 있었다.H.S.Y.뒤따라온 김 집사가 문가에서 멈췄다.유리는 순간 목 안이 바짝 말랐다. 별것 아닌 베개 하나였다. 어차피 떠난 여자의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있는 박정희의 표정을 보는 순간, 괜히 먼저 변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머니, 그건 오해예요. 언니가 어차피 나갔고, 오빠도 제가 여기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아서 그냥 제가 방을 조금 정리한 것뿐이에요.”박정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조금?”그녀의 시선이 침대 위 붉은 원피스에서 화장대의 향수병, 재헌 옆에 놓인 유리의 베개를 차례로 지나갔다.그러고는 손에 든 서윤의 베개를 침대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차유리, 내가 네 아버지 사업이 잘나가던 시절부터 널 봐왔지. 그래서 네가 눈치가 없는 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유리의 미소가 완전히 굳었다.박정희가 그제야 그녀를 돌아봤다.“남의 남자 침대에 먼저 들어가 누웠다고 그 집 안주인이 된 줄 알았다면, 내가 널 너무 높이 봤구나.”유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누가 감히 이 방을 네 방이라고 했니?”유리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분노를 억눌렀다.재헌이 분명 허락했다. 어젯밤에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는 서윤이 앉던 자리까지 내주었다. 그 사실을 박정희의 얼굴에 내던지듯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상대는 이 집안의 기강을 쥔 박정희였다.유리는 굳어진 입꼬리를 억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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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내가 이 집의 진짜 안주인이다

유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박정희가 자신을 며느리로 원했던 이유가 사랑받을 만해서도, 재헌과 어울려서도 아니었다.집안.돈.간판.그것뿐이었다.유리의 입술이 비틀렸다.“그건…… 저희 집안 사정이에요. 집이 조금 어려워졌다고 제가 달라진 건 아니잖아요. 재헌 오빠도 그런 조건 따위 상관없이 절 다시 받아줬고요.”“받아는 줬지.”박정희는 순순히 인정했다.오히려 그 담담한 태도가 유리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러니까 네가 재헌이 옆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난 신경 안 써. 재헌이가 널 끼고 살든, 보석을 사주든, 어디를 데리고 다니든 그것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어.”유리의 눈빛이 흔들렸다.박정희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하지만 그걸 이 집안의 안주인 대접까지 받을 자격이 생겼다는 뜻으로 착각하지는 마.”유리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한서윤이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요!”결국 눌러두었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그 여자는 오빠도 싫다, 이 집도 싫다면서 다 내던지고 나갔잖아요. 그런데 왜 그 여자는 되고 저는 안 되는 건데요?”박정희가 잠시 유리를 바라봤다.“내가 서윤이를 귀하게 여겨서 이러는 줄 아니?”차가운 코웃음이 흘렀다.“나도 걔 마음에 안 들어. 제 남편 하나 붙들 생각도 없이 연구니 일이니 하며 밖으로 도는 것도 못마땅하고, 이번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짐을 빼서 나간 것도 오만하기 짝이 없지.”유리의 눈에 순간 희망이 번졌다.그러나 박정희의 다음 말이 그 기대를 단숨에 짓밟았다.“그래도 걔는 강재헌의 법적인 아내야. 연구를 하든 제 인생을 찾겠다고 밖으로 나돌든, 적어도 지금 강씨 집안의 정식 며느리라는 이름은 한서윤이 가지고 있어.”박정희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넌 아니고.”유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러니까 내 앞에서 서윤이 행세하지 마. 걔가 비운 자리에 네가 저절로 들어앉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박정희는 미련 없이 김 집사를 불렀다.문가에 서 있던 김 집사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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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너 원래 이렇게 조용한 애 아니었잖아

이삿짐 상자 여섯 개가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서윤은 그중 ‘주방’이라고 적힌 상자를 발끝으로 밀어놓고 식탁 위에 노트북부터 펼쳤다. 아직 커튼조차 달지 않은 창으로 늦은 오전 햇살이 쏟아졌고, 접이식 의자 위에는 어젯밤 벗어놓은 재킷과 연구 자료가 뒤섞여 있었다.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어수선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누가 어느 자리에 앉는지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정해진 아침 식사 시간을 맞추거나 밤늦게 들어오는 사람의 발소리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어디에 무엇을 두든, 몇 시에 밥을 먹든 전부 서윤이 정하면 됐다.그 단순한 사실이 낯설면서도 좋았다.서윤은 화상회의 화면을 열었다.“다혜 씨, 어제 보내준 데이터 다시 봤는데요. 3차 조건에서 온도값이 튀는 건 장비 오차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화면 속 정다혜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저는 반대로 봤는데요. 시료 문제라면 2차 분석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나왔어야 해요. 장비 보정부터 다시 잡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그럼 오전에 장비 검증부터 하고 결과 보고 오후 실험 결정하죠.”“네. 대신 오늘 일정 밀리면 박사님 책임입니다.”서윤이 웃었다.“내가 언제 책임 회피한 적 있었어요?”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커다란 종이봉투 두 개를 든 최은채가 서 있었다.“한서윤. 너 진짜 여기 사는 거 맞아?”은채는 들어오자마자 휑한 거실을 둘러봤다.“침대는 있어?”“들어왔어.”“냉장고는?”“있고.”“먹을 건?”서윤이 대답하지 못하자 은채가 한숨을 쉬며 봉투를 식탁에 내려놓았다.“역시 없구나. 김밥이랑 샌드위치, 과일 사 왔어.”노트북에서 다혜의 목소리가 들렸다.“박사님, 저 아직 접속되어 있는데요.”은채가 화면을 보며 눈을 빛냈다.“누구야?”“정다혜 씨. 지금 같이 프로젝트 진행하는 공동 연구자.”은채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당겼다.“혹시 얘 요즘도 자기 분석이 무조건 맞다고 우겨요?”“은채야.”다혜가 웃었다.“조금요. 방금 전까지도 저랑 의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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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하나도 안 변했네

“사람이 5년 동안 계속 똑같이 살 수는 없잖아.”서윤의 대답은 담담했다.은채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남은 김밥을 밀폐용기에 옮겨 담으며 슬쩍 말을 돌렸다.“그래도 너무 재미없는 인간으로 변하진 마. 대학 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네가 사고 치면 뒤에서 수습한 건 항상 나였지.”“기억까지 왜곡됐네.”서윤이 작게 웃자 은채도 따라 웃었다.휴대전화가 울렸다.“네, 다혜 씨.”수화기 너머로 빠른 목소리가 쏟아졌다.“박사님, 장비 보정 끝났는데 결과가 똑같아요. 제가 맞았습니다. 시료 건드리지 마시고 바로 오세요.”서윤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원데이터 열어놨어요?”“네. 그리고 오후 실험 취소하면 안 됩니다.”“그건 내가 보고 결정할게요.”전화를 끊은 서윤이 재킷을 집어 들었다.은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너 이사한 지 하루 됐어.”“알아.”“이 집을 이렇게 해놓고 어디 가?”“연구실.”은채가 피식 웃었다.“역시 하나도 안 변했네.”한 시간 뒤, 연구동 실험실에서는 다혜가 모니터 두 대에 데이터를 띄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보세요. 장비를 세 번 돌렸는데 같은 구간에서 오차가 납니다. 시료가 아니라 센서 반응 문제예요.”서윤은 그래프를 확대했다.“센서라면 이 구간만 튈 이유가 없어요. 시료 하나 더 확인하죠.”다혜의 표정이 굳었다.“그러면 오늘 본 실험 못 들어갑니다. 박사님은 정확한 데이터가 먼저지만 저는 전체 일정도 봐야 해요. 이번 주에 결과 못 넘기면 다음 공정팀까지 밀립니다.”서윤이 다혜를 바라봤다.자신의 판단에 확신은 있었지만 다혜 역시 이 프로젝트의 결과를 책임지는 연구자였다.“그럼 하나만 추가 검증해요. 한 시간 안에 끝내고 이상 없으면 다혜 씨 의견대로 진행하죠.”“좋습니다. 대신 이상 없으면 정말 제 조건으로 갑니다.”“그때 가서 내가 말 바꾸면요?”“박사님 이름 빼고 논문 낼 겁니다.”서윤이 헛웃음을 터뜨리자 뒤에서 지켜보던 은채가 혀를 찼다.“둘이 아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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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내 며느리를 만나러 왔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추가 검증 결과가 모니터에 떴다.다혜가 가장 먼저 수치를 확인하더니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프를 훑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제가 이겼네요.”서윤도 그래프의 축을 확대해 오차 범위와 원자료를 확인한 뒤 작게 웃었다.“그러네요. 오후 실험은 다혜 씨가 제안한 조건대로 갑시다.”“이렇게 순순히 인정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까는 제 조건이면 반응 효율 떨어질 거라고 하셨잖아요.”“내가 틀렸으니까요. 연구하는 사람이 자존심 때문에 데이터를 부정할 수는 없잖아요.”옆에서 실험 기록을 정리하던 연구원이 피식 웃었다.“이래서 두 분 내기할 때는 사이에 끼면 안 된다니까.”“내기 아니었어요.”다혜가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커피 걸었는데요?”실험실에 웃음이 번졌다.두 사람은 곧바로 다음 실험 조건을 맞추기 시작했다. 장갑 낀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화이트보드에는 새로운 조건과 수정된 값이 하나씩 채워졌다.서윤은 어느 순간 오전에 은채가 던졌던 질문조차 잊고 있었다. 강재헌도, 차유리도 생각나지 않았다.오랜만에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그날 오후, 강재헌의 저택에서는 마지막 정리가 끝나고 있었다.김 집사는 주침실과 손님방을 확인한 뒤 1층으로 내려왔다. 박정희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정리는?”“차유리 씨 물건은 손님방으로 옮겼고, 사모님 물건은 요청하신 대로 반출을 마쳤습니다.”“정말 하나도 안 남겼어?”“예. 옷과 책, 연구자료까지 전부 가져가셨습니다.”박정희가 찻잔을 내려놓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라봤다.차유리가 안방을 차지하려 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서윤이 말 한마디 없이 짐을 전부 빼고 나간 것도 못마땅했다.옷 한 벌, 책 한 권 남기지 않았다.잠깐 나간 사람의 짐이 아니었다.“재헌이는 알아?”“대표님께서는 아직 회사에 계십니다.”“제 아내가 짐을 다 빼고 나갔는데 회사에 처박혀 있어?”김 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주소는 알아?”“사모님께서 새로 옮기신 곳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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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여기는 제 집입니다

몇 분 뒤,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현관문을 열자 박정희가 서 있었다. 몸에 꼭 맞는 정장과 흐트러짐 없는 머리, 손에 든 가죽 핸드백까지 저택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편한 니트 차림의 서윤과 현관에 쌓인 상자를 훑어본 순간 입술이 비틀렸다.“어머, 꼴 좀 봐라. 정말 이런 데 처박혀 살고 있었니?”“어떻게 알고 오셨어요?”“내가 내 며느리 하나 어디서 굴러다니는지도 못 알아낼까 봐?”박정희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섰다. 구두를 신은 채 거실까지 들어와 상자와 노트북, 미처 정리하지 못한 연구서적을 훑더니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혀를 찼다.“그 좋은 집 놔두고 겨우 이런 데 살겠다고 짐까지 싸 들고 나왔어? 이제야 네 주제에 맞는 데 찾아온 거야?”“어머니께서 신경 쓰실 일 아니에요.”“돈은 어디서 났는데? 설마 재헌이 돈 들고 나온 건 아니겠지?”“제 돈으로 구했어요.”“그래 봤자 강씨 집 며느리 되고 벌어들인 돈 아니니?”예전 같으면 서윤은 슬리퍼부터 내놓고 차를 준비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문만 닫았다.식탁에 있던 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박사님, 손님 오셨으면 저는 이만—”“그대로 있어요. 금방 끝날 일이에요.”박정희가 다혜를 위아래로 훑었다.“쟤는 또 누구야?”“정다혜 씨예요. 저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자입니다.”“연구자?”박정희가 식탁의 분석 자료를 집어 들었다.“네가 집구석 내팽개치고 그렇게 잘났다고 떠들던 연구가 이거야? 박사니 연구원이니 이름만 번지르르하면 뭐 해. 제 남편 하나 못 챙겨서 다른 여자가 안방까지 들어오게 해놓고.”다혜의 표정이 굳었다.서윤은 박정희의 손에서 자료를 가져왔다.“제 연구자료예요.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어머, 세상에. 강씨 집에서 삼 년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이제 시어머니한테 눈까지 치켜떠?”서윤은 대꾸하지 않고 의자 하나를 빼주었다.박정희는 앉지 않았다. 핸드백만 소파 위에 내려놓고 다시 서윤을 돌아봤다.“여기 이사 온 거 재헌이는 아니?”“말해야 하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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